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의 신(1)
마법의 신(1)
[회귀 1회차]
이때는 모든 게 이전 상황과 비슷했다.
외신에 의해 거핀의 머리가 터져나가고 외물들이 치솟으며 세상을 잠식했다.
다만 달라진 점이 있다면 멀린이 외신의 첫 번째 공격을 피해냈다는 것뿐.
하지만 이어진 두 번째 공격을 피하지 못하고 시간을 되돌렸다.
[회귀 3회차]
이전 회차와 똑같이 반복된 상황.
멀린은 외신의 공격을 3번까지 피해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한계였다.
멀린에게 첫 번째 목표가 생겼다.
회귀를 거듭하여 외신의 공격을 온전히 피해 낼 수 있게 되는 것.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날아오는 외신의 공격에 멀린은 의지를 불태우며 다시금 회귀했다.
[회귀 10회차]
거듭되는 짤막한 회귀.
상황이 아주 조금 나아졌지만, 그래봤자 회귀하는 시간이 조금 길어졌다는 정도였다.
10회까지 멀린이 회귀한 시간은 모두 합쳐도 10분을 채 넘지 못했다.
무언가를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기에는 턱없이 짧은 시간.
하지만 멀린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대로 회귀를 반복한다면 언젠가는 되풀이되는 종말의 전조를 끊어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회귀 50회차]
처음으로 외신의 공격에서 15분을 버텼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여전히 모든 이들이 죽었고 멀린은 아무도 구해내지 못했다.
결국, 마지막에 홀로 남는 것은 자신뿐이었다.
[회귀 100회차]
회귀를 반복하며 멀린은 계속해서 새로운 마법을 만들어냈다.
시간은 과거로 돌아갔지만, 카이노스가 남겨주고 간 신격은 멀쩡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처음에는 미숙했던 신격을 다루는 일이 회귀를 반복할수록 익숙해져 갔다.
그 속에서 멀린의 마법은 계속해서 진화해 나가기 시작했다.
[회귀 200회차]
새롭게 만들어낸 마법으로 시리우스 호의 파괴를 막았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거핀은 죽었다.
머리통에 광물으로 가득 찬 늙은 드워프는 도무지 자신이 시키는 대로 하지를 않는다.
무리하게 공격을 하다가 이번에는 몸이 두 쪽으로 갈라져 뒈졌다.
또다시 모두가 죽고 외신의 공격에 한 시간을 버티다 회귀를 결정했다.
[회귀 300회차]
회귀에 무감각해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멀린은 포기하지 않았다.
[회귀 500회차]
멀린은 끊임없이 외신을 물리칠 방법을 연구하며 대항해 나갔다.
그러다가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의 시간은 얼마나 남았을까? 앞으로 얼마나 회귀를 이어갈 수 있을까?'
그런 의문을 품고 다시금 과거로 시간을 되돌렸다.
[회귀 600회차]
제도에서 조금 거리가 떨어진 곳.
멀린은 그곳에서 죽어간 아발론의 제자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녀석들이 여긴 어떻게?!'
처음에는 외신과 싸움 때문에 신경을 쓰지 못하다가 600회차가 되어서야 그들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 손이 많이 가는 녀석들...."
회귀를 거듭하며 지켜야 할 놈들이 늘었다.
[회귀 700회차]
외신의 공격에서 반나절을 버틸 수 있게 되었을 때.
멀린은 처음으로 외신과 전투를 포기했다.
대신 그는 외신을 피해 세상을 돌아보았다.
그 과정에서 멀린이 본 것은 이미 종말을 겪은 세상이었다.
대륙 곳곳, 모든 것이 회색으로 변했고, 범람하는 외물들에 의해 인간들이 죽어 나갔다.
인간들이 흘린 피, 색을 잃은 피는 마치 외물의 것처럼 검디검었다.
회색으로 인해 더욱 칙칙하고 암울한 분위기를 풍기는 세상에는 절망과 좌절만이 넘쳐났다.
[회귀 800회차]
500회차 때 들었던 생각이 다시금 불쑥 고개를 치켜들었다.
'앞으로 나의 남은 시간은 얼마일까?'
비록 1회당 회귀 시간이 들쭉날쭉했지만, 평균적으로 소모된 시간을 1회당 하루로 치면 대충 800일이다.
