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5
385화 협상,반란,혼란 (7)
소련. 스베르들롭스크(Свердло́вск). 유럽과 미국에는 예카테린부르크라는 이름이 더 익숙한 곳이었다.
소련인들에게는 시베리아 유형지로 가기 직전 잠시 머무는 곳으로 더 익숙한 장소이기도 한 도시였고, 1945년 지금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임시 수도이기도 했다.
“서기장의 상태는?”
베리야의 물음에 진찰을 끝낸 스탈린의 주치의 비노그라도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의식을 못 차리고 계십니다.”
“알았네. 좀 더 노력을 해주게.”
“알겠습니다.”
대답을 한 비노그라도프는 다시금 스탈린 옆에 자리를 잡았다.
의사의 뒷모습을 보던 베리야는 몸을 돌려 스탈린의 방을 나왔다. 방을 나서자마자 다가온 부하에게 베리야는 작게 명령을 내렸다.
“저 의사는 물론이고 간호사들 모두 감시를 철저히 하도록. 서기장이 쓰러졌다는 소식이 밖으로 퍼지면 안 된다.”
“알겠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사실이 밖으로 퍼져서는 안 돼. 퍼지면 자네나 나나 모두 죽은 목숨이야.”
베리야의 경고에 부하는 침을 삼키고는 바로 대답했다.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그래. 그래….”
“무엇을 지키겠다고?”
베리야와 그의 충복은 더 이상의 대화를 이어가지 못했다, 그들의 눈앞에는 그들이 절대로 만나고 싶지 않은 이들이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장군들. 흐루쇼프 위원. 말렌코프 위원.”
“베리야 씨.”
“베리야 위원. 설명이 필요한데?”
“지금 뭐하자는 거지?”
주코프, 로코솝스키로 대변되는 군의 최고 권력자들과 흐루쇼프, 말렌코프로 상징되는 당의 최고 권력자들이 베리야와 그의 부하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느새, 아니 어떻게….”
“평소와는 다른 서기장의 명령이 수상하더군. 전군 현재 전선을 유지하라? 서기장이 그런 명령을 내릴 사람인가?”
“몰로토프가 계속해서 연락을 해 오고 있지만, 서기장의 대답이 없는데 모를 줄 알았나?”
“감기가 심하셔서….”
베리야가 우물거리며 대답을 했지만 흐루쇼프가 코웃음을 쳤다.
“흥! 서기장이 어떤 이인지 우리가 모르나? 자신의 감기마저도 음모라고 말하며 숙청명단을 내밀 사람이야!”
말을 한 흐루쇼프는 베리야를 밀치고 문을 열었다.
“역시나….”
침실 안, 침대에 누워 있는 스탈린과 그 옆에 바짝 얼어붙어 서 있는 주치의의 모습을 본 흐루쇼프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온 이들 역시 마찬가지의 표정이었다.
* * *
“도대체 언제부터인가?”
흐루쇼프의 물음에 베리야는 짧게 대답했다.
“사흘 전부터요.”
베리야의 물음에 말렌코프는 고개를 돌려 주치의인 비노그라도프를 바라봤다.
“무슨 병인가?”
“아마도 뇌혈관에 문제가 생긴 듯합니다.”
“확실한 것인가?”
“지금 우리가 가진 장비로서는 최선의 결과입니다.”
“미국이라면?”
“미국도 힘들 것입니다. 만약 가능하다면 한국 정도나? 루즈벨트의 위기를 사전에 알아 치료해 줬다는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말입니다.”
비노그라도프의 발언에 좌중에 모인 이들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그 소문을 믿고 서기장을….”
“무슨 소리! 자본주의의 벌레 놈들에게 서기장을 맡기자고?”
찬반양론이 격하게 오가는 와중에 흐루쇼프는 비노그라도프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현재 서기장의 용태는?”
“점점 안 좋아지고 계십니다. 조만간 자력호흡도 힘들어지실 듯….”
“회복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비노그라도프의 마지막 발언은 도화선이 되었다. 회의실에 모인 이들은 모두 한 가지 결심을 한 듯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스탈린이 침실에서 튀어나와 ‘너 숙청!’이라고 말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입을 연 것은 흐루쇼프였다.
“당은 서기장의 결심이 있어야 움직일 수 있으니 대기하도록 합시다.”
흐루쇼프의 말에 주코프가 바로 말을 받았다.
“군 역시 마찬가지로 현재 상황을 유지하겠소. 하지만 혹시 모를 위기를 대비해 주변에 병력을 대기시키겠소.”
“그러시오.”
