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0
380화 협상,반란,혼란 (2)
베를린, 총통관저.
“…현재까지의 상황은 이렇습니다. 영국은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비밀리에 총통관저를 찾은 리벤트로프는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고했다.
“그거 다행이로군. 하지만 영국이 미국을 확실히 막을 것이라는 보장이 필요하다는 점을 잊지 말도록.”
“알겠습니다. 협상 과정에서 파악한 것이지만 영국 역시 유럽에서의 주도권을 놓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이 점을 잘 활용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대영제국이니까….”
고개를 주억거리며 리벤트로프의 이야기를 듣던 히틀러는 보고서의 ‘중요 쟁점’ 항목을 살피고는 리벤트로프를 노려봤다.
“프랑스에서 가져온 미술품들의 70%를 넘기고 로켓 기술과 기술자들을 제공하라?”
“아직 조율 중입니다!”
히틀러의 얼굴이 사납게 변하자 리벤트로프는 다급히 설명을 덧붙였다.
“아무리 조율 중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말을 그냥 듣고만 있었던 거야!”
“아닙니다! 저 역시 거부를 했습니다. 제가 내놓은 제안은 30%입니다! 그리고 로켓 기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정말인가?”
“정말입니다!”
리벤트로프의 대답에 히틀러는 화를 억눌렀다. 의자에 앉아 숨을 고르며 궁리를 하던 히틀러가 최종안을 내밀었다.
“프랑스 놈들에게서 뺏은 것 가운데 넘길 수 있는 것은 40%,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이 비율을 넘기지 말도록. 나중에 프랑스 놈들을 적당히 달래기 위해서는 생색을 낼 물량이 좀 필요하니까 말이야.”
“알겠습니다.”
“그리고 로켓 기술도 마찬가지. 핵심 기술을 미끼로 적당히 낚아 봐. 기술은 넘겨줄 수 있지만 기술진들을 넘겨줄 수 없어. 기술진들까지 넘어가면 미국은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니까.”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무조건 항복은 피한다는 것이 최종 목적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원하는 대로 모두 다 줄 수는 없다. 우리의 손실을 최대한 줄이면서 목적을 달성하는 것, 그것이 자네의 임무다.”
“반드시 달성하겠습니다.”
리벤트로프는 진땀을 닦으며 반드시 성공시킬 것을 다짐했다. 그런 리벤트로프를 바라보던 히틀러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번 일에 조국의 미래가 걸려 있지만, 자네의 미래도 걸려 있다는 것을 유념하도록. 조국이 패배하는 순간, 자네는 전범 재판에 회부될 것이니까. 설마 거기서 무죄를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런 생각 안 하고 있습니다. 이번 일 반드시 성공시키겠습니다!”
“나가 봐. 다음번에는 좋은 소식을 가지고 왔으면 좋겠군.”
“반드시!”
리벤트로프를 내보낸 히틀러는 한쪽에 있는 창문으로 걸어가 창밖의 풍경을 바라봤다.
“술이 마시고 싶군.”
하지만 히틀러는 금연, 금주에 금욕주의자-연인인 에바 브라운이 있었지만-였다.
히틀러가 팔짱을 낀 채 한참동안 베를린의 풍경을 바라보며 석상처럼 서 있을 때, 비밀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왔다.
“총통 각하.”
남자의 부름에 혼자만의 사색에서 깨어난 히틀러는 몸을 돌렸다. 남자를 확인한 히틀러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아! 스코르체니 소령! 이쪽에 앉도록.”
“감사합니다, 총통 각하.”
단정히 의자에 앉은 스코르체니를 책상 너머로 바라보던 히틀러가 입을 열었다.
“그래… 뭐 좀 찾아낸 것이 있나?”
“있습니다. 총통 각하.”
“이런….”
스코르체니의 짧은 대답에 히틀러는 망연자실한 표정이 되었다.
“없기를 바랐는데, 보고를 해 보도록.”
“예, 총통 각하. 국방군과 친위대 양쪽에서 모두 비밀스런 회동을 하는 이들이 발견되었습니다.”
“어떤 이들인가?”
“친위대에서는 히믈러와 하이드리히, 국방군에서는 OKW(Oberkommando der Wehrmacht, 국방군 최고사령부)의 카이텔과 일단의 장군들입니다.”
“하….”
스코르체니의 보고에 히틀러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이 다인가?”
“죄송합니다만, 한 명 더 있습니다. 두 세력 모두 한 명과 접촉을 시도 중에 있습니다.”
