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
15화 마닐라 익스프레스 (5)
“재미없는 농담이오.”
‘서기 202*년’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맥아더가 내놓은 대답이었다. 고 제독은 대형 홀로그램 모니터를 가리키며 질문을 했다.
“그럼 이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시기에 이런 기술이 과연 가능합니까 ”
“…….”
고 제독의 물음에 맥아더와 하트는 입을 다물었다.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맥아더와 달리 하트는 조금씩 시간이동 쪽으로 무게추가 기울고 있었다.
레이더라던가 이들이 작전통제실이라 부르는 것과 비슷한 CIC(전투정보통제실)라던가 하는 것은 이미 미국 해군에서도 얼마 전부터 실전배치에 들어가 중요함선들에 설치가 되기 시작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우리 함선들에 달리는 것들이 세계적으로도 가장 최신이라고 들었는데 이들과 비교하면 석기시대 수준 아닌가!’
하트 제독의 솔직한 심정이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연합군으로 받아들인 다음 이 배에 사령기를 걸고 싶은 심정이었다.
“…과연 당신들이 미래에서 왔다고 치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본과의 전쟁은 어떻게 끝이 나나 ”
“미국과 일본의 전쟁입니까 지금 벌어지는 필리핀 전투를 말하시는 겁니까 ”
혼자만의 상념에 잠겨 있던 하트 제독은 맥아더와 고 제독의 대화가 들리자 현실로 돌아왔다. 고 제독의 질문을 받은 맥아더는 잠시 생각을 하고는 질문을 정정했다.
“일본과의 전쟁은 우리 미국의 승리로 끝날 것이 확실하니까 넘어가고 지금 벌어지는 필리핀 전투로 한정지어서.”
“집니다. 장군께서는 소수의 지휘부와 함께 호주로 탈출하시고 대부분의 미군 장병들은 포로로 남아 ‘죽음의 행진’을 하게 됩니다.”
“마음에 안 드는군.”
고 제독의 설명에 맥아더는 툴툴거리며 빈 파이프를 입에 물었다.
“그럼 나는 ”
“죄송합니다만… 모릅니다.”
“모른다 Son of… 마음에 안 드는군.”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오려는 욕을 억지로 참은 하트 제독은 입체 지형도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하트 제독이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만의 생각에 잠겨있던 맥아더가 고 제독에게 질문을 던졌다.
“난 철수나 탈출이 참 마음에 안 들어… 제독의 전단이 가진 전력이라면 전세의 역전이 가능하지 않나 ”
“오면서 계산은 해봤습니다만. 불가능합니다.”
“불가능 ”
“이런저런 요소들이 많지만 가장 큰 요인은 일본이 필리핀을 포기할 가능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흐음….”
고 제독의 대답에 맥아더 제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본이 만약 전쟁을 벌인다면 필리핀을 그냥 놔둘 리가 없다는 것은 그 자신도, 미국 정부도 잘 알고 있었다. 그 결과 수립된 오렌지 계획에서도 만약 일본이 일을 벌인다면 필리핀의 미군 전력은 바탄 반도에 모여 미 본토의 병력이 지원을 올 때까지 농성을 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문제는 그 계획을 뒤집은 인물이 자신이라는 것이었고… 맥아더는 아쉬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적어도 한 달만 더 늦게 일이 벌어졌어도….”
“일본도 그걸 아니까 지금 공격해 들어온 겁니다.”
고 제독의 지적에 맥아더는 말없이 파이프의 자루만 씹어댔다.
맥아더는 속이 탔다. 맥아더의 요청에 의해 9월부터 필리핀 육군의 대대적인 확장이 진행되었다. 맥아더는 새로 늘어난 필리핀군을 제대로 훈련시키면 설사 일본이 쳐들어오더라도 해안에서 격멸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일본군은 그의 예상보다 빠른 시점에 쳐들어왔고, 숫자만 늘은 필리핀군은 계속해서 뒤로 후퇴만을 하고 있었다. 물론 예전부터 제대로 훈련을 받은 필리핀 스카우트와 미군은 일본군에게 한방씩 먹이곤 있었지만 그게 다였다. 뒷심이 없는 상태에서 그렇게 먹인 한방은 치명타가 될 수 없었다.
