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동치는 대륙(7)
요동치는 대륙(7)
"아니, 괜찮다. 네가 없는 사이 수련에 임했다."
"...마르스, 그거 별로 안 좋아. 수련도 적당히 해야 하는 법이야."
"수련에 '적당히'란 단어는 없다. 무(武)의 길에 끝이 없으니까. "
"네에 네에. 어련하시려고요."
마치 자신은 없는 듯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둘을 보며 멀린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는 현 상황을 파악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팠다.
'대체 이게 뭐지?'
마나가 터무니 없이 희박한 세상.
자신이 모르는 모습을 한 마르스와 정체불명의 여인.
그리고 폭발 당시 마르스가 사용한 이상한 무지갯빛의 공격.
골똘하게 궁리를 하던 멀린의 입에서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이거 설마... 마르스 기억인가?"
그것이 멀린이 내린 결론이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은 멀린의 가슴팍에서 들려왔다.
-정답이다.
굵직하고 익숙한 목소리.
이에 멀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카이노스?"
멀린의 부름을 들었음일까.
잠들었던 시리가 뽀로로 날아올랐다.
하지만 녀석에게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평소 멀린이 알던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오랜만이군.
"허... 그동안 그렇게 불러도 나타나지도 않더니, 이제야 나타난 거냐?"
-너무 원망치는 말아라. 이게 다 너 때문이니.
"나 때문?"
-흘러간 시간을 되돌리는 일에 대가가 없을거라 생각했던 거냐?
시리의 몸을 빌린 카이노스가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말에 멀린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지난번 회귀로 인해 자신이 득을 본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다른 것을 물어보았다.
"아까... 정답이라고 했지?"
-그랬지.
"그럼, 여기가 마르스의 기억 속이라고? 만약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여기에 들어올 수 있는 거지? 난 지금 분명히 육체를 지니고 있는데?"
그게 바로 멀린을 혼란스럽게 하는 사실이었다.
남의 기억 속에, 그것도 육신을 가지고 어찌 들어온단 말인가.
멀린으로서는 이해 못 할 일이었다.
하지만 카이노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건 마르스의 기억이 맞다. 정확히는 마르스의 기억을 모아 놓은 공간이지.
"기억을 모아 놓은 공간?"
-신이란 망각을 모르는 존재. 하지만 때때로 잊고 싶은 기억도, 혹은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기억도 있기 마련. 이곳은 그런 신들을 위해 만들어진 개별 공간이다.
"......."
-오직 자신만이 열 수 있는 안전한 장소에 기억을 저장해 두었다가, 보고 싶은 기억이 있을 때 찾아보는 거다. 혹은 기억을 공유하고 싶은 존재에게 이곳을 빌려주거나. 한때 신들에게 유행하던 방법이었다.
"...진짜 신이란 건 알다가도 모를 존재군."
-너도 망각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기분을 이해하게 될 거다.
"아무튼, 여기가 신 전용 기억 금고라, 그중에서도 마르스의 금고라는 소리잖아."
-대충 그렇게 생각하면 된다. 그나저나... 마르스 녀석이 어지간히 수세에 몰린 모양이군. 너를 이곳에 보내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말했다시피 이곳은 신의 기억을 모아두는 곳인 만큼 절대적인 안전성을 자랑한다. 그 어떤 충격에도 멀쩡하게 버틸 수 있지.
".......?"
-그 말은 반대로 허락 없이 이곳에 들어온 존재는 쉽게 나갈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무리 신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기억을 남이 보는 것을 유쾌하게 여기지는 않거든. 그런 의미에서 마르스가 너를 이곳에 보냈다는 것은 자신의 치부를 들키는 한이 있더라도 이곳에 가두겠다는 의미다.
"......?!"
카이노스의 설명에 멀린의 안색이 굳어졌다.
"잠깐... 그러면 내가 이곳에 영원히 갇혀 있을 수도 있다는 소리냐?"
-아마도.
"...진짜 나갈 방법이 없는 거냐?"
-전혀 없지는 않다.
"그걸 알려달라고!"
-지금부터 말하려고 했다. 일단, 첫째로... 널 이곳에 가둔 이가 직접 꺼내 주는 거.
"...첫 번째 방법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군. 다른 거는?"
-두 번째는 기다리는 거다.
"기다려?"
-보통 주인 이외의 존재를 이곳에 들일 때, 주인은 자신이 보이고 싶은 기억의 재생이 끝나면 자동으로 외부자를 내보내게 설정한다.
"다시 말해 내가 보고 있는 기억재생이 끝나면 알아서 자연히 나가진다?"
-그렇다. 물론, 이 기억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마르스만이 알고 있겠지,
"다른 방법은? 없나?"
