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
143화 늪 (22)
“달려! 달리라구!”
“히익! 상등병님!”
“돌격! 돌격이란 말이다! 이 비리비리한 샌님 같은 녀석아! 돌격!”
“힉! 히이익!”
미군이 쏘아 댄 조명탄 때문에 환해진 공간에서 다나카 이쥬로 상등병은 분대의 신병인 다나카 요시키 이등병의 멱살을 붙잡고 함께 앞으로 달렸다.
다나카라는 같은 성을 쓰는 까닭에 상등병의 고참들은 이 어리바리한 인텔리 신병-와세다 대학출신-의 관리를 다나카 상등병에게 맡겼다.
다나카 이등병이 실수를 하거나 어리바리한 모습을 보일 때마다 고참들과 그 윗선의 간부들은 다나카 상등병에게 폭력을 가했고, 다나카 상등병은 다나카 이등병에게 그대로 그 폭력을 전달했다.
하지만 다나카 이등병의 동기들은 다나카 이등병을 복 받은 놈이라고 불렀다.
다나카 상등병이 다나카 이등병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때는 다나카 이등병 때문에 자신이 얻어맞을 때뿐이었다.
그리고 다나카 상등병은 정확하게 자신이 맞은 만큼만 다나카 이등병을 두들겨 팼고, 그 이후에는 다나카 이등병이 실수한 부분을 반복해서 학습시켰다.
다나카 상등병은 다나카 이등병의 뒷덜미를 붙잡고 달리며 고함을 질렀다.
어리바리한 이등병 때문에 두 사람은 돌격을 하는 무리들의 뒤로 처졌기 때문이었다.
이 상태라면 운이 좋아 전투가 끝나고 살아남는다고 해도 엄청난 수준의 체벌이 예약된 상황이었다.
“돌격! 돌격이라고 외쳐! 제국 육군의 이름에 먹칠을 하지 마라! 돌격을 외치면서 달리는 거다! 돌격!”
“도… 돌격!”
“더 크게! 돌격!”
“돌겨어억!”
있는 힘껏 돌격을 외치던 다나카 이등병이 갑자기 앞으로 고꾸라졌다.
뒷덜미를 잡고 있던 탓에 덩달아 넘어진 다나카 상등병은 잔뜩 화를 내며 다나카 이등병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어리바리한….”
뭐라 한마디 욕을 하려던 다나카 상등병은 말을 멈추었다, 땅에 쓰러진 다나카 이등병이 배를 움켜쥐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움켜쥔 손가락 사이로는 붉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야! 이 자식아! 위생병!”
자신도 모르게 다나카 이등병의 복부를 억누르며 다나카 상등병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위생병을 불렀다.
그리고 다나카 상등병은 조명탄들이 만들어낸 조명 속에 지옥도를 볼 수가 있었다.
기관총들에서 발사된 예광탄들이 붉은 빛의 그물을 허공에 짜고 있었다, 그 그물 안에 들어간 일본군들은 말 그대로 픽픽 쓰러지고 있었다.
군도를 뽑아든 간부들도, 붉은 원과 함께 ‘필승(必勝)’이라는 문구를 쓴 머리띠를 두른 병사들도 그 그물 안에 들어가는 순간 그대로 땅에 쓰러졌다.
영화에서처럼 허우적거린다거나 비틀거리거나 하는 이들은 하나도 없었다.
붉은 그물 안에 들어가는 순간 억지로 세워놓았던 나무 장작이 쓰러지는 것처럼 모래벌판에 쓰러져 나갔다.
“빌어먹을! 위생병!”
멍하니 그 모습을 보던 다나카 상등병은 정신을 차리고는 위생병을 부르며 고개를 뒤로 돌렸다.
자신들이 달리기 시작한 뒤쪽을 바라봤을 때, 다나카 상등병의 눈에 척탄통과 99식 경기관총들이 모인 진지에 폭탄이 떨어지는 광경이 들어왔다.
