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4
224화 지름길(Shortcut)작전 (11)
임정에서 보낸 밀정의 말을 믿고 여운규는 조용히 동지들과 연락해 소문을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채병석과 접촉을 해 무기 조달에 관해 약속을 받아냈다.
그렇게 바쁘게 보내고 있을 때, 일본을 오가는 이들을 통해 일본의 주요 도시들이 폭격을 받았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소문을 들은 여운규는 무릎을 치며 반색을 했다.
“드디어 때가 왔구나! 해방의 때가 왔어!”
하지만 그 뒤로 한 달이 넘어가는 동안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연합군의 상륙이 시작되자마자 바로 봉기를 할 채비를 갖춘 채 기다리던 여운규의 동지들도 점점 기운이 빠져 나갔고, 회의적인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동지들의 이상을 느낀 여운규는 계속해서 밀정을 닦달했지만 밀정 역시 어깨를 으쓱할 따름이었다.
오늘 아침에도 다락에 숨어있던 밀정과 아침을 함께 하면서 여운규는 같은 이야기를 반복했다.
“연합군은 언제 오는 것인가 ”
“자세한 일정에 대해서는 특급기밀이었던지라 저도 모릅니다.”
“정말 오기는 오는 것인가 ”
“분명히 옵니다. 제가 출발하기 전까지도 본토진공을 위해 병력들이 모이고 수송선들이 모이고 있었습니다.”
“그 본토(本土)가 조선반도인 것은 확실한 것인가 ”
“예. 확실합니다.”
“너무 늦으이… 너무 늦어….”
매일 아침, 다락에 숨어있던 밀정과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닦달을 하는 여윤구였고, 난처한 얼굴로 같은 대답을 반복하는 밀정이었다.
“선생님! 선생님!”
밖에서 여운규를 찾는 소리에 밀정은 후다닥 다락으로 몸을 숨겼고, 옷매무새를 정비한 여운규가 밖으로 나가 자신을 찾는 이를 맞이했다.
“응 손 군 아닌가 아침부터 무슨 일인가 ”
다급한 목소리로 자신을 찾은 이가 손기정임을 안 여운규는 자신을 찾은 연유를 물었다.
여운규의 물음에 손기정은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선생님! 왔습니다! 왔어요!”
“누가 왔… 설마!”
“맞습니다! 선생님! 연합군이 원산에 상륙하고 있다고 합니다!”
손기정의 말에 여운규는 버선발로 뛰어나가 손기정의 손을 붙잡았다.
“정말인가!”
“아침에 출근했는데 일본인 간부들과 직원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손기정이 근무한 곳은 조선저축은행.
소문이 가장 빠른 곳 가운데 하나였다.
바로 그 순간.
투다다다다다다.
요란한 소음과 함께 수많은 헬리콥터들이 두 사람의 머리 위를 지나갔다.
익숙한 소음에 다락에 숨어있던 밀정이 밖으로 튀어나왔다.
머리 위를 가로지르는 헬리콥터들을 보며 밀정이 소리를 질렀다.
“야호! 드디어 왔구나! 선생님, 왔습니다!”
“저 이상한 비행기들이 연합군이란 말인가 ”
“헬리콥터라고 부르는 것들입니다. 저 정도의 수라면 적어도 1천은 타고 있을 겁니다!”
“1천 경성을 공략하기에는 너무 적은 것 아닌가 ”
여운규가 의문을 표하고 있을 때, 밀정은 헬기들이 향하는 방향에 있을 중요 시설들이 무엇인지 열심히 기억을 더듬었다.
잠시 그렇게 기억을 더듬던 밀정이 여운규의 팔을 붙잡았다.
“선생님! 저들은 지금 총독부를 장악할 목적인 겁니다!”
“총독부를 아!”
왜 총독부인가를 생각하던 여운규는 외마디 감탄사를 내뱉었고, 그런 여운규의 모습에 밀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 갔다.
“이 조선반도의 가장 중요한 기밀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저들의 임무는 그 기밀들을 확보한 채 본대가 올 때까지 버티는 것! 그렇다면 곧이어 제대로 된 부대들이 경성으로 밀고 내려올 것이라는 말입니다!”
밀정의 말에 여운규는 서둘러 방으로 돌아가 겉옷을 챙겨 들었다.
“그렇다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손 군! 미안하지만 동지들에게 연락을 좀 해 주게! 지금은 자네 발밖에 믿을 것이 없어!”
“알겠습니다!”
손기정이 힘차게 대답하는 모습에 옆에 서있던 밀정이 주의를 주었다.
“조심하십시오! 일본 경찰들이 독이 바짝 올랐을 겁니다! 무조건 피해서 움직이십시오!”
“알겠소이다!”
힘차게 대답을 한 손기정은 대문을 빠져나가 모습을 감추었다.
겉옷을 챙겨 입고 지팡이까지 손에 쥔 여운규가 밀정을 돌아봤다.
“우리도 가지!”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다락으로 돌아간 밀정은 가지고 온 트렁크의 바닥판을 들어냈다.
