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9
389화 정쟁(政爭)이라는 이름의 전쟁. (4)
“어서 오시오.”
“만나서 반갑습니다.”
조영려는 흐루쇼프, 베리야, 몰로토프, 그리고 주코프와 로코솝스키 등의 장성들과 악수를 교환하며 인사말을 나누었다.
“오는 길에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스탈린 서기장의 명복을 빕니다.”
“고맙소이다. 그럼 양국에 모두 좋은 일이 있기를 바라겠소.”
“감사합니다.”
‘흐루쇼프에게 무게추가 기울고 있는 것인가?’
앞장 서서 일을 진행하는 흐루쇼프의 모습을 보며 조영려는 소련의 정국이 어떻게 흐르는지 가늠하기 위해 노력을 했다.
“자 앉읍시다.”
“그러시지요.”
커다란 테이블을 마주하고 앉은 조영려와 몰로토프는 시종일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눈은 절대로 웃고 있지 않았다.
“자, 그럼 조선….”
“대한민국이오. 조선은 역사로만 남은 이름이오.”
“아, 이거 실례. 크흠!”
가볍게 간을 보려던 몰로토프는 시작부터 한 방 먹고는 헛기침을 하며 상황을 수습했다.
“크흠! 고려인 송환에 대해 협상을 하자고 하셨는데, 고려인은 우리 소비에트 러시아의 국민이오.”
“국가에 대한 개념이 약하던 시절 연해주에 진출했던 우리 동포들을 강제로 이주시킨 것이지요.”
“강제 이주라? 그거 상당히 무례한 발언이라고 생각하오만? 우리는 분명히 이주를 사전에 통보했소이다. 그걸 받아들이기 싫었으면 도로 돌아갔었어야지.”
“기껏 개간한 농토를 내버려 두고 말이오? 그리고 사전 통보라 했는데, 통보를 하기 전에 실시한 여행 금지 조치는 무엇이오? 여행 금지 조치를 취한 상황인데 움직일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오? 외상(外相)도 전 서기장의 성격을 잘 아실 테오만?”
“…”
조영려가 스탈린을 언급하자 몰로토프는 입을 다물었다. 기세를 잡았다 생각한 조영려는 계속해서 몰로토프를 압박했다.
“우리가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이 강제 이주로 인해 약 4만의 우리 동포가 죽었소이다. 4만이나!”
“우리도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불가항력인 일이었소이다. 만주와 접경 지역에 거주하던 고려인들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일본 놈들과 결탁해 부역을 하고 있었다는 정보가 있었소. 그리고….”
몰로토프는 서류를 하나 내밀었다.
“감사부에서 올라온 보고서요. 당시 중앙정부에서 지원한 소수민족 정착 자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했다고 되어 있소. 모르시지는 않겠지?”
“…”
이번에는 조영려가 할 말이 궁해졌다. 연해주에서 보내진 돈은 임정까지 오기는 왔었기 때문이었다. 중간중간 많이 사라지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역으로 몰로토프가 조영려를 밀어붙였다.
“한쪽은 일본과 붙어먹고, 다른 한쪽은 독립운동을 지원하면서 일본을 자극하는 상황이었소. 가뜩이나 만주 국경선에서 일본과 충돌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먼저 불씨를 당길 수는 없는 일 아니겠소? 그래서 이주를 시킨 것뿐이오.”
“좋소. 그런 이유로 이주를 시켜야 했다면 그렇게 알겠소이다. 하지만 일본은 항복했고, 상황은 바뀌었소이다. 그러니 이제는 우리 동포들을 돌려보내 주시오.”
“고려인들은 이미 자리를 잡은 상태요. 그런 그들을 다시 끌고 나오는 것은 매우 ‘비인간적’이라는 생각 안 하시오?”
“그들이 다시 자리를 잡을 수 있는 충분한 준비를 한 상태요.”
“그 좁은 땅에?”
“좁은 땅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아. 홋카이도가 있었지? 흐음….”
과장된 표정을 지으며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시늉을 하던 몰로토프가 본론을 꺼내들었다.
“솔직히 말하지. 우리가 고려인들을 돌려보내 주면 대한민국은 우리에게 무엇을 줄 것이오?”