쾅!
거대한 붉은 화염과 함께 조명탄의 밝은 빛 속에 폭발의 폭풍에 휘말린 동료병사의 몸뚱어리가 하늘로 떠오르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하늘로 떠오른 병사의 몸에서 옷들이 찢겨져 나가고 뒤이어 병사의 맨몸뚱이가 조각조각 분해되는 광경을 본 다나카 상등병은 자신이 있는 곳이 현실인지 이미 죽어 지옥에 온 것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쾅!
“욱!”
저 앞에서 터진 포탄의 폭발에 다나카 상등병은 몸을 납작 엎드렸다.
“아으으… 상등병님….”
조금만 고개를 들어도 바로 죽어 나갈 것이 확실한 상황에서 옆에 쓰러진 다나카 이등병이 신음을 흘리며 자신을 찾는 모습에 다나카 상등병은 욕설을 내뱉었다.
“이런 빌어먹을!”
욕설을 뱉은 다나카 상등병은 땅바닥에 엎드린 채 군복의 주머니를 뒤졌다.
다행히 독일어가 능숙한 다나카 이등병을 통해 안면을 트게 된 독일군에게서 구한 응급키트를 꺼내기 위해서였다
어렵사리 감춰 갔고 온 청주 한 병을 넘기고 2개를 얻었던 응급키트였고, 열악한 일본군의 의료체계를 잘 알고 있던 다나카 상등병의 목숨을 지키기 위한 소중한 보물이었다.
양철로 만들어진 응급키트 케이스를 꺼내 든 다나카 상등병은 다나카 이등병을 똑바로 눕혔다.
“빌어먹을 자식아! 좀 참아라!”
다나카 이등병의 상의를 풀어 헤친 다나카 상등병은 상처에 가루약을 뿌리고 동봉되어있던 붕대로 상처를 둘러쌌다.
모르핀까지 주사한 다나카 상등병은 다나카 이등병을 주변을 살피다가 바로 앞에 쓰러져 있는 동료 일본군의 시체를 움켜쥐고는 자신들의 앞으로 끌어당겼다.
전우의 시체를 모로 세워 방벽을 만든 다나카 상등병은 다나카 이등병을 방벽 뒤로 옮기고는 소총을 움켜쥐었다.
십중팔구 죽을 것이 확실했지만 상등병까지 진급하는 동안 그의 머리에 새겨진 ‘상명하복’과 ‘무조건 돌격’의 명령은 그에게 돌격을 하도록 강요하고 있었다.
다나카 상등병이 다시 돌격을 하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 할 때, 다나카 이등병이 그를 붙잡았다.
“가… 가지 말아요.”
“야! 이 자식아! 돌격 명령이란 말이다! 다른 동료들은 계속 돌격을 하고 있단 말이다!”
“날 혼자 두지 말아 주세요….”
“이 나약한 놈아!”
거칠게 다나카 이등병의 손길을 떼어 낸 다나카 상등병이 몸을 일으켰을 때, 총탄이 그의 왼쪽 어깨를 관통했다.
“아악!”
비명과 함께 다나카 상등병은 땅에 쓰러졌다.
* * *
“탄이 떨어졌다!”
“탄창교환! 탄창교환!”
“탄통 가져와! 탄통!”
만조 때 해변으로 밀려드는 바닷물처럼 밀려드는 일본군을 상대로 방어전을 펼치는 한국군 역시 쉬운 상황은 아니었다.
방어선에 미리 준비해 놨던 예비탄약들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탄약을 요청하는 다급한 목소리가 여기저기에서 튀어나왔다.
탄약의 수급을 맡은 이병과 일병들이 양손에 탄약통을 든 채 교통호를 따라 이리저리 내달렸다.
“총열교환! 총열교환!”
M60E6의 사수가 붉게 달아오른 총열을 교환하기 위해 방벽에 올려놓았던 M60기관총을 끌어내리자 부사수가 소총을 들고 빈자리를 메웠다.