잘 위장된 바닥판이 치워지자 그 안에는 방탄조끼와 상부와 하부가 분리된 SSK, 다량의 탄창들, 콜트 45와 여분의 탄창, 마지막으로 군복이었다.
서둘러 군복으로 갈아입고, 방탄조끼부터 시작해 모든 장비들을 착용하고 SSK까지 결합해 손에 든 밀정은 밖으로 나와 여운규에게 가볍게 목례를 했다.
“안전을 위해 선생님은 당분간 이곳에 머물러 주십시오. 그동안 머물게 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자유의 날이 올 때 다시 뵙겠습니다.”
“이보게! 조 군! 조 군!”
목례를 하자마자 바로 길거리로 사라진 밀정을 보며 여운규는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이 친구야… 이름이라도 알려 주고 가지 그랬나 겨우 성만 알려 주고 가는 것인가 ”
* * *
한편, 총독부 청사 상공에 도착한 헬리콥터들은 두 패로 나뉘었다.
벌레와 빨갱이 일행을 태운 헬리콥터는 총독부 청사로 향했고, 또 다른 그룹의 헬리콥터는 총독관저로 몰려갔다.
“Touch down!”
“내려!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 한다!”
헬리콥터가 청사의 옥상에 내려앉을 때마다 병사들이 우루루 밖으로 뛰어내렸다.
날일(日)자를 눕혀 놓은 것과 같은 모습을 한 청사 옥상의 동쪽에는 빨갱이와 그의 부하들이 서쪽에는 창기와 그가 이끄는 부하들이 착륙했다.
남쪽 옥상에는 벌레와 그이 부하들이 모여 전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여기는 창! 전원 도착! 진입 시작한다! 이상!
-여기는 레드! 우리도 진입 시작한다! 이상!
“여기는 벌레, 손님 맞을 준비를 하겠다. 행운을 빈다, 이상.”
-여기는 창. 행운을 빈다, 이상.
-여기는 레드. 행운을 빈다. 이상.
짧게 대화를 끝낸 벌레는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곧, 종로경찰서의 순사나리들은 물론이고, 용산에서 단체손님들이 올 거다! 손님 맞을 준비해!”
“알겠습니다!”
“박격포 제대로 설치해! 용산 방향에 집중 설치하도록! 중앙 첨탑에 관측수 올라가!”
“알겠습니다!”
“바로 아래층이 정리 되는대로 저격수 내려가고! 저 모퉁이 꼭짓점 부근에 빼먹지 말고 기관총들 배치해! 사선(射線)과 화망을 고려하는 것 잊지 말고!”
“알겠습니다!”
“예비탄약들은 중앙 통로의 안전이 확보되는 대로 바로 갖다 놓고!”
“알겠습니다!”
벌레의 명령을 들으며 부하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후속(後續)하는 헬기들이 내려놓는 탄약과 물자들을 정리하고, 방어진지를 구축하는 동안 밖을 내려다보던 벌레가 혀를 찼다.
“쯧! 익숙하게 보이던 것이 안 보이니 되게 낯설군!”
그가 말한 익숙한 것은 광화문이었다.
일본이 총독부청사를 건설하면서 시야를 가린다는 이유로 광화문을 치워버렸다.
이후 1968년에야 원래 있던 곳 근처에 다시 건축되었고, 21세기가 되어서야 그나마 제 자리를 찾은 건축물이었다.
“뭐, 앞이 뻥 뚫려 잘 보이기는 하다만은… 드론 띄워! 용산 방향을 중심으로! 아! 종로 경찰서는 확실히 살펴라!”
“알겠습니다!”
벌레의 명령을 받은 부하들이 드론들을 하늘로 띄웠을 때, 아래쪽에서 총성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탕! 타탕! 타타타탕!
아래쪽에서 울리기 시작하는 총성에 벌레의 인상이 굳어졌다.
“의외로 많이 쏴 대는데 경비 병력이 예상보다 많았나 흐음….”
잠시 고민을 하던 벌레는 자신이 지휘하는 그룹의 지휘관들에게 명령을 전달했다.
벌레의 명령을 받은 지휘관들은 예비대에서 인원을 뽑아 옥상으로 올라오는 출입구를 경계하는 임무를 맡겼다.
* * *
총독부청사로 진입한 한국군은 빠르게 내부를 제압해 나갔다.
“오마에(お前, 너)다….”
탕!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의 입구를 지키고 서 있던 헌병을 사살한 빨갱이는 뒤따르던 병사들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빨갱이의 수신호를 본 부하들은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창기의 부하들이 각 층별로 늘어선 사무실들을 청소하며 내려가는 동안 빨갱이의 부하들은 중앙 계단과 주요 계단을 장악하고 1층에 방어진지를 만드는 것이 임무였다.
아래로 내려가는 부하들을 재촉하며 빨갱이는 중앙회랑에 자리한 엘리베이터 도어를 보며 중얼거렸다.
