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전단 1941-283화 (283/464)

# 283

283화 협상, 귀향 그리고 출항 (4)

“엉?”

“뭐?”

정 수석차관의 말에 벌레와 빨갱이는 물론이고 창기까지 놀란 눈이 되어서 정 수석차관을 바라봤다.

“미국이 왜?”

“미국은 이번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세계의 패자(霸者)가 되고 싶어 하지. 가능성도 높고 말이야. 영국은 이미 지는 해고, 가장 강력한 경쟁자로 유력한 소련은 지금 독일 때문에 절반으로 줄어든 상황. 이런 상황에서 차기 경쟁자로 가장 유력한 이는 중국이야. 전제조건이라면 ‘하나의 중국’이겠지. 워싱턴은 이 경쟁자가 자라는 것을 원하지 않아. 이것이 나와 우리 애들이 생각한 ‘Why?’의 첫 번째 이유다.”

“두 번째는?”

“청나라 때부터 미국은 중국을 식민지가 아니라 시장(市場)으로 생각하고 있었어. 그런데 만주에 들어가 보니 괜찮은 공업지… 아! 공업지대는 미국이 부숴 버렸으니 빼고… 풍부한 자원지대가 존재하고 있는 상황이야. 이걸 그냥 내주는 바보는 어디에도 없을 거다.”

“흐음….”

“그럴 듯한데?”

정 수석차관의 설명에 빨갱이와 창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 수석차관의 설명을 곱씹어 보던 벌레는 걱정스런 표정이 되어 정 수석차관에게 질문을 던졌다.

“자원도 있고, 부숴 버렸다지만 언제든지 복구할 수 있는 산업시설도 있으면 앞으로 우리나라의 최대 경쟁자가 되는 것 아냐?”

“역으로 우리가 싼값으로 자원을 수입할 수도 있다는 장점이 있지. 경쟁은 우리는 앞으로 갈 길을 알고 있고, 저들은 모르는 상황이라는 점을 최대한 이용해야겠지?”

“계획은 확실히 준비되어 있는 거냐?”

“어느 정도는?”

정 수석차관의 대답에 빨갱이가 딴죽을 걸었다.

“기껏 계획을 세워 놓았다고 해도 정권을 놓치면 말짱 황이야. 그렇다고 임정을 독재정권(獨裁政權)으로 만들 수는 없잖아. 잘못하면 하와이로 도망가는 것은 런어웨이 숭민이 아니라 임정이 될 수도 있어.”

“그 부분에도 대책은 세워 놓았어. 너희들이 배 타고 일본에 들어서고 있을 때 김 주석이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했어. 내용은 향후 시간표. 전쟁수행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임정은 전시내각(戰時內閣)의 위치에서 모든 국정(國政)을 운영할 거야. 그리고 유럽전선의 전쟁까지 끝나면, 3개월 이내에 헌법 초안을 만들어서 그에 대한 찬반 투표도 들어갈 거고 헌법이 추인되면 다시 3개월 이내에 나라의 최고 지도자와 입법을 담당할 국회의원들을 선출할 거다. 그 후 6개월 이내에 정권이 수립될 거고 그러면 제1공화국이 수립이 되는 거지.”

“흐음….”

“제1공화국이라….”

벌레와 빨갱이가 정 수석차관이 말한 일정을 곱씹고 있을 때, 창기가 슬그머니 정 수석차관을 한쪽으로 끌고 갔다.

“왜?”

“네 말대로라면 전쟁이 끝나고 길어야 1년 안에 제대로 된 정부가 만들어진다는 거지?”

“그래. 왜?”

정 수석차관의 대답에 창기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전쟁 끝나고 1년 동안은 저 새끼들 근처에 얼씬도 말아야겠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창기는 정 수석차관에게 ‘벌레와 빨갱이 사용설명서’를 이야기해 주었다. 창기의 이야기를 들은 정 수석차관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선거철엔 건들지 마시오. 뭅니다.’라니….”

“영감, 아니 원 준장은 쟤들 보고 극렬은 아니라고 했는데, 전혀 아니야. 저 새끼들은 극렬 중에 극렬이고 진성(眞性) 중에 진성이다. 그것도 쌍진성.”

“누구보고 진성이래?”

“벌레 새끼는 극렬일지 몰라도 난 중도좌파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냐!”

“새끼들, 귀도 밝다.”

‘누가 과연 진성인가?’를 주제로 잠시의 투덕거림이 있었지만 네 명은 곧 술잔을 들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 씨… 나도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오래 서 있으려니 힘드네. 어디 앉을 만한 곳이 없나?”

