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6
236화 지름길(Shortcut)작전 (23)
“장간교 ”
“그렇습니다. 지금 저 소리는 일본군이 한강 인도교와 철교를 끊은 소리일 것입니다.”
“현장에 가 보도록 하지.”
오 중령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벌레가 말을 덧붙였다.
“여기서도 확인 가능합니다.”
“응 ”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오 중령은 벌레를 보고는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자네들이었지. 여기서 바로 확인 가능한가 ”
“옥상으로 가시면 됩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옥상으로 올라온 오 중령과 장교들은 바로 영상을 확인했다.
영상 속의 한강 인도교와 한강 철교는 허리부분이 동강나 버려 있었다.
“흠… 몇 야드나 날린 거지 ”
“한강 중심부 약 400m는 날아간 것 같습니다.”
영상을 확인한 오 중령은 벌레를 돌아봤다.
“여기서 한반도로 통신 가능하지 ”
“가능합니다.”
오 중령은 바로 한반도와 통신을 해서 공병장교를 요청했다.
한강 다리들이 날아갔다는 소식을 들은 한반도에서는 미군에게 연락을 하겠다는 답신을 전달했다.
다리가 끊어졌지만 벌레 일행이나 오 중령, 한반도의 지휘부 모두 별다른 걱정을 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광복군 출신들이나 21세기 출신들이나 할 것 없이 가장 익숙한 지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수송선 3척 분량의 장간 조립교와 부교가 이미 도착해 있던 상황이었다.
“공병들이 오면 좀 더 정확하게 계산이 가능하겠지.”
“그렇습니다.”
“외곽경계팀의 통신입니다.”
대화를 나누던 통신병 하나가 벌레에게 무전기를 내밀었다.
무전기를 건네받아 보고를 받은 벌레가 오 중령을 바라봤다.
“몽인 여운규 선생님과 그 동지들이 아래에 와 계시다고 합니다. 지휘관을 찾고 있다는데 만나시겠습니까 ”
“여 선생님이 당장 내려가야지!”
* * *
“전투가 끝난 것 같습니다. 선생님!”
“그런 것 같군.”
한국군과 일본군이 전투를 벌이던 곳에서 조금 떨어진 안국동의 한 호떡집.
호떡집 2층에서 창밖을 바라보던 여운규는 젊은 동지의 말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여운규와 그의 동지들이 총독부 청사로 향할 때, 주변 건물에 숨어있던 이들이 슬금슬금 고개를 내밀고 밖을 살피고 있었다.
빵! 빠아앙!
요란한 경적음과 함께 일단의 차량들이 거칠게 달려오자 여운규를 비롯해 거리로 나왔던 이들 모두가 옆으로 비켜섰다.
사람들이 모두 다 비킨 거리를 빠르게 지나가는 차량들의 안테나에는 태극기들이 펄럭이고 있었다.
“선생님, 진짜로 우리 군이 온 것 같습니다.”
“그런 것 같으이. 그런데 저들이 어디로 가는 것 같은가 ”
“방향을 보면 종로경찰서 같습….”
말이 끝나기도 전에 트럭들이 달려간 방향에서 총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탕! 타타탕! 탕!
“에그머니!”
“피해라!”
총성이 들리자마자 거리로 나왔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건물들 안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건물 안으로 피신을 했던 여운규와 그의 동지들은 밖의 상황에 귀를 기울였다.
총성이 가라앉자 여운규가 결심을 하고는 명령을 내렸다.
“우선 종로경찰서로 몇 명이 가서 상황을 좀 알아보도록 하고. 나머지는 나와 함께 총독부 청사로 가세나.”
“알겠습니다, 선생님.”
여운규가 결정을 하자 젊은 청년들 셋이 종로청사로 향했고, 나머지는 여운규와 함께 총독부 청사로 향했다.
총독부 청사와 시청을 연결하는 대로와 그 인근지역에서는 전장정리가 한창이었다.
소총을 가로 멘 병사들이 힘을 모아 일본군들의 시체를 치우고 버려진 총기들과 화기들을 수거하고 있었다.
“정지! 신분을 밝혀라!”
외곽에서 경계를 서던 병사의 외침에 걸음을 멈춘 여운규는 병사를 향해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나 여운규요! 여기는 내 동지들이고! 어제 이곳에 있었던 지휘관이라면 나를 기억할 것이오! 좀 불러 주시오!”
“거기서 잠시 기다리시오!”