2년이 넘는 시간.
아직은 많은 시간이 남아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자신에게 정해진 운명의 시간이 얼마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내 시간이 끝나기 전에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불쑥 고개를 치켜드는 불안감을 억지로 잠재우고, 멀린은 다시금 회귀했다.
[회귀 1,000회차]
외신의 공격에서 하루를 버텼다.
모두가 죽고 또다시 홀로 남은 상황.
공격 도중 갑자기 외신의 움직임이 멈췄다.
-나의 시간선이 되풀이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카이노스, 그 멍청한 놈의 저주를 이어받은 거겠지.
한두 번이 아닌 1천 번.
멀린이 시간을 되돌린 흔적이 차원에 남았는지 외신이 이를 알아차린 것이다.
외신이 멀린을 향해 조소 지었다.
-우매한 필멸자여. 어디 한번 발악해 보거라. 되풀이되는 시간은 너를 갉아먹을 뿐. 과연 네가 나를 넘어서는 것이 빠를지, 아니면 너의 시간이 다하는 것이 빠를지... 심히 기대되는구나.
외신의 조롱에도 멀린은 개의치 않았다.
비릿한 외신의 미소를 보며 멀린은 다시 시간을 돌렸다.
[회귀 3,000회차]
모두가 죽고 또다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멀린.
그는 끝까지 살아남아 외신과 싸웠다.
무려 일주일간 외신과 싸우며 넝마가 된 몸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겹다....'
수천 년을 살아가며 마법 익혔던 멀린도 계속해서 되풀이되는 시간의 굴레 속에 정신이 갈리기 시작했다.
회색으로 물든 하늘이 멀린의 눈에 담겼다.
마치 원래 그의 눈이 그랬던 것처럼 멀린의 눈동자가 탁하게 변했다.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돌아가자.'
습관처럼 다시금 시간을 돌렸다.
[회귀 4,000회차]
처음이었다.
처음으로... 멀린의 마법이 외신에게 치명상을 입혔다.
그러나 이내 상처를 회복한 외신의 반격에 멀린은 다시금 회귀했다.
하지만 멀린은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언젠가는 이 지겨운 싸움을 끝낼 수 있을지 모른다고.
[회귀 6,000회차]
어느 순간부터 멀린의 마법이 또 한 번 진화했다.
더 이상의 마법진도, 더 이상의 술식 계산도 필요가 없어졌다.
10서클의 경지를 넘어선 무언가에 다가가고 있는 멀린.
회귀 회차 수가 6천에 달하며 멀린의 목적이 변했다.
외신을 죽이기보다는 자신의 마법이 어디까지 향하는지....
멀린은 그것을 확인하고 싶어졌다.
[회귀 7,000회차]
반복되는 회귀.
그 속에서 멀린은 끊임없이 마법을 연구했다.
'과연... 마법의 끝은 어디인가? 이것은 단순히 진리를 관리하기 위한 수단일 뿐인가?'
멀린의 고뇌는 계속됐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의 말에 힘이 깃들고, 그가 원하면 간섭력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회귀 8,000회차]
수많은 시행착오를 회귀로 극복한 끝에... 멀린은 외신을 쓰러트릴 수 있었다.
그의 마법이 이룬 성과였다.
멀린은 그저 외신의 소멸을 원했다.
그러자 세상에 존재하는 간섭력이 그를 도왔다.
마치 제왕을 떠받드는 신하들처럼.
세상의 마나와 간섭력이 오로지 멀린의 의지에 반응하여 그를 따른 것이다.
이에 멀린은 생각했다.
'이것을 과연 마법이라 할 수 있을까?'
오랜 고뇌 끝에 멀린이 도달한 경지.
그와 함께 카이노스가 남긴 말이 스쳐 지나갔다.
-잘 생각해 봐라. 네가 정한 신명이 곧 너의 운명이 될 테니.
어쩌면 그의 말처럼 멀린이 정한 신명이 그의 운명이 된 것일지도 몰랐다.
'마법의 신'이라는 운명이 말이다.
[회귀 9,000회차]
멀린은 또다시 외신을 죽였다.
