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0
310화 유럽으로 가는 길 (12)
12월 10일 일요일. 새벽 5시. 비스케이 만을 향해 움직이는 연합군 수송선들의 갑판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모든 수송선에서 군종 신부들과 군목들이 미사와 예배를 진행했다. 상륙을 코앞에 둔 병사들은 누구보다 간절하게 신의 가호를 빌었다.
예배가 끝나고 상륙을 위해 각자의 장비를 챙기는 병사들의 손끝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많은 수송선들의 스피커에서는 군가들과 이런저런 구호들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지만 가장 많이 흘러나오는 것은 주기도문이었다.
“하늘에 계신….”
“오늘 일출 시각은?”
“7시 44분입니다.”
“그런가….”
상륙작전을 총지휘하는 임무를 맡은 홀시 제독은 한반도의 함교 난간에 몸을 기댄 채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의 발아래 비행갑판에서는 갑판요원들이 출격을 준비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어느새 필터만 남은 담배 꽁초를 버리고 새 담배를 입에 물려던 홀시는 손에 들린 담배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필리핀에서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계속해서 줄담배를 피우며 긴장을 풀려고 노력하는 것은 홀시만이 아니었다. 다른 많은 제독들이 비슷하게 난간에 몸을 기댄 채 줄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 모습들을 보며 고 제독은 쓴웃음을 지었다.
“끊었던 담배가 다시 땡기는군.”
고 제독은 줄담배를 피는 다른 제독들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일본군보다 훨씬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독일군들이 웅크리고 있는 곳을 향해 밀고 들어가서 사상 최대의 병력을 단 몇 시간 안에 프랑스에 상륙시키는 작전이었다.
조금이라도 삐끗하는 순간, 연합군은 독일군의 공격이 아닌 스스로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자멸을 하게 될 것이었다.
“썅. 담배가 땡기는데 나가지도 못하고 죽겠군.”
함교에서는 함장인 강 대령이 연신 커피를 마시며 투덜거렸다.
흡연보다 금연이 일반적이던 21세기에서도 꿋꿋하게 흡연을 계속하던 강 대령이었다. 지금 이 순간이 가장 담배가 땡기는 순간이었지만 함교 바깥에 늘어선 제독들 사이에서 담배를 땡길 담력은 없었다.
연신 새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도 홀시는 계속 상황을 체크했다.
“전함들은?”
“가장 선두에서 상륙지점을 향해 항해 중입니다. 예정된 시간에 예정된 위치에서 지원사격을 가할 것입니다.”
* * *
이번 작전을 위해 미국은 자국의 모든 전함들을 긁어모았다. 진주만 공습에서 가라앉은 것을 부활시킨 전함들을 비롯해 장거리 항해에서 속도를 맞추기 힘든 골동품들을 뺀 모든 전함들이 이번 작전에 동원되었다.
본토방어를 위한 뉴욕급과 와이오밍급 4척을 제외한 20척의 전함들이었다.
중순양함과 경순양함들이 구축함들을 이끌고 함대 외곽에서 대잠 방어를 위해 바쁘게 돌아다니는 동안 이 20척의 전함들은 10대씩 나뉘어 상륙부대의 선봉을 맡고 있었다.
가장 최신예인 사우스다코타와 아이오와급 전함들을 제외한 다른 전함들에게 내려진 명령은 간단했다.
“좌초돼도 좋다! 최대한 해안에 바싹 붙어 눈에 보이는 모든 독일 놈들을 가루로 만들어 버려!”
* * *
벌레가 준비한 교보재의 영향은 확실했다. 영화상의 과장이 아니라 실제로도 심각한 손실을 입었다는 것을 알게 된 육군 장성들은 바로 해군 장성들을 불렀다.
“…해서 댁들이 가진 전함들이 필요하오.”
“몇 척이나?”
“있는 대로 다 내놔!”
“강도다!”
‘일본 상륙 작전에서도 그 정도로 많은 수를 동원하지 않았다!’
‘본토방어를 위한 최소한의 수는 필요하다!’
해군이 강하게 반발을 했지만 육군은 더 강경했다.
“본토방어? 영국과 대서양, 태평양이라는 최고의 방어물이 있다! 독일 놈들이 항공모함들을 리버티 쉽-미국이 대량생산한 수송선-들 뽑듯이 뽑아서 끌고 오지 않는 한 본토의 방어는 굳건하다! 웃기지 말고 전함들 다 내놔!”
“지금부터 상대할 놈들은 잽들이 아니라 독일 놈들이라고! 스탈린과 처칠이 쩔쩔매는 바로 그 독일!”
