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8
388화 정쟁(政爭)이라는 이름의 전쟁. (3)
한반도에 상륙한 임정의 광복군-상륙 당시에는 다들 광복군이라고 불렀다.-과 미군의 연합군이 한반도를 수복하고 만주와 일본을 공략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이곳은 제대로 된 행정지명조차 붙지 않은 곳이었다.
이곳에 거주하던 주민들은 자신들의 마을을 강촌(江村) 마을이라 불렀고, 장이라던가 기타 업무를 보기 위해서는 5리(약 2km) 떨어진 부포리까지 왕복을 해야 했다.
이 강촌 마을이 사람들로 북적거리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일본이 항복을 하고 만주국과 인근 러시아 지역에서 조선인들과 일본인들이 짐을 싸들고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일본인들이 몰려든 것은 일본의 항복 이후, 중국인들과 조선인들에게 보복 행위를 당할지 모른다는 풍문 때문이었다.
불안함을 이기지 못한 일본인들은 세간을 정리해 귀국길에 올랐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미군에 의해 일본군은 물론이고 소속이 불분명한 마적들까지 다 소탕이 되어 버리면서 지독하게 운이 없는 소수를 제외하고는 좀도둑에 의한 피해가 귀향 일본인들이 입은 피해의 거의 전부였다.
이렇게 몰려드는 일본인들의 무분별한 월경과 혹시 모를 불순분자들의 위장 침투를 막기 위해 만주와 한국의 국경선에는 미군과 한국군이 경계선을 쳤고, 출입국 사무소를 군데군데 설치했다.
그리고 그 출입국 사무소들 가운데 가장 동쪽에 있는 곳이 바로 이 부포리 강촌 마을에 설치된 곳이었다.
두만강을 따라 가늘고 길게 파고든 중국 영토와 러시아의 영토, 그리고 한국, 이 3국의 국경선이 모두 자리한 곳이었다.
덕분에 이 강촌 마을은 사람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두만강 너머에는 입국을 위해 기다리는 이들을 상대로 천막을 빌려주는 장사치들이 흥정을 하고 있었고, 임시로 만든 부뚜막에 가마솥을 얹어 놓고 음식을 파는 노점 식당들도 여럿 있었다.
두만강 이쪽 강촌 마을도 마찬가지였다. 두만강을 오가는 나룻배들도 여러 척으로 늘어났고, 일어밖에 모르는 일본인들과 문맹인 조선인들을 위해 입국 서류를 대필해 주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생기자 강촌 마을 사람들도 열심히 부업을 하기 시작했다.
일본으로 가는 여객선이 있는 나진항으로 가는 교통편은 하루에 두 번, 군대의 트럭이 전부였다. 이 트럭들을 놓치면 꼼짝없이 하룻밤을 강촌 마을에서 보내야 했다.
이런 일본인들을 상대로 방이나 헛간을 빌려주며 돈을 벌거나 강 건너와 마찬가지로 음식을 만들어 파는 일로 강촌 마을 주민들은 때 아닌 호황을 맞이했다.
일본으로 돌아가는 일본인들을 비롯해 만주나 러시아에서 생활하던 조선인들이 돌아오면서 사람들이 바글거리자 이들을 노린 범죄들도 늘기 시작했다.
결국, 출입국 사무를 담당하는 군인들 외에 경찰과 군인들이 대규모로 배치되어 질서를 유지하기 시작했다.
* * *
“상병님!”
“무슨 일이야?”
사람들이 줄지어 대기를 하고 있는 출입국 사무소 주변을 경계하는 임무를 맡아 사람 구경을 하고 있던 서종국 상병은 막내인 한일수 이병의 외침에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상병의 물음에 이병은 두만강 너머를 손가락질하며 큰소리로 대답했다.
“아, 아라사(俄羅斯)군이 왔습니다!”
“뭐?”
이병의 말에 상병은 두만강 너머를 바라봤다. 트럭들이 줄지어 도착하고 거기서 소련병들이 내리는 것을 본 상병은 이병에게 명령을 내렸다.
“비상 걸어!”
“알겠습니다!”
이병에게 명령을 내린 상병은 바로 지휘관에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소대장님! 아라사군입니다!”
“이미 확인했다. 강변과 출입국 사무소를 중심으로 방어선을 친다! 애들 데리고 움직여!”
“알겠습니다!”
소대장의 명령에 서종국 상병은 바로 강변의 모래사장을 향해 달렸다. 이미 소식을 들은 한국군들이 쉬고 있던 텐트에서 빠져나와 출입국 사무소, 나루터, 모래사장에 미리 구축한 참호선에 뛰어들고 있었다.
