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
99화 작전명 ‘유사(流砂, quicksand)’ (2)
이틀 후, 새벽.
엘 아리쉬의 해변가.
1차로 해변에 도달한 십여 척의 미 해군 LST(Landing Ship Tank. 전차상륙함)의 선수가 열리고 커다란 강철 그물 매트를 화물칸에 가득 실은 트럭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퉁~. 퉁!
트럭에 장치된 도르래 장비들을 통해 널찍한 매트들이 깔릴 때마다 요란한 소리가 사방을 채웠다.
그리고 잠시 후, 해변을 지나 단단한 지반까지 연결되는 강철의 길이 설치되었다.
작업을 끝낸 트럭들을 다시 태운 LST들이 물러나고 뒤이어 또 다른 LST들이 몰려오면서 미군의 본격적인 상륙이 시작되었다.
* * *
미군이 열심히 상륙을 하는 해변에 면한 언덕 위에서는 한 무리의 영국군들이 모여 미군을 바라보고 있었다.
“히야~ 열심히들 내리네.”
“저 트럭들 봐라. 과연 양키들이네.”
“물자들이 좀 많은데 ”
“정말 많군. 지난 전쟁에 참전하셨던 우리 아버지께서 늘 하시던 말씀이 ‘양키는 물자가 넘쳐난다.’였는데 말이지….”
LST와 LC(상륙주정)들을 통해 열심히 육지로 올라오는 미군과 미군의 물자들을 보며 잡담을 떠들던 영국군들은 점점 말이 없어졌다.
미군 1진의 상륙이 끝나고 2진의 상륙을 담당한 LST들과 화물선들이 몰려오자 언덕 위의 영국군들은 한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해도 해도 이건 너무하잖아!”
엘 아리쉬의 해변 모래사장이 사라졌다. 아니, 모래사장이 미군의 물자에 덮여버렸다.
* * *
“1차 상륙이 끝났습니다.”
“예상보다 빠르군.”
“컨테이너를 이용한 것이 주효했습니다.”
부관의 대답에 아이젠하워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군이 상륙작전에 컨테이너를 이용할 생각을 하게 된 것은 한국군의 조언 때문이었다.
“물자 이동에 컨테이너를 사용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아주 편한데 말이지요.”
“컨테이너 ”
한국군의 이야기를 들은 전쟁부와 해군부의 보급담당 장교들은 또다시 LA로 달려왔다.
“이제는 LA가 낯설지가 않아.”
푸념을 하면서도 육군과 해군의 장교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로 들어섰다. 그들을 맞이한 것은 정 수석차관이었다.
“요즘 자주 뵙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0.5인치 전쟁’때부터 가장 최근의 ‘105mm 논쟁’까지 이런저런 일로 친분이 깊어진 정 수석차관과 전쟁부와 해군부의 보급담당 장교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컨테이너들이 쌓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정 수석차관으로부터 한국군이 컨테이너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설명을 듣고, 그 실제를 눈으로 직접 본 보급담당 장교들은 이구동성으로 탄성을 질렀다.
“유레카!”
- 지금 미군이 새로운 물건 운송방식으로 채용한 팔레트보다 컨테이너를 활용할 경우 운송 효율을 더욱 높일 수 있다.
- 컨테이너의 문에 부착한 컬러띠 또는 컨테이너 자체의 컬러를 다르게 함으로써 내용물을 바로 확인하는 방식은 보급창에서 관리효율과 보급품 분배효율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다.
- 컨테이너 자체가 보급창고 역할을 겸하게 되면서 추가적인 시설의 건설 또는 관리에 들어가는 비용을 줄일 수 있다.
등등의 온갖 칭찬이 가득 담긴 보고서를 받아든 미 군부는 바로 행정부에게 지갑을 열 것을 요구했다.
군부의 요청을 받은 행정부는 재정담당부처의 관리들에게 과연 합당한지 확인해볼 것을 명령했다.
명령을 받은 관리들은 LA로 달려왔고, 정 수석차관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미 행정부의 관리들을 상대로 프레젠테이션을 벌였다.
그리고 정 수석차관의 프레젠테이션을 본 관리들의 반응은 군의 보급담당 장교들과 마찬가지였다.
“유레카!”
결국, 미국의 운송체계는 컨테이너를 기반으로 규격화, 기계화의 시동을 걸었다.
이런 미국의 변화를 본 빨갱이는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정 수석차관을 바라봤다.
“저 컨테이너 특허 안 받았다며 돈 날린 거 아냐 ”
“컨테이너 자체는 미국인들에게 이미 익숙한 물건이야. 단지 규격화가 안 되었을 뿐이지.”
“그 규격화 자체가 돈이 되는 거잖아 ”
“그것까지 했다가는 미국 놈들이 도끼눈을 뜨고 우리를 볼 거다. 앞으로 미국 애들한테 손 벌릴 거 천지인데 시작도 하기 전에 찍힐래 ”
“…….”
* * *
그런 저간의 사정 속에 엘 아리쉬의 해변을 컨테이너들이 가득 채우게 된 것이었다.
