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경제(1)
창조경제(1)
레드포드 대공령에서 뿌린 작은 단검은 황금 이동의 신호탄이 되었다.
비단 그것은 제국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제네리움 제국은 물론 인접한 타 국가까지.
레드포드 영지에서 벌어진 일들은 소문과 정보에 민감한 상인들이 가장 먼저 알아차렸다.
그리고 누구보다 먼저 소문의 진상을 파악한 상인들은 발 빠르게 움직였고, 곧 막대한 황금이 레드포드 영지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때문에 레드포드는 북방에 자리 잡은 이래 역대 최고의 호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레드포드 영지의 수뇌부들은 극심한 업무에 시달리며 하루하루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지만....
물론 그렇지 않은 자도 있었다.
"흠......."
드워프의 탑 최상층에 마련된 멀린의 공간.
소파와 업무용 책상뿐인, 면적에 비해 휑하기 그지없는 방이었다.
그곳에서 멀린은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흐음......."
의자를 앞뒤로 왔다 갔다, 빙그르르 돌려보기도 하고.
드르르-
이리저리 의자를 타고 굴러다니던 멀린의 입에서 한탄이 새어 나왔다.
"아... 심심하다."
남들이 뼈 빠지게 일하고 있을 때, 그는 심심함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시리우스 호의 모든 제작은 마무리가 되었고, 드워프와 관련된 사업은 케이와 아이들이 알아서 척척 굴리고 있었다.
대륙 각지에서 교단과 관련된 정보를 모으는 일은 아직 눈에 띄는 성과가 나오지 않았다.
그마저도 황태자 루시안이 알아서 척척- 보고를 하니 멀린이 딱히 신경 쓸 게 없었다.
그간 폭풍처럼 몰아치던 일거리가 한순간에 쑥 빠져버린 것이다.
"수련이나 할까...."
그리 중얼거렸지만, 그것도 썩 내키지 않았다.
8서클에 이른 매듭식 고리.
멀린의 경지는 지난번의 극적인 성과가 있던 이후로 다시 정체기를 맞이했다.
9서클은 8서클에서 고작 한 계단 올라서는 일이지만, 1서클부터 8서클까지 도달한 것보다 몇십, 몇백 배는 더 어려운 일이었다.
매일 꾸준히 수련하고 있지만, 여기서 더 열심히 한다고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뭐하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멀린의 품에서 작은 머리통이 불쑥 머리를 내밀었다.
-아빠 심심해애?
시리의 등장에 멀린이 '잘됐다!' 싶어 녀석의 뒷덜미를 잡아 들었다.
그러고는 녀석을 짤짤 흔들며 소리쳤다.
"어이, 카이노스! 거기 있는 거 다 안다! 얼른 나와!"
-으앙! 하지 마!
멀린의 짤짤이에 시리가 양손을 휘두르며 바동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멀린은 계속해서 시리를 흔들었다.
"얌마! 좀 나와봐! 언제까지 그 속에 처박혀 있을 건데?!"
멀린이 부르고 있는 이는 '지나온 시간의 신 카이노스'.
그는 지난번 회귀 이후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멀린이 몇 번이나 대화를 시도해 봤지만, 그 뒤로 단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었다.
덕분에 고통받는 것은 시리뿐이었다.
-하지 마아아앙!
양팔을 휘휘 내두르며 울상을 짓던 시리가 와락 소리치자 녀석의 손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멀린의 코앞을 가로지르는 칼날.
"우왁! 얌마!"
-아빠 나빠!
시리가 엑스칼리버를 꺼내 들고 쓱쓱 휘두르자 멀린이 기겁하여 녀석을 놓아주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시리는 엑스칼리버를 휘두르며 멀린을 쫓아 왔다.
-죽어라 나쁜 대악마아앙!
"야 이놈아! 어디 아빠한테 죽으라고...! 우악!"
