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
138화 늪 (17)
원 준장의 기도가 좀 늦게 통했는지 2주 뒤, 아이젠하워의 전령이 한국군 주둔지로 달려왔다.
전령의 말을 들은 이청천은 원 준장을 불렀다.
전투 후 사상자 통계와 기타 보급물자 소모에 관한 보고서를 정리하던 원 준장이 회의용 텐트에 들어섰을 때, 다른 지휘관들은 모두 참석을 한 다음이었다.
“좀 늦었습니다.”
“아닐세. 자네가 가장 바쁠 텐데 불러서 내가 미안하이. 상황이 상황이라서 말일세.”
원 준장까지 자리에 앉자 이청천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이젠하워에게서 연락이 왔소. 일본군의 흔적을 잡았다고 하오.”
“드디어!”
‘일본군의 흔적을 잡았다.’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텐트 안은 흉흉한 살기가 가득 찼다.
일본군이 페르시아만으로 들어와 상륙을 했다는 것은 한참 전에 들어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정보를 접했을 당시 모두의 예상은 강을 끼고 북상을 해서 독일군과의 접촉을 시도함과 동시에 중앙아시아 지역에서의 소련의 영향력을 제거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일본군의 행보는 예상을 사실로 만들고 있었다.
상륙 이후, 해당지역의 원주민들이 인편으로 보내오는 소식에 따르면 일본군의 진군 속도는 미군의 예상보다는 늦었고, 한국군의 예상보다는 조금 빠른 수준이었다.
한미 양국의 참모들은 이유를 분석했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일본군의 차량화 수준은 질과 양 모두 미군의 예상보다 열등하고, 도보 행군 수준은 한국군의 예상보다 뛰어나다!
말 그대로 일본군은 잘 걷는 부대였다.
문제는 그런 보병들을 엄호할 중화기들을 견인할 차량들의 수준이 저질이라는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수운이 제대로 정비된 강에서는 빠른 속도를 내는 반면 조금이라도 수운에 문제가 있는 지역에서는 속도가 확 떨어지는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일본군의 상륙 이후 거의 2달이 되어 갈 무렵, 한국과 미국의 연합 함대가 일본 해군을 쓸어버렸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잽들이 모조리 다 포기하고 돌아가는 것은 아닐까 ”
“설마... 지금까지 전진한 거리가 아까워서라도 후퇴는 안 할걸 ”
심각한 타격을 입은 일본군이 보일 행보에 대해 설왕설래를 하고 있을 때, 일본군이 다시 전진을 시작한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하지만 그 속도는 매우 느렸고, 신중했다.
그리고 오늘, 일본군이 드디어 독일군과 접촉을 했다는 보고가 들어온 것이었다.
“그래서 현재 일본군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
끓어오르는 살기를 가라앉히며 원 준장이 질문을 하자 이청천은 지도의 한곳을 가리켰다.
“알 트와르. 이곳 홈스에서 200km정도 떨어진 곳일세.”
“교전을 벌이지 않고 시속80km로 밟는다면 3시간 정도면 갈 수 있는 곳이로군요.”
“그렇지. 그 사이에 죽치고 앉아 있는 독일군과 유대군만 없다면 말이지.”
홈스에서 알레포까지 가는 통로에는 잘 무장된 독일군과 유대군들이 모여 있었다.
확인된 병력만 10만에 온갖 중화기와 대구경 야포, 그리고 전차들을 보유한 강력한 세력이었다.
“아이젠하워는 한 달만 기다리자는 의견을 보내왔네. 다음 수송 선단 편으로 신형전차들이 수송될 예정이라고 말이야, 신형전차로 무장한 신규 사단들이 전투에 지친 부대와 교대를 하게 된다면 전력이 강화될 것이고 그러면 다시 밀어붙일 수 있다는 말을 전해왔네.”
“미군의 사정은 알겠습니다만, 우리의 사정도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들도 지쳤습니다. LA로 돌아가 휴식과 정비를 해야지 맥아더의 필리핀 진공에 맞춰 본토진공이 가능해집니다.”
원 준장의 대답에 이청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 점은 계속 이야기를 해왔네만…. 아이젠하워도 쉽지가 않은 모양이야. 당장 독일 놈들의 티거 전차를 마음대로 사냥할 수 있는 전차는 우리가 가진 전차밖에 없고, 그동안 우리의 정찰자산에만 의존을 하다 보니 우리를 보내고 난 후에도 이 전선에서 우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을 못하고 있네.”
