# 397
397화 정쟁(政爭)이라는 이름의 전쟁. (12)
다음 날도 같은 시간에 공개토론회가 진행되었다. 토론회 참석자들은 지지율 4위부터 8위까지의 후보들이었다.
“사람들이 모이기는 하려나?”
“예산 낭비 소리를 들을 수도 있겠는데요?”
21세기의 경험을 토대로 부하들이 우려를 했지만 정 수석차관은 그들의 우려를 일축했다.
“그들도 대통령 후보고, 토론회에 참석할 권리가 있다. 예산 운운하면서 기회조차 안 주면 그 역풍을 우리가 맞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도록.”
“그건 압니다만 예산 낭비, 자원 낭비 같아서….”
“거기까지.”
하지만 예상과 달리 4위와 8위까지의 대통령 후보들이 참석하는 토론회에도 많은 시민들이 참석했다. 운동장의 스탠드를 가득 채운 시민들을 본 정 수석차관은 부하들을 노려봤다.
“독립 이전의 조선 제국 시절에도 없던 일이었고, 식민지 시절에는 당연히 없던, 역사상 최초의 대통령 선거다. 나라의 최고 우두머리를 자기 손으로 뽑는 첫 번째 행사인데 21세기와 같은 일이 벌어질 거라고 생각했냐?”
“죄송합니다.”
“오늘 일을 제대로 피드백해라. 적어도 10년 정도는 기록적인 참여율을 기록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 * *
다음 날, 드디어 선거가 시작되었다. 제헌선거와 마찬가지로 전국 각지에 설치된 투표소로 투표권을 가진 시민들이 도착해 투표를 하기 시작했다.
“어? 자네가 웬일로 투표를 하러 나왔나? 자네까지 안 해도 될 놈은 되고 안 될 놈은 안 된다며?”
“그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되면 안 될 놈이 하나 있더라고.”
“되면 안 될 놈?”
“지 뿌리조차 헷갈리는 놈 하나 있었잖아.”
“아!”
제1대 대통령과 국회의원 선거는 제헌선거의 투표율을 훨씬 뛰어넘는 97%의 투표율을 기록했다.
“시민들의 참여도가 대단합니다!”
“이런 참여의식이라니! 조국의 미래에 희망이 보입니다!”
임정의 사람들은 높은 투표 참여율을 보며 잔뜩 고무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벌써부터 밝은 미래를 건설하는 임정의 독립운동가들과 달리 21세기 출신들의 반응은 냉소에 가까웠다.
“투표율 97%? 무슨 빨갱이 선거도 아니고….”
“처음이잖아? 처음. 오픈빨인 거지 뭐.”
“오픈빨이라… 그게 맞는 것 같네….”
근처에서 그 대화를 들은 고 제독은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욕을 할 수가 없구나.”
투표가 마무리된 다음, 잘 봉인된 투표함은 엄중한 경계 아래 개표소로 옮겨지기 시작했다. 군에서 제공한 장갑 트럭에 봉인된 투표함과 선관위 직원, 각 당의 참관인 8명, 중립국 감시단 직원, 마지막으로 무장 경찰 또는 군인이 탑승했다. 그리고 그 장갑트럭의 앞뒤로 또 다른 장갑트럭과 경찰 또는 군의 지프가 같이 움직였다.
그렇게 모든 투표함들이 개표소에 도착했고, 투표함에 찍힌 일련번호와 검수자 사인을 원장(元帳)과 비교하는 작업까지 끝나고 나서야 개표 작업에 들어갔다.
개표 결과는 그날 밤 9시부터 라디오 생방송을 통해 전국으로 방송되기 시작했다. 국민들은 자기 집이나 술집, 아니면 마을 공관에 모여 개표 결과를 들었다.
자신들이 지지하는 후보의 득표율이 나올 때마다 시민들은 일희일비(一喜一悲)하면서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 * *
다음 날 새벽 4시가 지나가면서 선거의 결과가 대략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우리의 압승이로군.”
“그런 것 같습니다.”
개표 방송을 듣던 김 주석의 말에 김기식 부주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방송된 결과를 보면 대통령 선거의 경우, 약 62%의 득표를 하며 김 주석이 앞서고 있었다.
국회의원 선거의 경우도 최소한 전체 의석의 65%를 임정의 대한진보당이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예측이 나온 상황이었다.
“이대로만 이어진다면 우리가 과반수를 넘게 차지하게 되니 국정 운영이 편하겠구먼.”
“야당이 될 이들이 난장(亂場)만 피우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아침 9시. 라디오에서 마침내 최종 결과를 방송했다.