순식간에 컨테이너 야적장으로 변한 해변 한쪽에는 본토를 벗어나 전쟁터에 발을 들이민 미 육군과 한국의 제 1 독립 기계화 교도대대의 병사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죽갔네…. 태평양이 왜 태평양(太平洋)인지 이제야 알겠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잠깐 쉬었는데도 속이 낫지를 않네.”
“그러니까 광양 프론티어 3호 타고 오자고 우긴 거잖아. 아우! 미식거려!”
바닷가에 밀려 올라온 미역마냥 축 늘어져 멀미의 후유증을 호소하는 벌레와 빨갱이였다.
그들이 필리핀으로 이동할 때 탔던 ‘광양 프론티어 3호’는 포스코의 수출용 강재들을 운송할 때 쓰는 선박이었다.
수십 톤은 가뿐하게 넘기는 강철 후판들과 강관들을 실어 나르기 위해 크고 튼튼하게 건조되었고, 후판들을 실은 컨테이너들을 싣고 내리기에 편한 로로(Ro-Ro)선의 선체를 가졌다.
마지막으로 주행선지는 평택의 수출입항구였지만, 필요할 경우 제철소에서 바로 물건을 실어 해외의 항구까지 배달 가능했다.
무려 15,000톤의 덩치를 가진 광양 프론티어 3호는 필리핀까지 전차들을 위시로 한 중장비들과 화물들을 실어 나르기에 그야말로 최적의 선박이었다.
결국, S그룹과 L그룹은 물론이고 정부까지 나서서 포스코에 압력을 가했고, 포스코는 눈물을 머금고 이제 막 운행하기 시작한 광양 프론티어 3호를 임대해주어야만 했다.
커다란 덩치에서 나오는 넉넉한 공간과 어지간한 파도는 무시하던 편안함을 자랑하는 광양 프론티어 3호를 대신해, 조각배 같은 LST를 타고 대서양의 거친바다를 건너온 필코 세이프티, 아니 제 1 독립 기계화 교도대대의 병사들은 모두 파김치가 되어버렸다.
“김 치프, 이 치프.”
“아, 예. 대대장님.”
자신이 부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벌레와 빨갱이를 본 남궁 소령은 손사래를 쳤다.
“대대장은 무슨… 필코 세이프티에서는 김 치프와 이 치프가 내 지휘관이었잖아요 ”
“그때는 필코 세이프티였고, 지금은 대한민국 육군 아닙니까 제대로 해야지요. 이미 샌프란시스코에서 끝난 이야기 아닙니까 ”
선을 딱 긋는 벌레와 빨갱이의 모습에 남궁 소령은 손을 내밀었다.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니까 이렇게 가도록 하지요. 드디어 실전이네요. 잘 부탁할게요.”
“저희야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가볍게 악수와 덕담을 교환한 셋은 앞으로 벌어질 전투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우리와 함께 할 미군 부대는 준비가 다 끝났습니까 ”
“장비 하역은 끝났고 점검 중이에요. 준비가 끝나면 바로 합류해 움직이기 시작할 거에요. 내 예상으로는 내일 새벽. 미군의 첫 공세에 우리가 낄 것 같네요.”
“준비하겠습니다.”
“우리 장비들의 점검은 다 끝났나요 ”
“다 체크 끝내놨습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던 남궁 소령은 주변을 살피고는 목소리를 낮췄다.
“K-11은 잘 챙겨왔나요 ”
“팀당 1정씩은 배치해 뒀습니다. 상태 역시 최상입니다.”
“좋군요. 그럼 이제 미군과 손발을 어떻게 맞추는 것이 좋을지 이야기를 해볼까요 ”
“미군이 통 크게 양보를 해서 전투단 하나를 떠넘겼는데, 이걸 어떻게 우리와 잘 섞느냐가 관건입니다. 미국 본토에서 훈련을 하기는 했지만 실전은 또 다른 법이니 말입니다.”
빨갱이의 지적에 남궁 소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미국이 기갑사단을 편제했을 때의 구성은 3개 기갑연대와 1개 기갑보병연대로 이뤄진 매우 단순한 것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벌어지면서 독일의 기갑부대가 소련을 박살내는 것을 보게 된 미국은 편제 구성을 대대적으로 손보기 시작했다.
거기에 때마침 미래의 지식을 가진 한국 육군-전차부대( )까지 들어있는-이 도착하자 미국은 도움을 요청했다.
통신장비부터 시작해 여러 가지 제한사항을 참조한 한국군은 미 기갑사단과 보병사단의 편제를 1944년 버전-2차 대전 최강이라고 볼 수 있는-으로 조정할 것을 제안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기갑사단의 1개 전투단이 북아프리카 전선에 배정된 한국군에게 넘겨졌다.
단순히 기호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제대로 편성된 1개 전투단-1개 중전차 대대, 1개 기갑보병 대대, 1개 기갑포병대대, 1개 기갑공병중대로 정수를 채운-의 사령부를 한국군에게 넘긴 것이었다.
미 제2기갑사단의 A전투단을 넘겨받은 한국군은 고심 끝에 제1독립기계화 교도대대를 쪼개 미국의 전투단에 섞어 놓았다.