처음에는 주변의 존재를 살리는 데 신경을 썼다면, 이제 멀린은 오로지 외신만을 죽이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후우...."
길게 한숨을 내쉰 멀린.
그가 주변을 돌아보았다.
"......."
멀린과 외신의 전투에서 모두가 죽어 나가고, 그의 곁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은 황무지뿐이었다.
허탈함도 잠시.
-제법이구나.
대지에서 솟아나는 외신을 보며 멀린의 얼굴이 굳어졌다.
늘 이랬다.
죽이고 또 죽여도, 놈은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멀린이 지친 얼굴로 말했다.
"이제 그만 적당히 하고 뒈지면 안 될까? 형, 힘들다."
-차원의 근원이 마르지 않는 한. 너는 결코 나를 죽일 수 없을 것이다.
황무지를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멀린은 다시금 회귀했다.
[회귀 10,000회차]
회귀 초창기에는 처음에는 외신에게 처참하게 밀리는 상태였고, 나중에 가서는 외신과 대등하게 싸웠다.
회귀 9천 회차쯤에는 50%의 확률로 외신을 죽일 수 있었다.
그리고 1만 회.
이제 멀린은 회귀함과 동시에 외신을 죽일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마법을 창조한 헤르시아를 넘어 그 이상의 경지에 도달한 멀린.
또한, 멀린의 마법은 이제 모두를 구하고 외신과 외물들을 쓸어버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래도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죽이고, 죽이고, 또 죽여도 되살아나는 외신.
그의 말처럼 정녕 차원의 근원을 없애지 않는 한 외신을 죽일 수는 없을 듯싶었다.
멀린은 자신의 안에서 무언가 부서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날 이후....
멀린은 더 이상 회귀의 회차를 세지 않았다.
***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거지?'
회귀가 10,000번을 넘어서고.
그 뒤로 멀린은 습관적으로 반복해서 회귀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는 회귀를 하지 않게 되었다.
끊임없이 부활하는 외신과 외물에 대륙은 초토화되고, 많은 이들이 죽어 나갔다.
어떻게든 살려보려 했지만, 살아남는 것은 결국 멀린 혼자뿐이었다.
모두를 살리기를 포기한 채, 멀린은 혼자 살아갔다.
그리고 살아나는 외신을 계속해서 죽이며 연구했다.
이 지독한 종말의 굴레를 끊어 낼 방법을....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황폐한 흙먼지가 날리는 세상을 보며 그는 깨달았다.
'얼마 남지 않았구나.'
카이노스가 소멸한 것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이번 회차에서는 제법 오랜 시간을 머물렀다.
이제 시간을 되돌린다면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모두 소멸할 것이다.
-또 보자꾸나. 나의 대적자여.
자신의 손에 죽고 육신이 흩어져가는 외신을 보며 멀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렇게 소멸한 외신은 곧 되살아나리라.
지금까지 그랬듯이.
'젠장! 그때 내가 이 짓을 왜 한다고 해서는....'
멀린은 외신과의 싸움을 쉽게 보았었다.
이토록 싸움이 길어질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후우...."
한숨을 내쉬는 그의 눈은 이미 오래전 탁하게 변해있었다.
거듭되는 회귀와 오랜 싸움이 그의 영혼도 갉아먹고 있던 것이다.
주먹을 쥐락펴락한 멀린은 이내 기운을 가라앉혔다.
탁하게 변했던 눈동자에 작은 빛이 떠올랐다.
그 순간 지면에서 치솟는 검은 형체를 보며 멀린은 이를 악물었다.
"또 보기는 개뿔. 그만 보자. 지겹다, 진짜."
이제는 정말 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이미 방법을 찾아냈다.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다.'
그 말을 끝으로 멀린의 마지막 회귀가 시작됐다.
***
[회귀 ?????회차]
"하하, 하하하!"
오염된 세계수를 가르며 나오는 외신.
언제나 회귀의 시작은 저 웃음소리로 시작됐다.
1만 번이 넘게 본 첫 장면이었다.
멀린은 그를 고요히 바라보다가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회귀하며 수없이 죽고 살고를 반복하던 그의 동료들.
저들의 죽음을 지켜본 것이 최소 1만 번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의 죽음은 없을 것이다.
자신이 그리 만들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