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
51화 돌발 변수 (2)
1942년 6월 10일. 폴란드 바르샤바 외곽 유대인 게토.
“모두 나와!”
확성기를 통해 기세등등한 친위대 장교의 고함소리가 게토를 뒤흔들자, 유대인들은 공포에 질린 얼굴을 한 채 밖으로 나와야 했다.
게토에 있던 유대인들이 모두 나온 것을 보고받은 친위대 장교는 임시로 만들어둔 단상 위로 올라가 확성기를 들었다.
“유대인들은 들어라! 위대한 제3제국의 히틀러 총통각하께서 너희들에게 자비를 베푸셨다!”
“자비 ”
“자비라고 이 게토를 나갈 수 있게 되는 건가 ”
친위대 장교의 발언에 유대인들은 작은 목소리로 수군거렸다.
“조용하라! 조용! 이 더러운 유대 놈들아!”
친위대 장교의 포악한 명령에 유대인들은 자라목이 되면서 입을 다물었다. 유대인들의 수군거림이 멈추자 친위대 장교는 말을 이어갔다.
“다시 말한다! 위대한 제3제국의 총통각하께서 너희 유대인들에게 자비를 베푸셨다! 너희들에게 너희들의 조상이 살던 곳으로 돌아갈 기회를 주셨다!”
“조상이 살던 곳 설마!”
친위대 장교의 말에 랍비 한명이 손을 번쩍 들었다.
“장교님! 조상들의 고향이라면 예루살렘을 말하는 것입니까 ”
“그렇다! 총통각하께서는 너희들에게 기회를 주셨다! 단! 너희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국방군과 유대 노동대에 지원해라! 너희들의 힘으로 예루살렘을 손에 넣어라! 예루살렘을 손에 넣으면 지원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은 예루살렘에 살 권리를 얻을 것이다!”
친위대의 장교는 고압적이지만 의외로 자세하게 설명을 이어 갔다.
1. 유대인 남성 가운데 군인으로 지원한 자는 아프리카 전선 또는 동부전선에 배치된다. 단, 이 선택은 지원자가 우선이지만 한쪽 전선으로 인원이 편중될 경우에는 추첨으로 배치가 정해질 것이다.
2. 군에 지원한 자와 그들의 가족들은 팔레스타인에 정착할 권리와 토지를 획득할 권리를 가지게 될 것이다. 만약 팔레스타인에 정착을 원하지 않을 경우에는 소련 점령지에서 땅을 분배받을 것이다.
3. 지원자의 가족들은 ‘충직한 유대인’으로 분류, 식품과 의복 배급에 편의가 제공될 것이다. 더불어 동일계급의 독일군의 50% 수준의 급여가 가족에게 지급될 것이다. 만약 지원자가 전사할 경우, 그의 토지 분배권은 가족에게 상속된다.
4. 유대 여성들도 유대 노동대에 지원할 수 있다. 노동대에 지원한 자들은 독일 노동자 임금의 40%를 지급받게 된다.
5. 노동대에 지원한 자들 가운데 토지 분배권을 가질 수 있는 자들은 유대 남성에 한한다. 여성들은 임금만을 지급받게 된다.
6. 5000 라이히 마르크 이상의 자금을 기부한 자는 ‘명예 독일제국 시민’으로 인정 독일인과 동등한 지원을 받게 된다. 또한 제국의 승전으로 전쟁이 끝날 경우 최소 2배 이상의 토지 분배권을 얻게 될 것이다.
친위대 장교의 설명이 끝났지만 처음과 달리 유대인들은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한참의 침묵이 이어지는 가운데 모여 있던 유대인들 가운데 한명이 손을 들었다.
“만약 군과 노동대, 그 어느 쪽에도 지원을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됩니까 ”
“총통각하와 독일제국의 자비를 바라지 마라.”
친위대 장교의 대답에 유대인들은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소문을 통해 저 무인지대의 벌판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군대 지원자에 나이제한은 있습니까 ”
“10세 이상, 50세 이하. 더 이상의 질문은 받지 않겠다. 1시간 후부터 지원자들을 받겠다. 각자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가도록. 해산!”
* * *
정확하게 1시간 후, 지원자들의 접수를 받을 친위대원들이 유대인 경찰(Judischer Ordnungsdienst)들과 유대인 평의회(Judenrat)의 의원들을 대동한 채, 게토의 각 구역들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친위대원이 지원자를 받으면 유대인 경찰들과 유대인 평의회의 의원들은 동거인들이 지원자의 가족들이 맞는지 확인하는 과정이 이어졌다.