결국 일본군이 링가옌에 상륙하고 아군이 뒤로 밀리고 있다는 전황보고가 올라오면서 해안 방어를 포기하고 원래의 오렌지 계획대로 바탄에서 농성하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 어제였다.
‘그런데 바탄에서 항복 나는 오스트레일리아로 도망을 가 이게 말이 되는 거야 ’
“도대체 바탄에서 왜 항복을 하게 된 것인가 물론 내가 오렌지 계획을 중지시키고 병력을 재배치하기는 했지만 바탄에는 이미 상당량의 물자가 집적되어 있네. 그 정도라면 미국에서 지원이 올 때까지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네만 ”
자신의 실책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맥아더가 계속 따지고 들자 고 제독은 컴퓨터를 이용해 그렇게 된 원인을 맥아더에게 보여줬다.
-예상보다 많은 인원이 바탄반도에 집중된 반면, 물자는 예상보다 적었다.
-미국과 연합국의 제해권 상실과 미국 본토의 지원능력 부족.
[하략]
모니터에 떠오른 요인을 살피던 맥아더는 결국 백기를 흔들었다.
“이래서야… 답이 없군….”
“그렇습니다.”
컴퓨터가 출력한 근거를 보던 맥아더와 하트 제독은 침통한 얼굴이 되었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환자의 얼굴을 하고 있던 맥아더는 곧 자신을 추슬렀다.
“마음에 안 드는 상황들뿐이지만 결론을 내려야겠군. 제독의 전단이 가진 전력으로는 전세 역전은 힘들다고 했지 ”
“그렇습니다.”
“도망은 마음에 안 들지만 항복은 더 마음에 안 드니… 도망을 가야겠군.”
“저와 저 컴퓨터도 같은 결론입니다.”
맥아더가 철수를 결정했지만 하트 제독이 문제를 제기했다.
“병사들을 수송할 선박이 없습니다.”
“한척도 없는 것이오 ”
“USAT(US Army Transfort) 소속의 돈 에스테반과 민간용으로는 대형 화물선 시키앙과 여객선이 몇 척 있습니다만. 병사들을 전부 태우기에는 모자랍니다.”
“다 태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응 ”
난제를 앞에 두고 고민을 하던 두 사람은 고 제독의 발언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집중되자 고 제독은 다시 한 번 모니터를 손으로 가리켰다.
“이곳으로 오는 길에 잠시 계산을 해봤습니다만, 의외로 가능성이 있는 계획입니다.”
* * *
“흐음….”
한반도에서 내려와 사령부로 돌아가는 차 안. 잔뜩 찌푸린 얼굴로 고민을 하던 맥아더는 동승한 하트 제독을 돌아봤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
“나름 좋은 작전이라고 생각하오.”
“흐음….”
하트 제독의 대답에도 찌푸린 표정을 풀지 않던 맥아더는 사령부에 도착해서도 계속 저기압을 유지했고, 동석한 참모들만 전전긍긍하며 맥아더의 눈치를 살폈다.
한참동안이나 말없이 전선에서 올라온 통신문과 지도만을 살피던 맥아더는 동석한 참모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본국에 통신을 넣도록. 내용은 ‘지금 당장 지원을 보내줄 수 있는가 12시간 안에 답신해 주기를 바란다.’다.”
“알겠습니다.”
“링가옌 부근에서 전투를 하고 있는 부대에게 24일 오전까지 D-2선으로 철수하라고.”
“알겠습니다.”
계속해서 전선부대가 행할 명령을 내린 맥아더는 하트 제독을 돌아봤다.
“잠시 둘이서 이야기 좀 했으면 하오.”
“그러시죠.”
