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9
319화 유럽 (9)
같은 날. 베를린,
정확하게 2시간이 지나자 장성들이 히틀러의 총통관저 회의실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이는 장성들의 뒤에는 보고서들을 잔뜩 든 장교들의 무리가 따라오고 있었다.
“총통각하 입실하십니다!”
친위대 장교의 알림에 장성들과 장교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부동자세를 취했다.
“하일히틀러!”
무장친위대 장성들의 나치식 경례와 국방군의 제식 경례에 가볍게 오른손을 드는 것으로 답을 한 히틀러는 자리에 앉자마자 본론으로 들어갔다.
“내가 명령한 것은 다 실행했나?”
“예. 총통각하.”
“그럼 보고서를 제출하도록.”
히틀러의 명령에 대기하고 있던 장교들이 히틀러 앞에 놓인 탁자에 서류들을 갖다 놓기 시작했다. 탁자 위에는 순식간에 서류의 벽이 만들어졌다.
서류를 내려놓은 장교들이 회의실 밖으로 사라지자 히틀러는 서류들을 보다가 장성들에게 물었다.
“이것이 현재 우리 독일군의 상황을 정리한 것인가?”
히틀러의 물음에 모델이 나서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육군 350개 사단. 무장친위대 38개 사단. 2개 공군 기갑사단과 공수부대를 포함한 공군, 그리고 해군의 모든 전력입니다.”
“흐음….”
모델의 대답을 들으며 히틀러는 얼굴을 찌푸렸다. 잔뜩 찌푸린 히틀러의 눈동자에는 후회의 감정이 가득했다.
그것을 알아차린 모델이 재빨리 치고 들어갔다.
“총통각하. 각하께서는 분명히 뛰어난 지도자십니다. 하지만, 신은 아니십니다. 국정(國政)과 군정(軍政)을 동시에 하시는 것은 상당히 힘에 부치실 것이 확실합니다.”
“그래서 지금 내게 내가 한 말을 철회하라 강요하는 것인가?”
“철회가 아닙니다. 좀 더 효율을 높이는 것입니다. 총통께서 적합한 이들을 골라 정리와 분석을 하게 하시고 그것을 보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럼 바뀐 것이 없지 않은가?”
“바뀐 것이 있습니다. 제1 회의실에 입체 지도를 설치하겠습니다. 그 지도는 선과 점으로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말을 멈춘 모델은 주변을 살피다 검은색 나무토막을 들었다.
그것은 지도에 사단의 위치를 표시할 때 쓰는 아이콘(Icon)이었다. 아이콘을 손에 든 모델은 말을 이어갔다.
“이 아이콘들로 모든 것들을 표시하겠습니다. 그리고 거의 실시간으로 상황을 개정하겠습니다.”
“실시간으로?”
“통신의 제약이라던가 피치 못할 사고가 없다면 실시간으로 개정(改定)하겠습니다.”
“흐음….”
모델의 제안에 히틀러는 조금씩 마음이 동했다. 귀족입네하고 젠체하는 OKW의 장성들이 꼴 보기 싫었던 것에 안 좋은 일이 겹쳐지면서 아무 생각 없이 내뱉었던 명령이었다. 그리고 막상 실제를 보니 그것은 경악을 하게 만드는 양이었다.
마음이 동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덥석 응하기에는 걸리는 것이 많았던 히틀러가 모델을 노려봤다.
“그렇게 해서 귀관들은 재량권을 되찾아가겠지?”
“재량권을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총통각하께서 지신 책임을 나눠 갖는 것이지요. 독일 제국의 존망이 걸린 대업(大業)을 성공시키느냐 마느냐에 대한 책임 말입니다.”
“흐음….”
모델의 설득에 히틀러는 콧소리를 내며 생각에 잠겼다.
그 모습에 회의실에 모인 장성들은 마음속으로 간절하게 기도했다.
히틀러가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을 경우, 독일의 모든 군사 조직은 동맥경화에 걸린 것처럼 반신불수(半身不隨)가 되어 버릴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될지 불문가지(不問可知, 묻지 않아도 알다.)였다.
적들의 공격에 말초적인 저항은 가능하겠지만 조직적인 방어나 반격은 꿈도 못 꾸게 될 것이고, 결국은 패전과 멸망으로 끝이 날 것이었다.
모든 장성들이 입을 다문 채 마른 침만 삼키는 동안 홀로 고민을 하던 히틀러가 결론을 내렸다.
