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
186화 마닐라 해전 (11)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나서야 이와부치 일행은 매복을 벗어날 수 있었다.
매복을 벗어난 이후 근처에서 헤매고 있던 수병들을 수습해 마닐라 시가지 중심부로 향하던 이와부치 일행은 목적지를 코앞에 두고 발걸음을 멈춰야 했다.
마닐라 시가지의 중심부라 할 수 있는 마닐라 시청은 이미 미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와부치는 미군이 그렇게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중포(重砲)를 장착한 자주포들과 장갑차량들, 그리고 하늘에서 날아와 병사들을 내리는 대형 오토자이로들.
이와부치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길을 따라 움직인 것이 아니라 아예 길을 만들어 버렸구나!”
타타탕!
“매복이다!”
“응사하라!”
“제독! 이쪽으로!”
마닐라 시가지의 가장 중요한 길목 가운데 하나인 마닐라 시청을 먼저 점령한 미군이 사격을 가해오자, 이와부치를 비롯한 일본군들은 황망히 근처의 빌딩으로 몸을 피해야 했다.
타탕!
“으윽!”
“제독!”
근처에 있던 3층짜리 건물로 달리던 도중 이와부치 제독은 어깨에 관통상을 입었고, 옆에 있던 장교들이 그를 업은 채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것이 지금 이와부치가 벌거벗은 상체에 붕대를 감으며 창문 밖으로 보이는 헬리콥터들을 향해 욕설을 내뱉고 있는 까닭이었다.
“응급처치는 끝났습니다.”
“수고했다!”
“하지만 가까스로 지혈만 끝낸 상황입니다. 근처 필리핀인 병원이라도 찾으셔야….”
“됐어! 가서 다른 부상자들이나 살펴!”
“하이….”
위생병을 한쪽으로 쫓아낸 이와부치는 장교들을 돌아봤다.
“다나카와 나마쿠라가 보이지 않는데 ”
“미군의 공격을 받아….”
“이런… 쯧!”
아끼던 참모들이 전사를 했다는 말에 혀를 차던 이와부치는 대답을 한 장교에게 질문을 던졌다.
“지도는 챙겼나 ”
“핫!”
“펼쳐 봐.”
“핫!”
커다란 지도판을 바닥에 펼쳐 놓은 채 이와부치는 장교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군의 피해상황은 지금 남은 전력이 얼마야 ”
“산티아고를 출발할 때 전력의 절반 이하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장교의 대답에 통증으로 인해 구겨져 있던 이와부치의 인상이 더욱 구겨졌다.
“겨우 1.5km를 이동하면서 병력의 절반을 잃은 거냐….”
“화력의 차이가 심각합니다.”
“조금 무리하더라도 중기관총을 계속해서 지켰어야 했습니다.”
“지나간 일이다.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 보자.”
이미 지나간 일이었기에 장교들의 말을 막은 이와부치는 앞으로의 일에 관해 의견을 나누었다.
“우선은 항만 근처의 아군과 합류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됩니다.”
“어째서 ”
“오면서 겪었다시피 주요 길목은 이미 미군이 선점했습니다. 여기서 다시 항만으로 이동하다가는 전멸입니다. 차라리 육군과 합류해야 합니다.”
카마쿠라가 ‘육군’을 입에 올리자 이와부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른 장교들을 돌아봤다.
“카마쿠라의 말에 이견이 있는 사람 ”
이와부치의 물음에 다른 장교 하나가 입을 열었다.
“카마쿠라 대좌의 의견에 반대합니다. 육군과 합류하는 것보다는 항만 인근에 남아 있을 아군을 규합하는 것이 낫습니다.”
“이유는 ”
“미군이 길목을 선점한 것은 저 오토자이로를 이용한 빠른 수송 덕입니다. 아무리 미군의 전력이 우월하다고 해도 항만 전역을 장악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최대한 빨리 항만근처로 이동해 병력을 모아야 합니다.”
장교의 설명에 카마쿠라가 언성을 높였다.
“병력을 모으러 가는 길에 전멸이야!”
“시가전의 장점이 뭡니까 적이 모든 길과 골목을 다 점령할 수는 없습니다! 최대한의 주의를 기울여 조심스럽게 이동한다면 아직 남아있는 병력들과 힘을 합칠 수가 있습니다!”
“네놈 말대로 그렇게 병력을 모으기 위해서는 성능 좋은 통신기가 필요하다! 지금 우리에게 그런 무전기가 있나 ”
카마쿠라의 지적에 의견을 내놓았던 장교의 입이 닫혀 버렸다.
하지만 다른 장교가 대신 나섰다.
“하지만 지금 상황으로는 육군과 합류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육군의 주력은 필리핀 대통령궁에 모여 있습니다. 지금 이곳에서 대통령궁을 가려면 다리를 건너가야 합니다. 다리 주변의 개활지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바로 표적이 될 겁니다!”
