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 정상 회담(4)
대륙 정상 회담(4)
화창한 아침.
아침 일찍 일어난 루시안은 고용인들의 도움을 받아 말끔하게 준비를 마쳤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흡족해하는 그에게 뚱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얼씨구. 네가 지금 정상 회담을 하러 가는 거냐 아니면 맞선을 보러 가는 거냐? 뭘 그렇게 꾸몄냐?"
루시안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돌아갔다.
그곳에는 쿠키를 오독오독 씹으며 소파에 널브러진 멀린이 있었다.
루시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하하, 스승님이 뭘 모르시나 본데, 원래 정상 회담은 이런 외적인 부분이 많이 작용하는 법입니다."
"모르긴 뭘 몰라. 나 때는 말야, 삼박사일 간 잠도 안 자고 회담을 해서 머리랑 얼굴이 기름 범벅이 되고 그랬어, 이 자식아."
"아, 더럽...."
"뭐라?"
"아닙니다. 뭐... 스승님 때는 그러셨겠죠. 예, 그러시겠죠."
이제는 멀린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루시안.
그냥 지어낸 소리라고 믿는 눈치였다.
솔직히 이제 스물도 안 된 멀린이 '나 때는 말야'를 하고 있으니 믿음이 가겠는가.
이에 멀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번 회담에서 걱정은 없겠구나."
"예?"
"간땡이가 부은 걸 보니 회담장에서도 또박또박 말 잘하겠네. 지금처럼."
"......."
루시안이 슬금슬금 멀린의 눈치를 봤다.
저 심기 불편한 얼굴을 보니 여기서 더 이야기했다가는 한 대 쥐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루시안을 멀린의 마수에서 건져주는 구원의 목소리가 있었다.
"저하, 준비 끝나셨습니까?"
"그, 그래, 끝났다!"
문밖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루시안이 화색을 지었다.
반대로 멀린은 불만스럽다는 얼굴이었다.
잠시 뒤, 외교부장이 방으로 들어왔다.
그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저희도 준비 끝났습니다. 언제 가시...."
"가자고! 지금 당장!"
쏜살같이 문밖으로 빠져나가는 루시안의 모습에 외교부장이 살짝 놀란 얼굴을 해 보였다.
잠시 뒤, 놀란 기색을 정비한 외교부장이 멀린을 보며 물었다.
"저, 멀린 님?"
"왜."
"같이 가시겠습니까?"
"나도?"
"예, 멀린 님도 저희 황실 인원으로 등록되어 있어서 회담에 참여하셔도 무관합니다. 혹여 생각이 있으시다면 함께 하시지요?"
"흠...."
멀린은 고민했다.
지루할 게 뻔한 회담.
한편으로는 현재 세상에서 회담이 어떻게 진행될지에 대한 호기심이 고민을 길게 만들었다.
귀찮음과 호기심이 맹렬하게 부딪힌 결과 결국 승리한 것은 호기심이었다.
원래 마법사란 족속이 호기심을 쉽게 떨쳐내지 못하는 이들이었고, 멀린 역시 마법사였으니 말이다.
"좋아. 가자고."
그 말을 하며 멀린은 들고 있던 쿠키를 집어 던지며 일어섰다.
외교부장이 난감한 얼굴로 멀린을 바라보았다.
"그...."
"왜?"
"의복은... 그거 하나뿐이신지요?"
외교부장의 시선이 자신의 가슴팍을 향하는 것을 본 멀린의 고개가 아래를 꺾였다.
누워서 먹느라 이런저런 양념이 묻은 앞자락.
회담에 참여한다고 아침부터 부지런히 멋을 부린 루시안과는 매우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이에 멀린이 피식 웃으며 손을 휘저었다.
곧 물방울이 멀린의 전신을 훑었고 연이어 불어온 따뜻한 바람이 그의 옷을 말렸다.
"됐지?"
"허...."
순식간에 말끔하게 변한 멀린의 모습에 외교부장은 혀를 내둘렀다.
이전부터 기인이라 여기기는 했지만, 그가 선보이는 괴상한 능력은 도무지 적응되지 않았다.
외교부장이 넋을 놓고 있으니 되레 멀린이 재촉했다.
"뭐해? 안가?"
"아... 가, 가시죠."
외교부장이 곧 정신을 차리고 안내를 맡았다.
이후 회담에 참여하겠다는 멀린을 보고 루시안이 기겁한 것과 기어코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은 회담 전에 벌어진 작은 촌극에 불과했다.
***
오랜만에 열린, 그리고 각국의 황태자들이 참여하는 정상 회담인 만큼 회담장도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각국에서 파견된 이들의 품격에 맞는 대우였다.
물론 멀린의 눈에는 정말로 쓸데없는 돈 낭비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쯧. 뭐 이런 곳에서 회담을 한다고. 결국에는 이래저래 난장판 벌어지는 거는 똑같은데. 자고로 회담이라면 가볍게 칼질 몇 번은 오가야 그게 회담 아닌가?"