맥아더의 사령관 집무실로 자리를 옮긴 둘은 위스키가 가득 담긴 잔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의 말대로 하면 선박의 확보는 확실히 가능하다고 보오 ”
“확실히 가능은 합니다.”
하트 제독의 대답에 맥아더는 소파에 옴을 깊숙이 뉘이며 중얼거렸다.
“게릴라라….”
“비록 제가 해군이라 육군은 잘 모르지만 지금의 정세라면 게릴라전이 제일 유리하기는 합니다.”
하트 제독의 말을 들은 맥아더는 손가락으로 소파의 팔걸이를 툭툭 치며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이런저런 고민과 계산을 하던 맥아더는 하트 제독의 빈 잔에 위스키를 채우며 다시 질문을 던졌다.
“수송편이 완전히 준비되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리겠소 ”
“화물선 시키앙이 얼마나 빨리 하역을 끝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 최대한 빨리 한다면 ”
“24일 오전입니다.”
“…….”
하트 제독의 대답을 들은 맥아더는 다시금 장고에 빠져들었다. 빈 위스키 잔을 좌우로 흔들며 고민을 하던 맥아더가 결론을 내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떠납시다.”
“준비하겠습니다.”
의견일치를 본 둘은 사령관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서둘러 해군 사령부로 돌아가는 하트 제독을 배웅한 맥아더는 참모들을 다시 소집했다. 잔뜩 긴장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참모들을 향해 맥아더는 짧게 명령을 내렸다.
“철수한다.”
“바탄입니까 ”
“아니. 오스트레일리아다.”
* * *
12월 24일. 마닐라 북쪽 50km지점.
마닐라로 향하는 국도를 가득 채운 군인들과 피난민들을 보며 벌레는 휘파람을 불었다.
“휘유~ 존나 바글바글하니 잔뜩 몰려왔구만!”
“저 병력들을 다 태울만한 배들이 있으려나 ”
옆에서 침울한 표정으로 대화를 듣던 미 육군 소속 제이슨 소령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저 가운데 절반 정도는 이곳에 남을 거요. 남아서 게릴라전을 수행할 거요.”
“게릴라전을 벌일 병력들은 이미 중간에 빠져나간 것으로 압니다만 ”
빨갱이의 물음에 소령의 얼굴이 더욱 침울해졌다.
“저들은 마닐라에 남아있는 마지막 보급품을 챙겨서 움직일 이들이오.”
“아아….”
제이슨 소령의 말에 빨갱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어느새 모니터를 보며 상황을 살피는 벌레를 돌아봤다.
“쟤들이 제일 마지막인 것 같은데 상황은 어때 ”
“자전거 탄 일본애들이 뭐 빠지게 쫓아오고 있다. 30분 후면 여기까지 올 거야.”
“그렇게 줘 터지고도 쫓아온다냐 ”
“안 오면 일본 애들이 아니지….”
“그렇겠지. 준비해야겠다. 모든 유닛에게 전한다. 30분 후 타겟이 킬 존에 들어온다. 준비하도록.”
어깨에 매달린 무전기의 마이크를 조작해 매복한 전투요원들에게 명령을 전달하는 빨갱이의 무심한 목소리에 제이슨 소령은 다시 한 번 몸에 소름이 돋았다.
제이슨 소령이 이들을 만난 것은 어제 오후였다. 아그노 강 건너편을 요란하게 뒤집어엎는 공습소리를 배경으로 사단 사령부에서 명령서가 날아왔다.
“귀관이 최후미요. 공습과 포격이 진행되는 동안 서둘러 처리하시오.”
사령관인 웨인라이트 장군의 친필사인이 담긴 명령서에 따라 제이슨 소령은 필리핀군을 동원해제 시키고, 미군과 필리핀 스카우트 그리고 동원해제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과의 전투를 선택한 필리핀 육군 가운데서 게릴라전을 벌일 이들의 지원을 받았다.
