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
68화 지중해의 女帝(Empress of the Mediterranean) (4)
1942년의 마지막을 장식한 역사적 사건은 ‘한미 연합 함대(Joint Fleet)’의 지중해 원정이었다.
‘Tokyo Raid’를 통해 미국의 강력한 투지를 만방에 알렸다면, 지중해 원정은 유대인들에 의한 경제적 혼란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전의(戰意)는 꺾이지 않았으며, 드디어 본격적인 전쟁참가를 세계에 알린 것이었다.
- 1995년. 2차 대전 종전 50주년 기념 BBC다큐멘터리.
‘2차 세계대전. 그 거대한 변화의 역사’의 5화 ‘미국 출전의 서막 지중해’의 내레이션 한 토막.
* * *
미국의 지중해 원정 직전에 미 해군의 지휘부에는 ‘학살(massacre)’이라고 불리기에 충분한 고급 장교들의 인사이동이 있었다.
그 인사이동의 결과, 전통적이고 정통적인 ‘함포주의’를 고수하던 제독들이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학살로 인해 비어버린 자리에는 레이더와 항공기를 주력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일명 ‘전자(Electronic) 제독'들이 채워나갔다.
- 2005년. 2차 대전 종전 60주년 특집 BBC 다큐멘터리.
‘2차 대전 음모론의 총아. 대한민국 해군 9전단’의 9화 ‘지중해의 여제’의 내레이션.
* * *
이런저런 크고 작은 우여곡절을 겪은 후에 지중해 원정을 위한 한미 연합함대의 출항준비가 끝났다.
그리고 출항 당일.
부두에 도열한 군악대가 군가와 흥겨운 행진곡을 연주하고, 배웅을 나온 시민들의 함성 속에 예인선에 이끌린 항공모함이 부두를 벗어나는 것을 시작으로 연합함대의 함선들이 하나, 둘 대서양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역시나 시끄럽군.”
예인선 견인이 필수인 다른 함선들과 달리 자력으로 부두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덕에 조금 더 빨리 외항으로 나온 곽재우의 함교에서 장 대령은 가볍게 눈살을 찌푸리며 불평을 했다.
군악대의 요란한 연주가 멀어지자, 이제는 각 함선의 스피커들이 시끄럽게 음악을 토해내고 있었다.
‘Tokyo Raid'는 물론이고 개전 이후 바쁘게 움직이던 태평양 함대와 달리 수송선단 호위와 같은 임무가 아닌 본격적인 해전 목적으로는 처녀 출전인 것이 대서양 함대였다.
함선에 탑승한 수병들의 사기를 고양시키기 위해 모든 함선들의 스피커에서는 각종 군가들이 시끄럽게 흘러나왔다.
거기에 경쟁이 붙었는지 통신용 주파수를 통해 다른 배에까지 자신들이 틀어대는 음악을 송신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었다.
누군가 다른 함선과 같은 음악이 나오는 순간, 같은 노래를 먼저 틀었던 군함에서 온갖 조롱이 튀어나왔다.
“역시나 양키는 양키로군.”
통신을 통해 벌어진 ‘배틀’을 들으며 중얼거리던 장 대령은 부장을 돌아봤다.
“우리가 너무 얌전했지 ”
“아이고… 함장님.”
장 대령이 무엇을 할지 걱정이 된 부장이 자기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짓궂은 미소와 함께 장 대령은 함내 방송용 마이크의 스위치를 눌렀다.
- 나 함장이다. 많이 시끄럽지 곽재우도 그냥 넘어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 5분 준다. 내 생각에는 딱 맞는 곡은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하지만…. 좋은 것 갖고 올라오도록.
장 대령의 방송을 들은 곽재우의 승무원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봤다.
“좋은 것 ”
“리버럴(Liberal) 장이 좋아하는 거라면 딱 하나밖에 더 있겠냐 ”
“옛날 것이기는 하지만 그 곡이 딱이기는 하지.”
어느새 승무원들의 의견은 하나로 정해졌고, 대표로 나선 수병이 쪽지와 USB를 들고 함교로 올라갔다.
쪽지와 USB를 건네받은 장 대령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과연! 이래야 곽재우지!”
기분 좋게 웃은 장 대령은 부장에게 USB를 건넸다.
“통신실에 전해줘. 못 듣는 배는 없겠지 ”
“없을 겁니다.”
처음 장 대령이 마이크를 잡을 때와 달리 부장 역시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잠시 후, 문제의 노래가 곽재우의 통신실에서 송출되었다. 곽재우에 달린 무선통신 장비의 강력한 출력은 모든 함선들의 스피커를 휘어잡았다.
“Awww. Shit! Get your….”
장 대령과 곽재우의 승무원들이 선택한 노래는 ‘I'm on a boat.'였다.
