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0
280화 협상, 귀향 그리고 출항 (1)
항복의 뜻을 밝힌 히로히토는 바로 항복을 알리는 방송을 준비하게 되었다.
가장 먼저 항복 사실을 알게 된 이들은 탑과 천황참모본부를 포위하고 있던 일본군들이었다. 방공탑 옥상에 올라간 히로히토는 마이크를 잡았다.
삐이익!
짧은 하울링(Howling) 소리가 난 다음, 탑 밖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들을 향해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히로히토의 목소리가 퍼져 나갔다.
-짐의 명령이다. 우리는 항복했다. 전원 무장을 해제하라. 다시 말한다. 우리는 항복했다. 전원 무장을 해제하라. 이는 짐의 명령이다.
“어?”
“이게 무슨….”
항복을 명하는 천황의 방송에 병사들이 우왕좌왕하는 것과 달리 고급 장교들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한탄했다.
“졌구나!”
전날 미군의 매우 강력한 폭탄으로 인해 3곳의 도시가 단 한순간에 날아갔고, 뒤이은 야간 소이탄 폭격으로 또 다른 도시들이 잿더미로 변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들이었다.
이미 패전을 직감하고 있던 상황에 확증이 떨어진 것이었다.
히로히토의 명령을 들은 지휘관들은 부하 장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병사들의 무장을 해제시켜.”
“대대장!”
“명령이다. 우리는 졌다.”
“크흐흑!”
‘우리는 졌다.’라는 말에 중하급 장교들은 통곡을 하며 부하들의 무장을 해제시키기 시작했다.
방공탑과 천황참모본부의 탈환을 위해 모여든 병사들의 대다수는 명령에 따라 무기들을 내려놓았지만 항복이라는 상황을 인정하지 못하는 이들도 존재했다.
“도츠게끼(突擊)!”
“천황폐하를 구출하라!”
“덴노헤이까아 반자이(天皇陛下萬歲)!”
군도를 뽑아든 일단의 장교들과 그들을 따르는 병사들이 만세를 외치며 탑을 향해 돌격을 시작했다.
“저것 봐라. 내가 저런 미친놈들이 꼭 나올 거라고 했지? 사격! 있는 대로 갈겨 버려!”
투타타타타타탕! 타타탕! 퐝! 퐝!
벌레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M42기관총부터 시작해 M249와 HK417, 그리고 유탄들이 몰려드는 병사들을 향해 불을 뿜었다.
“아악!”
“컥!”
든든한 방어물에 몸을 숨긴 병사들의 집중사격에 달려들던 일본군들은 순식간에 피범벅이 되어 땅에 쓰러졌다.
3곳의 탑들과 천황참모본부의 방공호 앞에서 비슷한 일들이 벌어졌고, 수많은 일본군들이 헛되이 목숨을 잃은 다음에야 상황은 종료되었다.
한국군과 미군의 삼엄한 경계 속에 일본군들은 무기를 한 곳에 모아 놓고는 고쿄와 해자 사이의 광장에 모였다.
엄폐물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벌판에 일본군들을 몰아넣은 한국군과 미군은 M42기관총들은 물론이고 일본군이 사용하던 1식 중기관총들까지 가지고 와 두터운 감시망을 구축했다.
한쪽에서 무장 해제를 한 일본군들을 모아 감시에 들어가는 동안 다른 쪽에서는 한국군들이 히로히토를 데리고 탑에서 나와 천황참모본부로 향했다.
잔뜩 긴장한 채 천황참모본부로 향하는 길을 지키는 미군들 사이로 히로히토를 데리고 천황참모본부에 들어선 한국군들은 바로 방송실로 향했다.
한국군과 미군 소속 통신병들이 방송 시스템을 점검하고 송출을 준비하는 동안 원 준장은 히로히토에게 한 장의 쪽지를 내밀었다.
“이것은 무엇인가?”
“항복 선언문입니다.”
“짐이 앵무새인가?”
“앵무새는 아닙니다만, 나중에 핑계거리가 없으려면 반드시 거쳐야 할 일입니다.”
원 준장의 말에 히로히토는 거친 손짓으로 항복 선언문을 받아들었다.
선언문의 내용을 살피던 히로히토는 성난 눈으로 원 준장을 바라봤다.
“이걸 지금 짐보고 읽으라고 하는 것인가?”
“예.”
“이걸 읽으면 일본의 황실은 끝장이다.”
“내 알 바 아닙니다.”
“황실을 허수아비로 만들어 무엇을 획책하는 것인가!”
“대정봉환(大政奉還)이 있은 지 80년도 안 되었습니다. 그 전에도 허수아비였는데 무엇이 문제입니까?”