“간단히 말해서 돈이오.”
“돈? 이제 갓 독립한 대한민국이?”
“왜 없을 것 같소이까?”
“그래서 두당 얼마를 지급할 생각이오?”
“난 지금 노예 매매를 하러 온 것이 아니오. 귀국이 시베리아에서 생산하는 원유와 지하자원을 구매하겠소. 대금을 채권이 아니라 달러로 지급하겠소.”
조영려의 대답에 몰로토프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시베리아에서 생산하는 원유와 지하자원은 지금 판로가 애매한 상황이었다. 원래대로라면 가장 큰 수요는 독일을 비롯한 유럽이었지만 국가사회주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있는 한 독일과는 무역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유럽의 다른 국가들을 상대로도 육로가 완전히 막힌 상황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소련이 사용할 수 있는 무역항은 블라디보스토크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던 몰로토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더 생각을 해 봐야 할 문제인 것 같소. 오늘은 여기까지 합시다.”
“그러시지요.”
그렇게 해서 회담의 첫날이 끝났다.
* * *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소련공산당이 배정해 준 숙소로 돌아온 조영려에게 수행원 하나가 볼멘소리를 했다.
“어쩌겠나?”
“지금의 소련이 전쟁 전에 우리가 알던 그 소련이 아니지 않습니까?”
수행원의 말에 조영려가 고개를 저었다.
“오면서 보지 않았나? 비록 우랄 산맥 서쪽은 잃었지만 지금도 엄청난 대국일세. 거기에 더욱 무서운 점이 무엇인지 아나? 산업 생산 시설의 거의 전부와 기술진, 과학자들의 거의 대부분이 이곳에 있어. 시간은 걸리겠지만 예전의 성세(盛世)는 어느 정도 회복할 걸세. 그런 나라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거야. 우리나라는.”
“그래도….”
“자네말대로 소련은 큰 손실을 입었지. 하지만 우리나라는? 아예 아무것도 없어. 예전에 수풍댐 관련해서 했던 정 수석차관의 농담이 기억나나?”
“기억합니다….”
조영려의 물음에 수행원은 입술을 깨물었다.
한반도에 남은 산업 시설을 점검하던 과정 중 수풍댐의 발전 능력을 보고하는 자리에서 정 수석차관은 주석과 각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댐의 발전소 하나로 한반도 대부분의 지역과 만주 지역 일부까지 전력 공급이 가능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2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 댐의 발전 능력이 예상보다 출중하다. 다른 하나는 겨우 댐 하나로 감당이 가능할 정도로 한반도의 산업 시설과 사회 기반 시설이 열악하다 못해 처참한 상황이다. 주석님. 그리고 각료 여러분들. 저와 제 부하들이 작성해서 올린 경제개발 계획의 감이 잘 안 잡히실 경우 이렇게 생각하시면 간단합니다. 1차 목표는 적어도 이런 댐 3개는 있어야 전력수급이 가능할 정도로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1960년까지입니다.”
“그 친구가 농담이라고 말은 했지만 절대 농담이 아니야. 우리는 갈 길이 멀고, 그 가운데 필요한 것은 개벽에 가까운 개혁이야.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이 필요하다.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친일파들과 기득권들은 자신들이 권력을 되찾기 위해 계속 노력을 할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막아야 한다. 친일파들과 기득권들을 최대한 거세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적대하면서 견제할 이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
조영려의 말에 수행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 *
첫 번째 만남이 끝나고 사흘이 지나서야 두 번째 회담의 일정이 정해졌다. 두 번째 회담의 일정을 들은 조영려는 수행원들을 돌아봤다.
“첫 번째 만남이 있고 일주일이나 지나서 두 번째 회담이라….”
“저쪽도 쉽게 결론을 못 내리라 봅니다.”
“챙길 수 있는 기회가 왔으니 최대한 챙기려 할 테지. 우리 역시 마찬가지고 말이야. 자! 다시 한번 우리가 가진 패들을 정리해 보세.”
“알겠습니다.”
수행원들과 함께 서류들을 정리하고 의견을 교환하는 조영려의 뇌리에 정 수석차관이 했던 말이 맴돌았다.