“엘리베이터라… 돈을 처바르긴 처발랐군.”
탕! 타탕!
계단을 따라 울리는 총성에 빨갱이는 눈앞에 쓰러져 있는 일본군 헌병의 시체를 보며 중얼거렸다.
“쏠 때는 방아쇠부터 당겨, 아가리부터 털지 말고.”
쾅!
거칠게 사무실의 문을 걷어차고 들어간 창기의 부하가 일본어로 소리를 질렀다.
“우고카나이데!(動かないで!, 움직이지 마!)”
밖에서 들려오는 총성에 바짝 긴장하고 있던 총독부 직원들은 병사의 살기등등한 외침에 바짝 얼어붙었다.
“유카니 후세!(床に伏せ!바닥에 엎드려!)”
병사의 외침에 총독부 직원들은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뒤따라 들어온 다른 병사가 책상 사이를 살폈다.
모두 다 바닥에 엎드린 채 바들바들 떠는 모습을 확인한 병사가 수신호를 하자 문을 지키고 있던 병사가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소노마마이떼!(そのままいて!그대로 있어!)스고쿠시데모 우고케바 합포타이!(少しでも動けば 泡たい!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발포하겠다!)”
병사의 외침에 총독부 직원들은 바닥에 더욱 바짝 엎드렸다.
직원들의 반응을 확인한 병사는 복도를 향해 외쳤다.
“클리어!”
“다음으로 이동해!”
리더의 외침을 들은 병사들은 정리가 끝난 사무실을 빠져나가 아직 정리가 되지 않은 사무실을 향해 복도를 내달렸다.
창기 부하들의 서슬에 눌린 총독부 직원들은 고분고분하게 말을 따랐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적지 않게 튀어나왔다.
후다닥!
“서!”
한창 제압이 이뤄지고 있던 사무실 뒤쪽에서 눈치만 보고 있던 직원 하나가 재빨리 뒷문을 향해 달려갔다.
갑자기 뒷문을 향해 튀어나가는 직원을 보며 병사가 정지를 외쳤지만, 그 직원은 순식간에 뒷문을 빠져나가 복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타타탕!
바로 그 순간 복도의 모퉁이를 지키고 있던 병사가 복도로 달려 나온 직원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총격을 받은 직원은 바로 그 자리에 쓰러졌고, 사무실을 정리하던 병사는 공포에 질려 얼어붙어있는 직원들에게 담담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유카니 후세.”
병사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명령을 받은 직원들은 순식간에 바닥에 엎드려 고개를 처박았다.
‘임시토지조사국(臨時土地調査局)제3과’라는 명패가 붙은 사무실.
“온다.”
살짝 열어놓은 문틈으로 밖을 살피던 직원의 말에 조사국 제3과 직원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토지조사국’이라는 업무의 특성상 건장한 체격의 직원들이 많았고, 그 선두에는 일본인답지 않은 커다란 덩치를 가진 ‘겐타(元太)’라는 성의 직원이 서 있었다.
“총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문으로 들어올 수 있는 이들은 한 번에 하나다. 뒷문을 막아 버리고 앞문으로 들어오는 놈을 우선 제압하는 거야. 문 옆에 숨어 있다가 덮치면 돼.”
명문 게이오(慶應) 대학 유도부 출신이라는 겐타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동료들을 돌아봤다.
겐타의 기세에 휩쓸린 직원들이 지금 역습을 준비하고 있었다.
“문을 잠가.”
겐타의 말에 직원은 문을 닫고는 문의 손잡이를 잠갔다.
쾅!
걷어찼지만 열리지 않는 문을 본 병사는 다시 한 번 문을 걷어찼다.
쾅!
살짝 열린 문틈으로 잔뜩 쌓아올린 책상들의 모습을 본 병사는 뒤따라 온 동료에게 수신호를 했다.
수신호를 본 동료는 손에 수류탄을 꺼내들고는 앞문으로 걸어갔다.
수류탄을 손에 쥔 병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병사는 어깨에 메고 있던 산탄총으로 총을 바꾸고는 산탄총의 총구를 문손잡이로 향했다.
투앙!
산탄총의 둔탁한 발사음과 함께 문의 손잡이 부분이 부서졌다.
문손잡이를 날려 버린 병사가 문을 걷어참과 동시에 대기하고 있던 병사가 수류탄을 안으로 굴려 넣고는 재빨리 옆으로 비켜섰다.
투쾅! 챙그랑!
커다란 폭음과 함께 유리창들이 깨져나갔다.
“으으....”
타타타타탕!
수류탄이 폭발한 다음 안으로 들어선 병사들은 신음을 흘리는 직원들을 모조리 사살했다.
그들이 복도로 나왔을 때 수류탄 소리를 들은 창기가 무전을 보냈다.
-여기는 창. 무슨 일인가 이상.
“여기는 페어44. 적극적 저항 발생. 처리 완료. 이상.”
-여기는 창. 수고했다. 다음 방들을 청소하도록. 이상.
“페어44.카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