원 준장의 냉소 가득한 대답에 히로히토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큭...크큭… 푸하하하하하!”
한참동안 웃음을 이어가던 히로히토는 눈물을 닦고는 배를 움켜쥐었다.
“꿰맨 곳이 아프군. 어쨌거나 장군의 말이 틀린 것은 없군. 그래… 장군에게 한마디 하고 싶군. 대정봉환을 했어도 어차피 허수아비 신세였다네. 이런들 저런들 허수아비 신세인 것은 마찬가지인데 무엇을 두려워할까?”
씁쓸하게 말을 하던 히로히토는 작게 중얼거리며 마이크 앞으로 걸어갔다.
“그래. 잠시 즐거운 꿈을 꾸었다 생각하자… 허수아비가 사람이었던 잠시의 즐거운 꿈을 말이야….”
마이크 앞에 선 히로히토는 자신을 노려보고 서 있는 한국군과 미군들의 얼굴들을 바라봤다.
화약의 검댕과 먼지가 덕지덕지 묻은 얼굴을 채 씻지도 못한 채 히로히토를 바라보는 병사들과 장교들의 눈에는 적의(敵意)가 가득했다.
“Start.”
미군 통신장교의 명령에 히로히토는 천천히 항복 선언문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옆에서는 종군 카메라맨의 카메라가 항복을 발표하는 장면을 촬영했다.
히로히토의 항복 선언은 전파를 타고 일본 전역과 조선, 중국으로 퍼져 나갔다.
방송을 들은 일본군들의 반응은 세 갈래로 나뉘었다.
첫 번째 부류는 방송을 듣고는 조용히 받아들이는 이들이었다.
방금 전까지 격렬하게 이어지던 총성이 가라앉은 적막한 공간에서 일본군들은 백기를 든 채 다가오는 연합군들의 사자를 맞이했다.
두 번째 부류는 항복이라는 현실에 자포자기를 한 채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 것이었다.
군도를 가진 지휘관들은 할복(割腹)을 했고, 병사들은 침상에 누운 채 턱밑을 조준한 소총의 방아쇠를 발가락으로 당겨 자살을 하거나 품에 안은 수류탄을 격발시켜 자폭(自爆)으로 생을 끝냈다.
세 번째 부류는 현실을 극복할 수 있다고 끝까지 믿는 부류였다.
“단 한 번의 합전(合戰,대규모 전투)으로 승기는 뒤바뀔 수 있다! 단 한 번만 제대로 싸워 이기면!”
이렇게 말하는 이들 대부분은 일본 본토에 주둔하는 이들이었다.
“귀축들의 비겁한 기습은 인정할 수 없다! 이것은 정정당당한 전투가 아니라 테러다! 우리는 인정할 수 없다!”
이렇게 반기를 든 부대는 해군은 히로시마(広島), 육군은 시부야(渋谷)에 모여 총궐기를 했다.
특히나 상황이 심각한 것은 히로시마 시였다.
구레가 원폭으로 날아가고 도쿄 쪽에 있던 소수의 해군 함선들을 제외한 히로시마 주둔 육전(陸戰)부대들과 어뢰정과 같은 초소형 함선들, 그리고 극소수의 항공기들을 보유한 해군들이 궐기를 하고 나선 것이었다.
“천황폐하의 황명(皇命)을 거역할 것인가! 전쟁은 끝났다! 더 이상의 희생은 무용지물(無用之物)이다! 무기를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라!”
히로히토의 동생인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高松宮 宣仁)해군 대좌가 말리고 나섰지만 궐기에 나선 군인들은 노부히토를 히로시마 시 경계 밖으로 쫒아내 버렸다.
“대좌가 비록 덴노의 동생이고 황족이라고는 하나 이는 명명백백(明明白白)한 매국적(賣國的)인 언사(言辭)다! 군율(軍律) 따르자면 즉참(卽斬)해야 할 것이나 덴노의 동생임을 감안하여 추방에 그친 것을 감사히 여겨라!”
노부히토를 쫓아낸 해군들은 항전(抗戰)을 준비한다며 광기에 가득 찬 참극을 벌이기 시작했다.
“전쟁에는 군량이 필요하다! 민가에서 징발하라! 반항하면 모조리 죽여라!”
군량을 징발한다며 히로시마 시 전역의 가옥과 상점을 약탈했고, 거부하는 이들은 모조리 칼로 죽임을 당해야 했다.
“신주를 침략한 귀축양이(鬼畜洋夷)들을 정벌하실 영웅들이다! 그들의 씨를 받는 것을 영광으로 알아라!”
