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경제(3)
창조경제(3)
작당 모의가 이뤄진 당일 저녁.
(구)아발론 마을 30인의 마법사와 황태자 루시안이 숲속 공터에 모였다.
남들이 쉴 시간, 벼락같은 연락을 받고 혼비백산하여 모인 이들.
차가운 기온 속에서도 그들은 식은땀을 절절 흘릴 정도로 바짝 긴장해 있었다.
"다들 정신 차려, 곧 오실... 오, 오셨다! 모두 차렷!"
패트릭의 외침에 서른한 명이 통나무처럼 뻣뻣하게 몸을 세웠다.
그런 이들 앞에 멀린이 떨어져 내렸다.
허공에서 뿅-하고 나타나 자신들을 훑어보는 멀린의 시선에 마법사들과 황태자는 마른 침을 삼켰다.
'대체... 갑자기 왜?'
'우리가 뭐 잘 못 한 거라도 있나?'
'제, 젠장... 화장실 가고 싶다. 쌀 거 같아!'
작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은 적막이 이어지고, 서른한 명이 오로지 한 사람만을 응시했다.
곧 멀린에게서 모두를 경악스럽게 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간 모두 고생했다."
그것은 정말 난데없는 격려였다.
또한, 절대 멀린의 입에서 나올 소리가 아니었다.
그 자리에 있는 이들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그나마 한 마을의 이끌어본 경험이 있다고, 패트릭이 날아가려는 정신줄을 겨우 붙잡으며 소리쳤다.
"사, 살려 주십쇼!"
"응?"
격려했건만 살려달라는 소리가 나온 상황.
이에 멀린이 볼을 긁적였다.
'음... 그간 너무 굴렸나?'
멀린이 (구)아발론 일동을 마냥 케이에게만 맡겨둔 것은 아니었다.
그도 종종 시간이 날 때마다 들러 지도를 해줬었다.
그때 (구)아발론 일동은 깨달았다.
케이는 그나마 선한 존재였다는 것을....
멀린을 통해 영과 육이 분리되는 경험을 한 이들은 그의 그림자만 봐도 벌벌 떨었다.
금방이라도 기절할 듯한 이들을 보며 멀린이 뚱하게 말했다.
"내가 언제 너희 죽인대?"
"새, 생애 마지막 격려를 해주신 거 아닙니까?"
"진짜 마지막 격려가 뭔지 보여줘?"
"부, 부디 자비를...."
패트릭이 울상이 되어 구걸했다.
이에 멀린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시답지 않은 소리 그만하고. 내가 너희를 왜 죽이냐. 귀중한 아발론의 인재들을."
"...예?"
패트릭을 비롯한 (구)아발론 일동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간 멀린은 자신들을 아발론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랬던 멀린이 조금 전 자신들을 '아발론의 인재'라 표현한 것이다.
패트릭이 믿지 못하겠단 얼굴로 물었다.
"그... 말씀은...?"
"진짜 고생했다고 한 말이다."
"아...."
"이제 너희, 예비 딱지 뗐다. 그 정도면 뭐... 어디 가서 아발론이라 말할 정도는 되겠네."
"아아...."
퉁명스러운 멀린의 인정에 패트릭을 비롯한 마법사들의 눈에 습기가 차올랐다.
그간 자신들이 구르고 또 구른 이유가 무엇이던가.
눈앞의 존재에게 인정을 받고 아발론이란 이름에 걸맞은 마법사가 되기 위함이었다.
그것은 정말 길고 긴 고난의 시간이었다.
끝날 거 같지 않던 오랜 고생 끝에 드디어... 멀린에게 인정을 받은 것이다.
이에 감격한 패트릭이 소리쳤다.
"감사합니다! 절대... 절대 아발론의 이름에 누가 되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명색이 아발론의 마법사라면."
"크흑!"
서른의 사내가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그 순간 멀린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들어라. 아발론의 마법사들아."
"네! 탑주님!"
"너희가 아발론에 들어왔다고 모든 게 끝난 게 아니다."
"네!"
"정진하고 또 정진해라. 아발론에 걸맞은 마법사가 되도록!"
"네!"
"또한, 명심해라. 너희 뒤에는 언제나 아발론이 서 있음을! 너희가 자부심을 가지는 만큼 아발론이 너희를 지켜줄 것이다."