‘기다린다. 스탈린이 죽거나 다시 살 때까지 무조건 기다린다.’라는 어정쩡한 결론을 끝으로 회의는 끝이 났다.
스탈린의 공관에는 베리야는 물론이고 말렌코프와 흐르쇼프까지 같이 머물며 스탈린의 상태를 관찰하기로 했고, 주코프와 로코솝스키는 각자 맡은 전선의 지휘를 위해 서기장 관사를 빠져나왔다.
“참 우습지 않나?”
“무엇이 말이오?”
“전선에 서면 수백만의 병력을 손가락 하나로 움직이는 우리인데, 침대에 누워 의식이 없는 인간이 두려워 하고 싶은 말도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으니 말이야.”
주코프의 말에 로코솝스키가 짧게 대답을 했다.
“침대에 누운 인간이 문제가 아니라 그 옆에 앉아 있는 인간들의 입이 무서운 것 아니겠소?”
“그게 맞겠군.”
* * *
결국, 스탈린의 사망이 확실해지기까지 약 보름간의 시간 동안 전선은 조용했고, 협상장은 시끄러웠다.
소련의 대표로 나선 몰로토프가 대놓고 무조건 반대, 파투 놓기, 불참 등의 행위를 반복하며 시간을 질질 끌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보름의 시간이 지나 소련 국영방송에서 스탈린의 사망을 긴급 속보로 알리고 나서야 협상은 다시 궤도에 올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보름 동안 공전(空轉), 그리고 다시 보름 동안의 설전(舌戰)이 오간 끝에 유럽의 전쟁이 종결되었다. 그리고 그 협상의 결과는 유럽 국가들에게 있어서는 ‘무의미한 전쟁’이었다.
독일의 경우는 알자스와 로렌을 프랑스에게 넘겨주고, 오스트리아와는 다시 분할, 단치히 회랑을 다시 폴란드로 넘겨주는 것으로 끝이 났다.
1938년 안슐루스(Anschluß) 이전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하지만 ‘국가사회주의 러시아 공화국’과 ‘우크라이나 공화국’이라는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에 대비한 방파제’를 만들어 냈다는 것 하나로 히틀러는 면죄부를 얻을 수 있었다. 아니, 나치 독재 정권에게 책임을 묻겠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기는 했지만.
폴란드는 다시금 독립을 얻었다. 영국에 있던 폴란드 망명 정부가 미군과 함께 다시 돌아와 정권을 확보했다.
국가사회주의 러시아와 독일 사이에 낀 형국이 된 폴란드는 강력한 친미 국가의 성격을 가지기 시작했다.
다시 독립을 하고 폴란드의 재건이 이뤄지는 과정에서 된서리를 맞은 것은 폴란드 공산당이었다.
‘카틴 숲의 대학살’이 다시 확인되면서 폴란드 공산 당원들은 체포되어 재판정에서 유죄판결을 받거나, 소련을 향해 멀고 고달픈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마찬가지로 혼란한 정국으로 몸살을 앓아야 했던 국가는 프랑스였다. 알자스와 로렌을 다시 회복한 것 외에는 오로지 손실만을 기록한 것이 프랑스였다. 베트남과 레바논 지역의 식민지들을 상실했고, 알제리를 비롯한 아프리카의 식민지들에서는 독립을 위한 불온한 움직임들이 대놓고 나타나기 시작했다.
드골 정권이 탄생하기는 했지만 군사력을 재건하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했고, ‘얻은 것은 하나도 없이, 잃은 것만 많은 전쟁’에 지친 국민들 사이에서는 반전사상(反戰思想)이 유행했다.
드골 정권의 징병을 피해 스위스로 도피하는 청년들이 대거 나오면서, 드골 정권은 결국 알제리를 포함한 많은 식민지들을 독립시켰다.
이런 반전사상의 대유행은 영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인도를 상실하고 중동의 많은 식민지들과 이집트가 독립하면서 제국(帝國)이라는 명칭은 허명(虛名)이 되고 말았다. 상실감에 빠진 영국 젊은이들은 고립주의와 반전주의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유대인들은 소득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추축국의 점령지들 가운데서 예루살렘에 가장 가까운 곳, 카프카스 산맥 북쪽의 그루지아 지역에 ‘유대 자치구’를 건설할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되었다.
“썅! 씨발! Fuck! 빌어먹을! 조지아에 유대 자치구라니! 왜 조지아야! 내 고향에 빌어먹을 유대인 배신자 새끼들이 왜 들어와?”
기사를 읽던 미군 병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는 조지아 주(州)출신이었다.