병사들이 경계를 늦추지 않는 가운데 한명이 들고 있던 SCR-536으로 보고를 했다.
잠시 후, 보고를 받은 벌레 삼총사와 오 중령이 여운규가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반가이 인사를 나눈 후, 군인들은 여운규 일행을 총독부 청사 내부로 안내했다.
1층 대형 로비에 누워 있는 전사자들의 유해를 본 여운규는 머리에 쓰고 있던 중절모를 벗어 가슴에 얹고는 고개를 숙여 묵념을 했다.
그 모습에 뒤따라 온 여운규의 젊은 동지들도 고개를 숙여 묵념을 했다.
회의실에서 오 중령과 여운규는 앞으로의 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1시간여 동안 이어진 회의 끝에 여운규가 이끄는 이들은 치안보조대가 돼서 우선 헌병대의 임무를 돕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본대가 도착하고 임정의 각료들과 행정조직이 도착하면 여운규가 이끄는 이들 가운데 젊은이들은 원하면 군에 지원할 수 있으며 가산점을 주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기동대대가 도착하면서 한국군과 미군이 장악한 지역은 총독부 청사와 관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총독부 청사에 잡혀 있던 경무총감부(警務總監部)의 고급 간부들이 줄지어 종로경찰서 유치장으로 끌려 들어갔다.
걸어서 또는 차량을 타고 분대 단위로 흩어진 한국군과 미군들은 착실하게 주변을 수색해 나갔다.
작은 태극기를 팔에 감은 여운규의 조직원들이 그들과 함께 이동하면서 안내를 함과 동시에 주요 건물의 벽과 길거리 게시판에 벽보들을 붙였다.
벽보는 두 종류였다.
-임시정부 포고령 1호. 적성자산과 치안유지에 관하여.
-임시정부 포고령 2호. 대한민국 국군 지원요강.
슬금슬금 길거리에 나와 상황을 살피던 사람들이 하나둘 벽보로 몰려들었다.
벽보의 내용을 읽으며 사람들은 서로의 의견을 교환했다.
“‘사적(私的)으로 일본인들과 친일파들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을 엄금한다.’ … 이게 무슨 소리여 ”
“네놈 마음대로 몽둥이 들고 나가서 일본놈들 후려 패지 말란 소리다.”
“스기모토 그 개새끼, 명도 기네. 적성자산에 대한 약탈 금지면…. ”
“왜놈들 가게랑 집들 그냥 놔두라는 것이지, 뭐. 친일파도 추가되었네.”
“뭐여 지금 하늘이 뒤집어졌는데 저 잡것들을 그냥 놔두라는 것이여 임정이 돌았구먼!”
“여러분 그게 아닙니다!”
조금씩 흥분하던 사람들은 뒤에서 들리는 말에 고개를 돌렸다.
기동대대가 타고 온 짚차 보닛에 한국군 장교가 올라가 확성기로 사람들에게 설명을 했다.
“여러분 그게 아닙니다! 임정 역시 여러분들이 받은 고통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고통을 풀겠다고 마구잡이로 몽둥이질을 하면 나중에 뒷말이 나올 수 있기 때문에 막은 것입니다!”
“뒷말 뒷말이 나오면 또 패버리면 되는 것이지!”
“그렇지! 사흘에 한 번씩 패버리면 지들이 어쩔건데!”
군중들 사이에서 험악한 말들이 튀어나오자 장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들, 손자 대까지 계속 몽둥이질을 물려주실 겁니까!”
그 말에 흥분하던 사람들이 멈칫했다.
장교는 목소리를 차분하게 가라앉히고는 말을 이어갔다.
“조만간 임정이 조선 땅에 돌아옵니다. 주석님들을 비롯해 임정의 여러 선생님들이 오시면 친일파들에 대해 엄정한 재판을 하실 것입니다. 그때까지만 참으시면 됩니다! 그때까지만!”
“광화문 한복판에서 조리돌림을 한다면 내 참지!”
“조리돌림만으로 광화문 한복판에서 목을 매달아 버려야 해!”
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졌지만 그것은 반대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친일파들에게 가할 형벌에 대한 의견교환 때문이었다.
“조용! 잠시만 조용히 해 주십시오!”
사람들을 조용히 시킨 장교는 다시금 말을 이어갔다.