“이 녀석들 그렇게 설치고 다니지 말라니까….”
벌레와 빨갱이들에 대한 자랑 반 미움 반이 섞인 목소리로 불퉁거리던 원 준장이 질문을 이었다.
“LA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
“만약 시간을 못 맞출 것 같다면 확실한 뒷마무리를 하고 오라고 하더군. 맥아더가 하루 이틀 안에 필리핀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니 말이야.”
“그렇긴 합니다만… 또 말이 바뀌면서 지루한 설득을 반복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돼서 말입니다.”
미국의 태평양전선 전략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한국의 본토진공을 끼워 넣느라 온갖 고생을 했던 지난 시간을 떠올리며 걱정을 하는 원 준장의 말에 이청천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걸 걱정을 하기는 했는데, 워싱턴에서 계획의 변동은 없다고 보증을 했네. 정 수석차관이 아예 문서로 받아 왔다고 하더군.”
“그럼 다행입니다.”
“그러니까 좋게 생각하도록 하세나. 미군은 강화된 신규전력이 올 때까지 든든한 동맹이 있어서 좋고, 우리는 미국에게 생색도 낼 수 있고. 서로 좋은 것 아닌가 그리고 혹시 아나 일본군이 먼저 나서서 덤벼들지 ”
“그렇게 일을 벌이기 딱 좋은 지휘관 하나를 알고 있습니다만. 과연 그가 이곳에 왔을지 모르겠습니다.”
이청천의 말에 작게 중얼거리는 원 준장이었다.
나흘 뒤, 이청천 장군이 다시금 지휘관들을 불러 모았다.
“아랍 부족들이 일본군 지휘관에 대한 정보를 알아냈네. 무다구치 렌야라고 하던… 응 ”
설명을 하던 이청천이 송 소장과 원 준장을 보며 말을 멈췄다.
“자네들. 얼굴이 왜 그런가 무슨 10년 독수공방한 과부가 샛서방 만난 표정일세 그려 ”
이청천의 물음에 송 소장과 원 준장이 웃음을 머금고 대답했다.
“무다구치 렌야라면 21세기의 젊은이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독립유공자’라고 말입니다.”
“응 ”
* * *
무다구치 렌야가 어떠한 이물이었는지 송 소장과 원 준장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서 자세하게 설명을 했다.
“그러니까…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은 실격. 그나마 옹호할 만한 것이라면 전쟁수칙을 지켰다는 거 하나 그 정도인가 ”
“그 정도입니다.”
송 소장의 대답을 들은 이청천과 이병석, 그리고 다른 독립운동가 출신의 고급지휘관들은 다들 심기가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문제라도…설명이 부족한가요 ”
원 준장의 물음에 이청천이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아니야. 단지 조금 억울해서 그러네. 저런 인간들한테 나라를 뺏겼다는 것이 억울해서….”
“그동안 우리가 했던 노력들은 무엇이었던 건지….”
“자괴감이 느껴지는구먼….”
원로 독립운동가들의 푸념에 할 말이 없어진 송 소장과 원 준장이었다.
독립운동가들의 분위기가 바닥을 뚫고 유전이라도 팔 기세로 가라앉는 것을 본 송 소장과 원 준장은 급히 화제를 돌렸다.
“일본군이 독일군과 접촉을 했고, 본격적으로 병력들이 모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치는 것이 낫겠습니까 아니면 기다리는 것이 낫겠습니까 ”
“응 그건 생각을 좀 해 봐야겠군. 지금 당장 우리 병력이 3만만 되었어도 당장 치고 들어갔겠으나….”
이청천은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한미 연합군 내에서 한국군은 독립 여단의 대우를 받고 있었지만 실제 병력은 여단 규모에도 못 미치는 상황이었다.
독일군과 유대군에 의해 중국-중앙아시아 루트가 막히기 직전 LA에 도착해 한창 훈련을 받고 있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들의 수는 다 합쳐서 200도 안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본토 진공 후 새로 구성될 경찰 업무를 맡을 헌병 교육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고민을 하던 이청천이 결론을 내렸다.
“기다리도록 하지. 자네들이 말한 그 무다구치 렌야라면 가만히 앉아만 있을 인간은 아닐 테니까….”
* * *
“빌어먹을!”
