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탕아(2)
돌아온 탕아(2)
"드디어... 드디어!"
아침부터 그렁그렁, 안구에 습기가 차올랐다.
황태자는 눈물을 훔쳐내고 빠르게 준비를 시작했다.
그 어느 때 보다 경건하게 몸을 씻고, 전날 준비해둔 옷을 꺼냈다.
황태자가 고른 의복은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입고 있던 옷이었다.
황궁에서 새 옷을 준비해 보냈지만, 루시안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것이 더 의미 있었기 때문이다.
'이걸 내가 다시 입는구나....'
이 기분을 뭐라 설명할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한참이나 감격에 젖어있던 루시안이 천천히 옷을 입기 시작했다.
홀가분함. 비장함. 기쁨. 슬픔.
온갖 감정으로 얼룩진 그의 얼굴.
아침도 걸러 가며 신중하게 준비를 하는 루시안에게서 비장함이 느껴졌다.
"후우...."
무려 한 시간.
마지막으로 루시안이 머리를 손질하고 있던 때였다.
똑똑-
"준비... 끝나셨나요?"
문밖에서 들린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루시안이 황급히 달려 나갔다.
벌컥 문을 여니 그 앞에 선 마윈이 보였다.
"마윈... 양?"
"아...."
벌컥 열린 문에 놀랐던 마윈.
그녀는 루시안의 덜 손질된 머리 상태를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머리... 제가 만져드려도 될까요?"
"그래... 주시겠습니까?"
승낙이 떨어지자 마윈이 루시안을 거울 앞에 앉혔다.
슥슥-
의자에 앉은 루시안과 묵묵히 머리를 손질하는 마윈.
침묵 속에 빗질하는 소리만 이어졌다.
서로에게 할 말은 많았지만, 섣불리 입을 열 용기가 나지 않는 두 사람.
먼저 용기를 낸 것은 루시안이었다.
"마윈 양. 저는...."
"알고 있어요. 루시안 제네리움 황태자 저하... 맞으시죠?"
"...알고 계셨습니까?"
루시안은 마윈이 자신의 정체를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자 마윈이 살포시 미소 지었다.
"어제 알았어요. 오빠가 알려주더라고요. 높은 가문의 자제이실 거라고는 생각했는데... 황태자 저하이실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네요."
"속여서... 죄송합니다."
"아뇨, 일부러 속이신 거는 아니잖아요."
둘 사이에 다시 대화가 사라졌다.
잠시 뒤.
"다 됐어요."
마윈이 빗을 놓고 물러났다.
깔끔하게 정돈된 머리.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여긴 루시안이 벌떡 일어났다.
그가 격정적인 눈으로 마윈을 바라보았다.
"마윈 양, 저는 당신이 좋습니다! 아니, 사랑합니다! 저와 함께...."
"죄송해요."
루시안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마윈이 씁쓸한 얼굴로 그의 말을 끊어냈다.
그녀가 살포시 고개를 내저었다.
"저는 이곳이 좋아요."
"마윈 양...."
"저하가 제게 느낀 감정은 일순간뿐일 겁니다."
"아닙니다! 절대로!"
"곧 저보다 더 예쁘고 좋은 집안의... 저하께 어울릴만한 여자가 나타날 거예요. 그러면 저하의 마음도 바뀌겠죠. 그러니 조금 전 이야기는 못 들은 거로 할게요."
자신을 밀어내는 듯한 그녀의 말에 루시안이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그럴 만도 했다.
제국의 황태자와 시골 소녀의 사랑.
그것은 동화에서나 벌어질 법한 일이었다.
현실에서는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인 것이다.
누구보다 루시안이 이를 더 잘 알고 있었다.
루시안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가 자신의 반지를 빼내 마윈에게 건넸다.
"받으십쇼."
"이건...."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제게 남긴 겁니다."
"이걸 왜... 제게?"
"2년.... 2년 안에 그 반지를 찾으러 돌아오겠습니다."
"예?"
"그 2년이면, 아마도 제 주변으로 수많은 여자들이 스쳐 지나갈 겁니다. 만약 그럼에도 제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제 마음을 받아 주시렵니까?"
마윈은 루시안이 내민 반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루시안이 초조함이 가득한 눈으로 마윈을 응시했다.
그녀의 얼굴에서 수많은 고민이 읽혔다.
한참 뒤, 마윈이 살포시 한숨을 내쉬었다.
"보통 이런 걸 정표라고 한다죠?"
"그렇습...."
"그리고 족쇄라고도 하고?"
"예?"
"내가 이런 걸 남기고 가니까 너 딴사람 만나면 죽는다는?"
"그, 그게...."
예상치 못한 말에 당황한 루시안.
그가 허둥거릴 때 마윈이 반지를 가로챘다.
그리고 곱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
"딱 2년이에요."
"......?!"
"하루라도 늦으면... 이 반지 바로 강물에 던져버릴 줄 아세요."
"무, 물론입니다!"
"그리고 얼른 나오세요. 다른 분들 기다려요."