그리고는 공습에 뒤이어 사단과 연대 소속의 중포들이 일본군의 진지를 두들기는 동안 동원해제된 필리핀 군인들을 내보내고, 1차로 선발된 게릴라 지원자들에게 탄약과 각종 보급품들을 들려 내보낸 제이슨 소령은 남아있는 병력을 인솔해 재빨리 전선을 벗어났다.
후퇴하는 필리핀군과 미군의 최후미를 지키는 제이슨 소령이 필코 세이프티의 전투요원들과 만난 곳은 마닐라까지 80km남은 곳이었다.
“쏘지 마! 아군이다!”
전투가 벌어졌을 상황을 막은 총사령부 참모부 소속의 젊은 대위는 제이슨 소령에게 이들을 소개했다.
“안전한 후퇴를 도울 이들입니다.”
작전 참모의 설명을 들은 제이슨 소령은 약 60명 정도로 보이는 규모의 병력을 보고는 작전참모를 한쪽으로 끌고 가 따지고 들었다.
“겨우 저만큼으로 충분한 전력이 되겠니 ”
“비슷한 규모의 병력이 이미 매복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봤자 120명인데 ”
“저들은 ‘충분하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설혹 실패하더라도 소령님의 병력이 뒤로 빠질 충분한 시간은 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후우~. 알았다. 애들 준비시키마.”
작전참모의 자신 없는 대답에 한숨을 내쉰 제이슨 소령이 부하들을 소집하려는 순간, 문제의 지원세력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왔다! 10분 후! 전원 준비!”
리더로 보이는 이의 명령에 대기하던 병력들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장갑차량들이 길목을 막는 위치에 자리를 잡자, 문제의 리더가 제이슨 소령에게 걸어왔다.
“우리가 저들을 막을 겁니다. 그동안 다음 지점까지 신속하게 물러나 주십시오.”
“알겠소. 계급이 ”
“치프라고 불러주십시오. 아니면 벌레(Bug)라는 별명으로 불러도 좋고 말입니다.”
“좋소. 치프. 당신들의 전투를 봐도 되겠소 ”
“부하들의 인솔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
벌레의 물음에 제이슨 소령은 동석한 사령부 작전참모에게 명령을 내렸다.
“텔리를 찾아서 내가 갈 때까지 대신 좀 지휘를 하라고 전해 주겠나 ”
“알겠습니다.”
그리고 10분 후, 제이슨 소령은 ‘학살’이 무엇인지를 두 눈으로 보게 되었다.
매복해 있던 병사가 소지한 로켓병기-후에 RPG라는 이름을 알게 된-에 일본군의 선두를 지키던 ‘경전차’가 고철로 변함과 동시에 길 양 옆에 자리한 기관총 두 정이 사격을 시작했다. 그리고 기관총 좌우에 있는 10여 명의 병사들만이 ‘단발’로 일본군에게 총격을 퍼부었다. 그 모습을 본 제이슨 소령이 작은 목소리로 빨갱이에게 질문을 던졌다.
“왜 다른 이들과 차량들은 사격을 하지 않는 것이오 ”
“일본군들이 자기네 주특기를 발휘할 수 있게 해줘야지요.”
“주특기 ”
제이슨 소령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일본군 진영에서 찢어지는 것 같은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突擊(돌격)!”
“突擊(돌격)!”
“우아아아!”
갑작스런 공격에 주춤하던 일본군들은 군도를 뽑아든 장교들이 돌격을 외치며 달리기 시작하자 착검한 소총을 길게 앞으로 내민 채 비명과도 같은 함성을 지르며 돌격을 시작했다.
“지금!”
투쾅!
상황을 살피던 벌레가 무전기를 잡고 외치자마자 길 양쪽을 따라 설치해 놓았던 클레이모어가 일제히 폭발을 하면서 돌격하던 일본군 진영의 뒤쪽 1/3을 날려버렸다. 그리고 처음 시작했던 두 정의 기관총 외에 모든 화력이 남아있는 일본군을 향해 십자포화를 퍼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