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
162화 태평양, 반격의 시작 작전명 질식(suffocation) (03)
영국과 네덜란드가 미국의 발목을 잡은 것은 그들의 이권이 달린 자원지대 때문이었다.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를, 영국은 말레이시아를 포기할 수 없었기에 미국의 발목을 잡았다.
계속해서 작전의 변경을 주장하며 두 나라가 발목을 잡아끌자 워싱턴은 두 나라의 대사를 불러 다음과 같이 미국의 의사를 전달했다.
“귀국의 사정은 알겠으나 우리는 그쪽까지 작전을 펼칠 정도의 병력이 없다!”
“그럼 수송선단이라도 지원해 달라!”
“미안하지만, 그쪽도 지금은 여유가 없다!”
“지금 미국의 조선소들에서 미친 듯이 찍어 대는 배들은 무엇인가! 여유가 없다는 말이 가당키나 하나!”
“진짜로 여유가 없다! 당신네들이 직접 선편을 마련하라!”
미국의 답변에 영국은 당장 호주 군과 뉴질랜드 군의 상당부분을 따로 편성하기 시작했지만 답답한 것은 네덜란드였다.
발락파판에서 합류한 네덜란드의 함선 몇 척과 소수의 경비대가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영국 역시 마냥 잘 풀리는 것은 아니었다.
북아프리카 지역의 전황이 잘 풀리지가 않은 까닭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페르시아 전선에 전력을 거의 집중한 미국 덕에 인력수급에 과부하가 걸린 영국으로 인해 영연방 국가들의 상황 역시 좋은 편은 아니었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캐나다 영연방 주력국가들에서 많은 수의 남성들이 징집되면서 해당 국가들의 사회도 심각한 구조적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캐나다로부터 들리는 앓는 소리가 무시할 수 없을 수준까지 올라갔다는 상황을 인식한 영국은 결국 눈물을 머금고 말레이시아 진격작전을 폐지하고 미군과 함께 작전을 벌여야 했다.
* * *
1943년 10월 하순, 다윈 항구 인근 상공.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한 기의 사이운(C6N 彩雲)이 정찰비행을 하고 있었다.
“날씨가 아주 좋습니다.”
“비행하기에 아주 좋은 날씨지.”
“조용히 해. 우리가 비행하기 좋은 날씨면 양키들도 비행하기 좋다는 소리다. 정찰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동료가 한둘이 아니야. 바짝 긴장하도록.”
느긋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항법사와 대공기총 사수는 조종사의 핀잔에 입을 다물고 근처의 하늘을 샅샅이 살폈다.
다윈 항구의 모습이 막 시야에 들어올 무렵, 헤드폰을 통해 조종사의 숨넘어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억!”
헤드폰을 통해 조종사의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리자 뒤에 앉아있던 항법사와 대공기총 사수가 놀라 마이크를 붙잡았다.
“무, 무슨 일입니까!”
“항구를 봐!(港を見て!)”
조종사의 고함에 다윈 항구를 바라보던 항법사와 대공기총 사수 역시 숨넘어가는 소리를 질렀다.
“허억!”
다윈 항구의 바다가 사라져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항구의 바다가 배들로 덮여 있었다.
이스트 포인트(East Point)부터 시작해 패니 베이(Fanny Bay), 라라케야(LArrakeyah)를 지나 다윈의 메인항구에 이르기까지의 넓은 지역에 정규 항공모함, 호위 항공모함, 순양함, 전함, 구축함, 수송선 등의 각종 함선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상황을 보던 항법사가 다급히 무전기의 키를 두들기며 모스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다윈 항구의 바다가 사라졌다.(ダ ウィン港の海が消えた.)
무선을 보낸 항법사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카메라를 들어 항구의 사진을 찍었다.
바로 그때, 적 전투기를 발견한 대공기총 사수가 고함을 질렀다.
“적 전투기! 바로 위! 급하강!(敵の 機! 上!級降下!)”
대공기총 사수의 비명과도 같은 고함을 들은 사이운의 조종사는 재빨리 조종간을 옆으로 꺾으며 방향타의 페달을 바닥을 뚫을 것처럼 힘껏 밟았다.
요란한 엔진 소리와 함께 사이운은 급선회를 시작했고, 적 전투기인 2기의 콜세어가 그 사이운의 뒤를 맹렬하게 쫓았다.
