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
190화 마닐라 해전 (15)
“베르드 아일랜드 패시지 우회로인 데다 함대가 고속기동을 할 공간도 적은데 잽들이 과연 이곳으로 오겠습니까 ”
“루손과 민도로 섬 사이에 가장 좁은 구역만 통과하면 충분히 고속기동을 할 공간이 나옵니다. 그리고 거기서 조금만 더 북진하면 바로 마닐라만입니다.”
“그렇기는 합니다만… 고속기동전을 펼치기 위해서는 좀 더 넓은 공간이 유리하지 않겠습니까 ”
“일본의 남방함대가 공격하고자 하는 함대는 우리가 아니라 마닐라만에 있는 상륙부대일 것입니다. 그래야만 일본이 가장 필요로 하는 시간을 확보할 가능성이 있으니 말입니다.”
“흐음….”
고 제독의 말에 스프루언스는 콧소리를 내며 생각에 잠겼다.
한참 동안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던 스프루언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이거 고 제독이 아니었으면 큰 실수를 할 뻔했습니다. 전통적인 함대전이라는 생각에 너무 얽매여 있었어요. 고 제독의 말이 맞습니다. 지금 일본은 시간을 버는 것이 중요하지요. 그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를 상대하는 것보다 마닐라에 있는 아군 상륙부대를 공격하는 것이 우선일 것입니다. 그럼 이 설정을 갖고 대응책을 논의해 봅시다.”
두 사람은 해가 질 때까지 해도를 가운데 놓고 의견을 교환했다.
* * *
한편, 해가 지면서 게이토급 잠수함 하더를 시작으로 수중에서 움직이고 있던 미군 잠수함들이 모두 수면 위로 올라왔다.
“환풍기 최대로 돌려!”
“Aye, Sir!”
“기관실, 축전지 상황은 어떤가 ”
“지금 충전중입니다!”
“레이더 ”
“수색중입니다만. 아직 잽들의 함대는 포착하지 못했습니다!”
“잼들이 갈 곳은 빤하다! 전속으로 전진! 목적지는 민도로 해협이다!”
“Aye, Aye, Sir!”
함장들의 명령이 떨어지면서 미 해군의 ‘늑대들’은 민도로 해협을 향해 속도를 높였다.
1시간이 넘는 질주가 이어지던 끝에 레이더를 확인하던 하더의 부사관이 함장에게 보고를 했다.
“잽들을 잡았습니다! 북동쪽으로 12.5마일(약 20km)!”
보고를 받은 애쉬튼 함장은 고함치듯 명령을 내렸다.
“총원 전투준비! 어뢰실! 확실하게 준비해!”
“Aye, Aye, Sir!”
“잠수함 사령부에 현재 위치와 속도, 그리고 공격하겠다는 말을 전해라!”
“Aye, Sir!”
애쉬튼 함장은 큰소리로 외쳤다.
“자! 이제 사냥의 밤이다!”
“우오오!”
하더의 보고를 시작으로 일본 함대를 발견한 미군 잠수함들의 보고가 이어졌다. 일본군 함대의 정확한 위치가 파악되면서 미군 잠수함들은 빠른 속도로 민도로 해협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늑대들이 사냥을 시작한 것이었다.
한편 같은 시각. 일본 함대에서도 경계의 수위를 높이기 시작했다.
“항공기를 띄울 수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은 전적으로 견시에 의지해야 한다. 실수하지 않도록 견시병들에게 이 점 단단히 주의를 주도록!”
“핫!”
기함 공고의 회의실에서 감시를 강화할 것을 명령한 이토 세이이치 제독은 참모들을 돌아봤다.
“도이치의 장비들을 실은 구축함들은 잘 움직이고 있지 ”
“예. 발군의 성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 *
독일관의 육로로 연결되면서 상당량의 전자장비들이 일본으로 들어왔다.
그 가운데에는 함선에 장착하는 레이더들과 대잠장비들도 소량이지만 들어왔다.
일본에 도착한 레이더들과 대잠장비들은 해당 장비들을 생산하는 회사에 연구용으로 들어갔지만 대부분은 일선부대로 분배되었다.
해당 장비들을 받아든 일선부대의 사령관들은 고민에 빠졌다.
“좋기는 한데… 집어넣을 곳이 없다!”
특유의 과무장으로 인해 레이더와 대잠장비들을 수납할 공간이 부족하다는 문제에 사령관들은 꼼수를 부렸다.
구축함들을 둘로 나눠 한쪽에는 독일제 레이더만을, 다른 한쪽에는 대잠장비만을 설치한 것이었다.
