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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서클 직전에 환생-170화 (170/191)

대적자(1)

대적자(1)

임금 협상.

이 얼마나 아름다운 단어란 말인가.

임금 협상의 시간은 용병으로 활동하면서 멀린이 가장 즐거워하는 시간이었다.

지닌 능력에 따라 대우받는 용병의 체계.

부조리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참으로 공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멀린이 손을 비비며 황녀를 초롱초롱 바라보았다.

"좋습니다! 임금 협상!"

"흠...."

멀린의 신난 표정과는 달리 황녀는 살짝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이들을 어찌 대우해 줘야 하는 건가.'

수십의 용병들을 때려눕히는 단원들부터 최상급 용병인 프랑크를 날려버린 정체불명의 단장.

분명 놓치고 싶지 않은 이들이었지만, 걱정스럽기도 했다.

'여력이 되는가....'

현재 프랑크를 비롯해 황녀가 고용한 최상급의 용병은 모두 일곱이었다.

그들과 그들의 용병단에게 지급되는 골드도 만만치 않았다.

대륙에서 부유하기로 소문난 슈마트 제국의 황족이지만, 꽤 오랜 기간 황권 다툼이 이어지며 마르지 않을 거 같았던 군자금도 슬슬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다.

특히 애초부터 다른 황족에 비해 많은 것이 부족한 상태로 황권 다툼에 끼어든 사브리나다 보니 이래저래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그녀는 길게 생각하지 않고 솔직하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솔직히 말하면, 그대와 용병단을 고용하고 싶다. 한 명의 실력자가 중요한 상황에서 그대와 같은 이를 놓칠 수는 없으니."

"아무렴요!"

"하지만 문제가 있구나."

그녀의 어투에서 멀린은 직감적으로 돈 문제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여력이 없으십니까?"

"그렇다. 이미 그대와 비슷한 실력자 일곱을 고용했다. 그들에게 들어가는 골드가 만만치 않다. 물론 그대를 고용하지 못할 것은 없으나... 오랫동안 계약할 여력은 없구나."

"음...."

멀린이 턱을 쓸었다.

'상황이 많이 안 좋은가 보네.'

어차피 세력이 약한 것은 알고 사브리나 진영에 합류했다.

그렇다 보니 자금력도 다른 황족들에 비해 부족할 것이란 것도 충분히 이해 갔다.

잠시 고민하던 멀린.

그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좋습니다."

"좋다? 무엇이?"

"이렇게 하시죠."

"......?"

"계약금, 잔금 없이 모든 임금을 성과제로 받겠습니다."

기본적으로 용병들에게 제공되는 임금은 계약금 10%와 잔금.

성과제는 황녀도 처음 들어보는 제안이었다.

이에 그녀가 흥미를 보였다.

"성과제라?"

"예. 만약 저희의 전공이 미미하다면 나중에 받을 돈도 적어지는 거고, 반대로...."

"전공이 화려하다면 지급 받을 임금 역시 커진다?"

"그렇죠."

"전공의 여부는 어찌 판단한단 말이냐?"

"그거야 황녀님의 양심에 맡기죠."

"호오?"

멀린의 답에 황녀는 얼굴이 밝아졌다.

'나쁠 게 없는 제안이구나.'

나쁠 게 없는 게 아니라, 무조건 황녀에게 유리한 조건이었다.

임금도 후불 지급에 그 액수를 정하는 기준도 자신이 정할 수 있으니 말이다.

황녀가 살짝 미소 지으며 물었다.

"만약 내가 그대들의 전공을 깎아내린다면 어찌할 셈이더냐?"

"그럴 수 없을걸요?"

"......?"

"그 누구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전공이라면 황녀님도 어쩔 수 없을 거잖습니까?"

담담한 멀린의 이야기.

이에 황녀는 큰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하."

호탕함이 가득 담긴 웃음이었다.

그 속에는 유쾌함이 듬뿍 묻어났다.

그녀가 호감 섞인 눈빛으로 멀린을 바라보았다.

"자신감이 대단하구나."

"제가 자신감 빼면 시쳅니다."

"좋다. 제안을 받아들이지. 내 그대가 어떤 전공을 세울지 기대하마."

"나중에 가서 후회하지 마시죠. 그때 오늘 남들만큼 주는 거로 계약했어야 했다고 후회하신들 소용없을 겁니다."