“좋다! 모델! 자네의 의견을 받아들이겠다. 자네가 구상한 대로 제1회의실을 꾸며 봐!”
“감사합니다, 총통 각하!”
히틀러가 수락하자 모델은 진심으로 기뻐하며 고개를 숙였다.
히틀러는 장군들을 돌아보며 선언했다.
“좋다! 장군들이 원한 재량권을 나눠주겠다! 하지만, 권한을 준만큼 책임을 확실하게 물을 것이다! 우리 위대한 독일국민들을 대신해 나는 그 책임을 확실하게 물을 것이라는 것을 각오하도록!”
“야볼(Jawohl)!”
히틀러의 선언에 회의실에 모인 모든 장성들은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그 다음 날부터 제1회의실은 모델이 말한 것을 실현하기 위해 갖가지 장비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필요하다면 히틀러와 전선의 사령관이 바로 통신할 수 있는 통신장비와 유럽과 러시아의 대형 지도. 그리고 독일군과 연합군의 사단들이 표시된 크고 작은 아이콘들까지….
독일군과 연합군 모두가 ‘히틀러의 병정놀이터(Hitlers Spielplatz, Hitler's playground)’라 부른 장소가 만들어진 것이었다.
* * *
총통관저를 나온 모델은 동료 장성들로부터 진심어린 감사의 말을 들었다.
“고맙네. 총통을 설득해 내다니, 정말로 수고했어.”
“감사합니다, 장군님!”
선후배 장성들의 칭찬에 모델은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운이 좋았을 뿐이에요.”
“참으로 겸손한 친구야!”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온 모델은 부관에게 진심을 털어놓았다.
“진짜로 운이 좋았을 뿐이야. 자네들이 들고 들어오는 서류들의 양을 보고 순간적으로 든 발상이었거든. 그 자리에서 임기응변으로 던진 도박수였는데 통한 것이 기적이었어.”
“기적이 아닙니다. 장군님처럼 총통각하를 잘 아는 분은 없으실 것입니다.”
“에이~. 자네까지 그러지 말게.”
모델은 계속 부정했지만 부관은 진심이었다.
잠시 후, 모델은 슈페어의 방문을 받았다. 모델로서는 뜻밖의 인물이 찾아온 것이었다.
“Herr. 슈페어. 이곳까지는 어쩐 일로?”
“장군님께 감사의 말을 드리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감사? 내가 장관의 감사를 받을 일을 했던가요?”
“총통 각하를 막아 주신 일 말입니다.”
슈페어의 말에 모델은 가볍게 손을 저었다.
“나를 위한 일이었소. 망할 때 망하더라도 무기력하게 손발이 묶인 채 망하고 싶지는 않았거든.”
“그래도 감사합니다.”
“그렇게 감사를 하고 싶거든. 총통의 처방전을 고쳐 준 이에게 감사를 표하도록 하시오. 새로운 처방전 덕분에 총통 각하의 고집을 꺾는 일도 쉬워졌으니까.”
“하하….”
모델의 말에 슈페어는 난감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
* * *
“모델이 그랬다고?”
“그렇습니다.”
독일 보충군 사령부의 밀실. 보충군 참모부장 프리드리히 올브리히트(Friedrich Olbricht) 육군 보병대장과 일단의 인원들이 밀담(密談)을 나누고 있었다.
올브리히트 대장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모델의 말이 일리가 있군. 그 처방전 덕에 총통의 광기도 많이 가라앉았으니까, 하지만 그래서 더욱 불안해. 이번에 벌어졌던 일이 또 다시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고, 그때도 이번처럼 운이 좋을 거라는 보장도 없으니까.”
“그렇습니다.”
“결론은 하나야. 총통을 제거해야 한다.”
“그렇습니다.”
“맞습니다. 조국의 파멸을 막기 위해서 총통은 제거되어야 합니다.”
올브리히트 대장의 말에 동의를 표하는 이들은 군 내부의 반나치 우익들이 모여 만든 비밀조직 ‘검은 오케스트라(Schwarze Kapelle)'의 일원들이었다.
올브리히트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미국이 프랑스에 상륙한 이상, 우리는 이제 적극적인 방어를 행함과 동시에 외교전을 벌여야 한다. 스탈린을 우랄산맥 동쪽으로 쫓아 버렸지만, 스탈린이라면 반드시 다시 우랄산맥을 넘어올 것이다. 그 전에 미국과 종전하고 스탈린을 상대해야만 해. 양면전선을 벌이는 것만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
“그렇습니다.”
