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6
296화 협상, 귀향 그리고 출항 (17)
정 수석차관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움직이는 동안 벌레 일당들도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썅! 전쟁 준비 하는데도 정신없어 죽겠는데! 방산비리라니!”
벌레가 분통을 터뜨리는 방산비리 사건은 육군이 착용할 동계 피복에 관련된 사건이었다.
“식민지 상태로 있으면서 모든 경제가 개판이 됐다. 당장 공장을 만들어 돌릴 형편도 안 되지만, 우선 있는 공장부터라도 돌리자.”
임정의 결정에 따라 몇 개 없는 공장들이 돌기 시작했다. 그런 공장들이 생산한 상품들의 소비처는 정부 기관들과 군대, 특히 군대가 대부분을 소비하는 임무를 떠맡았다.
“썅! 언제나 만만한 것이 군대지!”
벌레 일당들은 임정의 방침에 바로 반발을 하고 나섰다.
21세기에서 군 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부조리들이 아직도 생생했기 때문이었다.
“닭에 문제가 생기면 질리게 닭고기만 먹어야 했고, 소나 돼지에 문제가 생기면 소고기, 돼지고기만 질리게 먹어야 했습니다! 이런 일을 또 겪으라고요? 징병제도 아닌 모병제 하에서 군대에 인력 수급 참 잘 되겠습니다!”
벌레 일당의 반발에 김일홍 장군을 시작으로 군의 고위층은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그 말도 일리는 있네만, 지금 조국의 상황이 좋지가 않으니….”
“그 부분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군을 가장 쉽고 편한 해결책으로 생각하게 되는 풍조는 싹이 트기 전에 막아야 합니다!”
격론 끝에, 필요한 물건들을 받기는 하되 품질 검사는 철저하게 한다는 약속을 공식적인 문서로 남기고 나서야 군에 납품이 시작되었다.
그 뒤로 한반도에 있던 몇 안 되는 공장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군이 사용할 식기라던가 수통, 군화와 각종 피복들이 제작되어 군에 납품되었다.
그런 가운데 문제가 터진 것이 바로 군용 동계 피복이었다. 원단과 내부 충전용 보온재, 지퍼 등등을 미국에서 공급 받아 한국에 있는 공장에서 생산하는 방식이었다.
문제는 그때까지 조선에서 사용하던 것보다 월등한 품질의 원단과 보온재들을 뒤로 빼내고 비슷하게 염색한 저질의 원단과 저질의 보온재들로 동계 피복을 만들어 제대로 만들어진 피복들과 섞어서 납품한 것이 걸린 것이었다.
“대한민국 사상 최초의 방산비리(防産非理)가 피복이라… 미국에서는 고급이 아닌 원단이 이 땅에서는 고급으로 여겨질 정도로 이 땅의 산업 기술력이 엉망진창이야. 이제는 열이 받는 것이 아니라 서글퍼진다.”
정 수석차관의 말에 벌레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사설은 필요 없고, 당장 비리 저지른 놈들을 다 잡아다 발가벗겨서 만주 벌판에 세워 두고 얼려 죽여야 해. 젠장! 사람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것이 먹는 것, 입는 걸로 장난치는 거야!”
“동감이다.”
“노안이 너, 아직 만주 안 가 봤지? 아직 10월인데도 해 떨어지면 뼛골이 시린 동네야. 그런데 그 추운 곳에서 입을 옷을 가지고 장난을 쳐?”
벌레는 물론이고 빨갱이, 창기까지 이를 박박 갈며 분통을 터트렸지만, 정 수석차관은 담담한 표정으로 서류를 덮었다.
“군 내부는 기무부에서 수사를 하고 있고, 바깥은 경찰에서 수사를 하고 있으니까 곧 결과를 알 수 있을 거야.”
“이번에도 ‘생활고(生活苦) 어쩌고저쩌고’ 라는 말 나오면 진짜 엎어 버릴 거다!”
“전쟁 중이야. 군법이 적용될 거다. 그리고 너희들 말고도 이 가는 분들 많아. 특히, 부주석이 아주 박박 갈고 있지.”
정 수석차관의 말마따나 김기식 부주석은 살기등등한 표정과 목소리로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이번에 벌어진 참람(僭濫)한 일은 절대로 쉬이 넘어가면 안 되는 일입니다! 전쟁을 하고 있는 상황이오! 그런데 그 군수품에 부정을 저질러? 당장 교수대에 올려도 무방할 일이오! 그게 다 어떤 돈인데!”
임정 각료들의 분노에 직면한 경찰과 기무부는 최선을 다해 관련자 색출에 들어갔다. 피복 제작 공장에서 빼돌린 원자재를 유통한 상인들과 납품과정에서 눈을 감은 군 간부들이 줄줄이 수감되었고, 그들의 집과 가게, 사무실들이 샅샅이 수색을 당했다.
