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8
258화 본토진공(本土進攻) 그리고 내홍(內訌) (4)
박헌양과 그의 동지들의 회동이 있고 10일 후부터, 조선 전역(全域)에 벽보가 붙고 길에 삐라(비라,ビラ,전단지)가 뿌려지기 시작했다.
-反戰(반전)! 平和(평화)!
-朝鮮半島(조선반도)는 이미 解放(해방)되었다!
-他國(타국)을 侵掠(침략)하여 利益(이익)을 得(득)하려는 帝國主義者(제국주의자)와 資本家(자본가)의 計略(계략)에 희생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들이다!
-저 帝國主義者(제국주의자)와 資本家(자본가)의 走狗(주구, 앞잡이)들의 巧言令色(교언영색, 좋은 말과 꾸민 낯)에 附和雷同(부화뇌동, 생각 없이 행동을 따라 함)지 말라!
-募兵(모병)에 응하지 말라! 帝國主義者(제국주의자).資本家(자본가).파시스트들이 일으킨 전쟁의 한낱 消耗品(소모품)으로 利用(이용)되지 말라!
“썅! 무슨 놈의 한자가 이리도 수두룩 빽빽하냐….”
“그러게 말이다….”
문제의 벽보와 삐라를 처음 본 빨갱이와 벌레는 인쇄면을 빽빽하게 채운 한자들을 보며 욕부터 내뱉었다.
“훗!”
반면, 정 수석차관은 냉소를 지었다.
“그 삐딱한 웃음의 의미는 뭐냐 자본주의자의 냉소냐 ”
“내용 자체가 중2병 가득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 때문에 웃은 것 같아 보이진 않는다만 ”
벌레와 빨갱이의 물음에 정 수석차관은 팔짱을 낀 채 피식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리 봐도 이 양반들의 지적허영(知的虛榮)은 드라마하고 똑같은 것 같아서. 아, 빨갱이 말마따나 중2병인가 ”
“그건 또 무슨 씨나락 까먹….”
정 수석차관의 말에 반박을 하려던 빨갱이는 말을 멈추고는 문제의 삐라와 벽보를 다시 한 번 살폈다.
다시 한 번 삐라와 벽보를 살피던 빨갱이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그러네. 이 조선 땅에 있는 프롤레타리아 가운데 한자를 읽을 수 있는 이들이 몇이나 될까… 거기에 더해 제국주의네, 자본가네, 뜬구름 잡는 소리만 죽죽 써 갈겨놨으니… ‘난 이만큼 똑똑하다! 이 무지렁이들아! 다 나를 우러러 볼 지어다! 그리고 내 말에 따라라!’하고 떠드는 꼴이로군. 차라리 비둘기라도 한 마리 그려 넣을 것이지. 하아~”
한숨을 내쉬는 빨갱이와 피식거리는 정 수석차관과 달리 벌레는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래도 모병에 영향을 주기는 줄 거다. 전쟁터라는 것이 내 목숨 걸고 남의 목숨 따는 곳이라는 건 확실하니까 말이지. ‘네 목숨 걸어라!’ 그러면 고민을 하게 되는 것이 인간 본성이니까.”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동물의 본성이겠지.”
또 다시 벌레와 빨갱이의 만담이 시작되려할 때. 정 수석차관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모병제를 하는 거야. 그리고 훈련병들에게까지 착실하게 급여가 지급되는 것이고… 지금 조선에는 허공에 울리는 구호보다는 주머니 속에서 짤랑거리는 동전이 더 급한 때니까.”
“그렇기는 하지.”
정 수석차관의 말처럼 벽보와 삐라가 돌기 시작했어도 모병소를 찾는 이들은 그다지 줄지 않았다. 완전히 경제가 얼어붙은 조선 땅에서 칼 같이, 그리고 풍족하지는 않지만 모자라지도 않고 잘하면 살짝 남을 정도의 급료가 나오는 곳은 군대와 경찰 예비대뿐이었다.
“상황이 그다지 만족스럽지가 않소. 다들 이 조선반도의 공산혁명을 위한 의지가 약해진 것 아니오 ”
조선공산당 재건파의 비밀안가의 회의실에서 박헌양은 둘러앉은 간부들을 닦달했다.
박헌양의 닦달에 간부들은 자라목이 되었다.
잔뜩 주눅이 들어 박헌양의 눈치만 살피던 간부들 가운데 하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벽보와 삐라만으로는 그 효과가 미비합니다. 강력한 실력행사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강력한 실력행사 저 미제의 앞잡이인 임정을 뒤엎을 무력이 준비되었소 ”
“그건 아닙니다만….”
“그런데 실력행사를 하자고 동무, 동무는 방금 말한 것이 엄청난 해당행위(害黨行爲, 당을 해롭게 하는 일.)임을 알고 있는 것이오 ”
순식간에 위기에 몰리자 간부는 필사적으로 말을 이어갔다.