“개수를 했어도 1차 대전 때부터 쓰던 골동품들이잖아! 아껴서 뭐할 거야! 뭐? 함대 전투? 유보트들 상대로 포격전 할 거야? 당장 내놔!”
그런 결과, 동부 해안의 중요 항구를 방어하기 위해 구식 전함 4척을 남겨 놓고 모든 전함들이 동원된 것이었다.
전함들을 가장 선봉에 밀어 넣으면서 육군 지휘부는 또 다른 이점을 얻게 되었다.
“저 덩치들을 이정표로 삼으면 엉뚱한 곳으로 갈 일은 없겠군!”
상륙전을 할 때마다 가장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 가운데 하나가 엉뚱한 곳에 상륙하는 것이었다. 그런 일을 막기에 전함들의 우람한 덩치는 아주 제격이었다.
미 육군 장성들의 아이디어에 양념을 친 것은 벌레와 빨갱이였다. 상륙작전을 조율하기 위해 한국과 미국의 육군 장성들이 모였을 때, 벌레와 빨갱이도 그 자리에 참석할 수 있었다.
“우리는 왜요?”
“너희들 실적이 있잖냐.”
그동안 벌어졌던 여러 전투에서 보여 준 활약에 강렬한 인상을 받은 미 육군 장성들이 초청한 것이었다.
어쨌거나 그렇게 참석한 회의에서 전함을 이정표로 쓴다는 아이디어를 들은 벌레가 양념을 쳤다.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배를 잘 몰라서 그런지, 전함들의 구분이 잘 안 갑니다. 이 배가 저 배 같고, 저 배가 이 배 같아요. 익숙한 해군들이 아니라면 다들 비슷할 것입니다. 상륙지를 나누었어도 상륙에 들어가는 병력은 어마어마한 규모입니다. 반드시 혼선이 벌어집니다. 기왕 전함을 해안선에 가까이 대는 것, 전함에 마킹을 하죠?”
“마킹?”
“전함 옆구리에 번호를 적어 넣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륙하는 부대에 해당 번호를 알려 주면 잘 찾아갈 것 아닙니까?”
“그거 좋군. 좋은 아이디어야.”
벌레의 말에 장성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빨갱이가 말을 덧붙였다.
“기왕 마킹을 하는 김에 주포 포탑 지붕에도 큼지막하게 적어 넣는 것이 좋습니다. 전선 통제기가 알아볼 수 있게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전함 자체가 엉뚱한 곳에 가는 것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군!”
그 결과 작전이 벌어지기 전날, 전함들의 수병들은 자신들이 탄 전함 옆구리와 주포탑 지붕에 큼지막한 기호들을 그려 넣어야 했다.
전함들 옆구리에 그려진 것은 알파벳 F(Front)와 S(Second), 그리고 두 자리의 숫자였다.
F01에서부터 F12까지는 해안에 가장 근접해 지원사격을 하는 전함들에게, S는 그 다음 열에서 지원을 하는 전함들에게 배정이 되었다.
그리고 상륙을 하는 부대를 실어 나르는 수륙양용 장갑차들과 상륙주정의 운용요원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간단한 약도가 배부되었다.
“S04의 우측으로 돌아서 F04와 F05 사이를 지나 포탄이 터지는 곳을 향해 곧바로 직진하라고?”
* * *
시간이 점점 가까워지면서 함대의 움직임은 더욱 부산해졌다.
“워키토키와 통신기들의 최종점검이다!”
통신기들을 점검하라는 명령에 담당 병사들은 자신들에게 배정된 통신기들을 점검했다.
벌레와 빨갱이를 비롯한 21세기 출신 한국군들은 물론이고 독립군 출신 한국군들 모두가 미군하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있었다.
“미군의 최대 강점은 물량이 아니라 엄청나게 빠른 피드백(Feed Back)이다!”
21세기 출신 한국군들과 그들에게 교육받은 한국군들이 개인용 단거리 무전기와 차량에 탑재한 중장거리 통신기를 유용하게 사용하는 것을 본 미 육군은 첫 실전에 들어가는 부대에도 대량의 통신기를 공급했다.
그 결과, 중동 전선에서 짭짤하게 재미를 본 미군은 분대 레벨에까지 통신기로 도배했다.
-주면 뭐하냐? 평소에는 멀쩡하다가도 전투가 벌어지면 10개 가운데 9개는 먹통이 되는 것이 무전기다!
전투를 겪은 부대에서 통신기 관련으로 불만 가득한 사용 후기들이 올라오자 미 육군 상층부의 대처는 간단했다.
1. 좀 더 성능이 강화되고 신뢰성이 향상된 통신기의 개발.
