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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서클 직전에 환생-169화 (169/191)

멀린과 아이들(5)

멀린과 아이들(5)

여전히 굳은 얼굴을 풀지 않는 프랑크를 보며 멀린이 말했다.

"진짜인데? 왜 안 믿어 주실까."

프랑크의 시선이 너무도 여유로운 멀린을 훑었다.

이제 겨우 사내의 모습을 취해가는 아직 어린 소년.

'한 수 감춰둔 게 있는 녀석인가?'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소년에게서 그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말은 다시 말해 녀석이 아무것도 익히지 않은 평범한 인간이거나.

혹은, 자신보다 윗줄의 실력자라는 소리였다.

익스퍼트 최상급인 자신보다 윗줄의 실력자라면 소드 마스터란 소리인데....

'말 같지도 않은 소리군.'

끽해야 20살이나 됐음 직한 녀석이 소드 마스터일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만약 그렇다면 녀석은 대륙 역사에 이름을 남길 만한 천재임이 틀림없으리라.

그리 생각을 정리한 프랑크는 멀린에 대한 경계심을 낮췄다.

대신 겁 없는 소년을 향해 살기를 흘렸다.

"죽는 게 소원이라면 들어 줄 수밖에."

프랑크가 서서히 멀린에게 걸어갔다.

프랑크 앞에 선 멀린은 오우거 앞에 선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지켜보는 이들은 프랑크의 손에 겁 없는 소년이 피떡으로 변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때였다.

"잠깐!"

멀린이 다급히 손을 들어 올렸다.

이에 프랑크가 피식거렸다.

"이제 와서 후회한들 소용없다."

멀린의 제지에도 프랑크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멀린은 손을 휘휘 내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아, 무슨 오해가 있으신 모양인데.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만하자는 게 아니고."

"......?"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하면 재미없으니 규칙을 하나 정하자고."

너무도 태연한 멀린의 모습에 프랑크는 어이없다는 시선을 보냈다.

"규칙?"

"남들처럼 그냥 치고받으면 그게 뭔 재미가 있겠어. 그러니까 서로 공평하게 한 대씩 치는 거로 하자."

"허...."

프랑크가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다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피식거렸다.

"재밌군."

"그렇지? 할래?"

"못할 것도 없지."

멀린이 제안한 규칙은 용병들이 주먹 싸움을 할 때 흔히 하는 내기였다.

비록 그것을 저 겁대가리 없는 놈이 먼저 제안할 줄은 몰랐지만, 프랑크가 이를 피할 리 없었다.

아니, 피한다면 두고두고 놀림거리가 되리라.

"먼저 들어와 봐라."

프랑크가 도발적으로 손을 까닥였다.

멀린이 씨익 웃었다.

"오? 정말? 후회하지 않겠어?"

"계속 입으로만 떠들 셈이냐?"

"그렇다면야 사양하지 않지."

멀린은 어깨를 휘휘 휘두르며 앞으로 걸어갔다.

조금의 긴장감도 보이지 않는 모습.

프랑크와의 거리가 약 40cm가 남았을 때 멀린이 멈춰 섰다.

"자, 그럼 간다?"

"얼마든지 와봐라."

"살살할 테니까. 잘 막아봐."

동시에 멀린이 팔을 휘둘렀다.

마치 프랑크를 놀리듯, 어린 꼬마도 피할 수 있을 정도로 천천히 말이다.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저, 저... 뒷감당을 어찌하려고."

"아무래도 오늘 송장 하나 치우겠네."

모두가 멀린을 비웃었다.

하지만 정작 멀린의 주먹질 앞에 놓인 당사자는 달랐다.

"흡?!"

프랑크의 눈이 크게 치떠졌다.

그는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주먹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모, 몸이?!'

어째서인지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프랑크의 몸이 움직이지 않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마치 뱀 앞에 놓인 쥐처럼.

포식자 앞에 놓인 피식자처럼 프랑크의 몸이 경직된 것이다.

프랑크도 그러한 사실을 알아차렸다.

'두렵다고...?'

저토록 느린 주먹이?

열 살 먹은 아이도 피할 것 같은 느려터진 주먹에 자신이 겁을 먹는다는 게 말이 되는가.

하지만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은 현실이었다.

또한, 그의 본능은 여실히 경고해주고 있었다.

'맞는 순간 죽는다!'

이대로 당한다면 자신은 100%의 확률로 죽는다는 것을.

느려진 사고 속에서 프랑크는 어느새 자신의 복부와 10cm 거리로 다가온 멀린의 주먹을 느꼈다.

'마, 막아야 한다!'

