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당거래(3)
부당거래(3)
다시 멀린에게로 시선을 돌린 황제.
그가 살짝 인상을 쓰며 물었다.
"조건 추가라... 또 무얼 원하는 거냐?"
"제국 정도면 운영하는 정보기관 하나쯤은 있겠죠?"
"...한데?"
"그걸 이용하고 싶네요."
황제로서는 사뭇 의아스러운 말이 아닐 수 없었다.
"그걸 어디에 쓰려는 거지?"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거는 제네리움 제국에 해가 되는 일은 아니란 거죠."
멀린이 제국의 정보기관을 원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교단의 본거지를 찾아야 한다.'
멀린이 대륙 북부에서 사업을 벌인 이유.
그것은 사업을 기반으로 하여 대륙 각지에서 교단에 관한 정보를 긁어모으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멀린의 사업은 이제 막 시작한 참이었다.
아무리 파급력이 있다고 해도 대륙 전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만약 제국의 정보기관을 이용할 수 있다면 교단에 관한 정보를 더 빠르고 쉽게 모을 수 있으리라.
그런 의미에서 이번 황제와의 거래는 멀린에게 결코 실이 될 수 없는 거래였다.
"흠...."
황제는 고민했다.
분명 제국에서 운영하는 정보기관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을 일개 평민에게 빌려주기에는 위험부담이 컸다.
잠시 고민이 이어지고.
"응?"
황제가 돌연 미소를 지었다.
"좋다."
"...시원시원하시네요."
오늘 멀린이 한 제안에 황제는 단 한 번도 거절 의사를 보이지 않았다.
되레 멀린이 민망할 정도로 말이다.
황제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어나갔다.
"물론 그냥 넘겨주겠다는 거는 아니다."
"그럼?"
"루시안에게 정보기관을 이용할 수 있는 권한을 넘겨주지."
"거참... 이걸 이런 식으로 써먹으시겠다?"
멀린이 대충 눈치챘다는 듯 중얼거렸다.
"선물이라고 생각하거라."
"선물은 무슨.... 덤이지. 아니, 끼워팔기인가? 정보기관을 이용하고 싶으면 저 반푼이를 제대로 키워서 써먹어라?"
"후후후."
"거기에 내가 정보기관을 어디에 써먹는지 감시하겠다는 의도도 깔려 있을 테고."
"알고 있다면 입 아프게 더 설명할 필요는 없겠구나."
능구렁이 같은 황제를 보며 멀린이 혀를 내둘렀다.
황궁 암투로 다져진 황제의 협상 능력은 그 짧은 사이 멀린의 조건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 냈다.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황제도 멀린을 보며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정확하게 내 의중을 파악해 냈구나.'
황태자에게 정보기관의 권한은 넘긴다는 말 속에 담긴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해 내는 혜안.
도무지 어린 소년의 것이라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렇게 잠시 잠깐 눈싸움을 벌이던 두 사람.
먼저 백기를 든 것은 멀린이었다.
"좋습니다. 받아들이죠."
물론, 멀린이 온전하게 패배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그가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들며 펄럭였다.
입가에 음흉한 미소를 지은 채.
"그럼, 계약서를 작성해 볼까요?"
"......?"
아발론 일동이 봤다면 기겁을 했을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
"대체 언제 오시는 거지...."
"이, 이러다 들통나는 거 아닙니까?"
윈스턴과 제플린이 불안한 눈으로 문을 응시했다.
당장이라도 저 문을 부수고 황실 기사들이 들이닥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던 그때 허공에서 두 개의 인영이 떨어졌다.
"나왔다!"
반갑게 손을 흔들며 나타난 멀린과 영혼이 빠져나간 듯 넋을 잃어버린 황태자.
그들의 등장에 그제야 집무실에 모인 이들이 화색을 지었다.
얼마나 크게 안도했던지 알렌 후작은 다리 힘이 빠져 휘청거릴 지경이었다.