신문 기사를 보며 온갖 욕설을 내뱉는 미군 병사 옆을 지나고 있던 장교가 설명을 했다.
“그 조지아가 너가 아는 조지아가 아냐.”
“그건 또 무슨 소리입니까? 내가 촌놈이라도 알 건 압니다!”
“하아~.”
장교는 길게 한숨을 쉬고는 지도첩을 꺼내 들었다.
“학교 지리 시간에 뭘 했냐….”
이 전쟁에서 가장 큰 이득을 본 이들이라면 미국과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피식민 국가들이었다.
전쟁으로 인한 엄청난 경제적 손실과 그로 인한 복구 과정에서 미국의 힘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를 위한 지원 과정에서 미국은 자연스럽게 미국식 가치관과 경제관을 주입시켰다. 그 결과, 동서 유럽을 막론하고 전통적 가치관이었던 귀족주의적 가치관이 점점 사라지고, 그 빈자리를 미국의 대중주의적, 소비주의적 가치관이 채워 나갔다.
이런 움직임은 유럽은 물론이고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국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미 미국의 문화가 깊숙이 스며들은 필리핀은 차치하더라도, 베트남의 사이공과 하노이에는 미국식 재즈클럽들과 술집들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고, 길거리에는 미국의 대중가요들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퍼진 미국 대중문화의 많은 부분에 ‘한국’-정확하게는 21세기의 한국-이 묻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한반도에 실려 있던 콘텐츠들의 힘도 컸지만 한반도에 동승하고 있던 연예인들도 한몫을 했다.
그들이 부른 음반들이 미군이 머무는 캠프에서 울려 퍼졌고, 전선의 군인들을 위무하는 위문 활동에 모여든 미군들은 그녀들의 노래에 열광적인 환호를 보냈다.
덕분에 예상보다 빠르게 락 음악이 개화하기 시작한 것은 물론이었다.
한 술 더 떠, 랩이라는. 1940년대 흑인들에게도 생경한 음악 장르가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도대체 미군 애들이 왜 그렇게 좋아하는 거야? 핫팬츠에 반했나?”
“쟤들 뮤지컬 보면 핫팬츠는 이미 익숙하게 나오는데 무슨….”
‘예상보다 강렬한 한류’에 벌레와 빨갱이가 의견을 나누고 있을 때, 노래를 듣고 있던 창기가 입을 열었다.
“전쟁터가 본능적이고 말초적이지 않냐? 그리고 본능적이고 말초적인 거 하면 21세기 노래고. 박자가 아니라 비트랑 RPM으로 놀면서 가사가 아니라 음악 자체가 홀려 버리는데 안 빠지고 배겨?”
“아….”
‘홀린 것’은 미군만이 아니었다. 전쟁터에 나선 한국군들-1940년대 한반도 출신 오리지널 한국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이것도 노래냐?’하던 이들이 훈련소에서, 전선 캠프에서 들으며 점점 익숙해지더니 마침내 중독이 되어 버렸다.
1940년대 오리지널 한국인들이 중독된 것은 노래만이 아니었다. 훈련소는 물론이고 전쟁터에서 미국과 21세기 한국의 문화를 거르는 것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들은 누구보다 빠르게 ‘전통적인 한국인’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이는 정 수석차관을 비롯한 21세기 출신들의 노림수였다.
“한반도의 경제와 사회구조가 완전히 자리를 잡기 전까지는 군과 군인이 모든 것을 선도하고 있는 이들일 거야. 이들을 이용해 강제로 업그레이드 시켜 버린다.”
전통적인 판소리로 상징되는 구시대적 농촌문화와 엔카(演歌)로 상징되는 식민지 문화에서 최단시간에 벗어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서울.
“전선에 나갔던 병사들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정 수석차관의 보고에 주석과 임정의 각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보다 전쟁이 짧게 끝나서 다행입니다.”
“적어도 3번 이상의 부대교환이 있어야 전쟁이 끝날 줄 알았는데 1번 밖에 없었어요. 그만큼 손실도 적었으니 아주 다행한 일입니다.”
주석과 각료들의 말을 듣고 있던 정 수석차관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좋은 점도 있지만 안 좋은 점도 있습니다.”
“안 좋은 점?”
“군인들의 전쟁은 끝났지만, 이제부터 우리들의 전쟁이 시작됩니다. 최선을 다해서 준비를 해왔지만 예상보다 빠른 시점입니다. 각오를 하셔야 합니다.”
“그렇군.”
정 수석차관의 말에 주석과 각료들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바야흐로 그들의 전쟁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