사수는 M60의 피드커버를 열고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달아오른 총열을 빼내고 예비총열을 끼워 넣었다.
아직도 벌겋게 달아있는 총열을 한쪽에 세워놓은 사수는 탄띠를 다시 결합한 다음 부사수의 어깨를 두들겼다.
신호를 받은 부사수가 옆으로 비키자 사수는 모래주머니 위로 M60을 올리고는 일본군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 * *
2차 대전의 전선에서 독일과 미국의 보병 분대간의 전투를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MG42 VS. M42’이었다.
GPMG(General Purpose Machine Gun, 다목적기관총)의 시발점이자 전후까지 기준점으로 자리한 두 총기의 경쟁은 일장일단이 있었다.
독일의 MG42의 경우 분당 1200발의 발사속도와 우수한 내구성이 있었다면 미군의 M42 경우에도 MG42만큼 빠르지는 않지만 적절한 발사속도와 확실한 신뢰성을 자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군의 M42가 독일의 MG42에 확실한 우위를 가진 부분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총열교환이었다.
독일군의 MG42의 총열교환 자체는 간단했지만 석면장갑과 같은 부수장비가 필수였다면 미군의 M42는 총열에 부착한 운반손잡이 자체가 총열교환용 손잡이가 되어버리는 설계상의 이점을 자랑하고 있었다.
종합적인 전력에서 독일군의 MG42가 근소한 우위를 차지하게 만들어준 물건은 총자체가 아니라 삼각대였다.
- 1995년 히스토리채널의 다큐멘터리 ‘역사의 라이벌- MG42 VS. M42’의 일부분.
* * *
“에잇! 이놈의 물건은 쏠 때는 좋은데 탄띠 물리는 게 문제야!”
개틀링의 급탄 벨트에 탄띠를 밀어 넣으며 개틀링 사수는 욕설을 내뱉었다.
전투 시작 전 1200발이 들어간 탄통 두개를 결합해 준비를 했지만 2400발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직도 일본군들은 밀려오고 있었고, 개틀링의 사수와 부사수는 커다란 탄통들을 붙잡고 씨름을 해야 했다.
정식장비가 아니라 임시변통으로 만든 갈고리를 이용해 탄띠를 급탄 벨트의 끝까지 끌어올린 사수는 피드 커버를 열고 탄띠를 밀어 넣었다.
손으로 총열을 돌려가며 탄약을 물리는 것까지 끝낸 사수는 피드 커버를 닫고는 모터의 스위치를 켰다.
모터의 이상 유무를 알리는 신호판의 녹색전구가 빛나는 것을 본 사수는 고함을 질렀다.
“장전 끝!”
커다란 조준환에 일본군들을 집어넣은 개틀링 사수는 삽자루형 권총손잡이 사이에 만들어진 스위치를 눌렀다.
바아아아악!
총탄의 소나기가 다시 쏟아지면서 일본군들은 다시금 경계선 밖으로 밀려나야 했다.
* * *
새벽 5시. 먼동이 밝아오는 하늘을 배경으로 일본군은 전투를 단념하고 후퇴하기 시작했다.
“일본군들이 물러간다!”
“잽들이 물러간다!”
“이겼다!”
“와아아아!”
일본군들이 물러가는 것을 확인한 미군과 한국군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는 가운데, 지휘벙커에서 상황을 살피며 지휘를 하던 이청천의 지친 얼굴에도 미소가 피어올랐다.
자리에서 일어선 이청천은 지휘본부에 자리한 지휘관들을 치하했다.
“수고했소.”
“수고하셨습니다!”
서로 상찬(賞讚)의 말을 나누고 악수를 교환하는 가운데 이청천이 벌레와 그 부하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고생했네.”
“감사합니다.”
드론 조종과 포격관제, 통신 관제를 담당한 한국군과 미군 병사들에게 치하를 한 이청천은 벙커를 나와 외곽 경계선으로 움직였다.