질퍽한 욕설이 섞인 노래가 방송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자, 강감찬의 함장 조 대령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좌우지간 못 말리는 양반이야.”
해군 함장들 사이에서 장 대령은 ‘기인(奇人)’으로 통했고, 승무원들 사이에서는 ‘Liberal 장.’으로 통했다.
승무원들이 붙여준 별명 그대로 장 대령의 지휘 특징은 ‘자유주의’였다.
“징집도 아니고 자원해서 온 놈들이다. 제 몫만 제대로 하고 동료에게 폐만 끼치지 않는다면 나도 터치하지 않는다. 단, 사적 제재, 성군기 위반하는 놈은 반드시 족친다.”
각종 첨단장비로 도배 되면서 점점 군기가 ‘빡세게’ 변하던 해군문화 속에서 장 대령의 지휘 방침은 그야말로 ‘툭 튀어나온 못’이었다.
아마 능력이 평범했다면 바로 망치질을 당하고 잘해야 중령 예편이었을 이가 장 대령이었다.
하지만 지휘했던 함선들의 전투능력 평가는 항상 상위권이었던 덕분에 장 대령은 나름 평균적인 진급속도로 진급을 계속해 곽재우의 함장이 되었다.
그리고 장 대령이 곽재우의 함장이 되면서 ‘마왕 세종’, ‘통곡 이이’, ‘노예 유성룡’과 같은 살벌한 별명이 붙는 다른 함선들과 달리 곽재우에는 살벌한 별명이 붙지 않았다.
자신도 모르게 콧소리를 흥얼거리던 조 대령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는 걱정스런 얼굴로 곽재우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저 양반, 제독이 타고 있었는데 틀은 거야 ”
* * *
조 대령의 걱정과 달리 홀 제독의 반응은 호의적이었다.
“좋은 노래로군.”
“좋게 평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냐. 아주 뱃놈들(Seamen)에게 어울리는 곡이야. 육지 놈들은 뭘 모르지.”
“그렇지요.”
“그거 다시 틀어줄 수 있겠나 ”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제독의 요청에 장 대령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부장을 돌아봤다. 하지만 그보다 한발 빨리 부장이 장 대령에게 보고를 했다.
“함장님. 통신실에서 연락입니다. 다른 함들에게서 이 노래의 판이 있으면 보내달라고 한답니다.”
“잉 ”
예상외의 결과에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장 대령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판은 없고, 지금 한 번 더 송출한다고 전해. 그리고 나중에 원하는 시간이 있으면 맞춰 틀어준다고 하고.”
“알겠습니다.”
잠시 후, ‘I'm on a boat.'가 다시 한 번 모든 함선들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어느새 꽤 많은 수의 미군 수병들이 노래의 반복구인 ’I‘m on a boat!'를 따라 외치고 있었다.
U-보트의 집중 출몰지역으로 들어갈 때까지 적어도 하루의 한번은 모든 함선들의 스피커에서 ‘I'm on a boat.’가 흘러나왔다.
귀가 좋고 손이 빠른 수병들은 빠르게 가사를 받아 적었다. 거기에 더해 개사까지 진행되었다.
‘5노트’가 ‘30노트’로, 그리고 ‘Fuck land’가 ‘Fuck Army’로 바뀌는 등의 개사가 이뤄진 ‘I'm on a boat.’는 미 해군의 비공식 군가로 불려졌다.
* * *
U-보트의 집중출몰 지역에 들어서면서 함대 승무원들의 긴장도가 급격히 오르기 시작했다.
어벤저와 돈틀레스의 초계비행이 증가했고, 구축함들의 대잠훈련의 횟수와 강도도 크게 늘었다. 곽재우와 강감찬 역시 함대 진형의 왼쪽 끝과 오른쪽 끝으로 자리를 옮겨 대잠작전에 돌입했다.
“특이 소음이 잡혔습니다!”
“어딘가 특성은 ”
“함대에서 남동쪽 100km! Artificial!"
음탐관의 보고에 곽재우의 SMC의 긴장도는 확 올라갔다. 음탐관이 바라보는 모니터 옆으로 자리를 옮긴 장 대령은 질문을 던지며 상황을 살폈다.
“음문 대조는 ”
“현재 대조 중입니다…. Negative! 기존 데이터에 없습니다!”
음탐관의 보고에 장 대령은 홀 제독을 돌아봤다.
“현재 이 지역에서 활동 중인 영국 잠수함이 있습니까 ”
“정기 보고에는 없었네.”
“그렇군요. 표적 1지정.”
“표적 1지정!”
미확인 잠수함에 대한 목표 지정을 끝낸 장 대령은 양 중령을 돌아봤다.
