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
96화 대전략 회의 (3)
워싱턴.
백악관의 대형 회의실에는 루스벨트를 비롯해 전쟁에 관여된 행정부 최상층의 인물들이 다 자리하고 있었다.
회의가 벌어지게 만든 주인공인 맥아더와 그의 참모들은 루스벨트를 비롯해 회의에 참석한 이들을 상대로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 태평양 지역의 공세를 강화해야 합니다! 지금이 바로 일본을 공격하기에 적기란 말입니다!
지금을 놓치면 우리 미국은 명분을 잃게 됩니다! 더불어 입지 않아도 될 피해까지 입게 될 것이 확실합니다! 미국의 주력은 유럽이 아니라 지금 당장 태평양으로 향해야 합니다!”
맥아더의 논지는 다음과 같았다.
- 필리핀에서 오스트레일리아로 철수한 미군의 수는 약 6만. 오스트레일리아에 도착한 이후 충분한 휴식을 취했고, 장비도 제대로 보유한 상황이다.
더 이상 오스트레일리아에만 머무르고 있으면 되려 전투의지가 떨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 오스트레일리아에 있는 미군들은 필리핀에서의 경험을 통해 정글이 낯설지가 않다.
거기에 더해 오스트레일리아 인근의 아군 지역에서 정글전 훈련까지 다 수료한 상태이다.
- 오스트레일리아 현지의 정세도 별로 좋지가 않다. 자국의 병사들은 북아프리카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데, 미군은 1년 가까이 허송세월만 하고 있다는 불만이 높아지고 있다.
- 현재 일본군의 진격 방향을 보면 동에서 서로 길게 늘어진 형태이다. 이 형태에서 허리에 해당하는 필리핀을 점령하면 일본의 군사행동은 마비(paralysis)되어 버린다.
- 제일 큰 문제는 일본이 내세우는 정치적인 어젠더(Agenda)인 ‘Greater East Asia Co-Prosperity Sphere(대동아공영권)’가 남태평양의 아시아인들에게 상당한 호응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계속 늑장을 부리다 보면 일본은 제국주의자들에게 저항하는 ‘십자군(Crusader)'으로 자리를 잡고, 우리는 비열한 ’이교도‘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높아지게 된다.
이럴 경우 우리에게 호의적인 세력은 감소함과 동시에 적인 일본에 우호세력은 증가하는 매우 반갑지 않은 일이 벌어지게 된다.
맥아더의 주장이 일리가 있었기 때문에 루스벨트의 얼굴에는 고민이 가득했다.
그리고 맥아더 쪽의 발언이 끝나자마자 반대쪽의 반론이 펼쳐졌다.
- 6만의 병력이 있다고 하지만, 공세를 펼치기에 충분한 병력은 아니다. 지금 하와이에서 3만의 해병들이 정글전 훈련을 받고 있고, 추가로 5만의 육군 병력이 태평양 전선에 배치될 예정이다.
총 14만의 병력의 전투태세가 완료되어야만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는 남태평양의 전략 요충지들을 다시 손에 넣을 준비가 끝났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섣불리 움직여서는 무의미한 소모전만 벌어질 따름이다.
- 오스트레일리아의 국민적인 정서가 안 좋다고 하지만, 태평양 지역 연합군에 배속된 오스트레일리아 군도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 부가적인 설명을 덧붙이자면, 지금 태평양 전선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은 지상전 병력뿐이다.
해군 항공대와 육군 항공대, 잠수함들은 지금도 일본군과 교전을 계속 벌이고 있다.
- 일본군이 서진을 하면서 전선이 옆으로 길어진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하지만 병력의 밀도는 아직 떨어지지 않았다.
특히나 일본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남태평양의 유전지대와 필리핀, 인도차이나 반도의 전략적 가치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병력의 규모를 줄이지 않고 있다.
따라서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밀고 올라가는 시기는 일본군의 병력밀도가 떨어지는, 다시 말해 일본의 체력이 한계에 도달하는 시점이어야 한다.
- 대동아공영권은 일본에게 있어서 ‘양날의 검(Double-edged sword)’과 같다.
일본은 자원수입국이다. 일본의 경제를 유지하고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동남아의 자원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문제는 ‘대동아공영권’의 이상을 따르자면 해당지역의 원주민들에게 정당한 대가를 치르고 자원을 입수해야 하지만, 일본에게는 불행하게도 그럴만한 경제력이 없다.