시리 녀석이 한동안 밖을 뽈뽈-거리며 돌아다니더니 어디서 또 이상한 걸 주워듣고 온 모양이었다.
-악마! 심판의 검을 받아라아아!
용사 놀이에 심취한 시리가 빛이 번쩍이는 검을 들고 멀린을 쫓았다.
한참을 그러다가 부아가 치민 멀린이 시리의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이놈의 자식이!"
-악!
매직 애로우가 아닌 손수, 직접 꿀밤을 먹여준 멀린.
그렇게 둘의 투덕거림은 시리가 정수리를 부여잡고 바닥을 나뒹굴면서 끝이 났다.
티격태격을 멈추고 나니 다시 찾아든 무료함.
한참이나 의자에 늘어졌던 멀린이 어슬렁어슬렁 자리에서 일어났다.
"...산책이나 갔다 와야겠다."
잽싸게 방 밖을 빠져나가는 그의 뒤로 시리가 쪼르르 따라붙었다.
***
대공성의 회의실에 자리한 십여 명의 사람들.
레드포드 대공, 사샤, 기사단장 래너드를 비롯한 대공가의 충실한 가신들.
레드포드 대공령 외부 유통을 맡은 두 후작가의 파견인이자 책임자인 윈스턴과 제플린.
거기에 레드포드 사업을 총괄하는 케이까지.
회의실에 모인 이들은 현 레드포드를 이끌어가는 중추였다.
그리고 가장 끄트머리에 앉은 총관이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 회의의 마지막 안건은 근래 극성하고 있는 도적 떼의 처리 문제입니다."
연일 이어지는 회의로 그곳에 자리한 모두의 얼굴에 피로감이 가득했다.
그래도 오늘 회의의 마지막 안건이란 소리에 그나마 밝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총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최근 저희 영지로 몰려드는 상인들이 늘다 보니 그들을 노리는 도적들도 급증하고 있습니다. 근래 도적들과 마주했고 금품을 뺏겼다고 접수된 건수만 해도 17건입니다. 이로 인해 상인들이 불안감과 불만을 호소하는 중입니다."
"허... 우리 영지가 발전하긴 발전했나 봅니다. 도적들이 들끓다니! 불과 몇 개월 전만 해도 털어먹을 게 없다고 이쪽 동네는 얼씬도 안 했는데 말입니다! 흐허허."
"래너드 경... 그게 치안을 담당하는 당신 입에서 나올 소립니까? 그리고 웃어요? 어디 한 번 더 웃어 보십쇼. 웃은 횟수만큼 당신 녹봉에서 골드가 까여 나갈 테니."
"크흠...."
총관의 으름장에 기사단장 래너드가 헛기침을 하며 딴청을 피웠다.
이에 총관이 한숨을 쉬며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후우... 누구 이 안건에 대해 좋은 의견 가지신 분 안 계십니까?"
이에 사샤가 손을 들고 말했다.
"예, 아가씨."
"간단한 문제 아닌가요? 치안이 좋지 못하다면 치안을 강화하면 될 일인데? 래너드 경, 현재 대공령의 치안을 담당하는 경비대의 인원 중 여력이 되는 인원이 얼마나 되죠?"
"음... 그게 말입니다."
사샤의 말에 래너드가 난색을 보였다.
"지금 저희가 운용 중인 치안대... 그러니까 기사단과 경비대는 이미 한계입니다. 영지가 발전한 만큼 인원도 충원되어야 하는데... 아시다시피 기사단과 경비대가 일, 이년 사이에 뚝딱 만들어지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죠."
"지금 열심히 예비단원을 육성 중이기는 하지만, 그들을 현장에 투입 시키기까지는 아직 많이 모자라지요. 여기서 더 일거리를 늘리면 못 해 먹겠다고 때려치울 놈들이 속출할 겁니다."
"흐음...."
