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전단 1941-201화 (201/464)

# 201

201화 마닐라 해전 (26)

1943년 12월 고 제독이 이끄는 9전단은 LA로 회항했다.

LA로 가는 길은 9전단만 홀로 가는 것이 아니었다. 물자 하역을 끝낸 수송선들과 본국에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 부상병들을 실은 의무선들.

마지막으로 필리핀에서 구해 낸 6000명의 조선인 강제 노동자들과 8000명의 조선인 강제 징용 위안부 여성들을 태운 수송선들이 9전단과 미군 구축함들의 호위를 받으며 태평양을 가로질렀다.

한반도의 제독 전용 선실에서 고 제독은 LA에서 급파된 신석기 사무관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태식 사무관은 그럼 곧장 베트남으로 간 것인가 ”

“그렇습니다. 그쪽에도 많은 이들이 끌려간 정보를 확인했습니다.”

“그런가….”

고 제독이나 신석기 사무관 모두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미디어에서나 보며 남의 일이라 여겼던 일을 실제로 옆에서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필리핀에서 아직 구출하지 못한 조선인 강제 노동자들과 강제 위안부 여성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고 했던가 ”

“그렇습니다. 문제는 강제 징용 위안부 여성들입니다. 피해자 진술에 따르면 남태평양은 물론이고 중국에까지 상당수 보내진 것으로 보입니다.”

“후우~.”

신 사무관의 대답에 고 제독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강제 징용 위안부 문제는 단순히 사죄와 배상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답답한 속을 달래기 위해 옆에 놔둔 찬 물을 연거푸 마신 고 제독은 재차 질문을 이어갔다.

“그래서 LA의 정부는 어떻게 할 방침인가 ”

“우선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위안부가 된 이들이 우리나라 여성들뿐만이 아니라 필리핀 거주 미국 여성들 가운데 상당수, 그리고 수녀들까지 다수 포함된 상황입니다. 이들의 진술을 기반으로 대대적인 선전전을 벌일 생각입니다.”

“선전전 ”

“자국 여성들은 물론이고 거기에 더해 수녀들까지 평생을 갈 상처를 입었습니다. 거기에 1944년에는 미 대선이 있습니다.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 못하면 루스벨트는 4선 도전에 심각한 영향을 받을 겁니다. 이미 펄 벅 여사와 엘레노어 루스벨트 여사가 깊은 관심을 표하고 있습니다. 특히나 여성 연예인들의 활발한 활동 덕에 미 상류층들은 물론이고 대중들까지 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들이 어떻게 ”

“음반장사가 아주 잘 되었습니다.”

*    *    *

‘유행은 돌고 돈다.’라는 말이 진리였던지, 아니면 어쩌다 얻어걸린 우연의 일치였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9전단에 동승했던 여성 가수들의 주력 장르가 1940년대 미국 대중들의 입맛을 직격했다.

솔로 여가수의 경우 주력이 CCM(Contemporary Christian Music. 현대기독교 음악.)이었고 걸 그룹의 경우 주력이 스윙과 레트로 재즈였다.

그녀들은 한반도에 실린 방송국의 DB를 뒤져 이 시기에 맞을 만한 21세기 음악들을 찾아 1940년대 스타일로 편곡을 했다.

다행히 그녀들 모두 상당한 수준의 작곡, 편곡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덕에 아주 괜찮은 노래들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결과물을 받아든 정 수석차관이 아주 듬뿍 MSG를 쳐버렸다.

LA에 있는 소형 레코드사를 아예 인수해 버린 정 수석차관은 그녀들의 노래가 담긴 레코드판을 대량으로 찍어 내 중동과 남태평양 전선에 무료로 뿌려 버린 것이었다.

미군의 캠프가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음악이 흘러나왔고, 그 때까지의 백인 중심의 음악이 아닌 뭔가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음악에 군인들이 중독되어 버렸다.

그 결과. ‘군목들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와 ‘군목들이 가장 싫어하는 노래’ 양쪽 부분 모두 1위에서 10위까지 줄을 세워 버렸다.

특히 ‘군목들이 가장 싫어하는 노래’ 1위에 자리한 ‘데스파시토(Despacito)’는 텍사스 출신 미군들과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가한 멕시코군이라면 자면서도 흥얼거릴, 반드시 알아야 할 노래가 되어 버렸다.

군대에서 일어난 ‘한류 중독’은 곧장 대중사회로 뻗어 나갔다.