"네!"
"자, 그럼 이제 연장 챙겨라!"
"네!... 예?"
무언가 감격스러운 상황이었지만, 마지막이 이상했다.
모두가 벙찐 얼굴로 멀린을 바라보았다.
끔뻑거리는 서른한 쌍의 눈동자에 멀린이 어깨를 으쓱였다.
"뭘 봐?"
"여, 연장요? 갑자기 그건 왜?"
"왜긴. 아발론 마탑의 일원이 됐으니 이제 일을 해야지."
"일... 말씀이십니까? 무슨 일을?"
"흐흐흐."
멀린이 낮은 웃음을 흘렸다.
"그건... 가면서 알려줄게. 후후후."
"......."
묵직하게 깔린 멀린의 웃음소리에 이제 막 아발론 마탑의 일원이 된 이들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멍해 보이는 신입 아발론 마법사들에게 멀린의 호통이 날아들었다.
"뭐해! 빨리빨리 안 움직이고! 10분 준다. 당장 연장 챙겨서 동쪽 외문으로 집결해!"
"아, 알겠습니다!"
불안하지만 어떡하랴.
이미 자신들은 아발론 마탑의 일원이 되었고, 지엄한 탑주의 명령이 떨어진 것을.
그들에게 거부할 명분은 없었다.
아니, 거부했다가 무슨 꼴이 날지... 그것이 더 두려웠다.
멀린의 시퍼런 안광에 30인의 마법사가 질겁해 부리나케 움직였다.
그리고 그 속에....
"아, 아니 나는 왜...."
얼떨결에 휩쓸린 황태자가 울상을 지으며 아발론 일동과 같이 뛰고 있었다.
***
그로부터 한 달 뒤.
케이는 자신의 앞에 펼쳐진 장부를 보며 미간을 모았다.
"이게 왜...."
이상해도 너무 이상했다.
지난 몇 달간 레드포드 사업을 총괄하며 나름 장부 보는 일에 능숙해졌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때문에 자신이 발견한 이상점이 더욱 이해 가지 않았다.
"대체 뭐지...?"
케이는 몇 번이고 두 개의 장부를 대조해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이들이 모여들었다.
"뭐하냐?"
"왜?"
"뭐가 잘 안 풀려?"
사샤와 윈스턴, 제플린.
그들은 드워프의 탑 한 층을 자신들의 공동 집무실로 이용하고 있었다.
세 사람의 물음에 케이가 작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제작 장부와 판매 장부가 안 맞아 떨어지네."
"어? 그거 큰일 아냐? 누가 중간에서 횡령했다는 거잖아?"
제플린이 놀라 소리쳤다.
하지만 케이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게... 횡령 같은 거는 아닌 거 같아."
"무슨 소리냐, 그건? 제작 장부랑 판매 장부가 안 맞는다며?"
"어... 그렇기는 한데."
골머리를 싸맨 케이가 자세히 설명을 시작했다.
"예상 수익보다 실제 판매 수익이 더 많이 나오고 있어."
케이의 말에 이번에는 윈스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이에 제플린이 한심하단 눈빛을 보냈다.
"넌 진짜 장사하지 마라. 그 머리로 어떻게 장사를 할래?"
"이 자식이... 그래서 그게 무슨 소리인데?"
윈스턴의 물음에 답을 준 것은 사샤였다.
"제작 장부에는 드워프들이 만드는 모든 물건의 수량이 적혀 있어. 그걸 일정 단가로 가격을 매기면 판매됐을 때 예상 수익을 알 수 있지. 그리고 판매 장부로 진짜 판매된 액수와 남은 재고를 확인하는 건데... 케이 말은 판매 장부의 금액이 더 높게 나온다는 거야."
"어... 음.... 그러니까...."
여전히 이해를 못 한 윈스턴을 보며 제플린이 한숨을 내쉬었다.
곧 그가 쉽게 풀이해 설명을 해줬다.
"돌대가리야, 간단하게 말해서, 오늘 드워프가 10골드짜리 검 10개를 만들었고, 이걸 전부 팔면 100골드가 남아야 하는데, 실제 판매액 110골드가 판매 장부에 적혀 있다는 거잖아!"
"아하!"
그제야 이해를 했다는 듯 윈스턴이 고개를 끄덕였다.
