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전단 1941-49화 (49/464)

# 49

49화 악마의 뇌, 악마의 혀 (2)

1942년 5월 25일 베를린.

“허어억!”

숨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한 남자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슨 일이에요 ”

“아무 것도 아니오. 잠시 악몽을 꿨나 봐.”

옆에서 자고 있던 아내가 반쯤은 잠에 취한 목소리로 던진 물음에 대답을 한 남자는 침실을 나왔다. 잠이 완전히 달아난 남자는 서재로 자리를 옮겼다.

“진짜로 무서운 꿈이었어….”

완전히 악몽을 떼어내지 못한 듯 계속해서 몸서리를 치는 남자의 이름은 알베르트 슈페어였다.

꿈속에서 그의 조국은 패배했다. 베를린이 폐허로 변했고, 그 폐허 위로 몰려든 소련군들이 몰려들었다.

“악몽이야….”

꿈속의 내용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몸서리를 치던 슈페어는 서재의 책상 위에 놓인 서류들을 내려다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후우~.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은 건가 ”

비행기 사고로 죽은 토트의 뒤를 이어 슈페어가 제국 군수부 장관 자리에 앉은 지 3개월에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동안 슈페어가 본 것은 수많은 위험신호, 아니 이대로 가면 제국은 확실하게 무너진다는 징조들이었다.

TV와 라디오에서는 매일같이 승전을 알리는 괴벨스의 연설이 흘러나오고, 무기와 군수품의 생산에 관한 보고서를 보면 토트가 살아있었을 때부터 구축해왔던 시스템이 제대로 궤도에 올랐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슈페어는 그 안에 숨어있는 무서운 진실을 알아내고야 말았다.

막대한 물량이 생산되고 있지만, 마찬가지로 막대한 물량이 소모되고 있었다.

전선에서 전투 중 발생하는 파손으로 인한 소총과 피복의 요구량 이상으로 많은 물량이 제조되고 계속 빠져나가고 있었다. 이는 계속해서 대규모로 신병들이 충원되고 있다는 소리이고 그만큼 전선에서 죽어나가는 병사들의 수가 많다는 소리였다.

이는 독일의 젊은 남성들이 그만큼 많이 죽어나간다는 소리였고, 그만큼 생산력이 떨어진다는 말과 이어지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독일군과 독일 국민들이 소모해야 할 물건들을 만들기 위해 들어오는 자원들의 문제였다. 들어오는 원료의 양보다 소모되는 원료의 양이 점점 많아지기 시작했다. 이는 자재가 없어 공장이 돌아가지 못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길어야 2년 아니면 3년 ”

보고서에 적힌 숫자들을 보며 독일군의 숨이 멈출 날을 계산하던 슈페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슈페어는 또 다른 보고서를 펼쳐 들었다. 보고서 안에 적힌 것은 국가보안본부 본부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상신했고, 히틀러가 최종 결재를 한 ‘최종해결책’과 관련된 자원 배분 보고서였다.

“빌어먹을… 유럽에 있는 유대인의 인구가 얼마인데….”

최소 4백만은 넘을 것이 확실한 유대인을 ‘최종해결’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슈페어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비효율적인 일에 자원을 소모해야 한다니 이래서는 악몽이 현실이 될 뿐이다! 대책을 찾아야 해!”

무엇인가 결심을 한 슈페어는 바로 옷을 챙겨 입고는 집을 나섰다.

*    *    *

1942년 5월 28일. 베를린 총통 관저의 지하벙커.

“어서 오게. Heer. 슈페어.”

“안녕하십니까, 총통각하 ”

“요 며칠 매우 바쁘게 움직이는 것 같던데, 그래 무슨 일인가 ”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용건을 묻는 히틀러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슈페어는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부터 자신이 하려는 말은 자칫 잘못하면 자신에 대한 히틀러의 신임을 한순간에 날려버릴 수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나치 독일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그 안에서 자신이 지금과 같은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만 할 말이었다.

“예. 총통각하. 제국의 미래를 위해서 반드시 총통각하께 드려야 할 진언입니다.”

딱딱하게 굳은 슈페어의 표정과 목소리에 히틀러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제국의 미래 말해보게.”

“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대로 가면 우리 위대한 독일 제3제국은 패전하게 될 것입니다. 제2제국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슈페어의 단언에 히틀러의 얼굴이 대번에 사나워졌다.

“뭐라! 자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이유를 설명 드리겠습니다! 총통각하, 제발! 제가 설명을 드릴 수 있습니다! 들으신다면 총통각하도 이해를 하실 것입니다!”