군인들이 있는 캠프 주변에서 생활하던 민간인들이 가장 먼저 익숙해졌고, 그 주변으로 그 여파가 퍼져 나갔다.

그렇게 점점 노래가 퍼져 나가면서 정 수석차관이 인수한 레코드 회사는 대박을 쳐버렸다.

여세를 몰아 LA의 작은 라디오 방송국을 하나 인수한 정 수석차관은 ‘한인 라디오 방송국’을 설립해 여성 연예인들이 편곡한 영어 팝송은 물론이고 새롭게 편곡한 5,60년대 한국 노래까지 하루 20시간을 틀어 댔다.

“눈으로 보는 자극도 자극이지만 귀로 듣는 자극이 더욱 강렬한 법이지. ASMR(Autonomous Sensory Meridian Response)이 달리 뜬 게 아니라니까!”

정 수석차관의 말마따나 1940년대 미국인들의 귀에 한국의 음악은 강렬한 자극이었다.

백인은 백인만의 느낌으로, 흑인은 흑인만의 느낌으로 구분 지어졌던 음악적 구분이 사라진 한국 음악은 LA를 중심으로 한 연예산업에 커다란 파문을 던졌다. 그리고 미국 전체는 무리더라도 적어도 서부지역에서 ‘Korean Pop’은 불과 2년 만에 하나의 장르로 자리잡아갔다.

미국 서부 지역에서 ‘Korean Pop’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한국 여성 가수들의 몸값이 껑충 뛰어올랐다.

초기에는 단순히 미국 정계 파티에 초대되어 여흥을 돋우는 정도에 불과했다면 1943년 말이 되면 전국으로 방송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정기적으로 출연하는 위치까지 올라간 것이었다.

점점 ‘귀한 몸’이 되어가는 여성연예인들을 정 수석차관은 아주 유용하게 써 먹었다.틈나는 대로 온갖 자선활동과 국채 구입 캠페인에 참가시키면서 미국인들에게 아주 좋은 이미지를 갖게 만들었고, 그렇게 이미지가 공고해져 갈수록 그녀들의 ‘한마디’가 갖는 파급력은 어마어마해져 갔다.

훗날, ‘선전과 선동의 시작은 괴벨스였지만 예술로 승화시킨 이는 정 수석차관이었다.’라고 진보주의 역사학자들이 평가하게 만든 작업이었다.

그리고 ‘강제 징용 위안부’의 존재가 파악되자 정 수석차관은 곧장 그녀들을 모아 기자회견을 벌였다.

“저 잔인하고 흉폭한 일본군의 손에 무참하게 인생을 파괴당한 저희들의 동포 여성분들을 도와주세요.”

눈물을 흘리며 도움을 요청하는 여성 연예인들의 기자회견 장면은 곧장 극장의 뉴스필름에 삽입되었고, 그에 이어 필리핀에 거주하다가 전화(戰禍)에 휩쓸린 미국 동포 여성들도 마찬가지로 피해를 입었다는 기사까지 호외로 돌았다.

극장에서 뉴스를 보고, 신문의 호외기사를 본 미국인들은 다시 한 번 뜨겁게 타올랐다.

자국 동포까지 화를 입었다는 기사에 미국 국민들의 의견은 하나로 모아졌다.

“일본놈들을 멸종시켜 버리자!”

“그놈들을 다시는 국제사회에 발을 내딛지 못하게 만들어 버려야 한다!”

그전까지는 ‘일본에 복수한다.’내지는 ‘일본을 패배시킨다.’라는 다소 온건한 의견이 주종이었다면 이제는 ‘일본을 아예 지도에서 없애 버리자.’라고 말하는 극단적인 ‘일본 처단론’의 화려한 등장이었다.

*    *    *

“그래서 그 가수들이 도움이 되었다는 것인가 ”

“그렇습니다. 이미 미국의 많은 자선단체들이 그녀들의 자활을 돕기 위한 교육프로그램을 제공해 주겠다고 천명하고 나섰습니다.”

신 사무관의 설명에 고 제독은 한시름 놨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행이로군.”

“또 다른 좋은 소식도 있습니다. 조선인 강제징용자들 가운데 한국군 지원자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이번에 가는 조선인 노동자들 가운데서 지원한 이들까지 합쳐서 드디어 총원 1만을 넘겼습니다. 그 가운데 3000이 해군에 지원 했습니다.”

“그래에 그게 정말인가 ”

“그렇습니다.”

신 사무관의 대답에 고 제독의 얼굴이 아주 환해졌다.