지나는 교통호마다 발에 수북하게 쌓인 빈 탄통들을 본 이청천이 부하들을 근처의 중위를 붙잡고 질문을 던졌다.
“탄환소모가 예상보다 많았던 것 같군 ”
“일본군들이 돌격을 포기하지 않아서 소모가 컸습니다, 그래도 그 덕에 우리 애들의 피해가 적었습니다만….”
“손실이 어느 정도였나 ”
“제 소대에서는 다행히 전사나 중상자들은 안 나왔습니다, 경상자들만 다섯이 나왔으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다행이로군, 자네 말처럼 감사할 일이야. 가서 일 보게.”
“예.”
중위를 보낸 이청천은 참모에게 명령을 내렸다.
“다들 지쳤을 테지만 최대한 빨리 피해를 집계해서 올리라고 전하게.”
“알겠습니다.”
가장 외곽의 경계선으로 갈수록 이청천의 얼굴은 점점 딱딱해져갔다.
임시방편으로 모아 놓은 탄피들과 링크들이 여기저기 수북하게 쌓여 있었고, 잔뜩 그을린 기관총의 총열들이 여기저기 굴러다니고 있었다.
피곤한 얼굴로 주저앉아 총기들을 손질하던 병사들은 이청천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쉬어.”
“쉬어!”
“그래, 총기에 문제가 많은가 ”
“이상은 없었습니다만, 지난 전투에서 무리를 했기 때문에 점검 중입니다!”
“그래. 잘 점검하도록. 일본군이 언제 또 몰려올지 모르니까.”
흐뭇한 얼굴로 병사들을 바라본 이청천은 모래주머니를 쌓아 만든 방벽에 뚫린 총안구를 통해 교전지역을 바라봤다.
“끔찍하군….”
가깝게는 외곽방어선 전면 250m부터 갈색 군복을 입은 일본군들의 시체가 땅을 덮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는 밤새도록 쏘아 댔던 조명탄들의 낙하산들이 처박혀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낙하산들은 바람에 펄럭였고, 이는 갈색의 땅에 하얀 꽃밭이 펼쳐진 느낌을 주었다.
그런 살풍경한 현장에 착검한 소총을 든 병사들이 생존자를 수색하는 광경을 보던 이청천이 따라온 지휘관들을 돌아봤다.
“우리가 아는 일본 놈들이라면 또 몰려오겠지 ”
“당연히 몰려올 것입니다.”
한반도에서, 만주벌판에서, 중국 본토에서 질리도록 일본 놈들을 상대해봤던 지휘관들은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지휘관들이 동의를 하자 이청천이 명령을 내렸다.
“병사들을 셋으로 나눠서 돌아가면서 휴식을 취하도록 시키게.”
“알겠습니다.”
“그리고 탄약과 예비총기들을 충분히 공급해놓도록.”
“예비총기들까지 말입니까 ”
“지금 병사들이 점검을 하지만 저런 돌격이 이어진다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야. 탄약도 충분히 있어야 하지만 그 탄약을 제대로 써먹을 총기들도 충분히 있어야 해. 적어도 한 자루씩은 여분으로 챙길 수 있도록 분배해, 들고 뛸 일 없는 방어전의 이점을 살려야하지 않겠나 ”
“알겠습니다.”
“그리고… 미군에게 연락해서 굴착기와 불도저들을 좀 수배해서 갖고 오도록.”
“굴착기와 불도저 말입니까 진지를 확장하실 겁니까 ”
“아니.”
짧은 대답과 함께 고개를 가로저은 이청천은 일본군의 시체무더기들을 가리켰다.
“저거 치워야지. 그냥 놔두면 작게는 적군의 엄호물이 될 것이고 크게는 전염병의 근원이 될 거다. 지금 병사들이 다 지쳤는데 삽질까지 시킬 수는 없지 않나 거기에 더해 일본군들이 언제 다시 올지 모르니 빨리 처리해야지.”
“바로 수배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