젊은 장교들은 연이어 반대의견을 내놓았다.
“문제는 양키들이 마닐라 시청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통령 궁으로 향하는 최단거리의 노선은 아야라 교(アヤラ橋, Ayala Bridge)를 지나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로페수 토리(ロペス通り, Natividad Lopes Stree)를 통과해야 합니다! 이 일직선의 도로에 들어서는 것은 말 그대로 총살대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다리 근처에도 가지 못할 것입니다!”
“차라리 항만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항만은 안 된다니까! 그곳은 포기해야만 해! 제독! 거리는 좀 멀지만 북상을 해서 케손 교(ケソン橋, Quezon Bridge)를 지나면 됩니다! 아직 강 건너에는 육군들이 있습니다! 그들과 힘을 합쳐야 합니다! 잘못하면 이곳에서 각개격파로 전멸입니다!”
“해군의 자존심이 있습니다!”
“지금이 자존심을 찾을 때인가! 생존과 승리가 먼저다!”
카마쿠라 대좌의 말에 학사장교들이 지지를 하고 나섰다.
“대좌의 말이 옳습니다!”
“승리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본토에서 지원이 올 때까지 버텨야 합니다!”
학사장교들이 카마쿠라 대좌를 지지하자 해군병학교 출신 장교들이 그들을 반박했다.
“네놈들은 자존심도 없나! 이 근본 없는 학사장교들 같으니!”
“지금 이 상황에서 그걸 따지고 있나! 빠가야로!”
“빠가야로 이 겁쟁이 자식들아!”
언쟁이 격화되면서 사관학교인 해군병학교 출신 장교들과 학사장교들 사이에 주먹다짐이 벌어졌다.
그 모습을 보던 이와부치 제독이 소리를 질렀다.
“그만! 지금 이 무슨 추태인가!”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지금 밖에서는 양키들이 이곳을 노리고 있는 상황이다! 목숨을 걸고 양키들과 싸우고 있는 수병들 보기 부끄럽지도 않은가 ”
한바탕 질책을 가한 이와부치는 숨을 가다듬었다.
“결론을 내리겠다. 지금부터….”
타타탕! 쾅!
“양키들의 공격이다!”
이와부치가 막 결정을 내리려는 순간 멀리서 들리던 총성이 바로 코앞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허겁지겁 안으로 달려 들어온 수병이 이와부치 제독에게 급보를 전했다.
“양키들의 집중공격입니다! 밀리고 있습니다! 피하셔야 합니다!”
수병의 보고에 이와부치는 통증도 잊은 채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벗고 있던 상의를 챙긴 이와부치는 장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지금 즉시 케손 교로 이동한다!”
“핫! 지도를 챙겨라!”
이와부치와 장교들은 서둘러 건물을 빠져나왔다.
후위를 맡은 병사들이 미군의 발걸음을 막는 동안 제독과 장교들을 비롯한 일본해군들은 북쪽으로 이동을 개시했다.
“메트로폴리탄 극장까지 이동한다!”
한편, 육군항공대 장교를 태운 채 상공에서 마닐라 시청 인근을 관찰하던 어벤저가 이와부치 일행의 이동을 발견했다.
“여기는 와치버드22. 시청에서 북쪽으로 이동하는 대규모 일본군 발견. 규모와 이동방식을 보아 고위 간부가 있는 것 같다. 오버.”
-여기는 커맨드. 와치버드22. 발견한 일본군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예상할 수 있나 오버,
커맨드 쉽에서 온 질문에 와치버드22의 리처드 굿맨 중위는 지도를 살피고는 응답했다.
“여기는 와치버드22. 메트로폴리탄 극장으로 예상한다. 오버.”
-여기는 커맨드. 메트로폴리탄 극장 확인. 곧 기병대를 보내겠다. 감시를 계속하라. 오버,
“여기는 와치버드22. Copy.”
커맨드 쉽과의 통신을 끝낸 굿맨 중위가 망원경으로 지형을 정찰하자, 가장 뒤에 앉아서 후방기관총을 담당하던 젊은 수병이 굿맨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까부터 계속 ‘기병대’라는 말이 나오던데. 진짜 기병대입니까 ”
“진짜 기병대야, 상병.”
“예 수송선에 말들을 태웠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습니다.”
깜짝 놀라는 상병의 반응에 굿맨 중위는 기병대의 정체를 알려줬다.
“저기 헬리콥터들 타고 다니는 부대들 있지 그 친구들 다 기병대(Cavalry)야.”
* * *
독일군이 전격전을 선보이면서 본격적인 기계화된 전투가 새로운 트렌드가 되었다.