멀린의 곁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갔던 일은 잘되신 건가요?"
"그럼!"
비비안의 물음에 멀린이 당차게 답했다.
동시에 좌중의 시선이 황태자에게 향했다.
"으어어...."
동공이 풀리고, 백치가 된 듯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황태자의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아발론 일동이 멀린에게 떨떠름한 시선을 보냈다.
"때리셨습니까? 아니지, 아까 때렸지, 이미. 그럼... 때린 데 또 때리셨습니까?"
"그런 것 치고는 상태가 심각한데? 혹시, 고문이라도?"
"음... 저 상태는 정신 마법으로 뇌가 혹사당했을 때나 나오는 반응인데."
순차적으로 윈스턴, 사샤, 비비안의 목소리였다.
너도나도 한마디씩 하는 그들을 보며 대공과 후작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사샤가... 우리 사샤가 이상해졌어!'
'이 상황에서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도대체 어찌 되어 먹은 거냐?'
'아카데미에 보내뒀더니... 아들놈이 이상해졌구나.'
멀린을 알아가면서 겪는 작은 혼란기를 거치고 있는 대공과 후작들이었다.
그때였다.
"저하."
방문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집무실에 있는 이들이 허둥거렸다.
"어, 어떻게 좀 해봐요!"
"대체 사람을 얼마나 못살게 굴었기에 이 지경으로 만들어 온 겁니까?!"
당장 밖에 있는 기사들이 들어와 백치 같은 황태자의 상태를 본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건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난리가 나겠지.
반면 멀린은 너무도 태연했다.
"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난 아무 짓도 안 했다."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사람이 이 지경이 된다고요?"
"그거야 이 자식 정신 상태가 썩어빠져서 그렇지!"
"지금 한가롭게 이야기할 때가 아니잖아요!"
아발론 일동은 넋 나간 황태자를 황급히 의자에 앉히는 등 바쁘게 움직였다.
안에서 허둥거릴 때 밖에서도 이상함을 감지했다.
"저하? 들어가도 되겠나이까? 저하?"
한참이나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으니 내부 상황에 의문을 품은 것이다.
"저하 들어가겠습니다!"
곧이어 문이 벌컥 열리며 기사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넋이 나간 황태자에게 의문 어린 시선을 보냈다.
"저하, 괜찮으신 겁니까?"
"하, 하... 저하께서 마, 많이 피곤하신 듯합니다."
케이가 식은땀을 흘리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기사들을 더욱 자극했다.
"저하, 모시겠습니다."
가장 지위가 높아 보이는 중년 기사가 황태자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황태자는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저하...?"
중년 기사가 황태자가 이상함을 알아차리고 눈을 부라리며 호통을 쳤다.
"네 이놈들! 저하께 무슨 짓을 한 거냐!"
집무실이 떠나갈 정도로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다른 이들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 그게... 일단 저희 이야기를 좀...."
윈스턴이 당황하여 손을 내저으니,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황실 기사들이 검을 뽑아 들었다.
짙은 긴장감이 주변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넋 나간 황태자를 가운데 두고 대공가의 구성원과 황실 기사들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집무실은 두 진영으로 나뉘어 일촉즉발의 상황이 이어졌다.
반면, 멀린은 한쪽에 떨어져서 그 모습은 지켜봤다.
"흐하아아아암...."
늘어지게 하품을 하는 걸 보니 마치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두 진영 간의 대치가 길게 이어지려는 찰나, 몸을 숨기고 있던 비비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 구경하고 얼른 상황 정리해요!]
타박하는 듯한 목소리에 멀린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슬슬 피곤해졌기에 안 그래도 상황을 정리하려던 참이었다.
멀린이 터벅터벅 두 진영의 사이를 걸어갔다.
"멈춰라!"
중년 기사가 검을 빼 들었다.
하지만 그보다 멀린의 행동이 빨랐다.
퍽-
순식간이었다.