“제 말은 무력투쟁을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시위를 하자는 것입니다!”
“시위 ”
“모병소(募兵所) 앞에서 반전시위(反戰示威)를 하는 것입니다!”
“임정이 가만히 있을까 ”
“임정은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물리력을 행사하지 않는 이상 임정은 우리를 어쩌지 못합니다. 만약 임정이 먼저 물리력을 행사한다 이 조선 땅에 있는 수십만의 공산당원들이 들고 일어날 겁니다! 그러면 바로 혁명입니다!”
간부의 말에 박헌양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거 좋군! 시위대를 조직하시오!”
“알겠습니다!”
박헌양이 결정을 내리자 간부들은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시위를 통한 실력행사가 결정되자 이후의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지금 벌일 시위도 그렇고 앞으로 있을 선전전을 생각하면 문화선전단(文化宣傳團)의 조직은 필수요. 지금까지 얼마나 진행되었소 ”
“극단 고협이 적극 협조하기로 했습니다.”
해당 임무를 맡은 간부의 보고에 박헌양은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고협 그 사람들 친일하지 않았었나 ”
“그전부터 사회주의 낙원을 동경했었다고 합니다. 순간적인 오판(誤判, 잘못된 판단)으로 친일을 했던 것을 반성하고 있다고 전해왔습니다. 여기….”
간부는 옆에 있던 서류철에서 몇 장의 문건들을 꺼내 박헌양에게 내밀었다.
“고협 간부들의 자아비판서(自我批判書)입니다. 자신들의 피로 지장(指章)까지 찍었습니다.”
“흐음….”
“극단장인 심영은 조선에서 수위를 다투는 명배우입니다. 그가 앞장선다면 많은 인민들이 호응을 할 것입니다.”
“좋소. 고협을 중심으로 문화선전단의 조직을 최대한 빨리 끝내시오.”
“알겠습니다.”
훗날 임정과 공산당 사이의 분쟁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하게 되는 사안을 결정한 박헌양은 다음 의제로 넘어갔다.
“그리고 대구의 상황은 어떠하오 ”
“대구에 내려간 이들이 인편으로 보낸 보고서에 따르면 어제 대구 인민들 사이로 말을 퍼뜨릴 준비가 끝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대구에 있던 동무들이 무기들을 계속해서 모으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소 얼마나 ”
“아직까지는 아리사카 소총 80정과 경기관총 10정. 그리고 탄약 약 1만 발 정도지만 전장 복구 현장에서 계속 입수를 시도하고 있다고 합니다.”
“최대한 많이 확보하라고 전하시오. 공산혁명의 최종과정은 무력혁명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오.”
“알겠습니다.”
* * *
사흘 뒤부터 경성과 평양의 모병소 앞에서 공산당원들의 시위가 시작되었다.
각종 반전구호와 반제국주의, 반자본주의 문구가 써진 현수막과 팻말들을 든 시위대가 요란한 북소리와 함께 구호를 외쳐댔다.
“반전! 평화!”
“반전! 평화!”
“군인은 살인자다! 살인자가 되지 말자!”
“군인은 살인자다! 살인자가 되지 말자!”
“반전! 평화!”
“반전! 평화!”
요란하게 구호를 외치던 시위대는 모병소 입구로 자원자가 다가올 때마다 목소리를 높였다.
“군인은 살인자다!”
“집에 남은 가족들을 생각하라!”
“자본가들의 앞잡이가 되지 말자!”
결국, 모병소 입구에 진을 친 공산당 시위자들의 서슬에 눌려 적지 않은 지원자들이 길을 돌려 집으로 돌아갔다.
* * *
상황이 이렇게 되면서 모병에 응하는 이가 줄어들게 되었고, 이를 보고받은 임정의 각료들과 군부인사들은 좌우를 막론하고 한 목소리로 ‘개새끼들!’이라고 외치게 되었다.
“공산당에 대한 제재가 필요합니다!”
“맞아요! 이러다가는 국군건설에 들어갈 시간과 비용이 초과하게 됩니다!”
군부쪽 인사들이 소리 높여 공산당 제재를 외쳤지만 행정부 쪽 각료들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행정부 각료들의 대표로 내무부장이자 경찰예비대 대장인 조구완이 난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것이 어렵습니다. 우리가 자유민주주의를 천명한 이상 집회, 결사의 자유를 원칙적으로 막을 수는 없습니다.”
“집회와 시위에 관한 포고령이 있지 않소이까 ”
“집회나 시위를 벌이기 전에 미리 신고하도록 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 과정에서 불허가 되는 경우는 현재 우리 임정의 인원들이 거주하는 조선호텔의 내부나 주요 공공기관의 내부일 경우입니다. 저들은 지금 그 규칙을 지키면서 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먼저 제재를 가한다면 저들은 그것을 빌미로 우리를 공격할 것입니다.”