남방함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남방함대가 분배받은 레이더와 대잠장비는 모두 5세트였다.
“수량이 너무 적다!”
이토 세이이치의 항변에 본국에서 온 답신은 다음과 같았다.
-최대한 빨리 국산 레이더들과 대잠장비들을 생산해 공급하겠다.
본문에서 온 답신의 내용에 이토 제독은 코웃음을 쳤다.
“흥! 국산을 믿으라고 ”
본국에서 온 답신에 이토 제독은 이리저리 선을 넣어 다른 함대들은 얼마나 분배받았는지를 알아봤다.
“본국에 있는 함대들을 제외하고는 우리가 제일 많이 받았다니… 할 말이 없군.”
이노우에가 가장 신경을 쓴다는 인도 주둔 함대마저도 단 3세트만을 분배받았다는 소식에 이토 제독은 할 말을 잃었다.
그 후, 남방함대는 10대의 구축함들을 선정. 5대에는 레이더를, 나머지 5대에는 대잠청음기를 비롯한 대잠장비를 설치했다.
설치 후 시험평가에서 구축함 함장들의 평가는 모두 같았다.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과연 도이치!
하지만 그들의 상대는 미국이었다.
전자장비 분야에서 독일과 영국이 근소한 차이로 엎치락뒤치락하고 있었다면 영국과 독일에 비해 한발 앞서 나가고 있는 이가 미국이었고, 거기에 9전단이라는 히든카드가 버티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일본 해군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모르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고 있었다.
* * *
참모들의 대답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토 제독은 불안했다.
미군의 반격이 시작된 이후 일본해군은 단 한 번의 승전도 얻어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번 전투에서 반드시 승리를 거머쥐어야 한….”
투쾅!
“뭐야!”
요란한 폭발음에 이토 제독은 말도 제대로 끝맺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순간, 회의실의 문이 열리며 젊은 해군장교가 뛰어 들어와 상황을 설명했다.
“아라시 격침!”
“잠수함인가 ”
“잠수함입니다!”
‘잠수함의 공격’이라는 보고에 이토 제독은 참모를 돌아봤다.
함선 목록을 뒤져본 참모가 빠르게 대답했다.
“개장 구축함은 아닙니다.”“대잠 장비를 개장한 구축함들에게 대잠경계망을 강화하라고 해! 도이치의 대잠장비를 갖춘 구축함이 다섯 척이나 있는데 이 무슨 추태인가!”
“핫!”
이토 제독은 독일제 대잠장비들로 개장한 구축함들을 욕했지만 이는 개장 구축함들만의 잘못은 아니었다.
겨우 5척으로 함대의 대잠경계망을 운용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이토 제독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지금으로서는 개장 구축함들을 닦달하는 것 외에는 다른 답이 없는 상황이었다.
회의실 안에서 이리저리 걸음을 옮기며 대안을 찾던 이토 제독이 참모들을 돌아봤다.
“도이치의 레이더가 수면 감시도 된다고 했지 ”
“예, 그렇습니다.”
“레이더 개장 구축함들에게 지금 당장 외곽으로 자리를 옮겨서 수면 감시를 하라고 해!”
“핫!”
잠시 후, 공고의 높다란 함교에서 발광신호가 발신되었고, 5척의 구축함들이 함대의 외곽으로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잽의 구축함입니다! 우리를 찾았습니다! 바로 달려오고 있습니다!”
레이더실에서 올라온 급보에 커닝타워에 올라와서 지휘를 하던 애쉬튼 함장과 견시들이 망원경을 챙겨 들었다.
“긴급잠항!”
“긴급잠항!”
함교로 돌아온 애쉬튼 소령은 바로 명령을 이었다.
“300피트(약100m)까지 잠수!”
“300피트까지 잠수!”
“최대한 빨리!”
애쉬튼 함장의 명령에 잠수함의 후부와 기관실에 있던 선원들이 모조리 함수부로 달려갔다.
선원들의 무게가 더해져 함수의 경사는 급격히 가팔라졌고, 하더는 더욱 빠르게 심해로 내려갔다.
“수심300피트!”
“뒤로! 뒤로!”
이번에는 반대로 선원들이 모조리 뒤로 달려갔고, 그 덕에 하더는 빠르게 균형을 되찾았다.
“엔진정지.”
“엔진정지.”
“전원침묵.”
“전원침묵.”
수심300피트의 수중에서 하더는 조용히 멈춰 섰다.
음탐병 옆으로 자리를 옮긴 애쉬튼 함장은 작은 목소리로 질문을 했다.