독일군이 지원해 준 일본군의 사령부 건물. 사령관 집무실에 들어앉은 무다구치 렌야는 욕설을 내뱉고는 컵에 물을 채워 벌컥벌컥 들이켰다.
연거푸 물을 들이켠 무다구치는 당번병을 불렀다.
“야! 물 떨어졌다! 물 가져와!”
“하, 하잇!”
“얼른 움직여! 이 느림보 자식아!”
“하, 하이잇!”
조금이라도 반응이 늦었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랐기에 당번병은 후다닥 크리스탈 물병에 가득 물을 채워다 무다구치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무다구치가 분통을 터뜨리게 된 것은 독일군이 자신들을 대하는 태도 때문이었다.
처음 일본군들이 도착했을 때, 독일군들은 그들을 열렬하게 환영을 해주었다. 하지만 선봉진의 본대가 도착하고 야포들을 비롯한 중화기들을 제대로 볼 기회가 생기면서 독일군들이 일본군들을 대하는 태도가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독일군은 일본군을 2선급 부대로 취급하고 있었다.
“도저히 못 참겠다! 도조 사령관에게 전문을 보내겠다!”
열이 받은 무다구치는 도조에게 울분에 가득 찬 전문을 보냈다.
불평불만이 가득한 무다구치의 전문을 받아든 도조는 바로 무다구치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무다구치를 앞세운 도조는 독일군 사령부와 접촉을 했다.
독일군과 유대군의 사령관 빌헬름 리터 폰 레프 원수와 함께한 자리에서 도조는 일본군이 전선에 나서야 한다고 강변을 했다.
“우리 대일본제국의 황군(皇軍)이 왜 뒤로 물러서야 하오! 우리는 유람을 하러 이곳까지 온 것이 아니외다!”
“먼 거리를 온 병사들의 휴식도 필요하고 기후에 대한 적응도 필요한 법입니다.”
“우리 위대한 황군을 그런 오합지졸로 취급하지 마시오! 우리 황군이라면 그런 쓸데없는 일에 시간낭비를 하지 않소!”
도조의 대답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던 레프 원수가 직설적으로 대답을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일본국의 군대는 문제가 많소이다! 병사들의 자질은 우수할지 모르겠으나, 장비들의 수준은 형편없소! 내가 일본국의 군대를 처음 봤을 때 지난 전쟁의 병사들을 본 것 같았소! 소총은 그렇다 칩시다! 기관총은 그게 뭐요! 야포들과 전차들은 또 어떻고! 그런 장비들을 끌고 전선에 나가 미군과 전투를 벌인다 하! 일본국의 병사들이 죽는 것은 내 상관 안 하지만 그 일로 인해 우리 병사들이 죽어 나가는 꼴은 못 보겠소!”
“말 다했소 난 도조 히데키야! 일본제국의 총리대신까지 했던 사람이야! 그런 나를 무시하고 우리 대일본제국의 용맹무쌍한 황군들을 모욕해! 내가 가만히 있을 것 같나! 당장 히틀러 총통에게 따지겠어!”
“마음대로 하시오!”
멱살잡이 직전까지 간 상황에서 도조와 무다구치는 씩씩거리며 레프 원수의 사령부를 벗어났다.
도조와 마찬가지로 열이 바짝 오른 레프 원수는 주변에 자리한 장교들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빌어먹을 아시아의 미개한 원숭이들! 지금 저 사막 건너편에 있는 양키들이 어떤 놈들인지 모르는 건가! 저런 무장으로 싸움을 걸었다간 바로 전멸이야! 몰살이라고! 그나마 동맹국이라고 사정을 봐줬더니 어디서 망발이야, 망발이! 부관!”
“예! 원수 각하!”
“지금 당장 보고서를 작성하겠다. 총통의 책상 위로 최대한 빨리 가져다 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야볼!(Jawohl!)”
* * *
부관이 무슨 수를 썼는지 1주일이 지나지 않아 히틀러의 명령서가 도착했다.
히틀러의 친필 사인이 곁들여진 명령서의 내용은 짧고 간단했다.
- 우리 독일의 귀중한 동맹국의 군대니 독자적인 작전권을 부여하고 지원을 할 것. 단, 현재 전선과 우리 군의 상황에 악영향이 가는 것은 최대한 피하라. 총통. 아돌프 히틀러.
명령서의 내용을 본 레프 원수는 피식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한번 제대로 당해 보라는 소리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