조구완의 대답에 이병석이 분통을 터뜨렸다.
“이런 빌어먹을! 차 떼고 포 떼고 뭐하자는 것인지!”
솟구치는 화를 못 이기고 씩씩거리던 이병석이 김 주석에게 큰 목소리로 건의를 했다.
“그냥 밀어 버립시다! 우리에게는 잘 무장된 병력이 있습니다. 저깟 빨갱이 놈들은 그냥 전차로 밀어 버리면 되는 겁니다! 이럴 때는 나치들과 같은 과감한 움직임이 필요해요!”
“또 나온다… 저 빌어먹을 놈의 나치 타령… 썅, 이 자리에 벌레나 빨갱이가 있었어야 했는데….”
이병석의 과격한 발언에 작게 투덜거리던 정 수석차관은 목을 축이고는 회의에 끼어들었다.
“이병석 육군참모총장님. 이 조선 땅에 공산당원이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적게 잡아 20만, 많게 잡으면 50만 이상입니다. 그들이 무력투쟁으로 나서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시는 것은 아니시겠죠 ”
“무력투쟁 그놈들이 무슨 무기가 있어서! 기껏해야 아리사카로 무슨 일을 하겠어 ”
“바로 저 황해 건너 누가 있는지 잊으셨습니까 모택동이 있습니다. 비록 장개석이 버티고는 있다지만 모택동이 가만히 있을까요 한줌밖에 안 되는 우리 해군을 일본이나 유럽이 아닌 황해에 다 쏟아 부으실 겁니까 ”
“빌어먹을! 아오!”
정 수석차관의 지적에 이병석은 답답한 가슴을 두들기며 분통을 터뜨렸다.
그런 이병석의 모습을 보며 정 수석차관은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내무부장님의 말씀처럼 공산당에게 빌미를 줘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그것을 막기 위해 주석님께서 부산의 점령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대구에 가셨던 것입니다.”
대구의 점령이 끝나고 한미연합군의 주력이 부산과 그 일대로 진격하자 김 주석은 열차를 타고 바로 대구로 달려갔다.
살던 집과 일하던 직장을 폭격으로 잃어버린 대구주민들을 수용한 수용소에 도착한 김 주석은 연단에 오르자마자 모여든 대구주민들을 향해 절부터 올렸다.
“아이고, 주석님!”
난데없는 큰절에 모여든 주민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절을 한 김 주석은 연단에 무릎을 꿇고 앉아 연설을 시작했다.
연설의 시작은 사죄의 말이었다.
무릎을 꿇은 김 주석은 대구주민들을 향해 폭격에 대해 사죄를 하고, 왜 그래야 했는지 설명을 했다.
약 10분간 이어진 연설에서 김 주석은 폭격으로 파괴된 대구를 재건하는 것에 최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말로 끝맺음을 한 김 주석은 힘겹게 일어나 주민들에게 걸어갔다.
모여든 주민들 가운데 많은 이들과 악수를 나눈 김 주석은 다시 한 번 미안하다는 말을 하며 고개를 숙이고는 군부대를 위문하기 위해 대구를 떠났다.
“무릎은 괜찮으십니까 ”
동행한 정 수석차관의 물음에 김 주석은 싱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리는 좀 저리네만 괜찮네. 그깟 몇 분 동안 무릎 꿇어서 대구 주민들의 화가 풀린다면 문제 될 것이 무엔가 필요하면 석고대죄(席藁待罪)라도 해야 하는 것이 정치 아니겠나 ”
“그건 그렇습니다.”
“다음 일은 확실하게 준비가 되었겠지 ”
“예.”
“효과가 있겠나 ”
김 주석의 물음에 정 수석차관은 확신에 찬 표정으로 대답했다.
“예.”
김 주석의 방문 이후 대구에는 대대적인 재건사업이 벌어짐과 동시에 막대한 양의 식량이 공급되기 시작했다.
복구 작업에 투입할 노동자들은 피해지역 출신들을 우선으로 뽑았고, 3달러의 일당이 매일 지급되었다. 그리고 수용소에 있던 이들에게는 가족 단위로 같이 생활할 수 있게 소형과 중형 텐트, 간단한 주방도구들이 공급되었고, 의복과 밀가루, 스팸 등의 식자재는 물론이고 미군 군의관들을 초빙해 정기적인 건강진단도 진행되었다.
다행히 폭격을 피한 지역의 거주민들에게도 식량이 공급된 것은 마찬가지였다.
집은 남았지만 일터가 날아간 이들이 대다수였던 대구 주민들은 그 덕에 굶주림을 면할 수 있었다.
당시 대구에 거주했던 이는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왜정시대와 그 이후 70년대가 될 때까지를 통틀어서 그때만큼 잘 먹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