“누구인가? 설마 괴링?”
“그렇습니다. 총통 각하.”
스코르체니의 대답에 히틀러는 입을 다물고는 의자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한참 동안 창밖을 바라보다 다시 몸을 돌린 히틀러의 얼굴에는 감정이 사라져 있었다.
“프로이센의 늙은 귀족 장교 놈들과 초기부터 함께 해왔던 동지들이 등을 돌렸군. 웃음조차 나오지 않는 일이야.”
“체포할까요?”
스코르체니의 물음에 히틀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섣불리 움직이면 잔챙이들만 잡고 끝날 거다. 몸통을 잡아야 해. 자세한 계획은 입수했나?”
“자세한 계획은 아직 입수하지 못했습니다만, 가장 확률이 높은 행사를 알고 있습니다.”
“무슨 행사인 건가?”
“닷새 뒤, 베를린 국회의사당에서 하실 연설입니다.”
“아아….”
스코르체니의 말에 히틀러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의 핵 공격으로 파괴당한 도시들에서 사망한 이들을 추모하는 행사가 베를린 의사당에서 진행될 예정이었다.
히틀러는 이 자리에서 희생된 이들을 추모하고 시민들을 독려할 연설을 할 예정이었다. 이 여설을 위한 연설문을 쓰느라 히틀러는 요즘 밤잠도 설치고 있었다.
“일을 벌이기에 딱 좋은 날이로군.”
“대비는 하겠지만 너무 눈에 띄게 할 수 없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그건 그렇지. 하지만 나는 자네를 믿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스코르체니의 대답에 히틀러는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만 믿네. 제대로 한 번 해 봐.”
“예, 총통 각하.”
* * *
그날 밤, 베벨스부르크 성.
모닥불을 피워 놓은 서재에서 히믈러와 하이드리히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병력들의 동원 상황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소?”
“국회의사당에 동원되는 친위대원들을 이용할 생각입니다. 거사(巨事)가 성공하는 즉시 경비에 동원한 친위 대원들의 지휘권을 장악, 괴벨스와 기타 떨거지들을 제거하면 됩니다.”
하이드리히의 대답에 히믈러는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친위 대원들이 우리 명령에 따를까?”
“비록 2선으로 밀려났지만 친위대의 수장은 사령관이십니다. 일이 벌어졌을 때, 사령관이 나서시면 바로 따를 겁니다.”
“흐음. 그렇군. 괴링은 어떠한가?”
“열심히 저울질 중입니다.”
“빌어먹을 인간. 거사가 성공하면 그를 총통으로 추대하는 것이 아니라 제거하는 것이 낫지 않겠나?”
히믈러의 제안에 하이드리히가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제국의 시민들에게 괴링만큼 인지도가 있는 이가 없습니다.”
“빌어먹을 일이로군. 그래서… 괴링에게 접근한 다른 녀석들은 누구야?”
“카이텔입니다.”
하이드리히의 대답에 히믈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카이텔은 바람막이야. 실체가 따로 있어. 그 녀석들이 누구인지 알아내야 해!”
“그것까지 조사하기에는 시간과 인력이….”
“빌어먹을! 스코르체니만 이 자리에 있었어도!”
얼마 전부터 종적이 묘연한 스코르체니의 이름을 부르며 분통을 터뜨리는 히믈러였다.
여러 특수 작전과 방첩 작전에서 독보적인 능력을 보여 온 스코르체니는 얼마 전에 히틀러의 직권 명령으로 부하들과 함께 동부전선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동부전선에 도착했다는 보고를 끝으로 스코르체니와 그 부하들은 행방이 묘연한 상황이었다.
“예전부터 국방군 내에는 반 히틀러, 반 나치 조직이 존재해 왔어. 그들이 카이텔을 움직였을 거다! 최대한 찾아 봐! 그들보다 적어도 한 발은 앞서야 한다!”
친위대는 물론이고 게슈타포의 지휘까지 겸임했던 히믈러의 명령에 하이드리히는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사령관 각하.”
“후우~.”
길게 한숨을 내쉬며 흥분을 가라앉힌 히믈러는 하이드리히에게 작금의 상황을 다시 주지시켰다.
“하이드리히. 총통이 우리를 살려 둔 것은 선의가 아니야. 총통이 우리를 살려 둔 것은 희생양으로 삼기 위해서야. 그랬기 때문에 칩거만 명령했을 뿐, 직위와 계급은 그대로 유지시킨 거야.”