“제1대 대통령 및 국회의원 동시선거의 최종 결과입니다. 총투표율은 97%입니다. 대한민국 제1대 대통령은 총 91%의 득표율을 기록하신 대한진보당의 김백 후보입니다. 2위는 3.8%의 득표율을 기록한 여운규 후보, 3위는 1.1%의 득표율을 기록한 리숭민 후보입니다. 제1대 국회의원 선거의 결과는 전국 263개 선거구에서 202석을 대한진보당이 획득했으며, 사회민주당이 12석, 한국민주당이26석, 기타정당과 무소속이 나머지 23석을 차지했습니다.”
“우와아아아!”
선거 결과가 발표되자 조선호텔에 묵고 있던 임정 인사들은 목이 터져라 함성을 질렀다.
“김백! 김백! 김백!”
“대한민국 만세! 만세! 만세!”
목이 터져라 김백의 이름을 연호하며 사람들은 샴페인을 터뜨리고 만세를 외쳤다.
“이제 한숨 돌리겠군.”
밤새 사무실에서 선거 방송을 듣던 정 수석차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부하들과 악수를 나누었다.
“수고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차관님.”
“자네들도 수고했어.”
악수를 교환한 정 수석차관은 부하들을 바라봤다.
“큰 고비 하나는 넘었지만 앞으로 넘어야 할 고비는 수두룩하다. 대통령이 되신 양반과 국회의원들이 되신 양반들만 너무 믿지 말고, 모든 일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살피면서 진행을 해야 할 거야. 그래야만 우리의 노후가 편안하다.”
“알겠습니다.”
부하들에게 주의를 준 정 수석차관은 말을 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밥 좀 시켜라. 밤을 꼬박 샜더니 배가 고프네.”
“알겠습니다!”
* * *
선거의 여파는 큼지막한 후폭풍을 불러왔다.
“대통령 당선을 축하드립니다.”
“고맙네. 자네들의 공이 제일 컸어.”
“여러분들의 국회의원 당선을 축하드립니다.”
“고맙소이다.”
김 주석과 국회의원 당선자라는 새로운 간판을 단 임정의 독립운동가들은 정 수석차관의 말에 기분 좋게 화답을 했다.
즐겁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정 수석차관은 이번 선거 결과에 대한 분석을 먼저 보고했다.
“아직도 살아남은 토착 기득권층이 중심이 된 한민당이 국회 제2당이 되었다는 것을 주의해서 봐야 합니다. 이는 아직도 토착 기득권층의 여력이 남아 있고, 자신들이 그동안 가지고 있던 기득권을 내려놓을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가 절대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는데도 계속 신경을 써야 한다는 말인가?”
김 주석의 지적에 정 수석차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의회정치라는 것이 협상의 정치입니다. 저들이 마음만 먹자면 얼마든지 의사 진행을 막을 수 있습니다. 관련 법조항을 이용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언론기관을 이용해서 얼마든지 여론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국회의원의 한마디는 일반인의 한마디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무게를 가지고 있으니 말입니다.”
정 수석차관의 말에 김 주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지?”
“최선을 다해 저들의 권력 기반을 붕괴시켜야 합니다. 따라서 정부 내각이 조각(組閣)되면 그 즉시 준비해 두었던 토지개혁 정책을 시작해야 합니다. 저들의 권력기반인 농촌 사회를 붕괴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군.”
“의회에서도 토지개혁을 비롯한 각종 개혁, 개발 정책이 최대한 빨리 통과될 수 있도록 움직이셔야 합니다. 이를 위해 사회민주당과의 공조(共助)를 추진해 주시고 무소속 의원들의 영입을 시도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국회의원 당선자들에게 당면한 과제를 설명한 정 수석차관은 다시 한번 현재 상황을 주지시켰다.
“이번 선거를 통해, 임정은 드디어 임시라는 딱지를 떼었습니다. 지금까지는 가지고 있는 무력에 기반한 강제통치였다면 이제는 명분에 기반해 나라를 운영해야 합니다. 무력은 빠르고 편하게 결과를 얻을 수 있지만 적도 빠르게 만듭니다. 명분은 시간이 걸리지만 그만큼 적을 줄일 수 있다는 점을 꼭 생각해주십시오.”
“알겠네.”
정 수석차관의 보고가 잠시 멈춘 사이 정 수석차관의 부하가 들어와 정 수석차관에게 무엇인가를 보고하고는 물러갔다.
“무엇인가?”
김 주석의 물음에 정 수석차관이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사회 민주당의 여운규 후보와 대한 국가진보사회주의당의 리숭민 후보가 성명을 발표했다고 합니다.”
“그래? 라디오를 켜 보게.”
* * *
여운규와 리숭민의 성명(聲明)은 라디오의 긴급 생방송과 신문의 호외발행을 통해 전국적으로 알려졌다.
-이번 선거의 결과를 담담히 받아들이며 김백 당선자에게 축하의 말을 보낸다. 본인은 이후 초야(草野)에 묻혀 살면서 조국의 발전을 위해 기원하겠다.
여운규의 성명이 사실상의 항복 선언서이자 은퇴 선언문이었다면 리숭민의 성명은 많이 달랐다.