사샤의 입에서 옅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녀도 현재 대공령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영지의 발전도에 비해 유동인구는 급격히 늘었지만, 정작 영지에 정착한 이들은 크게 늘지 않은 것이다.
그렇기에 대공령의 다양한 곳에서 인력 부족을 호소하고 있었다.
그런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윈스턴이 입을 열었다.
"용병들을 고용하는 거는 어떻겠습니까?"
"흠...."
그의 의견에 대공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되네."
"그런가요...?"
"영지의 주민이 아닌 외부인이 치안을 맡는다면 기존 영지민의 불안이 커질 거네."
"아...."
"아무리 금전 관계로 의뢰를 하는 방식이라 하나, 영지민이 보기에는 용병 역시 무력을 가진 외부인일 뿐. 자신들의 안전을 그런 외부인에게 맡긴다면 불안감이 사그라들기는커녕 더욱 늘어나겠지."
그런 대공에 말에 이번에는 제플린이 손을 들었다.
"그런데 지금 중요한 거는 영지 내부 치안의 문제가 아니라 외부의 일이지 않습니까? 그럼 영지 내 치안은 기존 치안대가 맡게 하고 외부 치안은 용병대에 일임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흐음... 나쁘지 않은 생각이군."
제플린의 의견에 회의에 참여한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과 총관 역시 제플린의 의견이 가장 나은 방법이라 여겼다.
단, 한 사람.
지금까지 조용히 생각에 잠겨있던 케이가 손을 들기 전까지는 말이다.
"저기...."
얌전한 목소리였지만, 그에게 쏟아지는 관심은 높았다.
어리지만, 레드포드 사업을 총괄 대리하고 있는 핵심 인물.
거기에 지금까지 스스로 능력을 입증해왔기에 회의실에서 대공과 비슷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는 케이였다.
자신에게 쏠린 시선 속에 케이가 입을 열었다.
"그 도적들... 그냥 그대로 두죠."
"엉?"
케이의 말에 모두가 놀란 얼굴을 했다.
하지만 그중 누구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지는 않았다.
설명을 바란다는 사샤의 눈빛에 케이가 목소리에 힘을 주고 말했다.
"여러분께서 한 가지 망각하신 게 있습니다."
"망각?"
"예."
총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에 케이가 미소를 지었다.
"이번 사업을 하며 외부에서 들어오는 상인들이 중요한 이들이 맞기는 해요. 저희가 가진 물건을 사갈 고객이니까요. 하지만... 한 가지 확실히 해야 할 것은 우리가 팔고 있는 물건의 가치입니다."
"가치?"
"저들은 저희 물건을 사고 싶어합니다. 어떻게서든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지."
대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케이가 말을 이어받았다.
"하지만 저희는요? 저희는... 물건을 팔아도 그만 안 팔아도 그만입니다. 아니, 정확히는 불만을 토해내는 이들에게 물건을 팔지 않아도 됩니다. 왜냐. 저희가 가진 물건은 대륙에서 대체 불가능한 품목이니까요."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레드포드 대공령이 발전할 수 있게 된 것은 드워프제 물건이란 대륙 유일한 품목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자신의 말에 동의하는 듯싶자 케이가 신중하게 말을 이어갔다.
"때문에 치안을 문제 삼아 물건을 못 사겠다는 이가 있다면 안 팔면 그만입니다. 어차피 그들이 아니어도 웃돈을 얹어가며 물건을 사려는 이들이 줄을 서 있으니까요."
"음, 그렇기는 하지만...."
대공이 신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의 말이 옳았지만, 찜찜한 기분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그때 케이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추가로 생각해 보셔야 할 것은 대공령의 수입구조입니다."
"우리 영지의 수입구조?"
"저희 아발론은 드워프제 물건을 팔아서 수입을 낸다지만, 레드포드 령은 그 물건을 사기 위해 오는 이들을 통해 수입을 내고 있지 않습니까?"
"아?!"