그리고 이제 실전에서의 실증만이 남은 것이었다.
* * *
한편, 아이젠하워는 상륙한 미군들의 최고위 지휘관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작전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고 있었다.
“지금 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가자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독일 놈들의 규모는 약 6만이라고 합니다.”
참모의 보고에 아이젠하워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
“좀 많군.”
“그렇습니다.”
인상이 살짝 구겨진 것 외에는 담담한 아이젠하워와 달리 패튼은 얼굴이 시뻘겋게 변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빌어먹을 영국 놈들! 이런 정보를 이틀이나 묶어두다니! 당장 총살대로 올려도 시원찮을…!”
이후로도 패튼의 욕설이 계속 이어지자 아이젠하워가 제지에 나섰다.
“장군, 진정하세요.”
“큼! 크흠! 미안하외다.”
까마득한 후배지만 계급은 자신의 상급자인 아이젠하워의 명령에 패튼은 헛기침을 하고는 억지로 화를 삭였다.
패튼을 진정시킨 아이젠하워는 장군들을 보며 말을 이어갔다.
“본국의 명령도 있었지만, 우리의 목적은 독일 놈들을 이곳 시나이 반도에 묶어두고 출혈을 강요하는 것이오. 거기에 병력도 열세니까 무작정 밀고 올라가는 것은 절대 금물이오.
적당히 치고받으면서 독일 놈들을 출혈과다상태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오. 특히나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일본 놈들의 존재도 잊어서는 안 되고 말이오.”
아이젠하워의 말에 패튼이 반론을 제기했다.
“여기서 밀리면 영국 놈들이 옳다구나 하고 자기네 말을 들으라고 할 것이 확실하외다! 차라리 조금씩 밀고 올라가는 것이 낫소!”
패튼의 말에 브래들리 소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패튼 장군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몽고메리의 반응을 봤을 때, 여기서 밀리면 당장 우리보고 지휘권을 넘기라고 할 것입니다. 차라리 조금씩 밀고 올라가 가자 인근에서 공방전을 벌이는 것이 낫습니다.”
“3만 4천으로 6만을 밀고 올라가는 것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
“조금씩 밀고 올라가자는 것이지요. 그래야 독일 놈들이 미끼를 물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
브래들리의 말에 아이젠하워는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흐음… 그것은 앞으로의 상황을 보면서 이야기를 해봅시다.”
아이젠하의 말에 제일 반색을 하는 것은 패튼이었다.
“당연하외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전선의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움직이는 것! 그리고 시작도 하기 전에 물러서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만큼 기운 빠지게 하는 일은 없소이다!
나, 패튼! 적어도 맥없이 물러나라는 명령은 절대 듣지 않을 것이외다!”
패튼의 발언에 회의실에 모인 모두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지금 패튼의 발언은 대놓고 상관의 명령에 불복종하겠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지금 패튼의 자리를 대신할 맹장이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이젠하워 역시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상부의 명령을 잊지 마시오. 우리는 지금 당장 독일 놈들의 목을 뽑아버리는 것이 아니오. 저놈들이 스스로 목을 길게 늘이게 만드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줬으면 하오.”
“알겠습니다.”
“알겠소이다.”
* * *
“빌어먹을!”
회의를 끝내고 자신의 사단으로 돌아온 패튼은 냅다 욕설부터 내뱉었다.
“마음에 안 들어! 겁쟁이 같은 놈들!”
알고 있는 욕이란 욕은 다 끌어다 뱉어내던 패튼은 부관이 다가오자 말을 멈췄다.
“무슨 일이야 ”
“전투단의 지휘관들이 모였습니다. 내일 시작할 작전의 지시를….”
“기다리라고 해!”
거친 목소리로 부관에게 명령을 내린 패튼은 한국군 소속으로 1개 전투단이 배정된 사단 편제표를 보고는 냅다 욕설을 내뱉었다.
“Fuck!!"
잠시 동안 혼자 발광을 하면서 화를 식힌 패튼은 전투단의 지휘관들이 모인 텐트에 들어섰다. 패튼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내일 06시 정각. 미군은 탈라스 술탄을 향해 전진을 시작한다. 우리 2사단은 그 미군의 선봉이다. 독일군과 조우할 가능성이 매우 높으니 긴장을 늦추지 말도록.”
“알겠습니다!”
“가자 지역에 웅크리고 있는 독일 놈들의 수가 약 6만이라고 한다. 마음 단단히 먹어두도록! 첫 전투에서부터 앓는 소리 하는 멍청한 놈이 나오면 궁둥이 껍질이 벗겨지도록 걷어차 주겠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남궁 소령.”
“예. 장군님.”
“소령이 지휘하는 A전투단은 우리 사단의 우익을 맡아 전진하시오. 만약 라파 지역에서 독일군이 밀고 온다면 우리 2사단은 물론이고 미군 전체의 우익을 보호하기 위해 전력으로 독일군을 차단해야 하는데 가능하겠소 ”
“가능합니다!”
남궁 소령의 자신감 넘치는 대답에 패튼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믿어보도록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