3000이라면 경순 또는 중순 1척을 포함한 다수의 구축함으로 구성된 전단 하나를 만들 수 있는 병력이었다. 그렇게 작전을 펼칠 수 있는 전단 하나가 추가된다면 앞으로 있을 본토 진공은 물론이고 유럽 전선까지 9전단에 가해질 부담을 줄일 수 있을 터였다.

고 제독은 싱긋이 웃으며 손을 비볐다.

“앞으로의 일이 기대가 되는군.”

*    *    *

9전단의 인솔 하에 조선인들을 태운 수송선들이 항구에 도착한 날. LA의 항구는 눈물로 얼룩졌다.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인해 잔뜩 겁먹은 얼굴을 한 채 배에서 내리는 젊은 여성들을 본 김 주석 이하 임정의 각료들과 독립운동가들은 통곡을 했고, 그들이 우는 모습을 본 강제 징용 위안부 여성들과 강제징용 조선인 노동자들까지 통곡을 했다.

교민들까지 통곡을 하면서 항구는 눈물바다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이 광경을 본 신문기자들은 자신들의 신문사로 기사를 송고했고, 기사를 읽은 미국인들은 동정과 함께 일본인들에 대한 증오를 다시 키웠다.

백악관은 이런 호재(好材)를 절대 놓치지 않았다.

즉시 필리핀에서 일본군의 위안부로 끌려갔던 미국 여성들과 한국 여성들 대표를 워싱턴으로 불렀고, 상원은 그들을 대상으로 진상조사를 위한 청문회를 열었다.

청문회에서 조선 여성들에 대한 강제 납치, 취업 사기 등과 같은 범죄들이 낱낱이 밝혀지는 가운데 증언을 하던 미국 여성이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지는 장면이 라디오에서 실시간으로 중계되어 버리면서 미국인들은 루스벨트에 대한 절대적인 지지를 표방했다.

*    *    *

미국 정가와 시민사회가 들끓고 있는 동안 LA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군도 정신없이 움직였다.

우선 한국군에 지원하는 이들이 크게 늘었다.

LA에 올 때까지 지원의사를 밝히지 않았던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지원의사를 밝혔고, 그 덕에 육군은 그토록 원하던 사단규모까지 덩치를 키울 수 있었다.

‘무임소(無任所) 간부’로 눈치만 보던 이들이 자리를 찾았고, 중동 전선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이들이 부사관 또는 초급 간부들이 돼서 신병들을 훈련시켜 나갔다.

그런 가운데 특이한, 또는 난처하다고 할 일이 벌어졌다.

강제 징용 위안부로 끌려온 여성들 가운데 많은 수가 군에 지원한 것이었다.

청원을 한 여성들의 대표와 면담을 하게 된 김 주석은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군에 들어오면 목숨을 걸어야 하네.”

“이미 알고 있습니다.”

“군은 자네들의 한풀이 장소가 아닐세.”

“한풀이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다시는 우리 같은 이들이 나오지 않기 위해 나서는 것입니다!”

“그래도 여자들인데….”

“조 소령은 여자 아닙니까 그리고 조 소령 말고도 이미 군적에 오르신 여성분들도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뜻을 막으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주석님도 우리가 더럽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

“그것은 아닐세!”

대표들의 기세에 눌린 김 주석은 정 수석차관과 고 제독, 그리고 이번 사태의 가장 큰 원인제공자인 조 소령을 불렀다.

“뭐 어려운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오히려 차후의 일을 생각한다면 도움이 될 일입니다.”

“별 문제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 수석차관과 고 제독의 대답에 이어, 조 소령의 차례가 되었다.

여성 대표들을 바라보던 조 소령은 먼저 질문부터 던졌다.

“군에 들어오면 무슨 일을 하고 싶나 ”

“당연히 왜놈들을 무찌를 것입니다!”

“그 말은 전투병과에 지원하겠다는 것인가 ”

“그렇습니다!”

여성 대표의 대답에 조 소령의 표정이 날카로워졌다.

여성 대표들을 살피던 조 소령은 고 제독을 비롯한 높으신 분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한 가지 문제만 해결한다면 지원을 받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한 가지 문제 ”

“남성 지원자들과 동일한 체력 기준을 갖춘 이들의 지원만 받으면 됩니다.”

조 소령의 말에 고 제독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불가능한 일 아닌가!”

“저는 남군 기준 체력검정을 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했습니다만 절대 불가능이 아닙니다.”

조 소령이 말에 고 제독은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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