* * *
“콜세어들의 보고입니다. 적 정찰기를 무사히 쫓아냈다고 합니다.”
참모의 보고에 맥아더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파이프에 불을 붙였다.
그 모습을 보던 참모 하나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여태까지 해 왔던 것처럼 격추를 시키는 것이 낫지 않았겠습니까 ”
다윈항 인근 지역에는 미군이 설치한 이동식 레이더가 빽빽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레이더를 설치한 구축함들까지 포함해 다윈 항구 인근의 대공경계망의 그물은 엄청나게 촘촘했고, 그 결과 오늘 일이 있기 전까지 다윈항까지 접근한 일본군의 정찰기는 단 한 대도 없었다.
그래서 격추가 아닌 그냥 쫓아내기만 한 것에 대해 걱정이 가득한 참모의 물음에 맥아더는 파이프를 입에서 빼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딱 적당한 시점이야. 이제부터 일본군의 눈은 바로 이곳, 다윈과 이어서 티모르에 고정되어 버릴 거다. 그리고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에 단단히 틀어박히겠지.”
“과연 속을까요 ”
“이곳에 모인 병력만 내 휘하의 병력 가운데 30%다. 그리고 그 30%를 다 티모르 섬에 쏟아 부을 거고,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어,”
맥아더와 미국의 계획은 최대한 빠르게, 그리고 최소한의 손실로 일본 본토로 가는 자원 수송로를 막아 버리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남방 자원지대에 주둔한 일본군들과의 전투를 벌이는 것은 사절할 일이었다. 시간과 자원의 소모가 비효율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맥아더는 느긋한 표정으로 파이프를 입에 물며 참모에게 말했다.
“오늘 저 잽의 정찰기가 자원지대에 몰려있는 일본군들의 발에 족쇄를 채워 줄 것이다.”
* * *
“야! 무슨 전보를 그딴 식으로….”
콜세어의 추격에서 무사히( ) 탈출한 사이운이 착륙하자마자 책망을 하려고 달려온 정찰기 부대 지휘관은 걸레가 되어 버린 사이운의 수직미익을 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조종석에서 내린 정찰기 조종사는 다급한 목소리로 보고를 했다.
“다윈 항구에 미군의 대규모 함대가 밀집되어 있습니다!”
“대규모 ”
“항구의 수면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조종사의 보고에 이어 항법사까지 거들고 나서자, 지휘관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촬영은 했나 ”
지휘관의 물음에 항법사는 자신이 손에 들고 있던 대형 카메라를 들어 보였다.
카메라를 본 지휘관은 따라온 장교에게 명령을 내렸다.
“즉시 인화해서 가지고 오도록!”
“핫!”
“이 미친….”
자신이 책상 위에 도착한 사진들을 보던 지휘관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다윈 항구 인근의 지역만을 찍었을 뿐인데도 온갖 종류의 군용 선박들이 다 들어있었다.
한참동안이나 사진들을 보던 지휘관이 책상 앞에 부동자세로 서 있던 조종사와 항법사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다윈에만 이렇게 집중되어 있었나 ”
“다윈 인근 지역에 관찰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는 배를 댈 수 있는 곳에는 다 저렇게 몰려 있었습니다.”
“알았다, 수고했어. 나가 봐.”
조종사와 항법사를 내보낸 지휘관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몇 번이고 한숨을 내쉬며 사진들을 보던 지휘관은 부하 장교를 불렀다.
“이 사진들 추가 인화해서 하나는 남방사령부로, 다른 하나는 일본으로 보내도록. 시간이 없으니까 사이운에 실어서 보내.”
“핫!”
부하장교에게 명령을 내린 지휘관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군.”
* * *
다윈 항구의 영국 해군 사령부.
“미친 양키 놈들! 배가 없다더니!”
사령관 버튼 제독은 항구를 가득 채운 미군의 배들을 보며 분통을 터뜨렸다.
그 역시 자국 정부가 미국에게 배를 지원해 달라고 했다가 물을 먹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항구의 수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들어찬 미군의 함선들과 바람에 물결치는 엄청난 수의 성조기들을 보고 화를 참을 수 없게 된 것이었다.