이런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내뱉으며 민가의 여성들이 강간을 당하는 일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군인들이 이렇게 이성을 잃은 것에는 항복을 했다는 충격 외에도 항명(抗命)을 한 지휘관들과 제국주의적 망상과 정치적인 야심으로 항명한 지휘관들과 야합한 정치인들이 병사들에게 다량의 술과 마약을 뿌린 결과였다.
“출정(出征)이다!”
“가미가제(神風)다!”
술과 마약에 취한 병사들은 얼마 안 남은 항공기들을 끌고 자폭공격에 나섰다.
하지만 불과 30여 기에 불가한 자폭 공격대들은 미 해군의 CAP(전투초계비행)에 걸려 모조리 격추되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날 밤, 히로시마에는 1000기의 B-30 폭격기들이 몰려들었다.
3파에 나뉘어 몰려들은 B-30폭격기들은 히로시마 시의 건물들을 벽돌 하나 제자리에 있지 못할 정도로 완벽하게 부숴 버렸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에는 B-17, B-24, B-25 폭격기들이 몰려들어 확인사살까지 해 버렸다.
폭격기들의 융단폭격이 끝나자마자 시모노세키에 있던 미 해군의 함대들이 몰려와 히로시마 항구에 남아 있던 일본군 함선들을 모조리 수장시켜 버리는 것으로 사태는 끝이 났다.
훗날 ‘히로시마 항명 사건’으로 명명(命名)된 미친 사건이었다.
시부야에서 벌어진 일도 비슷했다.
“우리에게는 잘 훈련된 병사들도 있고, 최신(最新), 최강(最强)의 4식 중전차(4式 重戰車)도 있다! 이대로 저 양키들을 도쿄 앞바다로 밀어 버린다! 양키들을 축출한 다음 천황폐하를 구출한다! 이 일이 성공한다면 우리에게는 영광이 가득할 것이다!”
“우오오!”
도쿄 근위3사단 이치야 중장의 외침에 도열한 병사들은 커다란 함성으로 화답했다.
“전군(全軍)! 도츠게끼! 마에!(突撃!前に!)”
이치야 중장의 명령에 도열해 있던 4식 중전차들과 치하 전차들이 앞장서서 달려 나갔다.
근위3사단의 움직임은 바로 상공에 떠 있던 전장감시기(戰場監視機)에 포착되었다.
연락을 받은 미군 지휘관들, 특히나 전차부대 지휘관들은 바로 상급 지휘관들에게 달려갔다.
“공중 폭격만 막아 주십시오! 우리가 끝낼 수 있습니다!”
“자신 있습니다!”
“애들 사기에도 좋은 영향을 줄 것입니다!”
전차부대 지휘관들의 간청에 거버너 준장을 비롯한 미군 장성들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 자식들… 그렇게 손이 근질거렸냐?”
“맡겨만 주십쇼!”
결국 미군 사단장들은 니미츠 사령관에게 재가를 요청했다.
요청을 받은 니미츠 사령관은 고민을 하던 끝에 결론을 내렸다.
“그럼 제대로 끝을 내보라고 해. 그리고 각 사단장들은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준비 단단히 하고.”
“알겠습니다.”
니미츠의 허가가 떨어지자 시부야 인근에 있던 미군 부대 소속의 모든 전차들이 근위3사단의 전차들을 잡기 위해 몰려들었다. 그 광경을 보던 송 소장은 이병석을 돌아봤다.
“우리도 낄까요?”
“제1독립기갑대대만 가도 정리될 상황일세. 오랜만에 미국 친구들 기 좀 살려 줘야지.”
이병석의 말에 송 소장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우리 애들은 잠깐 쉬라고 하겠습니다.”
독일의 4호 전차의 설계도를 받아 생산한 4식 중전차와 퍼싱 전차의 대결은 일방적이었다.
자기들 말로는 중전차(重戰車)라고 우기지만 실제로는 중전차(中戰車)에 불과한 4식 전차는 제대로 만든 중전차(重戰車)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퍼싱 전차들은 압도적으로 두터운 전면장갑을 내민 채 원거리에서부터 하나씩 4식 중전차들을 격파해 나갔다.
4식 중전차도 상대가 안 되는 상황에서 치하가 겪은 상황은 더욱 안 좋았다.
치하의 주포는 퍼싱의 후면 엔진룸을 제외한 그 어느 곳의 장갑도 관통하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자포자기한 치하의 전차장은 퍼싱의 측면에 몸통박치기를 시도했지만 물량에서까지 밀린 상황에서 그런 시도는 대부분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근위 3사단의 도전은 사단의 전멸과 사단장의 자결로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