“미국의 발을 멈출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히틀러의 머리뿐이야!”
* * *
비슷한 시간,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결론을 내리는 이들이 있었다.
온갖 훈,포장이 걸린 제복을 입고 목에는 철십자 훈장을 건 장성과 고급 장교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히틀러를 죽이지 않으면 오늘과 같은 일이 또 벌어질 거다. 그때도 모델 장군과 같은 이들이 나서서 막을 거라는 확신이 없어.”
“동감이야.”
“동부 전선은 멈춰 섰지만 계속해서 많은 전력을 소모시키고 있는 상황에 서부 전선에 미군이 본격적으로 들어왔다. 이제는 루마니아와 체코슬로바키아가 문제가 아니야. 우리 조국의 존망(存亡)이 경각(頃刻)에 달렸어. 총통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우라누스 계획을 진행하고 있지만 알아본 바에 의하면 단시간 안에 성공할 수 있는 확률은 지극히 낮다.”
“미국은 성공했지 않은가?”
“유대인들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거기 들어간 비용과 시간, 인력이 우라누스 계획의 몇 배야. 그리고 그 세 가지 모두 우리에게는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들이지.”
“그렇군.”
“총통이 말한 것처럼 우라누스 계획으로 나온 신형폭탄을 ‘승리2호(Sieg Nr. 2)’로켓에 실어 날린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야. 따라서 우리는 대안이 필요하다.”
“대안이라….”
“가장 확실한 대안은 총통의 머리야. 그것만 내밀면 루즈벨트도 만족을 할 거다. 그러면 우리는 마음 편하게 스탈린만 상대하면 돼.”
음모가 싹트는 베를린의 밤이었다.
* * *
상륙 +3일째. 오전6시.
부흐뇌프-엉-해쯔(Bourgneuf-en-Retz).
겨울인 탓에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어둑어둑한 공간에 요란한 고함소리들이 튀어나왔다.
“얼른 짐 챙겨라!”
“아직까지 먹고 있냐! 지금 무슨 만찬이라도 즐기는 거냐! 얼른 뱃속에 밀어 넣고 식기 정리해!”
“8시에는 바로 출발해야 한다! 똥 마렵다고 울어도 멈추지 않으니까, 미리미리 비워!”
“언놈은 밀어 넣으라고 하고, 언놈은 비우라고 하고, 어느 장단에….”
“누가 구시렁거리고 있냐!”
영어와 한국어, 필리핀어와 베트남어까지 다양한 국적을 가진 고함소리가 튀어나오는 것을 바라보고 있던 송 소장이 거버너 소장에게 농담을 던졌다.
“꼭 바벨탑 무너진 다음의 혼란상 같군요.”
“교회다니십니까?”
“선데이 크리스천이지요.”
“아하!”
송 소장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던 거버너 소장이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저기 시끄러운 말들 가운데 80%는 욕설일 겁니다.”
“군대에서 욕설 빠지면 소금 빠진 정찬(正餐)이지요.”
“하하하하!”
상륙군의 주력인 미군과 한국군 장성들이 화기애애하게 농담을 나누는 동안 병사들은 바쁘게 출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얼른얼른 짐 챙겨서 실어라! 안 그러면 소대장이 또 와따빡, 쉐따빡하면서 뭐라고 할 거니까!”
소대 주임상사의 호령에 병사들은 부지런히 군장을 챙겨 자신들이 탈 방탄트럭에 실었다.
“이리 줘!”
“끙차!”
무거운 군장을 넘기고 트럭에 먼저 탄 병사들이 군장을 끌어 올리느라 힘을 쓰는 가운데 신참 이등병이 옆에 있던 선임에게 질문을 던졌다.
“와따빡, 쉐따빡이 뭡니까?”
“들으면 모르겠냐? 양놈 욕이지.”
“아….”
이등병이 고개를 주억거리자 트럭에 실린 군장을 정리하던 병사가 말을 덧붙였다.
“문제가 뭐냐 하면 그 욕을 양놈 앞에서 해도 양놈이 못 알아먹는다는 것이지.”
“그거 참 미안하다. 내가 영어를 왜놈한테 배워서 그래.”
막 소대장의 험담을 하려던 병사들은 난데없이 튀어나온 목소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소대장이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