윈스턴이 케이를 보며 물었다.
"그럼 좋은 거 아닌가? 우리가 10개 만들어서 판 것보다 더 많은 이득이 남은 거니까?"
"좋기야 하지... 그런데 이게 대체 왜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다는 게 문제잖아."
케이의 얼굴에 근심이 서렸다.
드워프 사업을 총괄하는 처지로서 갑자기 발견된 예상치 못한 변수가 마음에 걸렸다.
그것이 아무리 사업에 이득이 되는 방향이라도 변수는 변수였다.
그런 변수를 통제하는 게 자신이 할 일이니 말이다.
고민하는 케이를 본 사샤가 물었다.
"장부가 잘못 적혔을 가능성은?"
"그럴 가능성도 있기는 한데... 이상한 점은 이게 3주 전부터 똑같이 일어나고 있다는 거야. 단순히 한두 번 벌어진 실수가 아닌 거 같아."
"대충 얼마나 차이가 있는데?"
"들쭉날쭉하긴 해. 적으면 5%, 많으면 20%까지."
"흠... 큰일이네."
"큰일이군.... 다 같이 원인을 찾아보자."
케이와 사샤, 제플린이 장부를 가운데 놓고 고민에 빠졌다.
그 옆에서 윈스턴도 같이 고민하는 척을 해 보였다.
그렇게 그들이 생각에 빠져있을 무렵.
똑똑-
"안에 계십니까?"
문 너머에서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사람의 시선이 돌아갔다.
"들어오세요."
케이의 허락과 함께 방안으로 들어온 이는 세 사람이었다.
총관, 기사단장, 그리고 대공.
갑작스러운 그들의 방문에 케이가 일어나 반겼다.
"여긴 어쩐 일로...?"
케이의 물음에 답을 준 것은 대공이었다.
"음... 바쁜 건 알지만, 자네도 알고 있어야 할 사항인 거 같아서 찾았네."
"일단 앉으세요."
케이가 손을 뻗어 소파를 가리켰다.
곧 널찍한 소파에 일곱 사람이 모두 자리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사샤였다.
"무슨 일이세요?"
"그... 기억나느냐? 한 달 전, 기승을 부리는 도적 떼에 관해 회의한 거 말이다."
"네, 기억하죠."
"그거 때문이다."
살짝 한숨을 내쉬는 대공.
그의 반응에 상황을 모르는 아발론 일동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올랐다.
이에 대공이 기사단장을 바라보았다.
대공의 시선을 받은 기사단장이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몇 주 전, 외성 밖으로 단원 몇을 내보냈습니다."
"갑자기 왜요?"
"아무래도 외성 밖에 자리한 도적들의 너무 잠잠한 거 같아... 정찰차원에서 보냈었죠."
"그런데요?"
"외성 밖에서 정보를 모아온 단원에게 오늘 소식을 들었는데... 아무래도 이게 심상치 않습니다."
"그게 무슨...?"
"외성 밖의 도적들이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아발론 일동.
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떻게 말인가요?"
사샤의 다급한 물음에 대공이 답했다.
"처음에는 한 도적단이 인근 도적단을 흡수했고, 그렇게 차례차례 주변에 자리한 모든 도적단을 흡수한 모양이다."
"대체 상황이 어쩌다 그렇게 된 거죠?"
"첫 번째 도적단이 다른 도적들을 흡수하는 데 걸린 시간이 기이할 정도로 짧았다. 알아낸 바로는 인근에 자리한 모든 도적을 흡수하는 데 채 하루가 걸리지 않았다는구나."
"...놈들의 수는요?"
"파악한 숫자만... 500이 넘어간다."
"맙소사...."
사샤는 경악했다.
그만한 숫자가 하루 만에 한 집단에 귀속되는 것은 매우 비정상적인 일이었다.
그것이 가능해지려면 한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그것은....
"...처음에 움직인 도적단에 예상치 못한 실력자가 있을 가능성이 크겠네요."
"우리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사샤의 말에 대공이 침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 명의 실력자를 중심으로 뭉친 최소 500인 규모의 도적단.
흩어져 있을 때는 괜찮았지만, 한 집단에 그 정도로 많은 이들이 모인다면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케이가 입술을 깨물었다.
"제 판단이... 틀렸던 거군요."