* * *
나룻배를 타고 온 소련군 대표가 출입국 사무소를 방문한 것은 참호선에 뛰어들은 한국군들이 흉흉한 살기를 내뿜고 있을 때였다. 나룻배에서 내린 소련군 대표는 흉흉한 분위기에 주눅이 들은 듯했다. 하지만 그는 곧 군복의 매무새를 점검하고는 목에 힘을 빳빳이 준 채 출입국 사무소로 걸어왔다.
“소련제88국제여단이오. 연합군의 일원으로 조선에 들어가려 하오.”
소련군 대표의 말에 책상 뒤에 앉아 있던 중위가 입을 열었다.
“통보 받은바 없소. 국경 너머에서 대기하도록.”
중위의 대답에 소련군 대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봐! 같은 연합국의 일원이 방문한 것인데 이렇게 무례한 대우라니! 이 무슨 결례인가!”
“결례?”
소련군 대표의 고함에 중위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가락으로 나루터에 모여 있는 소련군들을 가리켰다.
“소련군은 동맹국을 방문하는데 무장을 하고 방문하나? 이곳은 명백히 우리 대한민국의 영토다! 이곳에 무장을 하고 있을 수 있는 이들은 대한민국 군과 경찰뿐이다!”
“이봐!”
“만주에 있는 미군들도 우리 영토로 들어올 때는 무장을 해제하고 들어온다! 무장을 하고 들어올 일이 있으면 사전에 통보를 하고 협의가 되어야 하고! 천하의 미군들도 그런데 어디서 되먹지 못한 짓이야! 지금 즉시 강 너머로 돌아가라! 돌아가서 정식으로 절차를 밟아 입국하라!”
“이 애송이가! 너, 내가 누군지 알아! 그리고….”
소련군 대표는 나루터를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저기 저곳에 계신 분이 누군지 알아! 보천보 대첩과 훙치허 전투의 영웅이신 김일성 소좌시다! 그런 분이 오셨는데 이 무슨 무례함이야!”
“그래서 무조건 들여보내라고? 흥!”
한국군 중위는 코웃음을 쳤다.
“소련군의 자격으로 온 것이라면 지금 즉시 강을 건너 돌아가서 절차를 밟아 오도록! 민간인의 신분이라면 지금 즉시 모든 무장을 해제하고 신체 및 화물에 대한 검사를 통과한 다음 다시 오도록! 예외는 없다!”
“이 썅!”
철컥! 철컥!
욕설을 내뱉은 소련군 대표가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가려는 순간, 주변에 대기하고 있던 한국군들이 모조리 총을 들어 소련군 대표를 겨눴다.
안전장치 푸는 소리까지 들리자 소련군 대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일촉즉발의 분위기 속에서 중위는 소련군 대표에게 통보했다.
“마지막 통보다. 소련군 소속으로 왔으면 지금 즉시 강을 넘어 돌아간 다음, 절차를 밟아 다시 오도록. 만약 조선인의 신분으로 들어오는 것이라면 지금 즉시 모든 무장을 해제하고, 신체검사와 화물 검사를 통과한 다음 이 자리에 오도록.”
“빌어먹을!”
욕설을 내뱉은 소련군 대표는 중위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이 치욕, 이 수모, 잊지 않겠다. 네놈의 관등성명을 말하라.”
“전 광복군, 현 대한민국 육군 중위 장하준이다. 귀관의 관등성명은?”
“전 항일연군, 현 소비에트 러시아 육군 대위 최현이다. 두고 보도록 하지.”
“마음대로.”
“으득!”
이를 간 최현은 거칠게 몸을 돌려 출입국 사무소 텐트를 나갔다.
* * *
나루터에 모인 소련군들-정확히 말하자면 김일성을 위시로 한 88여단 소속 조선인들-은 일제히 분통을 터뜨렸다. 온갖 욕설로 시끄러운 가운데 중년의 한국군 중령이 그들에게 걸어왔다.
“거 대단하신 국군께서 이 자리에는 무슨 일이오?”
최현의 비아냥거림을 무시하며 한국군 중령은 김일성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보라, 임자. 이리 좀 와보우.”
“무슨 일이오?”
“임자가 김일성이라고?”
“그렇수다, 왜?”
김일성의 물음에 한국군 중령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이었다.
“임자가 김일성이란 말이지비?”
“날 아오?”