-있다. 마지막 방법이.
"뭔데."
-힘으로 부수고 나가면 된다. 할 수만 있다면 말이지.
"거참... 가장 마음에 드는 방법이네."
카이노스의 말에 멀린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마르스가 자신을 꺼내 주는 것은 기대조차 하지 않고, 지금 보고 있는 마르스의 기억이 언제 끝날지는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그리고 신의 기억을 보관하는 이 장소를 부술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어떤 방법이든 쉬운 게 없었다.
이에 멀린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다른 방법이 없나?'
그 순간 멀린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으니.
"카이노스!"
멀린이 다급히 소리쳤다.
그가 큰 기대를 품고 카이노스에게 물었다.
"시간, 시간을 되돌려! 내가 이곳에 갇히기 전으로!"
멀린이 생각해낸 방법.
그것은 간단했다.
바로 카이노스의 힘으로 또 한 번 회귀하는 것.
그렇게 해서 마르스가 자신을 이곳에 가두는 것을 방지하면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멀린의 요청에 돌아온 것은 거부 의사였다.
-불가능하다.
"어째서!"
-힘이 없다.
"...뭐?"
-지난번에 너를 과거로 되돌려 보낸 것이 내 마지막 힘이었다.
"이... 조루 자식."
-...그건 신성모독이군.
"됐고. 그 힘이 뭔데? 마나? 아니면 다른 것? 그 힘을 채우는 데 뭐가 필요한데? 일단 같이 궁리해 보자고."
-궁리해도 어쩔 수 없다. 구할 수 없으니.
"도대체 뭔데 그래?"
-시간이다.
"뭐?"
멀린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 올랐다.
그가 되물었다.
"시간... 이라고?"
-그래. 나의 진명(眞名)을 기억하고 있나?
그의 물음에 멀린은 과거 카이노스가 자신을 소개할 당시를 떠올렸다.
[-신이었지. 한때, '지나온 시간의 신'이라고 불린]
멀린이 카이노스의 진명을 입에 담았다.
"지나온... 시간의 신?"
-그래. 나의 진명은 지나온 시간의 신이다. 그 이름이 어떻게 생겼을지 생각해 보았나?
"그게 무슨...?"
-내가 다룰 수 있는 시간은 오로지 지나온 시간, 즉 과거뿐이다. 그리고 그 힘을 쓰는 대가로... 나는 미래의 시간을 사용한다.
"......?!"
멀린의 동공이 커졌다.
"그러니까... 과거의 시간을 되돌리는 데 필요한 게 미래의 시간이란 거지?"
-그렇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시간을 통해 과거를 바꾸는 거지.
"아...."
멀린은 탄식했다.
확실히 과거를 바꾸는 카이노스의 힘은 절대적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긴 했지.'
카이노스에게 과거를 뒤바꿀 힘이 있음에도 차원 전쟁에서 현계의 신들이 열세에 몰렸다는 게.
그리고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진리의 문을 만들어 내야만 했다는 사실까지.
만약 카이노스의 힘이 무한했다면, 현계의 신들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카이노스의 힘은 절대적인 만큼 많은 대가를 필요로 했던 것이었다.
-나는 지난 전쟁에서 너무 많은 미래를 낭비했다. 무한에 가깝게 살아가는 신이라지만, 전쟁은 격렬했고, 패전을 승전으로 만들기 위해 나는 너무 많은 시간을 사용해버리고 말았다. 그런 나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나는 가장 먼저 진리의 문에 내 몸을 던졌다. 더 이상 내게 남은 시간을 허비하지 않기 위해.
"......."
-그리고 그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중 일부는 너를 위해 사용해 준 거다.
"음... 그건 좀 고맙군."
-만약 여기서 내게 남은 시간을 사용한다면 나는 소멸한다.
"소멸?"
-미래가 존재하지 않는 이에게 남은 게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에 대한 답은 간단했다.
'죽음.'
혹은 소멸.
미래가 없는 이가 맞이할 단 하나의 미래였다.
이에 멀린도 더는 카이노스를 재촉하지 못했다.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혹시... 네 시간이 아닌 나의 시간으로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는 거냐?"
-불가능하다.
"어째서?"
-내 시간이 아닌 너의 시간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내가 가진 격을 너에게 넘겨야 한다. 그렇게 되면....
"너 죽어?"
-그래. 나는 아직 자살하고 싶지 않다. 안 그래도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인데 유용하게 보내다 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 봤자, 또 잠만 잘 거잖아?"
-그래서 지금 나보고 너한테 격을 넘기고 자살을 하란 소리냐?
"아니... 뭐, 그렇다는 건 아니고."