케이의 말에 총관이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무릎을 쳤다.
그가 아연실색하여 소리쳤다.
"이, 이런! 큰일 날 뻔했구나!"
"그게 무슨...?"
총관에게 시선이 모여들었다.
이에 총관이 케이를 잔잔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케이 님의 말이 옳습니다. 저희 레드포드 대공령은 물건을 사기 위해 온 상인, 그리고 그들이 고용한 이들이 영지에 머물면서 쓰는 돈이 주 수입원입니다! 예를 들어 용병 같은 이들이죠!"
총관의 말에 나름 셈이 빠른 이들은 그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하지만 여전히 깨닫지 못한 래너드 같은 이를 위해 총관이 말을 이어 나갔다.
"드워프제 물건이 워낙 고가의 품목이다 보니 상인들이 고용한 용병들의 수도 많은 편입니다. 그런데 만약 영지 주변의 도적들이 사라지고 외부 치안이 안정된다면...."
그 말을 케이가 받아 이었다.
"상인들은 용병 고용을 줄일 것이고 자연스레 영지 수입도 떨어지겠죠."
"그렇습니다!"
총관이 감탄한 눈으로 케이를 바라보았다.
그의 말을 듣고 있으니 그제야 이해가 됐다.
최근 들어 영지에서 벌어들이는 수입이 늘어난 시기가 바로 도적 떼가 생기면서였다.
다시 말해....
"저희 영지가 부유해지려면, 도적들과 공생해야 한다는 겁니다."
총관은 그렇게 말하며 케이를 바라보았다.
마치 자신의 이야기가 맞냐는 듯 말이다.
이에 케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 둘 사이에 끈적끈적한 신뢰의 눈빛이 오갔다.
"물론 도적이 너무 많거나 하면 정말로 상인들의 발길이 끊길 위험부담이 커지지만, 잘만 이용하면 영지 발전에 크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맞습니다. 잘만 이용하면... 아! 그러고 보니 영지 내에 용병들을 위한 유흥시설이 많이 부족했던 거 같은데.... 잘됐습니다. 이참에 용병들을 위한 유흥시설을 늘리죠!"
주거니 받거니, 주도적으로 대화를 나누는 케이와 총관.
그들은 알고 지낸 지 수십 년이 된 이들처럼 죽이 척척 맞았다.
새롭게 돈줄이 될만한 방법을 깨달았기 때문일까?
피곤해하던 총관의 얼굴이 파릇파릇해졌다.
그가 당차게 외쳤다.
"자, 그럼 마지막 안건으로 영지 내 용병들을 위한 유흥시설 증축에 대해 논의하겠습니다!"
"아니, 총관... 아까 그 도적 건이 마지막 안건이라고...?"
피곤함에 넌지시 말을 꺼냈던 래너드는 총관의 매서운 눈빛에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래너드가 살려달라며 대공을 바라보았지만, 대공 역시 이미 포기한 얼굴이었다.
그때 케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저는 할 일이 있어서 먼저 좀...."
"아이고. 케이 님 바쁘신 거는 다들 알고 있지 말입니다. 어서 가보시지요!"
후다닥 달려와 손수 케이의 의자까지 빼주는 친절을 보이는 총관.
회의실에 자리한 이들이 떠나가는 케이의 뒷모습을 부럽게 바라보았다.
그렇게 문 앞까지 케이를 배웅하고 돌아온 총관.
그가 얼굴을 싹 바꾸고 매서운 어투로 말했다.
"자자, 다들 좋은 의견 있으면 내보십쇼!"
"하아...."
신이 난 총관을 보며 회의장 여기저기서 낮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
한편, 그 시각.
심심함에 몸부림치다 제법 멀리까지 산책을 나온 멀린은....
"크허헛! 얘들아, 손님 받아라!"
"옙!"
자신을 포위한 우락부락한 사내들을 보며....
"이야! 산적이다!"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