"걱정 말거라. 만약 그대의 전공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전공이라면 내 어떻게 해서든 돈을 마련하지. 빚을 내서라도 말야."

"믿음이 가네요. 쿡쿡."

그 뒤로도 계약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그들은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좋다. 계약서는 내 부관을 시켜 보내도록 하겠다."

"알겠습니다. 한데, 그전에 물어볼 게 있는데요."

"말하라."

"황녀님의 목표는 어디까지입니까?"

"내 목표라...."

멀린의 물음에 황녀는 슬쩍 미소 지으며 답했다.

"말해 무엇하겠는가. 당연히 정상이지."

"후후."

황녀의 미소에 멀린도 미소로 답했다.

"제가 그곳까지 초고속으로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기대하지."

은은한 미소를 지은 황녀.

그녀는 멀린의 말을 기분 좋은 아부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막사를 떠나려던 멀린을 붙잡는 소리가 있었으니.

"아, 이 얘기를 안 했구나."

"......?"

"흠... 제네리움 제국에서 영문 모를 전언이 왔다."

"전언?"

"제네리움 황제의 전언이라는군."

"......?"

멀린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이는 사브리나 황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황제의 전언?"

"그렇다. 그런데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지...?"

"뭐라고 왔는데 그러십니까?"

"집구석에서 사고 치는 놈 좀 데려가라더구나. 준비해 놓을 테니."

"아하."

황녀의 말에 멀린이 피식거렸다.

집구석에서 사고 치는 놈.

그게 누굴 말하는지는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전언 확실하게 받았습니다."

그리 말한 멀린은 바로 등을 돌려 황녀의 막사를 떠나갔다.

은은한 황녀의 시선을 받으며.

***

그로부터 한 시간 뒤.

아발론 일동에게 배정된 막사 안.

"읍읍!"

팔다리가 묶이고, 입에 재갈까지 물린 사내에게 아발론 일동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잠시 외출을 한 멀린이 들쳐업고 온 남자.

그를 알아본 이들은 하나같이 어이없다는 얼굴이었다.

"루시안 저하?"

자신을 향한 시선에 루시안이 처량한 눈빛을 보냈다.

이를 무시한 아발론 일동,

그들은 이내 멀린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 사태에 대해 해명하라는 시선에 멀린이 어깨를 으쓱였다.

"데려가라고 해서 데려왔지."

"...누가요?"

"저거 아버지가."

"폐하께서...?"

"응."

"아니, 그러면 그냥 곱게 데려오시면 될걸... 왜 저 꼴로?"

"내가 안 했다."

"예?"

"가니까 이미 저 꼴이 되어 있던데?"

이번에는 일동의 시선이 황태자에게 모여들었다.

제플린이 루시안의 재갈을 풀어주었다.

"고, 고맙다."

"아니... 저하. 어쩌다 이 꼴로...?"

제플린의 물음에 루시안이 이를 갈았다.

"이 망할 자식들! 사내놈들이 고작 그 정도도 못 참고 폐하께 상소를 올려?!"

"누가요?"

"누구긴 누구야! 황궁의 골드나 축내는 무능한 놈들이지!"

"대체... 얼마나 갈구셨기에?"

"별로 안 갈궜다! 그냥 난 내가 배운 대로 했을 뿐이라고."

"......."

순간 대화가 사라졌다.

루시안의 이야기에 저마다 생각에 잠긴 것이다.

'하긴, '누구'한테 배운 대로 했을 테니 밑에 놈들이 죽어났겠지....'

'하루 이틀 갈군 것도 아니고 허구한 날 두들겨 팼을 테니....'

그 폭력이 물리적 폭력이든, 정신적 폭력이든.

실제로 황태자 루시안이 복귀하고 나서 황궁 관리들과 근위대는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지치지도 않고 매일 실수와 오류를 잡아내는 탓에 피 말라간 관리들.

툭하면 찾아와서 훈련을 빙자한 싸움을 벌여 몸에 멍이 지워지지 않는 근위대까지.

오죽했으면 황태자의 복귀 이후 황궁에 탈모 환자들이 속출했다는 말이 나오겠는가.

아발론 일동은 루시안을 가르친 '누군가'의 밑에서 오랜 시간 버텨온 이들이었기에 충분히 상소를 올린 황궁 관료들의 기분을 이해했다.

단 한 명만 빼놓고.