살고자 하는 본능이 프랑크의 마나를 움직였다.

태어나서 이렇게 필사적이었던 적이 있었을까?

프랑크는 젖먹던 힘을 다해 마나를 끌어 올렸다.

"흐아압!"

거친 기합과 함께 프랑크의 전신에 푸른 마나가 치솟고.

퉁-

멀린의 주먹이 그의 복부를 두들기며 작은 소리를 냈다.

그리고.

화아악-

멀린과 프랑크를 중심으로 거친 돌풍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퐝!

거친 소리를 내며 프랑크의 거구가 하늘로 치솟았다.

쏘아진 포탄처럼 사선 방향으로 튕겨 나간 프랑크.

좌중의 시선이 날아오른 프랑크를 쫓았다.

"뭐, 뭐야?!"

"저게 무슨?!"

일련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이들이 기함을 토해냈다.

도무지 그들의 상식선에서는 설명되지 않을 일이었으니 말이다.

170cm가 조금 넘는 소년이 210cm의 거구를.

그것도 느리디느린 주먹으로 날려버린다는 게 말이 되는가.

"대, 대체 어디까지 날아간 거야?"

"저게 말이 돼?"

누군가 내던진 것처럼 프랑크는 무려 50m를 날아가 어느 빈 막사에 떨어졌다.

이를 끝까지 지켜본 멀린이 어깨를 휘휘 내저으며 중얼거렸다.

"후... 이거 힘드네."

멀린이 나지도 않은 땀을 닦아냈다.

한편으로는 매우 개운해 보이는 것은 착각일까?

"죽지 않게 치는 것도 일이구나."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멀린.

그에게 멍한 얼굴을 한 비비안이 다가왔다.

"방금 그거... 뭐예요?"

수준이 낮은 이들은 멀린이 무슨 일을 했는지 깨닫지 못했고.

나름대로 실력이 있는 자들은 멀린이 주먹을 내지르는 과정에서 기괴한 존재감을 느꼈다.

그리고 현장에서 멀린을 제외하고 가장 경지가 높은 비비안은 신세계를 보았다.

'대체... 그게 뭐지?'

놀라 토끼처럼 눈을 뜬 비비안을 보며 멀린이 그녀의 머리를 토닥여 주었다.

"네가 지금의 경지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간다면 이해할 수 있을 거다."

"......."

비비안이 불만스럽다는 얼굴을 해 보였지만, 멀린은 그 이상의 설명을 주지 않았다.

자신이 설명을 해주는 게 비비안의 발전 가능성을 막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이거 진짜 쉽지 않네.'

마르스의 기억 금고에서 깨달음을 얻으며 9서클임에도 약간의 간섭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된 멀린.

그가 조금 전 힘들었다고 말한 것은 빈말이 아니었다.

간섭력을 극도로 절제하는 일.

그것은 멀린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모두가 놀란 사이, 프랑크가 떨어진 막사가 들썩였다.

"쿠, 쿨럭!"

피 섞인 기침을 토해내며 몸을 일으킨 프랑크.

그가 핏발 선 눈으로 멀린이 있는 방향을 향해 비틀비틀 걸어갔다.

주변 인파가 프랑크에게 길을 터주었다.

그 모습에 멀린이 작게 감탄했다.

'이야, 진짜 튼튼한 몸이네.'

아무리 죽지 않게 쳤다고는 하지만, 어지간해서는 일어서지도 못할 정도의 타격이었다.

그런데 놈은 힘겨워하면서도 걷고 있었다.

실로 대단한 육체 내구성이라 할만했다.

비척비척 멀린의 앞으로 다가온 프랑크.

그가 입가에 흐른 피를 닦아내며 웃었다.

"이제... 내 차례인가?"

"오호?"

자신의 실력을 보았음에도 투기를 잃지 않는 프랑크가 제법 대단해 보였다.

'물론 대단한 거는 대단한 거고.'

주먹을 쥐고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프랑크를 보며 멀린이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양손을 들어 올렸다.

"항복."

"......?"

"내가 졌다."

프랑크의 얼굴이 멍해졌다.

그는 지금 자신이 무엇을 들었는지 깨닫지 못한 것이다.

반면 멀린은 힘들어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야, 내 필살의 공격이었는데 그걸 버틸 줄 몰랐네."

"이...."

"어우야... 힘이 쫙쫙 빠지는 게 나 금방이라도 쓰러질 거 같다. 그러니까 네가 이겼다."

"이, 이놈이!"

프랑크의 얼굴이 푸들거렸다.

혈압이 올라 얼굴이 붉어진 프랑크가 버럭 소리쳤다.