슈페어의 간절한 요청에 심호흡을 하며 흥분을 가라앉힌 히틀러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말해보게. 단, 허황된 말이라면 자네는 자네 목을 내놔야 할 거야.”

“감사합니다, 총통각하.”

히틀러의 허락에 잠시 숨을 고른 슈페어는 설명을 시작했다.

슈페어의 설명은 다음과 같았다.

- 전시생산체제로의 전환이 너무 늦었다.

루프트 바페를 사례로 들어보면 ‘바다사자 작전’이 진행될 무렵 이미 일선의 부대에서는 전투기의 초과생산과 배치를 요구했었다. 하지만, ‘전쟁에 대한 독일 시민들의 불안감을 일으킬 수 있다.’라는 이유로 요구는 기각되었다.

그 결과, 아직도 전투기 전력은 예비 전력이 충분하지가 않았다. 더불어 새로이 충원되는 조종사들도 개전 직후와 달리 질과 양 모두 문제를 보이고 있는 상황이다.

더욱 안 좋은 점은 이러한 질과 양에서 열등해지는 문제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심화될 것이고, 이는 적군 전투기 조종사의 전과만 올려주게 될 미숙한 이들이 양산됨과 동시에 아군 공군전력은 점점 약화되는 불행한 사태가 될 것이다.

- 생산과정에서의 비효율적인 소모가 많다.

전시생산체제가 구축이 되었다고 하지만 아직도 대량생산체제가 아닌 부분이 많이 존재하고 있다.

- 당의 고위관료들의 개인적인 이유로 자원 수송과 배분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빈발하고 있다.

슈페어의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히틀러는 화를 억누르기 위해서 최대한 노력을 해야만 했다. 슈페어가 하나씩 지적을 할 때마다 히틀러는 심장이 난도질당하는 기분이었다.

거기에 더해 자신의 동지들인 고위 관료들이 저지른 일까지 언급되었을 때는 당장이라도 친위대를 동원해 모조리 죽여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결국 참다못한 히틀러는 슈페어의 발언을 중지시켰다.

“그만! 그래서 자네의 해결책은 무엇인가 ”

“다른 것은 다 넘어갈 수 있습니다. 단 두 가지만 해결되면 말입니다. 하나는 제3제국의 철도 운송망의 우선순위를 총통각하의 직권으로 정해주셨으면 합니다. 당장 공장에 가야 할 자재를 실은 화물 열차가 어떤 분의 취미용품을 실은 화차를 먼저 보내느라 기관차 배정과 노선 배정에서 뒤로 밀려나는 일을 막아주셨으면 하는 겁니다.”

“내 이름으로 막아주지. 다시 말하지만 전쟁 수행에 관한 모든 것이 1순위로 배정될 것이다.”

“감사합니다, 총통 각하. 그리고 두 번째로 해결해야 할 것은….”

잠시 말을 멈춘 슈페어는 숨을 고르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잠시 후, 마음을 굳게 먹은 슈페어는 눈을 질끈 감고 입을 열었다.

“최종해결책의 폐지를 청원합니다!”

슈페어의 말에 히틀러는 오히려 담담한 표정이 되어 물었다.

“자네, 죽고 싶은 건가 ”

“아닙니다!”

“그런데, 저 더러운 유대인들을 최종 해결하는 것을 왜 막는 거지 ”

“쓸데없는 낭비이기 때문입니다!”

“호오 쓸데없는 낭비라고 ”

“그렇습니다! 전혀 달성할 수 없는 불가능한 목표에 쓸데없는 물자와 인력을 쓰는 최악의 낭비입니다!”

“제국이 다스리는 땅 안에 있는 유대인들을 박멸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인가 ”

“그렇습니다! 단언할 수 있습니다!”

슈페어의 말에 히틀러는 호기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유는 설명해 보도록.”

히틀러의 명령에 슈페어는 다시 한 번 침을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반드시 설득시켜야 한다! 안 그러면 제국은 끝장이다!’

결심을 다시 한 슈페어는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 제3제국의 지배하에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총통과 당의 명령에 불복한 이들이 은신시킨 유대인의 수는 상당하다. 마찬가지로 독일 본토 내에도 총통과 당에 충성을 하지 않는 자들이 숨긴 유대인들이 아직도 다수인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 거기에 더해 점령지의 반항적인 토착관료들의 농간을 통해 비유대인으로 위장한 유대인들도 상당수이다.