“보천보 대첩의 김일성은 몰라도 보천보 주재소를 습격한 비적(匪賊)들인 김일성 일파의 김일성은 들어 봤지비.”
“비적이라고!”
김일성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중령은 가볍게 양손을 들었다.
“아, 아, 그 비적이란 말은 왜놈들이 붙인 거고. 오랜만에 참 듣기 좋은 후련한 소식이었음. 참 장한 일이었지비. 그런데 말이우, 임자… 그런데 그 뒤로 임자는 뭐했음?”
“응? 거 무슨 소리오?”
한국군 중령은 자신의 군복 왼쪽 가슴에 달린 약장들 가운데 하나를 가리켰다. 흰색 바탕에 검은 원이 그려져 있는 약장이었다.
“이 약장이 무엔지 암? 일본 본토에 상륙해서 왜놈들을 조진 일본진공작전에 참가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지비. 그때 임자는 뭐했슴?”
중령의 물음에 김일성은 말을 얼버무렸다.
“사세가 여의치 않아….”
“사세?”
김일성의 대답에 중령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내레! 이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신의주부터 시작해서 조선팔도 안 가 본 곳이 엄서! 이런 엉망진창 뒤섞인 사투리가 뱄을 정도로! 그러다 왜놈들에게 쫓겨서 만주까지 갔고! 저어 만주 벌판에서 고생하다가 광복군이 조선땅에 돌아간다고 모이라는 말을 듣고는 중국 땅을 가로질렀고, 사막과 바다까지 건너슴! 다 늙은 나도 그랬는데, 뭬이? 사세? 에라이! 백당 놈의 애새끼야! 납작 엎드려서 눈알만 굴린 애새끼래, 뭐? 보천보 대첩의 영웅? 백당 놈의 애새끼! 다시 이 두만강을 건너오기만 해보라! 내레 당장 그 대갈통에 구멍을 내줄 거임! 각오하라우!”
서슬 퍼런 중령의 목소리에 김일성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몰려온 한국군들이 장하준 중위의 손짓에 재빨리 중령과 김일성 사이를 갈랐다. 그렇게 갈라 막은 한국군의 선두로 나선 장하준 중위가 최현을 노려봤다.
“중령님 말마따나 후방에서 잘 놀아 재낀 주제에 목에 힘은 왜 주나? 아까 말했던 것처럼 제대로 절차 밟아서 돌아오시지요. 소.좌.도.노.”
일본어로 나리인 ‘도노(殿)’라는 말까지 사용하며 던진 장하준의 비아냥거림을 들으며 김일성 일행은 다시 두만강을 건너 돌아가야 했다.
두만강에서 벌어진 해프닝은 바로 서울로 보고되었다. 보고서를 다 읽은 김 주석은 각료들을 돌아봤다.
“제일 큰 골칫거리가 왔소이다.”
김 주석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심각한 가운데 정 수석차관이 입을 열었다.
“조 외무부장님이 제대로 성공하시기를 기원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비록 소련의 상황이 안 좋다고는 하나 우리와 비교하면 압도적인 것이 현실이니 말일세.”
정 수석차관의 말에 긍정을 하던 김 주석은 고개를 돌려 김원봉을 비롯한 군부 인사들을 바라봤다.
“이 보고서에 나온 지휘관들, 어떻게 생각하오? 내 생각은 승진을 시켰으면 하는데?”
김 주석의 말에 김원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만간 승진을 시킬 생각입니다. 이런 기개 있는 장교들이야말로 군에 필요한 인재들이니 말입니다.”
“좋군요. 자고로 장수란 기개가 있어야지!”
김원봉의 대답에 김 주석은 만족한 듯 보였고, 다른 각료들 역시 동의했다.
주석과 각료들의 반응을 보며 이병석은 기쁨 반, 실망 반의 감정이 들었다.
기쁜 일은 장하준이라는 신진 장교의 부상이었다. 관동군으로 징병당해 가던 도중 탈출해 한국군에 합류한 젊은 친구였다.
젊은 나이에 학력도 고등학력이었고, 충성심도 좋았기에 바로 장교로 훈련받아 임관한 케이스들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철저한 반공주의자라는 것이었다.
실망한 것은 김일성을 찾아가 맹비난을 한 중령 역시 포상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능력도 좋고 인성도 좋은, 육군이 제대로 자리를 잡으면 요직에 등용될 가능성이 높은 이들 가운데 하나였는데 문제는 그가 의열단 출신이라는 것이었다.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소련의 스베르들롭스크(Свердло́вск)에서는 조영려가 흐루쇼프. 베리야 등을 상대로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