지원과 확인 절차가 끝나면 군에 지원한 유대남성들은 짐을 챙겨들고는 가족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집집마다 울음소리가 넘쳐나는 동안 짐을 챙겨 들은 남성들은 대기하고 있던 트럭에 하나, 둘씩 몸을 싣기 시작했다.
* * *
1942년 6월 하순이 되면서 슈페어와 국방부가 올린 1차 보고서를 받아든 히틀러는 파안대소를 했다.
“하하하하! 이거야! 이거! 이래야지!”
보고서에는 유대인들의 지원현황이 적혀 있었다.
6월 10일 이후, 유럽 각지의 게토와 집단 수용소에서 지원한 유대 남성들의 수가 100만을 넘었다고 적혀 있었다.
슈페어가 올린 보고서에는 이 수치가 최대는 아니며 최대 예상치는 200만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예상까지 더 적혀 있었다.
거기에 더해 유데 노동지원대에 지원한 유대인들의 수도 이미 200만을 넘어서고 있으며 이는 군수품 생산시설 확장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하아~. 괴벨스가 한 연설 덕인지 독일 국민들의 노동 생산성도 좋아졌다고 했었지 아주 좋은 일이야, 암! 독일 제국을 위한 축복이야!”
너무 웃느라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 낸 히틀러는 진실로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히틀러가 측근들의 숙청을 단행했던 ‘폭풍의 1시간’이 벌어진 다음 날, 괴벨스는 TV와 라디오를 통한 대국민 연설을 통해 승전을 위한 총력전에 동참할 것을 부르짖었다.
“여러분! 총력전을 원하십니까 만약 필요하다면, 오늘날 우리가 대체로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도 더 급진적이고 총력적인 전쟁이 되기를 원합니까 ”
모스크바에서 밀린 것을 담담히 인정한 괴벨스는 한편으로 ‘패배로 인한 제국의 파멸’을 위협적으로 경고하고는 ‘생존’을 위한 총력전을 강하게 부르짖었다.
북아프리카와 동부전선에서의 지지부진함에 속이 상해 있던 차에 기분 좋은 내용이 담긴 보고서에 흡족해진 히틀러는 펜을 들어 메모지에 명령을 적어 나가기 시작했다.
-슈페어 장관의 정책에 모든 부서는 적극 협력할 것. 총통 아돌프 히틀러.
자신의 사인까지 멋들어지게 한 히틀러는 메모지를 서류에 끼운 다음 콜 벨을 가볍게 두들겼다. 대기하고 있던 비서에게 서류를 넘기며 히틀러는 주의를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내 메모를 넣어 놨으니 제대로 전달하도록.”
“알겠습니다. 총통각하.”
* * *
살길이 생긴 유대인들을 전심전력을 다해 독일에 협조했다.
10살짜리 어린 남자아이와 50살 먹은 늙은이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철조망 밑을 기었고, 공장에는 유대 여성들이 밤늦게까지 공작기계와 씨름을 했다.
그리고 게토에 끌려들어갈 때에도 끝까지 숨겼던 귀금속들이 독일군을 위한 군자금으로 쓰이기 위해 모이기 시작했다.
유대인들을 수혈한다는 슈페어의 방책은 군과 산업계 모두의 숨통을 틔워주는 일이었다.
특히나 군이 가장 환영을 했는데, 경력과 전공 모두 괜찮았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축출되었던 이들이 군으로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들을 간부진으로 삼고 지원한 유대인들을 모아 편성한 부대는 일선에서 간절히 기다리고 기다리던 구원군이었다.
산업계 역시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총력전을 외쳤지만 아직은 느슨한 독일인들에 비해 유대인들은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독일인들의 경쟁심을 자극했고, 이는 생산성의 향상으로 이어졌다.
유대인들이 모아서 낸 군자금 또한 큰 도움이 되었다. 점령지 수탈만으로는 한계를 보이고 있던 자원 공급이 조금씩 원활해지기 시작했다.
역설적이게도 독일 제3제국의 군수산업이 활기차게 돌아간 배경에는 히틀러의 숙청이 있었다.
괴링을 비롯한 고위관료들의 숙청이 있은 다음, 히틀러는 슈페어에게 후방에 대한 전권을 위임했다.
그리고 전권을 위임받은 슈페어는 모든 우선순위를 전시체계의 역량강화에 집중시켰다.