“이하동문.”

잠시 후, 네 사람은 커다란 위스키병과 잔들, 그리고 간단한 안주들을 챙겨서 대연회실 근처의 작은 휴게실로 향했다.

우당탕!

히로히토를 잡은 전공은 물론이고 그동안 있었던 여러 전투에서의 공헌을 인정받아 명예훈장을 받은 세 사람-벌레, 빨갱이, 창기-과 정 수석차관이 휴게실로 들어서자 휴게실 소파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미군 장교들이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나 경례를 했다.

거수경례로 답례를 한 세 사람이 한쪽에 있는 빈 테이블에 둘러앉자 동행한 정 수석차관이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휘유우~, 방금 있었던 일이 명예훈장의 위력이냐?”

“그렇지.”

“대단하네.”

정 수석차관의 평가에 빨갱이가 가볍게 타박을 했다.

“부러워만 말고 우리나라에서도 서훈자들에 대한 대우부터 제대로 할 생각을 해.”

“그 부분도 이미 시행중이야. 임정의 어르신들부터 시작해서 이것저것 받은 양반들이 많아서 말이지.”

“제대로 해. 제대로.”

“거 참! 제대로 한다니까.”

말은 했지만 정 수석차관은 세 사람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정 수석차관 자신 역시도 LA에서부터의 여러 일들 덕에 독립유공훈장 금장을 받았지만 명예훈장 수훈자에 대한 대우는 완전히 격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최고급의 소파 덕분인지, 아니면 높으신 분들이 많은 곳을 벗어났다는 해방감 때문인지 테이블 주위로 둘러앉은 네 사람의 표정은 매우 편안했다.

“흐음… 그러고 보니까 여기 일본 의사당 건물이지?”

자신이 앉은 소파를 만져 보고 사방을 둘러보던 빨갱이의 물음에 정 수석차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럼 연합군 총사령부가 일본 국회 의사당에 얹혀사는 거냐?”

“아니, 총사령부가 얹혀사는 것이 아니라 일본 국회가 얹혀사는 거야. 전쟁 배상 문제가 해결된 이후로 한동안은 일본 정부가 존재하지 않을 거다.”

“응?”

“배상 문서에 사인할 놈들은 있어야지.”

“어차피 날려 버릴 거면 항복 조인식 끝나자마자 날려 버려도 됐잖아?”

빨갱이의 말에 정 수석차관은 가볍게 혀를 차고는 말을 이었다.

“배상은? 배상 문서에 사인할 놈은 있어야지. 사인할 놈도 없는데 싸그리 챙겨 가면 ‘강도’야. 하지만 사인할 놈이 있어서 사인 받고 뺐으면? 그것은 ‘배상’이지. 물론 앞에 ‘약탈적’ 또는 ‘강압적’이라는 말은 붙겠지만 말이야.”

“빌어먹을 정치란….”

“정치로 뭘 하건 제일 중요한 것이 명분이야. 어쨌거나 지들이 사인했잖아? 한일합방을 생각해 봐라. 어쨌거나 옥새가 찍혀서 상황 종료가 되었잖아.”

“그게 그렇게 되냐?”

“그렇게 된다.”

옆에 앉아 정 수석차관의 설명을 듣던 벌레가 빨갱이의 뒤를 이어 질문을 던졌다.

“저 이름도 찬란한 천황은 어떻게 되냐? 이번에도 그냥 넘어가는 거냐?”

“아니, 지금까지 합의된 바로는 히로히토는 퇴위, 퇴위한 다음에도 ‘상황(上皇)’의 지위를 갖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황족의 일원으로 격하. 생각 같아서는 감옥에 처넣거나 목을 매달아 버리고 싶었는데, 아직까지 그런 전례는 없다고 그래서 거기서 종료. 경제적 지원까지 빼자고 했는데 그것 역시 정치적으로 득이 없다고 해서 적당한 집 한 채 주고 최소한의 금액만 지원할 예정이야. 앞으로 먹고 살려면 꽤나 고생해야 할 거다.”

“그러면 다음 천황은 누구야? 히로히토 아들?”

“걔 너무 어리잖아? 히로히토의 둘째 동생이 오를 거다.”

“둘째라면?”

“히로시마에서 몰매 맞고 쫓겨났다는 소문의 주인공.”

이야기를 듣던 빨갱이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주 천황가를 마음대로 주물럭거리는구나?”

“내가 주물럭거리냐? 미국이 주물럭거리는 거지. 우리 정부는 단지 옆에서 간만 조금 칠 뿐이야.”