멀린이 입맛을 다시며 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야에 손을 맞잡고 신전으로 들어가는 1남 1녀의 모습이 들어왔다.
'저자가 마르스라면... 여인은.'
여인의 정체로 짐작할 이는 하나뿐이었다.
마르스의 연인.
최후의 용.
바로 그녀 말이다.
"하아...."
멀린의 입에서 짙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어쩔 수 없나?"
일단은 기다려보는 수밖에.
멀린은 마르스가 보여주는 이 기억이 어서 빨리 끝나기를 기도했다.
물론 그렇다고 마냥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으니.
'수련이라도 하자.'
저 기억 속의 마르스가 그러지 않았는가.
수련에 '적당히'란 말은 없다고.
이번 마르스와의 격돌을 통해 무언가 얻은 게 있는 멀린.
자신이 얻은 것을 갈무리하고 혹시 모르니 이 기억 금고를 깨부술 준비도 해야 했다.
그리고....
'이제 대충 마르스 그놈에 대해 알 거 같기도 하다.'
멀린은 다시 있을 마르스와의 격돌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
대륙 3강의 하나, 콴 제국의 분위기는 뒤숭숭했다.
며칠 전, 제국의 남동쪽에 자리한 협곡이 정체불명의 현상으로 소멸했다는 사실이 콴 제국 전역으로 퍼져나간 것이다.
빛이 번쩍이며 그 드넓은 협곡이 완전히 증발해버린 미증유의 사건.
이에 제국민들 사이에서 협곡의 소멸은 재앙의 징조라느니, 제국에 망조가 깃든 것이라느니 등의 소문이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런 소문을 더욱 들끓게 만드는 일이 벌어졌다.
슈마트 제국과 인접한 콴 제국의 검은 넝쿨 요새.
슈마트 제국에서 콴 제국으로 이어지는 요충지이니만큼, 초창기 콴 제국과 슈마트 제국의 분쟁이 빈번하게 일어나던 시기에 검은 넝쿨 요새의 전력은 콴 제국 내에서도 손에 꼽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평화가 길어지자 요새를 지키는 기강은 해이해질 수밖에 없었다.
"고년이 아주 그냥...."
"킥킥. 너 그러다가 마누라한테...."
성벽 망루를 지키는 임무를 수행하는 콴 제국의 병사들은 근무 중 술판을 벌여가며 음담패설을 나누고 있었다.
하나같이 얼굴이 불콰하게 오른 모습.
요새를 지키는 병사들의 기강이 어느 정도로 바닥을 치달았는지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으어... 나 화장실...."
그렇게 벌어진 술판에서 병사 중 하나가 주섬주섬 일어났다.
화장실을 간다며 망루에서 내려왔지만, 그가 향한 곳은 성벽 한쪽 구석이었다.
쫄졸졸-
곧 성벽을 타고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가는 세월에~ 장사 없나니~"
소변을 보며 노래를 흥얼거리던 병사가 잠시 뒤 어깨를 부르르 떨며 바지를 추켜 올렸다.
그렇게 그가 다시 망루로 돌아가려던 찰나.
"...응?"
병사는 두 눈을 끔뻑이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몇 번을 보고 또 보고도 자신이 본 것을 못 믿겠는지 병사는 연신 눈을 비볐다.
그리고 그제야 자신이 술에 취해 헛것을 본 것이 아님을 깨달은 병사가 소리쳤다.
"비, 비상!"
그가 고래고래 고함을 내질렀다.
갑작스러운 그의 호들갑에 망루 위에서 병사 몇이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뭔 지랄이여."
"저거 저거 취했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킬킬거리는 다른 병사들.
그때 놀라 새하얗게 질린 병사가 소리쳤다.
"저, 적군이...!"
퓨숙-
퍽!
아니, 그가 소리치려는 찰나, 날아온 화살이 병사의 입을 꿰뚫었다.
"헉?!"
"이, 무, 무슨?!"
쓰러지는 동료를 보고서야 무언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깨달은 망루의 병사들.
그들이 황급히 비상을 알리는 타종을 치려 했다.
그리고 그 순간.
파파파파파-
수십만 마리의 벌이 일시에 날아오르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병사들의 시선이 정면으로 향하고.
"헉?!
"아...."
그들은 볼 수 있었다.
어두운 밤하늘을 붉게 수놓은 수만 발의 불화살을.
파파파!
밤하늘을 밝힌 불화살 덕분에 어둠 속 시야가 닿지 않던 곳이 모습을 드러냈다.
요새의 성벽 너머에 존재하는 것은 엄청난 수의 병력이었고, 그들 군데군데에 군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슈마트 제국의 신수, 뿔 달린 하얀 낙타가 그려진 군기(軍旗)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