최종적으로 군수과의 대령 한 명을 시작으로 4명의 장교들과 5명의 부사관들, 그리고 12명의 사병들이 조사에 들어갔다.
-이 모든 일은 본인의 잘못이다. 군의 명예를 실추시킨 죄를 통감(痛感)하며 군과 국민에게 용서를 구한다.
짧은 유서와 함께 문제의 대령이 자살을 하고, 관련자들에 대한 중징계가 발표되면서 사건은 어느 정도 단락이 지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벌레 일당들은 신문기사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전형적인 꼬리 자르기로군!”
“벌써부터 이런 수작이라니!”
“나라 꼴 잘 돌아간다!”
* * *
벌레 일당들이 분통을 터뜨리고 있을 때, 정 수석차관은 기무부장인 최병섭 대령을 비밀리에 만나고 있었다.
“확실히 윗선이 있어.”
“누구입니까?”
“강장 유력한 이는….”
말을 흐린 최 대령은 품에서 작은 쪽지를 하나 꺼내 정 수석차관에게 내밀었다.
“그 사람이야. 이번에 자살한 대령과는 만주 시절부터 고락(苦樂)을 같이한 사이지.”
쪽지에 적힌 이름을 확인한 정 수석차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어느 정도의 금액이 흘러들어간 것입니까?”
“적어도 6천 불($).”
“겨우….”
정 수석차관이 피식 웃음을 터드리자 최 대령은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지금 이 대한민국의 경제상황에서 6천 불이면 어마어마한 금액이야.”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 목이 달아날 수도 있는 일을 하고 겨우 6천 불을 챙겼다는 게 우스워서 그렇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겨우가 아니네. 총독부 시절 공무원들이 10년을 넘게 모아야 하는 거액이야.”
한반도를 탈환할 당시 명목상 환율은 조선 엔과 일본 엔, 만주 엔, 대만 엔 그리고 중국 위안화의 가치가 1:1이었다. 그리고 달러와의 명목 환율은 일본 금화 1엔이 미국 금화 10달러였다. 하지만 실제 환율은 일본 금화 100엔이 미국 금화 10달러였다.
임정의 한반도 탈환 이후 한반도의 시장에서는 조선의 10엔이 1달러의 환율로 유통이 되고 있었다.
이런 시세에 따라 6천 불을 조선 엔화로 바꾸면 6만 엔이었고, 1944년 당시 공무원의 평균 월급이 400엔대였다는 것을 감안할 때 약 12년을 모아야 하는 돈이었다.
“거액인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저 빌어먹을 물가를 잡기 위해서 매일같이 보고받는 것이 시장 환율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군대 전체가 뒤집어진 초대형 비리에서 겨우 6천 불이라니… 스케일이 너무 작습니다.”
“그거야 아직 경제력이 형편없으니까.”
최 대령의 말에 정 수석차관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문제지요. 경제만 생각하면 사표를 던지고픈 욕구가 무럭무럭 자랍니다. 그건 그렇고 이 양반이 돈을 챙기는 목적이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정치 자금.”
“정치 자금이요? 이 양반이 정계에 뛰어들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정 수석차관의 물음에 최 대령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직 미국에서 돌아오지 않은 사람이 하나 있지 않은가? 그 인간이 돌아왔을 때 쓸 정치 자금이 거의 확실해.”
“충신(忠臣) 났군요. 충신 났어. 빌어먹을.”
최 대령의 대답에 정 수석차관은 자기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죄송합니다.”
“괜찮아. 나도 비슷했으니까.”
“기밀 유지는 잘 되고 있는 것이지요?”
“기무부 내에서도 21세기 출신, 그 21세기 출신 가운데서도 나 빼고 셋만 알고 있어.”
“때가 올 때까지는 철저히 기밀을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걱정 말게.”
그 뒤로 몇 개의 안건에 대한 의견 교환이 이뤄졌고, 두 사람은 자리를 정리했다. 막 자리를 나서려던 최 대령은 걸음을 멈추고 정 수석차관을 돌아봤다.
“방산비리의 대가리 말이야. 자네가 다 생각이 있기 때문에 킵(keep)해 둔 것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차라리 지금 그냥 밝혀도 괜찮지 않았을까? 어차피 쳐낼 것이라면 말이야.”
“지금은 임정 사람들이 동지 의식으로 똘똘 뭉쳐 있습니다. 잘못 쳤다가는 우리가 역풍(逆風)을 맞습니다. LA에 있는 리숭민이 돌아오면 그때는 확실하게 피아식별(彼我識別)이 될 겁니다. 그때 쳐내야 합니다. 그래야만 역풍을 막을 수 있습니다.”