결국은 폭력적인 방법이 동원될 것이고, 해당지역의 민심은 일본군을 이반하게 될 것이다. 이는 한반도와 중국에서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다.
한반도의 경우를 살펴보면 친일 지도층을 키워 민심의 이반을 가라앉히기 위해서는 거의 30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 일본이 30년의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양쪽의 의견 모두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대립은 팽팽하게 이어지던 가운데 양쪽의 의견은 점점 정치적으로 변해갔다.
“언제까지 유럽만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까 미국은 이제 강국입니다! 유럽의 평가에 일희일비 할 상황이 아니지 않습니까!”
“유럽의 평가에 일희일비하다니 말이 심합니다! 독재자의 폭력에 희생당하는 이들을 위해 나선 것 아닙니까!”
“태평양의 주민들 역시 마찬가지 아닙니까! 오히려 더하죠! 유럽 제국주의자들의 노예로 있다가 이번에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노예가 된 것 아닙니까!”
“서양문명을 지키기 위한 일입니다!”
“서양문명 유럽의 문명이겠지요! 우리 미국의 문명은 아닙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피를 흘려가며 해방시켜준들 그들은 당연시할 것이 확실한 일인데, 무엇 때문에 서두릅니까!
그들의 공치사 몇 마디가 그렇게 값진 겁니까! 세상이 변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유럽은 이미 늙었어요!
독일 놈들에게 쓸려나가면서 그들의 돈주머니였던 아시아와 아프리카, 중동의 식민지들이 풀려났습니다! 그들의 화려한 영화(榮華)는 이제 끝인 겁니다!”
“유럽의 국가들이 식민지를 쉽게 포기할 것이라고 봅니까 잘못하면 적만 늘릴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늙은 사자들이라니까요! 식민지를 다시 움켜쥘 힘이 없습니다!”
“식민지들이 해방될 것이라는 의견에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우리와 발을 맞추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많은 시간이 걸릴 겁니다! 그때까지 우리와 호흡을 맞출 수 있는 이들은 유럽밖에 없어요! 그걸 아셔야 합니다!”
“단지 호흡을 맞추기 위해서 미래를 포기하자는 겁니까 신생 식민지 국가들에게 우리 미국의 이미지가 어떻게 보일지 정해지는 중요한 시기입니다!
단지 ‘호흡’ 때문에 우리 미국을 제국주의자들과 동급으로 맞춰버리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소련을 생각해야 합니다! 유럽 대륙에 공산주의 세력이 확대되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그것이 패착이라는 겁니다! 이 세계 전체를 놓고 봤을 때, 유럽이 차지하는 부분과 식민지에서 독립할 국가들이 자리할 부분을 비교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 지역에 숨겨진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함께 생각해보라 이 말입니다! 다 늙은 제국주의자들 도와주다 신천지를 소련에게 내줄 것입니까!”
양쪽이 팽팽하게 맞선 채 날 선 대화가 이어지는 가운데 옵저버의 자격으로 회의를 보던 김 주석이 각료들을 돌아봤다.
“대화가 산으로 가는구먼.”
김 주석의 평가에 각료들은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고 제독과 정 수석차관은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이 사람들… 전쟁에서 질 수 있다는 생각은 아예 안하고 있군.”
고 제독의 평가에 정 수석차관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서운 점은 이 회의에 참석자들은 거의 대부분이 군인들입니다. 그런데 세계를 주제로 정치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그건 이 자리에 참석한 군인들 대부분이 별을 단 양반들이라서 그래. 군인이 별을 달면 군인이라기보다 정치꾼에 가까워지지. 군의 정책부터가 정치적인 결단이 필요한 것이니까.”
고 제독의 말에 정 수석차관은 물끄러미 고 제독을 바라봤다.
“왜 그렇게 보나 ”
“21세기의 뉴스들을 보면 전혀 안 그렇던데요 ”
“그래서 정치꾼이라고 그러는 거야… 피하고 싶었는데 결국은 내 손으로 얼굴에 똥칠을 하게 만드는구먼.”
* * *
맥아더의 참모들과 워싱턴에 있는 이들 사이에서 벌어진 격론을 듣다가 피곤해진 루스벨트는 시선을 돌려 주변을 살폈다.
흥미진진한 얼굴로 회의를 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한국정부의 요인들을 본 루스벨트는 손을 들어 토론을 멈췄다.