"진짜? 이야, 하여간 줏대 없는 놈들 같으니. 고작 그거 갈궜다고 황제한테 상소를 올린다고?"

"맞습니다! 진짜 저는 잘못이 없습니다."

"쯧쯧. 아니, 이건 전적으로 네 잘못이네. 갈굴 때 다시는 찍소리 못하도록 갈궈야지."

"아... 그렇습니까?"

"그래. 나중에 집 가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해라."

"며, 명심하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당장 보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은근슬쩍 눈치를 본 황태자의 말에 멀린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가고 싶냐?"

"보, 보내 주신다면야...."

가고 싶었다.

지금 당장에라도!

'폐하... 어찌 저를 이리 내치십니까?!'

황태자는 꿈에도 몰랐다.

자는 와중에 갑자기 근위대가 들이닥쳐, 황제의 명령이라고 자신을 포박할 줄은.

거기다 자신을 이 악마에게 넘길 것이라고는....

이는 믿었던 이에게 당한 두 번째 배신이었다.

그렇게 루시안이 세상 잃은 얼굴을 하고 있을 때.

그의 안색을 환하게 만드는 답이 들려왔다.

"그래, 보내 줄게."

"저, 정말이십니까?"

"응."

"감사합니다!"

"자, 골라 봐."

"네?"

"어떤 걸 놓고 갈래?"

"예?"

"팔? 다리? 두 개씩 있으니까 하나쯤은 놓고 가도 되잖아."

루시안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그가 다급히 외쳤다.

"저, 저는 이곳이 좋습니다! 화, 황궁보다 훨씬 안락하네요! 얼마든지 여기 있겠습니다!"

"그래? 이런, 아쉽네. 말만 하면 보내 주려 했는데."

"......."

루시안이 울상을 지으며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모두가 슬그머니 그의 시선을 회피했다.

돌아가는 상황에 체념한 루시안.

그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여기가 어딥니까?"

잘 자다가 봉변을 당해 끌려온 루시안.

그의 질문에 케이가 답을 줬다.

"슈마트 제국입니다."

"슈마트 제국? 거긴... 아니, 여긴 한창 내전 중이지 않습니까?!"

"네. 맞아요."

고개를 끄덕인 케이가 루시안을 더욱 절망케 하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여기는 사브리나 황녀 진영이고요."

"네?"

"...저희 지금 용병으로 슈마트 제국 내전에 참전한 상탭니다."

"......."

이거였던가.

엊그제 멀린이 자신을 찾아와서 용병단 하나 만들라고 난리를 친 이유가?

허탈해하는 루시안을 보고 멀린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자, 이제부터 네 이름은 루시다."

"......."

"우리 아발론 용병단 막내지."

"......."

"알아들었냐?"

"...네."

누구의 명령이라고 거부할까.

루시안의 동공이 멍하니 풀렸다.

'내가... 내 무덤을 팠구나.'

아발론 일동이 그런 루시안을 불쌍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때까지.

그 누구도 여전히 손발이 묶인 루시안을 풀어주는 이는 없었다.

***

황태자 루시안.

아니, 막내 루시가 아발론 용병단에 합류하고 일주일.

황녀의 진영은 여전히 조용했다.

폭풍같이 등장하여 실력을 증명한 아발론 일동을 무시하는 용병들은 없었다.

덕분에 아발론 일동은 제법 편안하게 막사 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그렇게 다시 며칠이 흘렀을 무렵.

황녀로부터 각 용병단의 단장을 소집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5천의 정병과 또한 5천에 달하는 용병들을 대표하는 이들이 대형 막사로 모여들었다.

무려 50명에 달하는 인원.

대인원이 모였지만, 막사 안은 조용했다.

그 누구도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잠시 후, 황녀가 호위를 대동하고 등장했다.

자리한 용병 단장들과 장군들을 보며 황녀가 입을 열었다.

"제군들."

"......."

"우리는 이틀 후, 클라이 사막을 횡단하여 할린 황자의 진영을 칠 것이다."

"......?!"

"자세한 작전 내용은 곧 하달할 예정이니 모두 만반의 준비를 하고 대기하라."

오랜 시간 끝에 떨어진 출정 소식.

이에 분위기가 축 가라앉았다.

그들도 느낀 것이다.

이번 출정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말이다.

모두가 심각한 눈빛을 하고 있을 때.

단 한 명.

'오호?'

멀린만 눈을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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