“초계기를 이미 그쪽으로 이동시켰습니다.”
“다행이군.”
작게 고개를 끄덕인 장 대령은 홀 제독을 돌아봤다.
“드디어 시작이로군요.”
“그렇군.”
* * *
“빌어먹을!(Verdammt!)”
긴급잠항을 시작한 U-299의 함장 권터 폰 에르겐 중령은 이를 벅벅 갈았다.
이번이 U-299를 맡고 나서 두 번째 패트롤인 그는 호송선단 사냥을 나왔다가 미국 지중해 함대의 출동 소식을 전달받고 이동하는 중이었다.
잠수함 사령부에서 보낸 분석 정보는 양키들이 자신들이 있는 곳에서 200해리 북쪽의 항로를 지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바다도 잔잔한 덕에 에르겐 중령의 U-299는 멋진 사냥을 꿈꾸며 최고 속도로 수상주행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부하들 역시 오랜만에 접하는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장비들의 점검을 하던 중에 갑자기 커닝타워에서 상공을 감시하던 견시가 고함을 질렀다.
“비상!(Alarm!) 어벤저다!”
“비상!(Alarm!)”
비상을 알리는 고함과 함께 에르겐 중령과 선원은 선내로 몸을 던지듯이 들어갔다.
해치가 닫힘과 동시에 U-299는 침몰하는 것처럼 급경사의 각도로 선체를 기울이며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150까지 내려….”
쾅!
와장창!
“우악!”
에르겐 중령이 U-299의 잠수 심도를 명령하려는 순간, 어벤저가 투하한 250파운드 폭탄이 근처에서 터졌다.
거대한 폭음과 충격파가 U-299를 뒤흔들었고, 에르겐 중령과 승무원들은 비명과 함께 나뒹굴었다.
해도 테이블을 붙잡고 급히 일어선 에르겐 중령은 명령을 내렸다.
“200까지 내려간다!”
“잠항심도 200!”
쿠앙!
“우욱!”
또 다시 한발의 폭탄이 추가로 투하되었고, U-299는 거세게 흔들렸다.
다행히 두 번째 폭탄이 먼 거리에서 터진 덕에 U-299에 가해진 충격은 예상보다 적었다. 흥분을 가라앉힌 에르겐 중령은 상황을 확인했다.
“피해 확인!”
“피해 확인!”
에르겐 중령의 명령이 전파되자 승무원들은 빠르게 함체를 점검했다.
다행히 함체의 손상은 경미했고, 부장과 기관장을 포함한 주요 장교들은 임무 수행을 계속 할 수 있다는 것에 동의했다.
“제일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은, 저 어벤저가 어디서, 어떻게 알고 날아온 것이냐이다.”
“우리가 쫓고 있는 양키들의 지중해 함대 아니겠습니까 ”
부장의 대답에 에르겐 중령은 고심에 가득 찬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게 가장 가능성이 높기는 하지. 하지만 문제가 있어. 방금 전의 그 빌어먹을 어벤저는 우리쪽으로 바로 날아왔다. 초계 중에 발견한 것이 아니야. 그렇다면 우리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아챈 존재가 있다는 거다.”
상황을 추리해 가던 에르겐 중령은 음탐장교를 돌아봤다.
“전파 경보기가 레이더 전파를 파악하지 못한 것인가 ”
“전파 경보기는 이상이 없었습니다.”
전탐 장교의 보고에 에르겐 중령의 인상이 더욱 험악해졌다.
“그럼 누가 우리의 존재를 알아낸 거지 ”
고민을 하던 에르겐 중령은 결론을 내렸다.
“어차피 놈들이 가는 곳은 지브롤터를 거쳐야 한다. 이제부터 우리는 현재 심도에서 지브롤터를 향해 움직인다. 항공초계가 문제니까 야간에만 부상해서 최고속도로 움직이는 것으로 하고. 부상과 동시에 잠수함 사령부에 이번 일을 보고한다. 그 때 즈음이면 양키 함대를 확인하고 보고를 하는 놈들이 몇 놈 더 나오겠지만 할 일은 해야겠지.”
“알겠습니다.”
“한방 먹었으니 우리도 돌려줘야할 것 아닌가!”
“그렇습니다!”
힘차게 대답을 한 부하들이 부지런히 움직이는 동안 에르겐 중령은 부장, 항해장과 함께 해도 테이블을 둘러싸고 의견을 나누었다.
“어벤저의 평균적인 항속거리를 생각하면….”
컴파스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문제의 양키 함대가 있을 곳을 추리하던 에르겐 중령은 한곳을 짚었다.
“이곳이 가장 유력하기는 한데 말이지….”
그가 짚은 곳은 실제 함대가 있는 곳에서 북쪽으로 50해리(92.6km) 떨어진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