-이번 선거는 금권과 관권으로 얼룩진 최악의 부정선거였다. 본인은 이런 부정선거에 통탄을 금할 수 없다. 이에 본인은 미국으로 정치적 망명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 대한의 국민들이 미망(迷妄)에서 벗어나는 날, 본인은 다시 돌아오겠다.
미국 대사관 정문에서 성명을 발표한 리숭민은 바로 미국 대사관으로 들어가 정치적 망명을 받아듣일 것을 요구했다.
대사 집무실 소파에 앉은 리숭민과 그를 보면서 난감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는 미국 대사의 모습을 찍은 사진이 주요 신문 1면에 대문짝만하게 인쇄되어 전국에 뿌려졌다.
신문을 읽은 김 주석은 정 수석차관을 돌아봤다.
“미국이 받아들일까?”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만약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면 받아들이라고 해야겠지요.”
“어째서?”
“지금 당장 리숭민을 어떻게 할 명분이 없습니다. 이번 선거에서 뿌려진 고무신들과 그를 연결할 선이 중간에서 끊긴 상황입니다. 과거 미국에서 있었던 공금횡령을 써먹으려 해도 장소가 미국이고 또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갔습니다. 괜히 건드려서 순교자로 만드느니 그냥 망명객으로 보내 버리는 것이 낫습니다.”
정 수석차관의 말에 김 주석은 신문을 내려놓고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들기며 생각에 잠겼다.
“망명객으로 갔지만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는 것 아닌가?”
“국민들이 보기에는 뒤가 구리니 도망가는 것으로 보일 겁니다. 아니, 그렇게 만들면 됩니다.”
정 수석차관의 말에 김 주석은 결론을 내렸다.
“그럼 그렇게 하게.”
“알겠습니다.”
* * *
대한국가진보사회주의당 중앙당사.
초췌한 얼굴을 한 이병석은 텅 비어 버린 사무실에 홀로 앉아 있었다.
“끝났군. 끝났어….”
불과 며칠 사이로 10년은 늙은 듯이 보이는 이병석은 씁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선거에서 패배가 확정된 날 아침까지만 해도 당사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리숭민을 둘러싸고 있었다.
“승패는 병가지상사라고 했습니다! 오늘은 비록 졌지만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자세로 최선을 다하다 보면 권토중래(捲土重來)의 때가 올 것입니다!”
“맞습니다! 옳소!”
“옳소! 리숭민! 리숭민!”
이병석의 말에 이어 많은 지지자들이 리숭민을 연호하자 리숭민은 기운을 차리는 듯했다.
하지만 점심이 지나기도 전에 당원들이 빠져나가고 있다는 말이 올라오면서 리숭민과 지지자들의 안색은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이병석은 그런 그들을 격려했다.
“박사님,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그리고 여러분 그런 쭉정이들은 신경을 쓸 필요가 없소! 박사님과 여러분들만 건재하다면 당원들은 언제든지 다시 늘 수 있습니다!”
이병석은 최선을 다해 리숭민과 지지자들을 격려했다. 그의 노력으로 리숭민이 조금씩 마음을 다잡고 있을 때, 당사의 창문으로 돌멩이가 날아들었다.
쨍그랑!
“일본 앞잡이! 매국노는 꺼져라!”
“매국노는 꺼져라!”
“이런 빌어먹을 새끼들!”
“당장 잡아!”
창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화가 잔뜩 난 이병석과 지지자들은 몽둥이를 움켜쥐고 당사 밖으로 달려 나갔다. 하지만 그들이 달려 나갔을 때, 돌멩이를 던진 이들은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빈손으로 당사에 돌아온 그들이 본 것은 분노로 부들부들 떠는 리숭민이었다.
“내가 매국노라고?”
화를 참지 못해 몸을 부들부들 떨던 리숭민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데! 내가 매국노라니!”
“박사님 참으십시오! 무지몽매한 자들의 헛소리입니다!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그 무지몽매한 자들을 독립된 조국에서 살게 하겠다고 평생을 힘들게 살아온 게 나야! 내가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어!”
분을 못 참은 리숭민은 미국으로의 망명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 비어 버린 당사였다. 이병석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끝났군. 끝났어….”
* * *
이병석에 관한 사항은 바로 정 수석차관에게 전달되었다.
정보를 가지고 온 최병섭 기무사령부 사령관 서리는 정 수석차관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병석과 관련된 정치자금 작전 실행할까요?”
향후 처리를 묻는 최 사령관서리의 물음에 정 수석차관은 반문을 했다.
“필요가 있을까요?”
정 수석차관의 물음에 최 사령관 서리는 잠시 생각을 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이미 모든 것을 다 잃은 뒷방 늙은이 신세니까. 독립유공자라는 마지막 훈장 하나는 남겨줍시다.”
사령관 서리의 제안에 정 수석차관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좋겠습니다. 마지막 예우는 지켜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