‘외교는 연인들의 줄다리기와 같습니다. 먼저 풀지 마십시오. 선린관계? 호의가 계속되면 호구가 됩니다.’
두 번째 회담이 열린 날. 조영려와 몰로토프는 다시금 얼굴을 마주했다. 의례적인 안부 인사가 오가고 본론으로 들어가자 몰로토프가 먼저 카드를 꺼내들었다.
“귀국의 제안에 대해 우리 정부와 당은 심사숙고를 했소이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소. 다음의 조건을 들어준다면 우리는 귀국의 요청을 받아들이겠소.”
“어떤 요청이오?”
“원산과 흥남의 항구를 개방하시오.”
말이 튀어나오자마자 조영려는 고개를 저었다.
“원산은 동해 지역의 군항(軍港)이고 흥남은 산업 시설이 있소이다. 따라서 둘 다 개방은 불가하오.”
“그렇다면 훗카이도를 분할해 주기 바라오.”
“그것도 불가. 우리 동포들이 전쟁터에서 피흘려가며 얻은 영토요. 분할은 없소.”
“우리와 척을 져서 좋을 것은 없을 텐데?”
“그럼 홋카이도와 남사할린에 미군을 주둔시킬까?”
“협박은 별로 좋지 않소.”
“댁이 한 것은 협박이 아닌 것이오?”
“실행 가능한 일을 언급하는 것은 협박이 아니라 경고지.”
“우리 역시 마찬가지로 경고를 한 것이오.”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 사이의 대화는 사라졌다. 서로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 가운데 몰로토프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야 원… 조 외무부장. 외교란 것은 주고받는 것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니오?”
“줄 수 없는 것을 달라고 하는 것은 외교가 아니오.”
조영령의 단호한 대답에 몰로토프는 다시 입을 다물고 조영려를 노려봤다. 다시금 침묵이 이어지던 가운데 몰로토프가 입을 열었다.
“그럼 귀국이 내놓을 수 있는 카드는 무엇이오?”
“우리나라가 필요로 하는 석유자원의 55%를 소련에서 구입하겠소. 이를 위한 육상 송유관 건설 자금의 60%를 우리가 부담하겠소.”
“그 작은 나라에서 석유를 소모해 봤자….”
“절대로 작은 양이 아닐 거요.”
“하지만 그걸로는 모자라오.”
“필요로 하는 지하자원의 수급처로 소련을 가장 우선하겠소.”
조영려의 대답에 몰로토프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들기며 이런저런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한참동안 고민을 하던 몰로토프가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로서는 지금까지의 조건으로도 꽤 좋다고 생각하오. 그런데 문제는 군이오. 특히 해군이 말이 많소. 원산이나 흥남이 힘들다면 청진은 어떻겠소?”
몰로토프의 요구에 조영려는 입을 다물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조영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본국과 의견을 교환해야겠소. 오늘은 여기까지 합시다.”
“좋소.”
“일정은 추후 통보하겠소이다.”
“그러시오.”
회담을 끝낸 조영려는 바로 특별수송기를 타고 만주를 거쳐 한국으로 돌아왔다.
“역시나 그 카드를 꺼내야겠습니다. 이미 미국과는 협의를 끝낸 사항이니 말입니다.”
“필요하다면 써야겠지.”
조영려의 보고에 김 주석과 각료들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병석이 이런 흐름에 거세게 반발했다.
“안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얻은 땅인데! 넘겨줘서는 안 됩니다!”
이병석의 반발에 정 수석차관이 현실을 설명했다.
“장군님. 지금 우리 대한민국의 상황으로 사할린까지는 무리입니다. 거기까지 배치할 병력도 예산도 부족합니다.”
“병력 부족이야 징병제로 돌리면 그만이고! 부사관 이상은 몰라도 일반 사병의 급료는 줄여도 돼!”
“장군님. 사병들도 우리 대한민국의 소중한 국민들입니다.”
“조국을 위해서는 희생도 감내할 수 있어야 한다!”
“희생을 감내하라고 하기에는 지금까지 조국이 국민들에게 해 준 것이 뭐가 있습니까? 그리고 국민은 국가를 위해 마구 써 버려도 되는 소모성 부품이 아닙니다.”
“그러면 예산을 늘리면 될 것 아닌가?”