전과 같았으면 강하게 반발했을 나치 고위관료들-괴벨스나 괴링 같은-은 힘러나 하이드리히와 같은 꼴이 될까 두려워 입을 닫고 적극적으로 협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훈련을 끝내고 부대 편성까지 끝낸 유대인들이 전선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회색 바탕에 검은색 수실로 새겨지고, 중심에는 갈고리 십자가가 자리한 다윗의 별을 왼팔에 부착한 ‘다윗의 악마들’의 출현이었다.
* * *
독일 제국 내에서 유대인들이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동안 수면 아래에 있던 유대인들의 네트워크도 활동을 재개했다.
특히나 이스라엘의 수복이 염원인 시오니스트들에게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기회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곳이 독일과 적국이건 아니건 상관하지 않고 독일에게 지원을 하기 시작했다.
* * *
“류 중령. 안녕하십니까 ”
“아, 안녕하십니까 플로브스키 비서관. 어쩐 일이십니까 ”
평소처럼 미국 정치인들을 대상으로 왕진을 갔다가 돌아오던 류 중령은 자신에게 인사를 거는 이에게 답례를 하고는 용건을 물었다.
류 중령에게 말을 건 이는 공화당의 거물급 상원의원의 차석 비서관으로 류 중령과도 어느 정도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제 친척 가운데 한명이 건강이 안 좋아서 요 몇 년 약 처방을 받아 생활하는데 조금 걱정이 되어서요.”
“왕진이 필요하시면 제가 스케줄을 살펴보지요.”
“문제는 그 친척이 유럽에 산다는 것이지요. 류 중령도 지금 유럽이 어떤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
“아….”
플로브스키 비서관의 말에 류 중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류 중령이 고개를 끄덕이자 플로브스키 비서관은 한쪽에 있는 카페로 류 중령을 안내했다.
커피를 사이에 놓고 플로브스키 비서관은 종이쪽지를 꺼내 류 중령에게 내밀었다.
“이게 그 친척이 사용하는 약들입니다만 좀 봐주시겠습니까 ”
“환자의 상태를 보지 않고 제 마음대로 처방전을 바꿀 수는 없지요. 거기에 저는 혈관 전문의라서요.”
“처방전을 바꿔 달라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이 약들이 괜찮은가만 확인해 주세요. 아무래도 친척이 나이도 많고, 할 일도 많은데, 딸린 식구들이 많아서요.”
“뭐, 그정도야….”
가벼운 표정으로 종이를 받아 든 류 중령은 종이에 적힌 처방전을 확인했다. 처방전의 내용을 읽어 나가면서 류 중령의 얼굴은 점점 심각해졌다.
“하아~.”
처방전을 다 읽은 류 중령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플로브스키 비서관을 바라봤다.
“혹시… 이 친척분, 크게 사고를 당하신 적이 있습니까 ”
“지난 전쟁에서 독가스를 마셔서 고생하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래도 이건 좀 심한데….”
“안 좋습니까 ”
걱정이 가득한 플로브스키 비서관의 물음에 류 중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한 병명이나 증상을 모르니 자세한 설명은 못 드립니다만… 몇 가지는 제가 봐도 심각합니다. 우선 마전자… 이거 흥분제군요. 비장과 위장에 손상을 입히는 부작용이 있습니다. 그 다음은 아트로핀… 독가스 피해자 치료에 쓰이기는 하지만 이것도 결국… 독(Toxic)입니다. 그리고 가장 문제인 점이 코카인, 매스암페타민입니다. 둘 다 마약입니다. 우리 때에는 이거 사용하면 당장 중범죄자로 체포됩니다. 이거 장기 복용하면 두뇌가 망가져 버리거든요.”
“두뇌가 망가져 버린다 ”
“쉽게 말하자면 노망과 비슷한 증상을 보이게 되는 겁니다.”
“안 좋은 거군요.”
“분명히(Definitely)… 처방전에 적힌 약재들 가운데 건강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건 국화차하고 비타민밖에는 없네요. 그 친척한테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연락해서 주치의 바꾸라고 하세요. 할 일도 많고, 딸린 식구 많다면서요 ”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류 중령의 권고에 플로브스키 비서관은 감사를 표하고는 처방전을 챙겨 서둘러 카페를 벗어났다. 그 모습을 본 류 중령은 설레설레 고개를 젓다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만 그러고 보니… 지금 한반도에도 필로폰이 흔할 텐데… 이러고 있으면 안 되겠네!”
류 중령은 알지 못했다. 문제의 그 처방전이 히틀러의 처방전이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