그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예상 못 한 일.
또한, 모두를 경악시킨 행동.
그것은 다름 아닌....
"새꺄! 정신 차려!"
멀린이 황태자의 뒤통수를 후려갈긴 것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이들의 사고가 그대로 정지했다.
좌중은 자신들이 무얼 본 것인지 몰라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5초 정도의 정적이 이어지고.
황실 기사들이 정신을 차린 것은 멀린이 황태자의 뒤통수를 한 번 더 후려갈기면서였다.
퍽-
"어쭈? 정신 안 차리지?"
"이, 이놈!"
멀린의 행태에 중년 기사가 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그 뒤로 자리한 다른 수행 기사들도 우르르 집무실로 몰려들었다.
그 순간, 멀린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며 소리쳤다.
"동작 그만!"
쩌렁쩌렁한 외침과 함께 멀린은 품에서 꺼낸 것은 중년 기사에게 내보였다.
멀린이 보인 것은 한 장의 문서였다.
그 가운데 찍힌 인장을 보는 순간 폭풍 같던 중년 기사의 기세가 사그라졌다.
그는 달려들던 자세에서 그대로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황제 폐하의 칙령을 받드나이다!"
선두에서 달려들던 중년 기사를 시작으로 뒤의 기사들이 줄줄이 무릎을 꿇었다.
난데없는 상황에 어리둥절해하던 아발론 일동이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같이 무릎을 꿇었다.
그때 멀린이 대공에게 문서를 내밀며 말했다.
"읽어 주시죠."
"그, 그러지...."
떨떠름한 얼굴로 종이를 받아든 대공이 문서를 살폈다.
문서에 적힌 내용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가 문서에 적힌 내용을 소리 내어 읽어나갔다.
"나 제네리움의 통치자 그레고리 제네리움은... 흡?!"
막 한 줄을 읽은 대공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찌나 놀랐던지 그는 다음 문구를 읽어야 한다는 것을 잊을 정도였다.
"뭐하십니까?"
"이, 이걸 정녕... 폐하께서 주신 건가?"
"그럼 어떤 간 큰 인간이 황제의 칙령으로 사기를 치겠습니까? 그것도 황태자와 황실 기사들이 보는 앞에서."
"그, 그렇기는 하지.... 허...."
대공은 탄식했다.
그러던 중 좌중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자, 잠시 헛기침을 한 대공이 다시금 서한을 읽어나갔다.
"흠흠. 나 제네리움의 통치자 그레고리 제네리움은 이 시점을 기점으로 멀린을 황태자 루시안의 스승으로 추대하는바, 향후 황태자의 모든 행동거취를 그에게 일임한다."
"헉?!"
여기저기서 헛숨을 집어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발론 일동도 놀란 눈으로 멀린을 바라보았다.
"스, 스승?"
"누가?"
"타, 탑주님이 황태자 저하의 스승이라고?"
"헙!"
하지만 그들이 놀라기에는 아직 일렀다.
대공의 낭독이 이어졌다.
"또한, 황태자의 신변과 관련돼 벌어지는 모든 일에 황실은 그 어떠한 간섭도 하지 않을 것이며, 그로 인한 책임을 스승 멀린에게 떠넘기지 않을 것이다."
"헉?!"
"설령 그것이 황태자의 죽음일지라도 이는 변함이 없을 것이며, 이 모든 것을 그레고리 제네리움의 이름에 걸고 약속하는 바이다."
"컥?!"
짧지만 강렬했던 낭독이었다.
낭독이 끝나기 무섭게 멀린이 칙령서를 쏙 뺏어갔다.
자신을 향한 넋 나간 시선 속에 멀린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들었지?"
그리 말하며 멀린이 다시금 황태자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그렇게 자신들이 모시는 황태자가 얻어맞음에도 수행 기사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의 동공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제, 제가 잠시 그 칙령서를 살펴보아도 되겠습니까?"
"그러시던가."