전쟁의 방식이 바뀌면서 존폐의 위기에 처한 병과가 여럿 만들어졌지만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것은 기병대였다.
‘없애느냐, 바꾸느냐’의 기로에서 고민을 하던 미 육군의 높으신 분들의 눈에 한 장의 사진이 들어왔다.
대한민국 육군으로 바뀐 필코 세이프티 소속의 헬리콥터 파일럿들이 미군 기병모에 선글라스를 낀 사진이었다.
“이거다!”
사진을 본 높으신 분들은 무릎을 치며 좋아했다. 어차피 헬리콥터를 이용해 강습하는 부대를 만들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전통적인 보병부대를 시작으로 공수부대, 기갑부대를 비롯해 새로이 만들어지는 병과에 필요한 병력들을 우선적으로 충원하다보니 헬리콥터 강습부대에 필요한 병력을 뽑아낼 여력이 딸리는 상황이었다. 결국, 마셜을 비롯한 육군의 높으신 분들은 기병대 지휘관들을 헬리콥터 앞에 불러 모은 다음 일갈했다.
“이제부터 귀관들이 탈 말이다!”
‘지들이 무슨 킬고어 중령인줄 아나 ’라는 말까지 들으며 부린 잠깐의 호기가 일개 병과의 운명을 원래 정해진 것보다 더욱 빠르게 바꿔 버리게 된 것이었다.
* * *
이와부치 일행이 막 메트로폴리탄 극장에 도착했을 때와 거의 동시에 미 기병대의 헬리콥터들도 메트로폴리탄 극장 인근에 도착했다.
“저곳이 좋겠다.”
헬리콥터 편대의 지휘관 메이햄 대위는 메트로폴리탄에서 남서쪽에 자리한 녹지를 착륙지점으로 선택하고는 무전을 보냈다.
“여기는 펠리컨11. 파리안 요새(Revellin del Parian)요새 남쪽에 착륙하겠다. 요새는 깨끗한가, 오버 ”
-여기는 컨트롤. 펠리컨11. 잠시 대기. 정보를 확인하겠다. 오버.
“여기는 펠리컨11. 대기하겠다. 오버.”
커맨드 쉽의 불분명한 대답에 메이햄 대위는 무전기의 마이크를 손으로 가리고는 욕설을 내뱉었다.
“Shit! 일하는 거 하고는!”
짧게 욕설을 뱉은 메이햄 대위는 무전기의 채널을 바꿨다.
“여기는 펠리컨11. 모든 부대는 고도를 상….”
핑! 피피핑! 텅! 텅!
“잽의 총격이다!”
총알이 지나가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기체에 구멍이 뚫리는 소리.
도어 거너(Door Gunner)의 비명 섞인 무전에 메이햄 대위는 바로 헬기의 고도를 올렸다.
“어디서 날아온 총격이야!”
“파리안 요새입니다!”
도어 거너의 대답을 들은 메이햄 대위는 바로 커맨드 쉽을 호출했다.
“여기는 펠리칸11! 파리안 요새에 잽이 있다! 반복한다! 파리안 요새에 잽이 있다! 오버!”
-여기는 커맨드. 상공에서 대기하라. 곧 지상부대를 보내겠다. 오버.
“여기는 펠리칸11. Copy!”
* * *
자신들과 거의 동시에 도착한 미군의 오토자이로들이 총격을 받고 하늘로 도망가는 모습을 본 이와부치는 망원경으로 파리안 요새를 살폈다.
“육군이로군.”
중화기까지 소지한 군인들의 모습을 본 이와부치는 조금은 안심이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육군의 전령입니다.”
“들여보내.”
이와부치의 명령에 육군 소위가 안으로 들어와 이와부치에게 경례를 했다.
“하네다 소위입니다.”
“이와부치 제독이다. 육군이 온 것인가 ”
“아닙니다. 육군은 파시그 강 너머로 방어선을 치고 있습니다.”
“그럼 귀관들은 왜 이곳에 ”
“다리를 끊기 위해서입니다.”
“그런가 예정 시간은 ”
“앞으로 1시간 뒤입니다만, 앞당겨질 가능성이 큽니다.”
“파리안 요새에서 육군이 철수하고 있습니다!”
수병의 보고를 들은 하네다 소위는 이와부치에게 지금의 상황을 짧게 설명했다.
“적들의 신형 수송기들이 이곳까지 온 이상, 기갑부대들도 곧 올 것입니다. 따라서 최대한 빨리 다리를 폭파할 것입니다. 우리 육군과 같이 철수하시겠습니까 ”
평소라면 건방지다고 소리를 질렀을 상황이었지만 이와부치는 아무 말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육군과 같이 움직이겠다.”
“알겠습니다.”
투콰쾅!
30분 뒤, 퀘손 다리가 거대한 폭음과 함께 부서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