“알겠네. 그럼 최대한 조심스럽게 감시하면서 챙겨야겠군.”
“부탁드리겠습니다.”
만남을 끝낸 두 사람은 주변을 살피며 헤어졌다.
* * *
‘대한민국 사상최초 방산비리’로 전국이 들썩이고 있을 때, 일본에서 화물선이 한 척 도착했다.
화물선이 부산항 부두에 접안하자 곧 군인들이 하역장 부근을 둘러쌌고, 여러 크기의 나무상자들이 크레인에 의해 하나씩 배에서 내려왔다.
“조심! 조심해!”
“화물에 손상이 가면 안 된다!”
내려진 나무상자들은 곧장 트럭에 실렸고, 중무장한 병사들의 엄중(嚴重)한 호위를 받으며 서울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모든 장면이 카메라를 든 기자들에 의해 빠짐없이 촬영되었다.
마지막 트럭이 부두를 벗어나자 기자들은 서둘러 전화기로 달려가거나 차에 올라 트럭들의 뒤를 따라갔다.
그날 오후, 전국의 신문들은 일제히 호외를 발간했다.
“일본이 약탈해 간 우리의 보물들이 돌아왔다!”
일본이 약탈해 갔던 모든 보물들-불행하게도 미군의 폭격으로 소실된 것들도 꽤 있었다.-이 돌아온 것을 기념하는 행사가 끝나고, 문제의 보물들은 구(舊)총독부 청사 지하실로 옮겨졌다.
“이거…. 우리가 일할 행정부 청사나 의정원 건물보다 박물관부터 먼저 건설해야 하는 것 아닌가?”
엄청난 양의 나무 상자들을 본 임정 각료들의 말에 정 수석차관이 질문했다.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 총독부 청사 지하실이 안전하기는 해도 좋은 환경은 아니라서 말입니다.”
“그렇기는 하지.”
“저 보물들이 다 오래된 것들이라서 말입니다. 제대로 된 공간에 전시를 해야 후대까지 보관할 수 있습니다.”
가벼운 농담으로 시작된 것이 점점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각료들은 걸음을 멈추고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다.
“확실히 박물관은 필요해.”
“그렇다고 아무 곳에, 아무렇게나 지을 수는 없습니다.”
“제대로 계획을 세워야겠지요.”
어느새 주석과 부주석까지 껴서 진행된 대화 끝에 각료들의 시선은 정 수서차관에게 집중되었다.
무언의 명령을 받은 정 수석차관은 해탈한 얼굴로 대답했다.
“예산의 우선순위를 변경시켜 주신다면 사업 계획을 연구해 보겠습니다.”
* * *
온갖 사건사고와 식민지에서 벗어나기 위한 움직임으로 한반도 전체가 바쁘게 움직이는 가운데 독일을 상대하기 위한 병사들을 가득 태운 열차들이 부산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역전의 1사단과 2사단, 그리고 이번이 첫 참전인 8사단의 병사들을 위한 환송식이 벌어졌고, 가족들과 작별을 한 병사들이 하나둘 수송선에 올랐다.
벌레 일당 역시 한쪽 구석에서 정 수석차관고 작별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왜 매번 우리는 이런 구석에 처박히는지 알 수가 없다!”
“저 신문 기자들이 득실거리는데 가서 이야기할까? 참 속 편하겠다?”
언제나처럼 만담이 오가는 속에 정 수석차관은 벌레 일당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었다.
“몸조심해라.”
“너도 조심하고. 리꼰대가 남아서 뭔 짓거리를 할지 몰라.”
“그래서 너희들이 애들 남겨줬잖아? 그리고 예전에 준 방탄조끼, 요즘은 잘 때도 입고 잔다.”
정 수석차관의 대답에 창기가 푸념을 했다.
“도대체 무슨 놈의 팔자가… 전방이고 후방이고 목숨을 걸어야 하니….”
“좋은 팔자였으면 21세기에서 시간 이동도 안 했겠지.”
빨갱이와 창기가 만담을 하는 동안 벌레는 정 수석차관과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잔뜩 심각한 얼굴로 한참 동안 이어진 벌레의 말에 정 수석차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가능성도 낮지는 않아.”
“Plan B는 준비하고 있는 거냐?”
“어느 정도….”
“진지하게 연구 좀 해 봐.”
“그렇게 할게.”
그 대화를 끝으로 네 사람은 작별을 했다. 수송선에 오른 빨갱이는 벌레를 돌아보며 질문을 했다.
“노안이랑 무슨 이야기를 한 거냐?”
“역사가 틀어진 김에 더 틀어질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여기서 더 틀어져? 그럼 뭐가 되는 건데?”
빨갱이의 물음에 벌레는 어깨를 으쓱하며 짧게 대답했다.
“삼국지 전 세계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