“일본인들에 대한 사적 폭력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찰과 군인 특히 고등경찰과 헌병들은 죗값을 치러야만 합니다. 하지만 그거 역시 마찬가지로 재판을 거쳐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재판을 치르기 위해서는 우리 조선이!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저와 같은 국군들이 미군과 함께 전투를 벌이고 있는 것이고 말입니다! 만약 일본놈들을 족쳐야 내 속이 풀리겠다 싶으신 분들은 군에 지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군 ”
“군에 ”
장교의 말에 사람들은 두 번째 벽보로 시선을 돌렸다.
국군 모집요강의 내용을 보던 사람들이 가장 시선을 잡아끌던 것에 관해 질문을 던졌다.
“뭐냐, 급료도 준다는 것이 사실이오 ”
“급료, 드립니다!”
“정말 딸라로 주는 것이오 ”
“정말 딸라로 드립니다! 망할 왜놈 돈으로, 아니면 조선총독부에서 찍어 낸 돈으로 드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
장교의 말에 사람들, 특히 젊은 청년들의 눈이 반짝였다.
대충 사람들이 이해했다고 판단한 장교는 짚차에 올라타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장교가 사라지고 난 다음, 사람들은 벽보에 다닥다닥 달라붙어 꼼꼼히 읽기 시작했다.
사정은 벽보가 붙은 곳마다 대동소이(大同小異)했다.
한국군 장교와 병사들이 나서서 벽보의 내용을 다시 한 번 설명을 했고, 사람들은 들고 있던 몽둥이를 내려놓았다.
한편,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일본인들과 친일파들은 집에 틀어박혀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그날 저녁 6시.
퍼싱 전차들을 선두에 세운 대한민국 1사단이 당당하게 서울로 들어섰다.
의정부와 미아리를 지나 총독부 청사 앞까지 오는 동안 수많은 조선인들이 거리에 몰려나와 그들을 환영했다.
“만세에!”
“만세에!”
“대한민국 만세!”
사람들의 만세소리가 하늘을 울리는 가운데 1사단은 경성 시청 앞까지 진출해 멈춰 섰다.
“어서 오십시오.”
“애썼다. 정말 애썼어.”
이병석을 시작으로 총독부에 들어선 한국군 지휘부 장성들은 총독부 청사 점령을 성공시킨 병사들을 크게 치하하고는 청사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청사 안으로 들어서던 이병석과 지휘부들은 걸음을 멈췄다.
로비 한쪽에 놓인 테이블에는 테극기로 감싼 유골함들이 쭈욱 늘어서 있었다.
유골함 위에는 죽은 이들이 쓰고 있던 철모가 놓여 있었다.
이병석을 비롯한 최고지휘부는 유골함들을 향해 경례를 했다. 경례를 끝낸 이병석은 벌레 삼총사를 바라봤다.
“벌써 화장까지 끝낸 건가 ”
“날이 점점 더워지고 있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런가 모실 곳이 문제겠군.”
“국립묘지가 정해지기 전까지, 히로히토가 항복문서에 서명을 하는 것을 보기 전까지 전사자들의 유골은 이곳에서 지내게 하고 싶습니다.”
“이곳에 ”
가볍게 의문을 표하던 이병석은 곧 고개를 끄덕였군.
“최고의 장소로군. 그렇게 하도록 하지.”
* * *
1사단 본부가 총독부 청사에 똬리를 틀자 곧 여기저기에서 찾아오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병석은 여운규 한사람, 아니면 여운규가 보증하는 이들을 제외한 그 누구와도 만남의 자리를 갖지 않았다.
“오이밭에서는 짚신을 고쳐 신지 말고, 오얏나무 아래서는 갓끈을 고쳐 쓰지 말라는 이야기가 있지.”
이병석의 말에 모여 있던 장교들은 모두 피식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뉴욕에서 봤고, 그 뒤로도 틈날 때마다 보게 만들어서 이제는 거의 노이로제에 가깝지만, 우리 임정은 승전도 중요하지만 정권장악도 중요하다. 다들 명심하고 있지 ”
“옛!”
“쓸데없는 인간들하고 접촉은 삼가도록 해. 특히 빨갱이 놈들하고는 절대 마주하지 말도록. 아, 우리 쪽에 하나있는 빨갱이는 빼고.”
“하하하하!”
이병석의 농담에 장교들은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예상보다 상황이 잘 풀린 덕에 회의실 안은 여유로운 공기가 가득했다.
그렇게 회의가 이어지던 가운데 회의실 문이 열리고 이병석의 부관이 다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부관이 귀에 속삭이던 말을 들은 이병석은 크게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우 공(公)이 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