위스키 잔을 비운 정 수석차관은 말을 이어 갔다.

“우선 천황가는 이렇게 정리를 할 것이고, 행정부와 입법부는 배상문서에 사인이 끝나자마자 싸그리 감옥에 들어갈 거다. 전범(戰犯)으로 말이야. 최소한 10년 이상은 감옥에서 썩게 만들 예정이야.”

“그럼 그동안의 통치는? 연합군 사령부가?”

“연합군 사령부가.”

“막부(幕府)의 부활이냐?”

벌레의 말에 정 수석차관은 빙긋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막부의 부활이다. 니미츠 사령관이 새로운 쇼군(將軍)이지.”

정 수석차관의 말에 창기가 고개를 갸웃했다.

“응? 내가 알기로 맥아더가 쇼군이 되는 것 아니었냐? 맥아더의 직책이 ‘극동아시아 주둔 미 육군 총사령관’이잖아?”

“그거 워싱턴에서 교통정리 다시 하고 간판 다 다시 달았다. 맥아더는 필리핀과 인도차이나 반도 및 기타 태평양 도서들을 관장하는 ‘아시아 태평양 지역 사령관(Asia-Pacific Commander-in-Chief)’이 되었고, 니미츠 사령관이 만주, 한반도, 일본, 알래스카를 관장하는 ‘극동아시아 총사령관(General Commander, Far East Asia Region)’으로 임명되었다. 워싱턴에서는 맥아더가 쓸데없이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원하지 않아.”

“중국은?”

“그냥 그대로. 웨드마이어 장군이 맡고 있고.”

“맥아더만 피 봤네?”

빨갱이의 평가에 정 수석차관은 오른손 검지를 펴 보였다.

“한 명 더. 장개석.”

“장개석?”

“일본이 항복했으니까 군정(軍政)을 담당할 부대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의 미군들은 본국으로 돌아갈 거다. 독일을 쳐야 하니까.”

“그래서 맥아더하고 장개석이 피를 본다는 거냐?”

“맥아더는 속이 많이 상하는 선에서 끝나겠지만 장개석은 아마 치명적일 거야. 유럽전선에서의 승리를 핑계로 물자지원도 과격하게 줄어들 테니까. 아마 황하 이북으로 진격은 시도 못할 거다.”

“남북대치로군.”

“그렇지!”

정 수석차관의 대답에 벌레는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거 확실한 오피셜(Official)이냐? 아무리 동맹국이라고는 해도 그렇게 속속들이 알려 주지는 않을 텐데?”

“아까 내가 뭐라고 말했냐?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연구해 낸 추론이라고 했잖아.”

천연덕스런 정 수석차관의 대답에 나머지 셋은 일제히 욕설을 내뱉었다.

“썅! 진짜인 줄 알았잖아!”

“하하하!”

셋의 반응에 웃음을 터뜨리던 정 수석차관은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오랜만에 웃었네. 새끼들아. 비록 ‘뇌피셜(腦fficial)’이기는 해도 근래에 미군 장성들의 인사이동이나 여러 가지 정황들을 기반으로 분석한 거야. 나하고 우리 애들이 이곳에 오기 전까지 월급 받으면서 했던 일이 이거다. 물론 최종보스가 엉뚱한 거에 꽂히면 그거에 맞춰서 기획서 쓰느라 생고생을 했지만… 어쨌거나! 지금 아시아 지역의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가 않아. 그렇기 때문에 스탈린이나 모택동도 예상보다 빠른 움직임을 보일 가능성이 높고, 그래서 너희들이 올라가야 하는 거다. 지금 신규 편성된 사단들이 올라가기는 했는데 이 친구들 본토박이라 공산주의에 대해 많이 호의적이야. 거기에 ‘독립운동가’들이라는 간판이 있으면 프리패스로 들여보낼 수 있어. 막으라는 명령을 받았어도 말이지.”

“5사단이 있잖아? 대구에서 겪은 일로 공산주의라면 이가 갈릴 놈들일 텐데?”

“5사단 하나로 간도가 커버될 것 같냐? 아니, 간도만이 아니라 압록강 국경은 어쩔 건데? 다른 사단은 몰라도 1사단은 반드시 올라가야 해. LA에서부터 열심히 뒤통수 맞은 친구들이잖아.”

정 수석차관의 ‘투 머치 토킹(Too much talking)’에 질린 빨갱이는 정 수석차관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알았다. 알았어. 그러니 이거나 한 잔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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