마윈은 그 말을 남기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체취만 남기고 떠나간 그녀의 빈자리를 물끄러미 보며 루시안이 중얼거렸다.
"...귀여워."
도망치듯 떠나던 마윈의 얼굴이 붉어 보였던 것은 착각일까?
"아... 나 방금 좀 멋있지 않았나?"
루시안의 입꼬리가 헤벌쭉 올라갔다.
그러다가 다른 이들이 자신을 기다린다는 소리를 기억해 냈다.
"아차!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구나."
비록 오늘이 이 지옥에서 벗어나는 날일지라도 아직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됐다.
누가 뭐래도 이곳은 미치광이들의 소굴이 아니던가.
루시안이 후다닥 밖으로 달려 나갔다.
숨 가쁘게 뛰어간 그를 맞아 준 것은 황실에서 보내온 마차였다.
그 주변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이 모여있었다.
레드포드 대공가의 사람들과 아발론 마탑의 마법사들.
그리고 케이와 멀린까지.
자신을 배웅하기 위해 모인 이들을 보며 루시안은 실감할 수 있었다.
'나... 진짜로 해방이구나.'
설렘 가득한 기분으로 그가 발걸음을 옮겼다.
루시안에게 처음으로 말을 건 것은 대공이었다.
"그간 고생하셨습니다. 건강하시길...."
"감사합니다. 그동안 편의를 봐주신 점 잊지 않겠습니다."
처음 대공령에 협상하러 왔을 때와 확연히 달라진 황태자의 태도에 대공은 잔잔히 미소를 지었다.
그다음으로 루시안을 반겨 준 것은 30인의 아발론 마법사들이었다.
아무 말 없이 서른 명의 선배들과 눈빛을 주고받은 루시안.
다른 이들을 대표해 맞선배였던 마논이 악수를 청했다.
"쳇. 이제는 함부로 때리지도 못하겠네."
"하하. 이제 때리시면 큰일 나죠."
"내 밑에서 고생 많았다."
"네. 정말 많았죠. 흐흐."
루시안과 눈빛을 주고받은 마논이 예를 차리며 살짝 상체를 숙였다.
덩달아 다른 30인의 마법사들도 같이 고개를 숙였다.
"루시안 제네리움 저하의 앞날에 마나의 축복이 깃들기를...."
30명의 마법사가 동시에 건네는 축복.
더는 막내가 아닌, 황태자로서 자신을 배웅해주는 선배들의 모습에 루시안은 눈물이 시큰거렸다.
그가 작게 고개를 숙여 담백하게 이를 받아들였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선배들과의 인사를 마치고 고개를 돌리니 고요히 웃고 있는 케이가 있었다.
그는 별반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고생했다는 듯 미소를 보내올 뿐.
그리고 그런 케이의 옆....
"거, 앞으로 영영 안 볼 것도 아니고 뭐가 이렇게 구구절절해?"
툴툴거리는 멀린이 있었다.
그가 뚱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뭐하냐. 안 갈 거냐?"
"스승님...."
루시안이 멀린에게 다가갔다.
무언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 루시안에게 멀린이 손을 내저었다.
"아, 됐고. 잘살아라."
"......."
"그리고 잊지 마라. 한번 아발론은 영원한 아발론인걸."
"명심하겠습니다."
"가라."
휘휘 손을 내젓는 멀린에게 예를 갖춰 인사를 한 황태자가 증기 마차에 올랐다.
곧 황태자를 태운 마차가 대공령을 빠져나가고.
케이가 시원섭섭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갔네요. 이렇게 1년이 끝났군요."
그런 케이의 중얼거림에 뚱한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끝나긴 뭐가 끝나?"
"네?"
케이를 비롯한 이들이 시선이 돌아갔다.
그곳에는 귀를 후비적거리고 있는 멀린이 있었다.
"내가 말했잖아. 한번 아발론은 영원한 아발론이라고."
"그... 그러셨죠."
멀린의 말에 어색하게 웃는 케이.
이에 멀린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
"그건 다시 말해 내가 끝났다고 하기 전까지 끝난 게 아니란 소리인 거지."
"......."
좌중이 시선이 조금 전 떠나간 증기 마차가 가고 있을 방향으로 옮겨갔다.
무거운 침묵이 좌중에 내려앉고.
사람들의 시선이 황급히 선회했다.
"아, 할 일이 있다는 걸 깜빡했네."
"나, 나도...."
"그거 내가 도와주지!"
너도나도 한마디씩을 하며 부리나케 흩어지는 사람들.
그들은 조금 전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황급히 뇌리에서 지웠다.
'더럽게 엮이셨습니다, 저하....'
'잠시뿐인 자유를 마음껏 만끽하시길....'
속으로 루시안의 명복을 빌어준 이들이 모두 사라졌다.
반면 사샤는 자리에 남아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살살 하세요...."
"흐흐흐."
낮게 깔린 멀린의 웃음소리가 황태자의 앞날이 순탄치 않음을 알렸다.
***
부산스러운 황궁.