“지금도 거의 선군 정치에 가까운 군사예산이 배정되고 있습니다.”
“전체 정부 예산에서 20% 겨우 넘는데 무슨 선군정치!”
“그 정도만 해도 엄청난 수치인 겁니다. 장군님. 지금 우리나라의 경제적 능력에서 장군님이 원하시는 대로 사할란까지 철통 방어를 할 예산을 군에 대기 위해서는 단 한 가지 방법밖에 없습니다. 한반도를 미국에 팔면 됩니다. 지금 팔면 적어도 10년 동안은 국방 예산 걱정 없이 사고 싶은 거 다 지르셔도 끄떡없을 겁니다. 한반도 팔까요?”
“…”
정 수석차관의 말에 이병석은 입을 다물었다. 그런 이병석을 바라보며 정 수석차관은 쐐기를 박았다.
“사할린에 관해서는 이미 예전에 방침을 정했고, 다들 동의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동의를 다시 확인한 것뿐입니다.”
그것을 끝으로 더 이상의 반발을 하는 이들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김 주석이 상황을 정리했다.
“사할린 카드를 씁시다. 이 카드를 쓸 수밖에 없는 원통함을 후대가 기억하게 만들고.”
“알겠습니다.”
한국 정부의 상황이 정리되자 조영려는 다시금 비행기를 타고 몰로토프에게 향했다.
세 번째 회담이 시작되자 조영려는 한국 정부의 결론을 이야기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청진항의 개방을 허락할 수 없소.”
“그럼 협상은 여기까지요.”
“단!”
“단?”
“남부 사할린은 80년간 소련에게 조차해주겠소. 즉, 2025년까지 소련에게 남부사할린을 조차지로 맡기겠소.”
“흐음….”
조영려의 말에 몰로토프는 콧소리를 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런 몰로토프의 모습을 보며 조영려가 말을 이었다.
“사할린 정도면 소련 해군의 숨통은 충분히 틔워 준 것 같소만?”
“시간이 좀 필요하오.”
몰로토프의 말에 조영려는 속으로 환호를 했다.
‘넘어왔다!’
* * *
그 뒤로도 약간의 줄다리기와 설전이 벌어졌지만 합의는 성공적으로 이뤄졌다.
한국 정부와 소련 정부를 대표해 조영려와 몰로토프가 협정서를 작성했다. 협정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조영려는 흐루쇼프와 베리야 등에게 마지막 용건을 내밀었다.
“아! 한 가지 부탁이 더 있소이다.”
“무슨 부탁이오?”
“88여단.”
“88여단?”
고개를 갸웃하던 흐루쇼프와 달리 베리야는 뭔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그 친구들에게는 얼마 전에 명령을 내렸는데, 왜? 문제가 있소?”
“88여단에 있는 김일성과 그 동지들을 벼르고 있는 이들이 꽤 많소이다. 소련과 우리 대한민국의 안정적인 관계 정착을 위해서는 그 사람들이 한동안은 안 보였으면 좋겠소이다.”
조영려의 말에 베리야가 별 것 아니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거야 어려운 일 아니지.”
짧게 말한 베리야는 손짓으로 부하를 불러 귓속말을 속삭였다. 귓속말을 들은 부하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 * *
“동지. 상부의 명령이오.”
두만강에 면한 소련군 주둔지. 두만강변에 주둔한 연대 병력의 국경 수비대를 지휘하던 수비대장은 정치장교가 건넨 쪽지를 받아 내용을 확인했다.
꼼꼼하게 내용을 확인한 수비대장은 강변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방금 전 강을 건너갔다 쫓겨 온 김일성과 그 일가, 그리고 동지들이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명령서를 접어넣은 수비대장은 정치장교를 돌아봤다.
“확인했소. 즉시 실행하지.”
수비대장은 부하들을 이끌고 김일성에게 다가갔다.
“소좌! 상부에서 명령이 왔소! 지금 즉시 하바롭스크로 돌아오라는 명령이오.”
“하바롭스크로? 왜?”
“기밀 명령이오! 즉시 트럭에 탑승하시오!”
수비대장의 명령에 따라 김일성과 그 일행들은 트럭에 올랐다.
이후로, 그들이 다시 역사에 등장하는 일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