2. “10개 가운데 9개가 먹통이 된다고? 그럼 20개를 뿌리지!”
미 육군 상층부의 대처 덕에 미 육군은 분대급에 2개의 BC-611워키토키를 지급하는 것을 시작으로 그 상위 제대들에게도 대량의 통신기들을 배치했다.
그 결과 통신장애를 겪는 일은 크게 줄었지만 통신량 자체가 크게 증가하는 바람에 통신을 관제하는 병사들과 간부들이 고생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해병대 장성들이 워싱턴에 쳐들어가는 일이 벌어졌다.
“우리 해병대는 버린 자식들이냐!”
* * *
“시작합니다!”
06시 30분. 해안에서 200km 떨어진 지점에 자리한 2척의 호위항공모함들에서 어벤저들이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이륙한 어벤저의 양쪽 주익과 폭탄창에는 큼지막한 연료탱크들이 달려 있었다.
그들이 맡은 임무는 전선 통제였다.
전선 통제기들이 날아오르는 것을 시작으로 에섹스급 항공모함들과 그와 인접한 호위항공모함들에서 콜세어, 어벤저, 돈틀리스들이 날아올랐다.
그들이 맡은 임무는 전함들이 사격을 하기 전, 1차로 상륙지점과 그 인근의 지상을 갈아엎어 버리는 것이었다.
프로펠러 전투기들과 공격기들의 뒤를 이어 한반도에서 E-2D가 날아올랐다.
E-2D가 고도를 올리자 수퍼캐리어들과 한반도에서 썬더 캣들과 KF-1C들의 1진이 줄지어 이륙했다.
그들이 맡은 임무는 상륙지점을 향해 몰려올 것이 확실한 독일 전투기들을 제압하는 것이었다.
* * *
전함군(群)과 상륙부대들의 후방. 구축함들의 호위를 받는 20척의 호위항모들의 비행갑판도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부우우웅~.
하늘에서 비행기들의 엔진음이 들리자 비행갑판의 발함요원이 신호기를 흔들었다.
“엔진 시동!”
발함요원의 수신호에 따라 갑판에 대기하고 있던 MH-60R시호크 헬리콥터들과 H-21헬리콥터들의 로터가 일제히 돌기 시작했다.
“탑승!”
스피커에서 탑승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한국군들과 미군들이 줄지어 헬리콥터에 올라타기 시작했다.
상륙지점에 가장 먼저 발을 딛고, 가장 격렬한 전투를 담당하게 될 선봉의 출진(出陣)이었다.
자신에게 배정된 MH-60R에 올라탄 벌레는 동체 좌우에 달린 커다란 스피커를 보고는 바로 무전기의 채널을 변경해 기장과 연결했다.
“소령님! 저 스피커! 설마 그겁니까!”
벌레의 물음에 기장 백한상 소령은 고개를 뒤로 돌리고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히틀러가 바그너를 그렇게 좋아한다잖냐!”
대답을 끝낸 백 소령은 다시 앞을 보며 기기를 점검했다.
그 모습을 본 벌레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뭐? 역사적인 임무를 미군에게 맡길 수 없다고? 딴마음 먹은 것이 확실한데 무슨!”
“본토진공 때도 참았습니다! 하지만 유럽 상륙의 역사적인 순간에 뒤에 앉아만 있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습니다!”
상륙작전의 준비가 진행되면서 한반도 소속 MH-60R 편대 지휘관 백한상 소령은 강 대령과 고 제독에게 거칠게 항의했다.
“하지만 한반도에 있는 헬기는 귀관의 4대가 전부 아닌가? 그걸 잃으면 큰 손해야.”
“그렇다고 계속 뒤에서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부하들의 사기저하가 큽니다!”
“조금만 인내하게나.”
“우리의 뒤를 이어 들어올 후배들에게 뭐라 말할 겁니까? 육군이나 다른 부대들은 다들 영광의 역사를 기록할 때, 우리만 백지입니다! 기회를 주십시오!”
백 소령의 항의가 이유 있다고 생각한 고 제독은 결국 백 소령의 헬기 소대를 헬리본 부대가 탑승한 호위항공모함으로 보냈다. 그리고 그렇게 배치된 MH-60R에 벌레와 그 부하들이 탑승하게 된 것이었다.
다시 한 번 동체 좌우에 달린 스피커들을 본 벌레는 작게 중얼거렸다.
“호환, 마마보다 무서운 것이 영상이라더니… 영화 하나가 국적을 망라하고 여럿 버려 놨네.”
“출발!”
상륙지점에서 벌어질 일을 예상하고 고개를 흔드는 벌레를 태운 MH-60R헬리콥터가 힘차게 하늘로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