도무지 믿지 못할 상황에 수행 기사가 멀린에게서 칙령서를 넘겨받았다.
그때였다.
"으아아!"
넋 나갔던 황태자가 미친 사람처럼 수행 기사에게 달려들었다.
그러고는 칙령서를 냉큼 가로챘다.
그가 핏발 선 눈으로 칙령서를 찢으려는 찰나.
"찢게?"
멀린의 목소리가 황태자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이야, 황제의 칙령서를 찢는다고? 그거 반역죄 아닌가?"
"이... 이...."
"찢을 테면 찢어봐. 어차피 그거는 그냥 형식적인 문서고, 진짜 계약서는 따로 있단 걸 알 텐데? 그거 찢으면 계약서에 지장 찍은 황제 폐하가 참으로 좋아하겠다. 그렇지?"
"으으으...."
그리 말하며 멀린은 자신의 팔을 살랑살랑 흔들어 보였다.
이에 아발론 일동이 흠칫거렸다.
'아아, 설마....'
'서, 설마...?!'
윈스턴과 제플린의 눈이 멀린의 손등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해, 해버린 건가?'
'마, 맙소사! 그 악마의 계약서에 황제 폐하마저....'
그들이 어찌 모르겠는가.
저 나풀거리는 멀린의 손목과 그가 말한 진짜 계약서의 의미를.
"크흐흑!"
결국, 황태자는 칙령서를 어쩌지 못하고 자리에 털썩 무릎 꿇고 말았다.
좌절하는 황태자.
그와 같은 모습에 모두가 알 수 있었다.
멀린이 가져온 칙령서가 진짜이며, 그가 정말로 황태자의 스승이 되었음을.
또한, 어찌하여 황태자가 저토록 넋이 나가 있었는지를 말이다.
'명복을 빌어 드립니다... 저하.'
'죽고 싶더라도 아득바득 사셔야 합니다.'
윈스턴과 제플린이 황태자를 향해 동정 어린 시선을 보냈다.
그때 멀린이 난입한 기사들에게 손을 휘휘 내저었다.
"자자, 그만들 나가보시죠? 여기서부터는 스.승과 제.자의 오붓한 대화가 있을 예정인지라."
"아, 알겠습니다."
멀린의 살벌한 눈빛에 수행 기사들이 썰물 빠지듯 집무실을 벗어났다.
그렇게 다시 조용해진 대공의 집무실.
그때 멀린이 케이를 돌아보았다.
"케이."
"넵!"
"예전에 네 밑으로 들어간 애들 교육 잘했지?"
"네! 착실하게 교육했습니다!"
"좋아."
멀린이 말한 애들.
몇 개월 전 멀린이 받아들인 (구)아발론 마을의 마법사들이었다.
멀린이 그들을 떠올리며 말했다.
"애들한테 전해."
"뭐라고요?"
"막내 들어왔다고."
"알겠습니다! 후배님들이 좋아하겠네요."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네?"
"걔들한테 이것도 같이 전해."
"뭐라고 말입니까?"
"배움은 대물림되는 거라고. 너희가 배운 걸 아낌없이 막내에게 전하라고. 후후."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들의 대화에 케이를 제외한 아발론 일동이 다시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그 배움이... 그 배움이 아닐 텐데....'
'배움이라 쓰고, 갈굼이라고 말하는 거 아닌가...?'
지난 몇 개월간 멀린의 분신이 30명의 마법사를 어떻게 갈구는지 지켜본 아발론 일동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들의 밑으로 들어온 한 명의 막내와 대물림되는 '갈굼'이란 배움, 딱 봐도 향후 황태자의 신변에 무슨 상황이 벌어질지 알 수 있었다.
더군다나 30명의 마법사에게는 케이 한 명 만이 악마였다면, 황태자에게는 예비 악마 30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부디 좋은 곳으로 가십쇼.'
'그곳에서는 고통받지 마시길....'
'단단히 꼬이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