도적들을 가만히 내버려 두자고 했던 케이는 스스로를 탓했다.
이에 총관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그것은 저희도 충분히 동의한 일이었죠. 다만 문제는... 이러한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원래 욕심 많은 도적은 쉽게 뭉치지 않습니다. 하물며 한 패거리에 각각 우두머리가 있는데, 그들이 뜻을 모아 규합할 것이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겠습니까."
"음...."
총관의 위로에도 케이의 굳은 표정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감돌고, 제플린이 물었다.
"그런데 그렇게 도적들이 모였으면 상인들이 불안해하지 않습니까?"
그 물음에 총관이 답했다.
"그게... 좀 이상합니다."
"네?"
"분명 말씀하신 대로 그 정도 도적단이면 어지간한 용병으로도 대적하기 힘들고, 애초에 용병을 모으기도 힘들죠. 그러면 상인들의 발길이 조금 뜸해져야 하는데... 지난 몇 주간 영지를 오간 상인들의 수는 이전과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상하네요...."
"그렇습니다. 이상하죠. 저도 몇 주 사이에 영지를 재방문한 상인에게 연유를 물어보았는데...."
"그런데요?"
"...말할 수 없답니다."
"예?"
"무슨 이유에서인지... 안 알려주더군요."
제플린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둘의 대화를 끝으로 침묵이 내려앉았다.
잠시 모두가 생각에 잠겼다.
그들 모두 공통으로 떠올리고 있는 생각은 외성 밖에서 자신들이 모르는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었다.
이에 조치가 필요했고, 그 결정권을 가진 이는 대공이었다.
사샤가 침묵을 깨고 아버지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어쩌실 작정이에요?"
"쳐내야지. 영지 밖의 도적들은 상인들에게도 위협이지만, 영지민들에게도 불안감을 심어준다. 놈들이 더 세를 불리기 전에 뿌리를 뽑아야 해."
대공은 단호했다.
이번 일은 영지의 안위와도 관련된 사안.
영지를 아끼는 대공의 얼굴에 서릿발 같은 기운이 어른거렸다.
대충 회의가 마무리된 것 같자 윈스턴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럼 결정됐네요. 당장 준비하죠!"
그간 적성에도 안 맞는 온갖 서류와 숫자에 골머리를 싸맸던 윈스턴.
그는 모처럼 몸을 풀 상황에 들떠올랐다.
그때 케이가 손을 들었다.
"잠시만요."
"왜 그러는가."
"일을 벌이기 전에 확인할 게 있어요."
"무얼 말인가?"
"상인들이 입을 다문 이유,"
"음...."
확실히 그 점을 짚고 넘어가긴 해야 했다.
이에 대공이 물었다.
"그건... 어찌 알아낼 생각인가?"
"위장해야죠."
"호?"
"상인으로 위장해서 도적단에 접근하겠습니다."
"...위험하지 않겠나?"
"저희가 직접 가면 돼요."
"흠...."
굳은 의지를 보이는 케이를 보며 대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가 말한 '저희'가 아발론 사인방임을 모를 리 없었다.
그들이 무력이라면....
'머릿수만 채운 도적단을 상대하기에 과분할 정도지.'
다만 걸리는 점은 도적단 규합의 원동력이 된 정체 모를 실력자였다.
이를 걱정한 대공이 한 가지를 제안했다.
"좋네. 하지만 일정 거리를 두고 우리 기사단이 따를거네."
"알겠습니다."
케이는 별말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일은 레드포드의 문제이자 아발론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이후 그들은 발 빠르게 행동했다.
아발론 일동이 상인으로 변장하는 사이 총관이 짐이 실린 증기 수레를 준비했다.
"자, 출발하시죠."
케이의 신호와 함께 수레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기에 용병으로 위장한 소수의 경비대가 그들을 호위하듯 따라붙었다.
그로부터 30분 뒤.
'이쯤이라 했는데?'
사샤는 주변을 훑었다.
도적들이 자주 출몰한다는 길목에 들어선 것이다.
만약 이곳에서 도적들을 만나지 못한다면 다른 길목으로 이동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멈추시오!"
아발론 일행 앞에 일단의 무리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들을 마주한 순간.
"어라?"
"저게 뭐야...?"
아발론 일동의 눈이 휘둥그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