거기에 버튼 제독의 화를 더 돋은 것은 지금 다윈항과 인근지역-인근이라고 말하기에는 꽤 거리가 있는 이스트 포인트까지-의 작은 항구들은 물론이고 배를 댈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닻을 던진 채 정박하고 있는 저 빌어먹을 미국 배들은 미국이 태평양 전선에 배치한 선박들 가운데 일부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런 미국의 엄청난 물량에 질리고, 저런 물량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머니를 열지 않는 미국에 대해 화가 잔뜩 오른 버튼 제독의 속을 터뜨려 버린 것은 정박한 미군의 함선들마다 스피커가 터져나가라 틀어 대는 음악들이었다.
“I’m on a boat! I’m on a boat!”
“In the Navy~”
지중해에서 첫 선을 보인 The Lonely Island의 ‘I’m on aboat’는 물론이고 ‘Village People’의 ‘In the Navy’가 추가된 해괴망측한 노래들이 항구를 뒤덮고 있었다.
문제는 자랑스러운 영국 해군의 수병들까지 문제의 노래들을 따라 부르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참다 못 한 버튼 제독의 명령에 의해 문제의 노래를 부르다 걸린 영국 수병들은 영창에 들어갔지만 노래가 퍼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결국, 버튼 제독은 미 해군의 제독들에게 공문을 보냈다. 하지만 미 해군 제독들의 답변은 그의 기대를 무너트렸다.
‘비록 문제의 노래들이 품위는 없지만, 전장에 나온 수병들의 사기를 앙양시키는 일에 큰 도움을 준 노래들이다. 그러므로 영국 해군의 요청은 거절한다.’
답변을 날린 미 해군의 제독들은 코웃음을 쳤다.
“흥! 매번 손만 내미는 것들이 자존심만 세서는!”
“품위 품격 해적으로 시작한 놈들이 뭐라는 거야 ”
사실 미국 해군이 영국 해군에 가지는 감정은 좋은 편이 아니었다.
멀게는 독립전쟁 때부터, 가깝게는 1812년에 대차게 붙은 적이 있었다. 거기에 더해 1차 대전에서도 미국에 손을 벌렸고, 이번 전쟁에서도 미국에 손만 내미는 주제에 뒤로는 ‘미국 촌것들!’이라며 호박씨나 까는 이들이 영국인들이었다.
거절의 편지를 보낸 제독들은 휘하 함선들에 비공식 전문을 보냈다.
“노랫소리가 작다! 좀 더 크게 틀어라!”
항구에서는 참으로 저질스런 가사들로만 구성된 음탕한 노래가 흘러나오고, 외출 나온 미군 수병들로 인해 항구 인근 펍들의 술이 씨가 말라 버리는 상황이 지속되자, 마침내 다윈 시의 지역신문인 다윈 타임즈에는 ‘Yankee invasion! (양키의 침략)’이라는 제목을 단 사설이 실릴 정도였다.
그렇게 다윈과 인근의 지역들을 홀라당 뒤집어 놓은 미군들과 그들의 배가 어느 날 아침, 모두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가기 시작했다.
부두와 인근의 해안에서 바다로 향하는 미군의 배들을 보던 호주인들은 모두 한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신의 가호가 있기를….”
* * *
1943년 10월 15일 새벽, 티모르의 수아이.
먼동이 터오를 무렵, 고기를 잡기 위해 배를 준비하던 수아이의 어부들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바다를 바라봤다.
어제까지만 해도 자그마한 어선들만이 있던 수아이 앞바다를 거대한 전함들이 시야를 막고 있었다.
“뭐, 뭐야….”
해안의 모래사장에 모여든 어부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시야를 가로막고 있던 전함들의 주포탑이 서서히 회전을 하더니 자신들이 있는 쪽을 향해 포구를 겨눴다.
쾅! 콰쾅!
콜로라도 급 전함들의 주포들이 일제히 불을 뿜으며 티모르 상륙작전의 시작을 알렸다.
전함들과 중순양함들의 주포가 연신 포격을 하는 가운데 폭탄을 만재한 해군의 돈틀레스와 어벤저들이 하늘을 가득 메웠고, 해병들을 가득 실은 LVT(Landing Vehicle Tracked.상륙장갑차)들이 수아이의 앞바다를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