“잽들은 아직도 쫓아오고 있나 ”
“이동방향 변함없습니다.”
“알고 오는 것 같아 ”
“그건 확신을 못하겠습니다.”
음탐병의 대답에 애쉬튼 함장은 인터폰의 수화기를 들었다.
“어뢰실. 함장이다. 즉시 1번과 2번 발사관에 어뢰를 집어넣어라.”
-Aye, Sir.
애쉬튼 함장은 어뢰실에 방위와 어뢰의 항주 수심, 속도 등을 설정해 전달했다.
-발사준비완료.
어뢰실의 보고를 받은 애쉬튼 함장은 음탐병을 돌아봤다.
“잽들의 구축함은 계속해서 이쪽으로 오고 있나 ”
“속도, 방위 모두 변동 없습니다.”
음탐병의 대답에 부장이 스톱워치를 손에 들고 애쉬튼 함장을 바라봤다. 애쉬튼 함장은 수화기에 대고 짧게 명령했다.
“발사.”
요란하게 공기 빠지는 소리와 함께 어뢰들이 어뢰관을 빠져나갔고, 부장은 스톱워치로 시간을 재기 시작했다.
* * *
한편, 레이더에 잡힌 미군 잠수함을 목표로 거침없이 달리던 구축함 아키구모의 함장 이치로는 음탐장교를 상대로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놓쳤다고 지금 그게 말이 돼 겨우 4해리(7.4km)거리였다! 양키들이 자침하지 않는 이상 청음기가 놓쳐서는 안 되는 일이야! 너 뭐하는 자식이야!”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아키구모에 달린 청음기의 성능이 너무 열악합니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똑같은 청음기를 가지고 노미는 미군 잠수함을 2척이나 잡았다! 네놈이 무능한 탓이야!”
“죄, 죄송합니다.”
“뭣하고 있어! 당장 양키 잠수함을 찾아내!”
“하, 핫!”
“후우~.”
음탐장교를 쫓아낸 이치로가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숨을 몰아쉬는 이치로를 향해 부장이 조심스럽게 질문을 했다.
“목표를 놓쳤으니 변침할까요 ”
“직진해! 바로 잠항을 시작했으니 멀리 못 갔을 거다. 좀 더 접근한 다음, 청음기로 샅샅이 뒤진다!”
“핫!”
부장에게 명령을 내린 이치로는 바닥을 걷어차며 분통을 터뜨렸다.
“빌어먹을 청음기!”
독일제에 비해 너무나도 열등한 성능을 보여주는 대잠장비에 이치로가 분통을 터뜨리는 순간.
거대한 폭음과 함께 아키구모가 수면 위로 펄쩍 솟아올랐다.
쿠쾅!
아키구모와 마주보며 달려온 2발의 어뢰가 아키구모의 앞쪽 절반을 완전히 날려버렸고, 잠시 후, 아키구모는 어두운 수면 아래로 모습을 감췄다.
* * *
그날 밤이 새도록 이어진 일본 남방함대와 미 잠수함들 간의 전투는 혈투였다.
독일제 장비들로 무장한 구축함들이 분투를 한 결과, 미 해군 잠수함들은 4척이 격침되었다.
미군 잠수함들도 끈질기게 남방함대를 물고 늘어져서 6척의 일본군 구축함들과 2척의 순양함이 격침되었다.
“뼈가 시린 결과로군….”
전투 보고서를 받아든 이토 세이이치 제독은 이를 악물었다.
전투가 코앞인데 구축함 6척과 순양함 2척의 상실은 뼈아픈 것이었다.
거기에 더해 격침된 6척 가운데 4척이 독일제 레이더를 달은 개장구축함이었다. 한순간에 방공망에 구멍이 생긴 것이었다.
“그래도 잠수함들의 추적은 떨어낸 것 같습니다.”
“그나마 다행이지.”
밤새 미군들의 잠수함들을 상대로 숨바꼭질을 벌이며 이동을 한 결과, 이토 제독의 남방함대는 베르드 아일랜드 패시지 근처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부우우웅.
“아군기들입니다!”
나직한 엔진소리들이 하늘을 울리며 수많은 아군기들이 하늘을 채우자 이토 제독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제 좀 편하겠군.”
상공에서 함대들을 보호해 줄 아군기들의 모습을 본 이토 제독들과 참모들이 안도할 때, 고공에서 회색의 전투기들이 일본기들을 향해 내리 꽂혔다.
스프루언스와 9전단의 함재기들이 일본군의 항공기들을 낚아채기 시작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