궁인들이 소란스럽게 움직이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황태자 저하가 돌아오신다!
1년 전 갑자기 황궁을 떠났던 차기 황위 계승자가 돌아온다는 소식에 그를 맞을 준비로 분주해진 것이다.
때문에 오랜 시간 주인이 비어있던 황태자 궁은 수많은 시종과 시녀들이 동원되어 새것처럼 단장을 시작했다.
그리고 황궁의 정문에서는 황태자를 맞이하기 위한 사열식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해가 중천에 떠올랐을 쯤.
황궁으로 증기 마차 한 대가 들어섰다.
이에 사열을 위해 늘어선 근위대가 바짝 긴장하여 몸을 곧추세웠다.
마침내 증기 마차가 멈춰서고.
달칵-
후다닥 달려 나간 시종장이 문을 열자 황태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1년 전보다 살짝 탄 피부.
그리고 어딘가 모르게 강인함을 풍기는 눈빛과 분위기.
변한 황태자의 모습에 그를 맞이한 이들이 흠칫거렸다.
"음...."
루시안은 자신의 앞에 사열한 이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시종장에게 물었다.
"시종장."
"예, 저하."
"이거 누가 시킨 거냐?"
"예?"
"이, 사열식 누가 시킨 거냐고. 폐하께서 지시한 거냐?"
"아, 아닙니다! 행정관이신 자룸 남작이...."
"이런 미친 작자가!"
난데없이 터져 나온 황태자의 욕설에 모두가 놀라 움찔했다.
하지만 그들이 놀랄 일은 아직 남아 있었다.
"당장 해산시켜!"
"예? 하, 하오나...."
"하오나는 무슨! 황실에서 시종들과 근위대에게 비싼 돈을 줘가며 그들을 부리는 건 황실의 필요한 일에 쓰기 위해서다."
"......."
"황족 하나 맞이한다고 일과 시간에 사람 빼다가 이런 헛짓거리에 동원하면, 그 시간에 저들이 해야 할 일은 누가 하나! 그리고 그 비어버린 시간만큼의 고용비는 누가 충당하고!"
"......."
"그게 다 황실에서 나오는 돈 아니냐!"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열변을 토하는 황태자의 모습에 모두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씩씩거리는 황태자의 성화에 시종장이 다급히 손을 내저었다.
"해, 해산하시오!"
이에 모여있던 이들이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사이.
"잠깐, 모두 멈춰!"
루시안이 갑자기 손을 들어 흩어지려는 이들을 붙잡았다.
그는 늘어선 근위대를 보고 그리 다가갔다.
그리고 물었다.
"여기서 막내가 누구냐."
"예?"
"근위대 막내가 누구냐고."
그런 루시안의 물음에 한쪽에서 손이 올라왔다.
"기사 테일런! 제, 제가 막내입니다."
황태자가 그의 앞에 서서 물었다.
"근위대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됐지?"
"오, 올해로 2년 차입니다!"
"그런데도 막내라고?"
"예, 그렇습니다!"
근위대 막내의 우렁찬 답변을 들은 루시안의 눈에 아픔이 스쳤다.
그는 아련한 얼굴로 근위대 막내의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고생이 많구나."
"아, 아닙니다!"
"너 오늘부터 휴가다."
"예?"
"내가 해봐서 아는데... 그 막내 생활이 정말 뭐 같더라고."
"예?"
"넌 아무 걱정하지 말고 일주일만 푹 쉬다 와라. 내가 근위대장한테 말해 둘 테니까."
"감사합니다!"
"갔다 와서 위에 놈들이 괴롭히거나 하면 바로바로 나한테 보고하고. 이것들이 어디 하늘 같은 막내님을 괴롭혀! 알겠냐?"
"며, 명심하겠습니다! 충!"
난데없이 황태자란 든든한 뒷배경이 생겨버린 근위대 막내.
자신을 바라보는 황태자의 묘한 눈빛을 알아차리지 못한 그는, 그저 황태자의 따듯한 한마디에 깊이 감격할 뿐이었다.
그렇게 근위대 막내의 어깨를 한 번 더 두들겨준 황태자가 소리쳤다.
"뭐해! 당장 해산해!"
"충!"
황태자의 명령에 분분히 흩어지는 궁인들.
이를 보며 루시안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곧 그가 휑하니 비어 버린 황궁 진입로를 걸어갔다.
거창한 환영식은 없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화창한 햇살이 루시안을 맞아줬다.
그는 화려한 황궁을 올려다보며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집이다! 내 집이라고!'
그러고는 폴짝폴짝 황궁을 향해 뛰어갔다.
그런 황태자를 지켜보던 궁인들이 쑥덕거렸다.
"저하께서... 조금 이상해지셨지?"
"...이상해지신 건가?"
"뭔가 다른 사람 같지 않아?"
"그렇기는 한데, 난 예전보다 오늘 본 저하가 더 멋있는 거 같은데?"
"그건 그래."
오랜 방황 끝에 돌아온 탕아.
그는 복귀 첫날부터 황궁에 파란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