"개 같은 소리!"

"내가 졌다니까? 설마 항복한 사람 때릴 거야?"

"닥쳐라!"

"아아, 너무 흥분하지 말라고. 너 지금 다리 후들거리고 있어. 그러다가 진짜 쓰러질라."

아닌 게 아니라 프랑크는 정말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버티고 서있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단 한 가지.

저 유들거리는 놈의 면상에 주먹 한 방을 꽂는 것.

오로지 그것뿐이었다.

"누구 마음대로 끝낸다고!"

"어허! 항복이라니까?"

"닥쳐!"

질질 몸을 끌며 멀린에게 다가서는 프랑크.

이에 멀린은 뒷걸음질 치며 그를 피했다.

그 순간이었다.

"그만!"

프랑크가 등장했을 때처럼 인파의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나타난 황녀를 보고 용병들이 공간을 텄다.

멀린과 프랑크에게 다가온 황녀가 싸늘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만하거라."

"......."

"명령이다."

사브리나 황녀의 냉랭한 말투에 프랑크가 입술을 집 씹었다.

반면 멀린은....

"아무럼요. 누구의 명이신데 당연히 그만해야죠!"

그는 너무도 기쁘다는 얼굴로 유들거리며 연신 허리를 굽신거렸다.

그 인사를 받으며 황녀가 주변을 향해 외쳤다.

"유흥은 끝났다. 해산하거라."

황녀의 명령에 따라온 병사들과 장군들이 주변을 노려보았다.

이에 용병들이 흩어졌으면, 몇몇 용병들이 기절한 동료들을 데리고 사라졌다.

"우리도 가자."

"네."

멀린이 경쾌한 발걸음을 옮기자 아발론 일동이 그를 따랐다.

"쿨럭!"

"다, 단장!"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프랑크가 피를 토해내며 무릎을 꿇었다.

그의 부하들이 프랑크에게 달려가 그를 부축했다.

부하들의 도움을 받아 떠나가는 프랑크.

황녀는 그 모습을 고요하게 지켜보다가 발길을 돌렸다.

그 순간 그녀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 있었다.

'제법이야.'

전략회의를 하던 황녀가 소란을 느끼고 막사 밖으로 나온 것은 아발론 일동이 본격적으로 용병들을 두드려 잡던 때였다.

자신과 나이가 얼마 차이 나지 않은 소년·소녀가 압도적으로 수십의 용병을 몰아붙일 때, 황녀는 살짝 놀라고 말았다.

그리고 멀린이 프랑크를 날려버렸을 때 그녀의 놀람은 절정을 이뤘다.

'설마 프랑크를 일격에 그 지경으로 만들 줄이야.'

용병 프랑크는 사브리나 황녀도 익히 알고 있는 실력자였다.

자신의 진영에서도 손에 꼽히는 용병.

아무리 선공을 양보했다고는 하지만, 제네리움 용병단의 대표로 보이는 소년이 프랑크를 말 그대로 날려버린 건 경악할 만한 일이었다.

황녀가 곁을 지키는 장군을 보며 물었다.

"제네리움 제국에 그들의 증명서 알아보았느냐?"

"예. 오늘 중으로 연락을 준다고 했습니다."

"......."

잠시 뒤를 돌아 멀어지고 있는 멀린 일행을 흘끗거린 황녀.

'재밌구나.'

또한, 기대가 됐다.

과연 제네리움 제국에서 어떤 답이 돌아올지.

그리고 자신들을 제네리움 제국 용병단이라 말하는 이들이 말이 사실이라면, 과연 저들을 어찌 쓸 수 있을지.

사브리나 황녀는 사뭇 기대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그날 저녁.

제네리움 제국에서 연락이 오기 무섭게 사브리나 황녀는 멀린을 불렀다.

오로지 멀린 혼자.

널찍한 막사 안에서 멀린은 황녀와 독대를 가졌다.

***

"확인 끝났습니까?"

미소 띤 멀린의 물음에 황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끝났다."

제네리움 제국에서 돌아온 답은 간단했다.

-그들은 우리 황실 소속 용병단이 맞습니다.

제네리움에도 돌아온 답을 떠올린 황녀는 멀린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이름조차 듣지 못했구나."

"멀린입니다."

"그래, 멀린."

멀린과 황녀의 시선이 마주하고.

"실력이 제법이더구나."

"별말씀을."

멀린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너무도 자신감 넘치는 모습에 황녀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신분이 확인됐으니 이제 임금 협상이 남은 건가?"

그 말에 멀린의 두 눈이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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