히믈러의 말에 하이드리히는 고개를 끄덕였다. 히틀러의 주변에서 축출되었지만, 그들의 직위와 계급은 모두 그대로였다. 그에 따라 그들은 베벨스부르크 성과 자신의 집에서 결재 서류들에 사인을 해야 했다. 결과적으로, 모든 일들은 그들이 제안하고 실행하는 것으로 기록이 된 상황이었다.
장식장에서 독주를 꺼내 든 히믈러는 잔을 비우며 말을 이어 갔다.
“총통도 처음부터 이런 상황을 예상한 것은 아니었겠지. 하지만 전황이 불리해지면서 우리를 미끼로 써먹을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이야. 나라도 그랬을 테니까. 빌어먹을! 비어홀 폭동 때부터 내가 총통을 어떻게 모셨는데! 이럴 수는 없는 일이야!”
분을 삭이지 못해 계속해서 술을 마시고 소리를 지르던 히믈러는 하이드리히를 돌아봤다.
“거사가 성공하면 그 즉시 정권을 인수한다! 그 다음 괴벨스와 보어만, 슈페어를 처단한다! 그래야만 우리가 살 수 있어!”
“리벤트로프는 어떻게 할까요?”
“그 작자는 살려 둬야지. 지금 영국과 선이 닿은 유일한 이 아닌가?”
“알겠습니다.”
자신들만의 살생부를 만들며 두 사람은 자신들이 정권을 잡은 이후에 대해서도 의견을 교환했다.
그들의 생각은 히틀러의 생각과 비슷했다. 연합군에게 조건부 항복을 하되, 자신들의 정적들을 제물로 넘기는 것이었다.
* * *
비슷한 시각. 베를린 외곽의 고급 주택가.
“롬멜은 아직도 침묵 중인가?”
“그렇습니다.”
“소심한 작자! 그런 작자가 그런 공훈을 쌓았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는군!”
상황을 보고하는 장교의 대답에 카이텔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미군이 비스케이 만에 상륙한 것에 대한 문책(問責)으로 밀려난 카이텔은 결과를 승복할 수가 없었다.
“총통이 나에게 이래서는 안 되는 일이야!”
‘사무실만 지킬 줄 아는 늙은이’라는 오명까지 들어가면서 히틀러에게 충성한 그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모욕이었다. 저런 오명까지 뒤집어 써 가면서 그가 소장파 장성들을 억눌렀던 덕에 히틀러가 손쉽게 국방군을 운영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내게 책임을 물어서는 안 돼! 책임을 져야 할 이는 따로 있다!”
현실을 승복할 수 없었던 카이텔은 히틀러에 대한 반란을 꿈꾸기 시작했다. 카이텔은 가장 먼저 그와 함께 같이 물러난 OKW의 노장들과 다시 연락을 시작했다.
농담을 가장한 진담을 통해 동지들을 규합한 카이텔은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카이텔이 움직이자 조용히 사태를 관망하고 있던 반 히틀러, 반 나치 조직인 ‘검은 오케스트라(Schwarze Kapelle)’가 접근을 해왔다.
무능하다는 평가를 받고는 있지만 카이텔이나 그와 함께 하는 노장들이 국방군에 가진 지분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검은 오케스트라’까지 합류하면서 카이텔의 계획은 점점 더 구체적으로 변해갔다.
“거사가 성공한 이후 정권 수장으로 누구를 내세워야 하지?”
‘누구를 대표로 밀 것인가’라는 의제가 나오자 고민을 하던 참석자들은 한 명을 떠올렸다.
“괴링?”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괴링밖에는 없겠군.”
어쩔 수 없이 ‘가장 정답에 가까운 오답’을 선택한 카이텔 조직은 곧 괴링과 접촉을 시도했다.
하지만 괴링은 바로 가부를 밝히지 않았다. 두루뭉술한 말로 계속해서 시간만 끄는 괴링의 모습에 카이텔 조직은 괴링의 주변을 감시했고, 곧 한 가지 사실을 파악했다.
‘히틀러를 제거하고, 괴링이 나서기를 원하는 조직은 우리만이 아니다!’
작전을 변경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카이텔의 조직은 두 가지 대책을 세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나는 계속해서 괴링을 설득하는 것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새로운 인물을 옹립하는 것이었다.
독일 국민들에게 인지도가 높고, 그만큼이나 호감도도 높은 참신한 인물.
그런 새로운 인물로 낙점이 된 이는 롬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