“잠시 제3자의 생각을 들어보는 것이 어떻겠소 이곳에는 딱 어울리는 이들이 있는 것 같은데
식민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여태까지 투쟁하신 분들과 우리에게는 현실이자 미래인 것들을 과거의 역사로 배운 이들이 함께 있으니 말이오.”
루스벨트의 발언에 회의에 참석한 이들의 시선이 모두 김 주석과 일행들에게 집중되었다.
“나로서는 여러분들의 의견을 듣고 싶소이다. 우리 미국의 동맹국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
루스벨트의 말에 김 주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선은 우리에게 이런 배움의 장을 열어주신 것에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우선 루스벨트 대통령의 질문에 대한 의견을 말해보자면… 전쟁과 제 조국에 한정지어서 생각을 말하자면 태평양 전선이 빠르게 정리되면 정리될수록 우리 대한민국에 좋은 것은 기정사실입니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을 위해서 우리 대한민국의 동맹인 미국의 젊은 목숨들이 무의미하고 불필요하게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와 같은 비참한 식민지 신세에 있는 이들과 동맹인 미국을 위해서 미력하지만 제 의견을 말해본다면….
아시아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결자해지(結者解之)’라는 말이지요. ‘매듭을 묶은 자가 매듭을 풀어야 한다.’라는 말이 있지요. 거기에 한마디 더하자면 때로는 싫은 소리를 할 줄도 알아야 좋은 친구 아니겠습니까 ”
정 수석차관의 통역을 통해 김 주석의 이야기를 들은 루스벨트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렇지요! 좋은 친구라면 때로는 싫은 소리를 할 수도 있어야겠지! 좋은 의견 잘 들었소이다! 유럽 친구들에게 딱 필요한 말이였소! 고맙소이다!”
루스벨트의 발언은 유럽에 대한 미국의 정책이 어떻게 결정될 지를 의미하는 발언이었다.
루스벨트의 옆자리에 앉아있던 헐 국무장관은 루스베르트의 말에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들었다.
김 주석의 발언이 끝나고 고 제독이 손을 들었다.
“Admiral 고. 무슨 할 말이 있소 ”
“제 의견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
“기꺼이.”
마셜 참모의 대답에 고 제독은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 벽에 걸린 세계지도 앞으로 걸어갔다. 세계지도를 등진 채 고 제독은 입을 열었다.
“이곳에 계신 모든 분들이 잘 아시겠지만, 태평양 전선에서 일본군이 21세기 출신인 저희들이 알던 것과 다른 전술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몇 가지 특이점이 도출되었는데 첫째가 일본군의 항공세력, 그것도 대잠초계기 부대가 대규모로 충원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항모 기반으로 움직이는 항공전단의 규모도 그대로인 상황에서 이렇게 빠른 속도로 항공세력이 대규모로 충원이 가능한 이유를 조사해 봤습니다.
그 결과, 항공기 부대의 정비병들을 대잠초계기 파일럿으로 전용했다는 것이 제일 유력한 설명입니다.”
“정비병을 파일럿으로 그게 가능한 것인가 ”
“일본 해군의 파일럿 양성과정은 소수정예를 지향했습니다. 선발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재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종과 관련되지 않은 부분에서 결격이 되어 탈락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떨어진 이들이 항공대 정비병들이 되었습니다.”
“파일럿이 그렇게 쉽게… 아! 전투기 파일럿은 힘들어도 수송기나 대잠초계기 쪽이면 약간만 훈련시켜도 가능하겠군.”
맥아더의 참모들 가운데 하나가 자문자답하는 사이 고 제독은 말을 이어갔다.
“정비병들 가운데 실력이 되는 이들을 파일럿으로 돌려 시간을 버는 동안 후방에서는 대규모로 파일럿들을 훈련시키고 있을 것입니다.
이번에는 좀 느슨하게 해서 말이지요. 하지만, 느슨하게 한다 해도 파일럿을 양성하는 것에는 시간이 걸립니다.
이 갭을 우리는 파고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갭을 제대로 파고들게 되면 우리에게는 가장 껄끄러운 존재 가운데 하나인 일본 항공세력을 약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의 진출을 이곳까지 허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 제독은 지도의 한 부분을 지시봉으로 지적했다.
“일본의 팔이 가까스로 닿는 지점에서 대규모 소모전을 벌이는 겁니다. 그리고 이 지점이라면 독일군도 같이 소모전의 늪에 빠뜨릴 수 있을 확률이 커집니다.”
고 제독이 가리킨 곳은 시나이 반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