"아닙니다만...?"
"아냐? 왜?"
"회담장에서 왜 칼질을 합니까?!"
"회담에서 오가는 논의에 각 나라의 이권이 걸렸잖아? 수틀리면 칼도 빼 들고 그럴 수 있는 거지. 나 때는 다 그랬어!"
"스승님 때가 언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부디... 제발... 이번 회담에서는 자중하여 주시길."
"쳇, 알았다니까."
제네리움 제국 파견단과 함께 회담장으로 이동하는 멀린.
그의 옆에서 루시안이 제발 이번 회담장에서는 얌전히 있어 주길 계속 사정했다.
물론 멀린은 대충 알았다고 손을 휘휘 내저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도착한 회담장 입구에 하듐 왕국의 근위대가 자리해 있었다.
제네리움 제국의 파견단을 본 이들이 문을 열며 외쳤다.
"제네리움 제국의 황태자, 루시안 제네리움 저하 입장하십니다."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
동시에 문이 열리며 회담장의 내부가 드러났다.
넓은 공간과 둥그런 탁상.
그리고 이미 들어와 자리하고 있는 십여 명의 사람들.
5왕국에서 나온 파견단이었다.
그들은 제네리움의 등장에 호기심 가득한 눈을 해 보였다.
"제네리움이라...."
"흠... 올해도 리시안 외교부장이 왔군."
"가운데가 루시안 황태자인 거 같은데... 그 옆에는 누구지?"
여기저기서 작게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멀린을 포함한 파견단은 제네리움의 깃발이 놓인 곳으로 향했다.
그들이 착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콴 제국의 황태자, 호벤 무르 콴 저하 입장하십니다!"
곧 문이 열리며 일반적인 복식과 궤를 달리하는 의복을 입은 이들이 등장했다.
소매가 널널하고 마치 긴 치마처럼 보이는 의복.
어찌 보면 로브처럼 보이는 옷이기도 했다.
문을 열고 등장한 이들은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눈길을 익숙하게 받으며 자리로 찾아 들었다.
그들의 등장에 루시안도 약간 긴장한 눈빛이었다.
반면 멀린은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냈다.
'저들이 콴 제국의 인사들이군.'
대륙 3강의 한 축을 담당하는 콴 제국.
과거 중앙 5왕국에 뿌리를 두고 뻗어 나와 북방에 제국을 만든 제네리움 황조와는 달리 콴, 슈마트 제국은 저들만의 독자적인 문화를 구축했다.
제네리움 제국과 5왕국이 비슷비슷한 문화를 보유한 것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었다.
그리고 제네리움의 문화에 익숙해진 멀린에게 콴 제국의 의복은 꽤 신선했다.
'나중에 시간 나면 콴 제국이나 슈마트 제국에 들러봐야겠네.'
다양한 문화에서 오는 색다른 재미가 있지 않겠는가.
그렇게 멀린이 콴 제국을 곁눈질하는 사이, 회담장에 묵묵한 침묵이 감돌았다.
모두가 아직 비어있는 한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등장하지 않는 슈마트 제국으로 인해 회담이 지체되고 있었다.
이에 콴 제국의 황태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가? 이 많은 사람들이 슈마트 놈들을 기다려야 하는 거냐?"
물론 그 말에 답을 하는 이는 없었다.
슈마트 제국과 비견된다는 콴 제국의 황태자이기에 슈마트 제국의 늦장에 쓴소리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루시안도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합니다. 회담은 각국 정상 간의 중요한 약속입니다. 지금까지 기다린 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예를 지킨 것 같으니 이만 회담을 시작하죠."
3강 중 2개 제국의 황태자들이 동의하자 회담의 진행을 맡은 하듐 왕국의 관리가 종이를 펼쳐 들었다.
그와 함께 회담이 시작되려는 찰나였다.
"슈마트 제국의 황태자, 칼 마하무드 압셀 슈마트 황태자 저하 입장하십니다."
거친 목소리와 함께 회담장의 문이 다시 열렸다.
벌컥-
드디어 등장한 비어있는 좌석의 주인들.
좌중의 시선이 그들에게 몰렸다.
콴 제국의 의복보다 훨씬 더 통이 크고 전부 흰색으로 이뤄진 의복.
머리 전체를 둥글게 감싸고 있는 검은 천.
이를 본 멀린이 살짝 놀란 눈을 해 보였다.
'사막 부족의 전통 복장?'
머나먼 과거 멀린의 시대.
사막에 살아가던 부족이 모레 폭풍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의복이 이제는 슈마트 제국의 전통 의복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멀린을 놀라게 한 것은 그뿐이 아니었다.
'저 자식은?!'
슈마트 제국의 가장 선두.
슈마트 제국의 황태자로 보이는 이는 멀린도 잘 알고 있는 존재였다.
아니, 정확히 말해 잘 안다기보다는 며칠 동안 얼굴을 맞댄 사이였다.
'술값 안 내고 튄 놈이잖아!?'