- 이들을 수색해 찾아내기 위해서는 상당한 인력이 요구되는데 지금 전선의 급박한 상황을 생각한다면 인원을 따로 돌리는 것은 확실한 무리수이다.

“그러므로 최종해결로 유대인들을 박멸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비효율의 극치인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슈페어의 호소에 히틀러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어지는 말은 반대였다.

“하지만 말이야. 우리 위대한 아리아인의 제3제국을 위해서라면 다소 비효율적이어도 해야만 할 일이 아닌가 이는 나와 우리 나치당의 동지들, 그리고 위대한 독일인들에게 내려진 숭고한 사명이야!”

“그렇게 숭고한 일인데 왜 숨기는 것입니까!”

“응 ”

슈페어는 격한 어조로 히틀러에게 따지고 들었다.

“그렇게 숭고한 일인데 왜 숨기는 것입니까 지난 반제 회의에서 나온 공문을 보면 그 어디에도 ‘유대인들을 박멸한다.’, ‘유대인들을 처형한다.’라는 문장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단지 ‘유대인들에 대한 최종 해결책을 결정했다.’라는 말만 나오지요! 이것은 그렇게 떠들어댔던 작자들도 이 일이 전혀 자랑거리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슈페어의 비난에 히틀러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슈페어에게 삿대질을 하며 고함을 질렀다.

“그건 저 바다 너머 미국에 있는 유대 자본가들과 그들의 주구인 미국 정치가들에게 핑계를 주지 않기 위함인 것을 모르는 것인가!”

“이미 미국과 전쟁은 벌어졌습니다!”

“이봐, 슈페어! 친위대!”

“총통각하! 최종해결만이 방법이 아니란 말입니다. 다른 방법도 있단 말입니다! 이 위대한 독일 제국에서 유대인들을 치우는 목적이라면 말입니다! 더불어 전쟁에도 도움이 되는 방법이 있단 말입니다!”

당장이라도 친위대를 불러 슈페어를 끌어내려던 히틀러는 슈페어의 마지막 말에 손짓으로 명령을 취소했다. 다시 자리에 앉은 히틀러는 떨리는 숨을 고르며 슈페어에게 손짓을 했다.

“자네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세. 설명을 해봐.”

“간단히 말해서 유대인들 스스로 이 유럽에서 나가게 하면 될 일입니다. 그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갈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고향 예루살렘 ”

“그렇습니다. 지금 영국이 지배하고 있지요. 총통각하께서는 자비를 베푸시어 유대인들에게도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저 영국 놈들과 아랍 놈들이 차지하고 있는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을 수복할 수 있는 기회를 말입니다.”

슈페어는 열과 성을 다해서 히틀러를 설득했다. 슈페어의 말이 끝났을 때, 히틀러는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들기며 고민을 하던 히틀러는 슈페어를 바라봤다.

“괜찮은 생각이야. 하지만 바로 결정하기는 그렇군. 힘들어 보이는데 잠시 쉬고 있도록. 곧 다시 부르지.”

“감사합니다, 총통 각하!”

*    *    *

일주일 뒤, 히틀러가 부른다는 소리에 슈페어는 총통관저로 향했다. 총통의 집무실을 지키고 있던 친위대 장교가 슈페어를 안내한 곳은 대회의실이었다.

대회의실에 들어선 슈페어의 눈에 괴링, 괴벨스, 하이드리히를 비롯한 나치당과 독일 정부의 고위관료들이 들어왔다. 슈페어까지 자리에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친위대 장교가 히틀러의 입실을 알렸다.

“총통 각하께서 들어오십니다.”

친위대 장교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사람들은 히틀러의 모습을 보자마자 오른손을 번쩍 위로 들었다.

“하일 히틀러!”

“하일 히틀러!”

말없이 오른팔을 드는 것으로 짧게 답례를 한 히틀러가 자신의 자리에 앉자, 사람들 역시 따라 자리에 앉았다. 등을 꼿꼿이 세운 채 회의실 안의 사람들을 노려보던 히틀러는 곧 벌떡 일어나 연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단상으로 자리를 옮긴 히틀러는 사람들을 향해 연설을 시작했다.

“동지 제군들, 나는 신의 계시를 받았다. 이 위대한 독일제3제국을 위해 신이 말씀을 내려주신 것이다! 나, 이 위대한 독일 제3제국의 총통 아돌프 히틀러는!”

잠시 말을 멈춘 히틀러는 회의장 안의 사람들을 다시 한 번 주욱 둘러보고는 말을 이었다.

그것은 폭탄선언이었다.

“유대인들에 대한 최종해결 방법을 변경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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