바로 전전날 멀린에게 술을 얻어먹고 나오지 않은, 젊은 낚시꾼이었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만난 인연.
그리고 때마침 주변을 둘러보던 칼의 시선이 멀린과 마주쳤다.
이에 그 역시 살짝 놀란 눈빛을 해 보였다.
멀린을 회담장에서 볼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당혹스러운 얼굴도 잠시.
다시 평온을 찾은 칼이 입을 열었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며칠 전 뭘 잘못 먹은 건지 탈이 좀 나서. 화장실을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한 건지."
그의 익살스러운 말에 좌중이 난감한 얼굴을 해 보였다.
제국의 황태자가 저리 말하는데 늦었다는 이유로 그를 타박할 수 없던 것이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슈마트 놈들의 늦장 태도는 여전하군."
"콴 놈들이 좀생이처럼 아량을 베풀지 않는 것도 여전하고 말야."
칼과 콴 제국의 황태자 간에 눈싸움이 벌어졌다.
하지만 먼저 분위기를 읽고 그들을 만류한 것은 루시안이었다.
"회담이 많이 늦어졌습니다. 바로 시작하시죠."
"미안하군."
루시안의 말에 칼이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자리에 앉았다.
그와 함께 드디어 대륙 정상 회담이 시작됐다.
시간이 흐를수록 여기저기서 상투적인 말이 오가며 여러 안건이 논의되었다.
그리고 회담을 주최하는 이는 콴제국의 황태자와 루시안이었다.
막힘없이 대륙 정세와 관련된 것들을 이야기 나누는 모습은 그들이 많은 준비를 해왔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 하나하나가 대륙 정세에 크든 작든 어떻게든 영향을 미치는 것들.
둘이 주도적으로 회담을 이끌어 갈 때 슈마트 제국의 황태자 칸은 그저 조용히 상황을 지켜볼 따름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름에도 많은 이들이 회담에 집중했지만, 단 사람만이 몸을 배배 꼬고 있었다.
'아, 괜히 왔다.'
호기심 때문에 회담에 참여한 멀린은 기대 이하로 재미없는 회담의 진행 방식에 혀를 내둘렀다.
지루함으로 사람을 죽이는 자리가 있다면 바로 이곳일 것이다.
그렇게 멀린이 어떻게 이 자리에서 도망칠지를 고민하는 찰나, 그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안건이 이어졌다.
"내 듣자 하니 이번 제네리움 제국에 드워프들이 나타났다고?"
먼저 입을 연 것은 콴 제국의 황태자였다.
이에 모두의 이목이 쏠렸다.
드워프에 관한 소식은 근래 대륙을 가장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화제였기 때문이다.
난데없이 드워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흠칫 어깨를 떤 루시안.
그가 멀린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렇습다만?"
"제네리움에서 드워프로 제법 재미를 쏠쏠하게 보고 있다던데?"
"어디서 들은 건지 모르겠지만, 헛소문을 듣고 왔군요."
드워프로 인해 제국이 이득을 보는 것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실질적인 이득을 보는 것은 레드포드 대공령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멀린이 이득을 보는 거였지만....
물론 제국 내 세금 면제 같은 내부적인 문제를 모르는 이들이 보기에는 제네리움 제국이 드워프를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는 것으로 보이는 게 당연했다.
이에 콴 제국의 황태자가 피식 실소하며 말했다.
"뭐, 그거야 우리 측에서 자세히 알아보면 될 일이고."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겁니까?"
루시안은 미칠 것만 같았다.
불안과 초조함으로 다리가 미친 듯이 떨려오는 걸 겨우겨우 억제하고 있었다.
그가 이토록 불안해하는 이유.
그것은 눈앞에서 유들거리며 말하는 콴 제국의 황태자 따위가 아니었다.
바로 옆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멀린의 삐딱한 기운 때문이었다.
'제발, 말하지 마... 하지 마, 이 미친놈아!'
루시안은 할 수만 있다면 저 콴 제국의 족제비 같은 놈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기에 제발 족제비 놈이 별말 하지 않기를 기도할 뿐이었다.
물론 그런 루시안의 기도는 통하지 않았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제네리움에서 드워프를 통해 너무 부당한 이익을 얻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거지."
"부, 부당한 이익?"
"그렇네. 드워프가 물건도 아닐진대, 지금 형국을 보면 제네리움에서 온전히 드워프를 소유하고 있는 거 같지 않은가?"
"......."
"혹시 아나? 제네리움에서 드워프를 억압하여 착취를 하고 있는 걸지도."
"......."
"만약 그렇다면 나는 콴 제국을 대표하는 이로서 이를 좌시하지 않을 것이네. 드워프들도 지성과 이성을 지닌 종족일세. 그들에게도 자유를 보장해 줘야지 않겠나? 어찌 생각하는가?"
콴 제국 황태자의 물음에 루시안은 답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그는 보았기 때문이다.
사악하게 말려 올라가는 멀린의 입꼬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