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마리(3)
실마리(3)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크아아!
괴성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멀린이 본 놈의 상태는 이상했다.
'부서... 지는 건가?'
마치 눈발이 휘날리는 것처럼.
혹은 타버린 재가 바람에 날아가는 것처럼, 놈의 육신이 다리에서부터 천천히 사라지고 있었다.
그렇게 하반신이 거의 사라졌을 때, 놈이 눈을 부릅떴다.
-반드시...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작디작은 빛의 입자가 되어 천천히 사라져가는 놈은 지리의 문을 향해 울분에 찬 고함을 내질렀다.
시간이 흘러 놈의 육신이 완전히 사라졌고, 잠시 자리에 머물던 육신의 입자가 그대로 어디론가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이는 멀린도 마찬가지였다.
'어? 자, 잠깐!'
입자를 빨아들인 흡입력은 그대로 멀린조차 빨아들이고 있었다.
놀란 멀린이 소리쳤지만, 기억의 되풀이 하는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면서도 주변을 살필 시간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멀린은 볼 수 있었다.
'...저건?!'
과거 멀린이 마주했던 새하얀 진리의 문.
그 한가운데에 사선으로 거대한 흠이 나 있었다.
멀린이 알기로 저런 흔적을 낼 만한 것은 하나였다.
'검흔?'
마치 검으로 베어낸 듯한 흔적.
그로써 놈이 진리의 문을 공격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손상된 진리의 문의 열린 문틈 사이로 수많은 글자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래서였구나!'
저것 때문에 기억의 주체가 문밖으로 튀어나온 것이리라.
한눈에 봐도 진리의 문에 이상이 생긴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그긍-
잠시 뒤, 살짝 열렸던 진리의 문이 서서히 닫혀갔다.
이를 본 멀린은 진리의 문이 힘겨워하고 있다고 느껴졌다.
상처를 입고 안간힘을 내며 문을 닫는 듯 보인 것이다.
때문에 멀린은 저도 모르게 진리의 문을 응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시간도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윽?!'
순간 멀린의 시야가 암흑으로 물들었다.
곧이어 기억이 보여주는 배경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밝은 빛으로 가득한 장소였다.
이에 멀린은 작게 탄식을 내질렀다.
이번에도 역시 멀린의 기억에 있는 장소였다.
과거 10서클의 문턱에 들어서며 이곳을 지나쳐 진리의 문 앞에 섰었다.
바로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지나친 통로.
'아아....'
그때와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지만, 덕분에 당시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속속들이 전해졌다.
'이랬었구나....'
멀린은 깨달았다.
빛의 통로가 그저 진리의 문에 도달하는 단순한 과정이 아니란 것을.
이제서야 그것이 보였다.
큰 깨달음으로 멀린의 의식이 맑아졌다.
'이 또한... 진리의 일부였구나.'
환하게 느껴지는 통로 내벽은 하나같이 빛을 발하는 글자의 집합체였다.
빠르게 흘러가는 상황 속에서도 멀린은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기회는 항상 오지 않는 법.
준비된 자만이 찾아온 기회를 잡을 수 있다 하였다.
그리고 멀린은 그러한 준비를 지난 수천 년간 해온 존재였다.
그는 자신이 보고 느낀 진리의 일부를 습득해 나가기 시작했다.
비록 그것이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의 기억일 뿐일지라도, 간접적으로 진리를 접한 것은 멀린에게 크나큰 행운이었다.
'아아아....'
그렇게 멀린은 찰나에 다가온 깨달음에 몰두했다.
시간이 흘러 기억의 되풀이가 끝나고 의식이 제 영혼으로 찾아 들었음에도.
멀린의 무아지경은 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깊고 깊게, 깨달은 것을 바탕으로 진리를 파헤쳐 갔다.
알고 있던 것을 곱씹고, 새롭게 알아낸 것을 새로운 진리에 섞고.
그런 과정이 반복됨에도 멀린의 마나 연공은 끝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곧 현실에 있는 멀린의 육신 주변으로 마나의 폭풍이 몰아쳤다.
우우웅-
멀린의 심장에 자리한 6개의 서클이 격렬하게 움직이며 더욱더 굵고 단단해져 갔다.
마침내 한계에 달한 6번째 고리는 자동으로 실타래를 풀어내 새로운 '매듭식 고리'를 만들어나갔다.
한데, 놀라운 점은 그 고리가 하나가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무려 두 가닥.
한꺼번에 두 가닥의 고리가 동시에 만들어지고 있었다.
우우웅-
즈즉 즈즉-
빠르게 생성되는 서클로 인해 주변 마나가 순식간에 비워졌다.
만약 지금 멀린이 자리한 곳이 순수한 마나가 풍부한 세계수의 인근이 아니었다면 새로운 도약을 하기 전에 좌절했을지 몰랐다.
그런 멀린의 변화를 누구보다 먼저 알아차린 것은 역시나 세계수였다.
"응?"
세계수는 숲 내부에서 요동치는 마나의 흐름에 고개를 들었다.
"...저곳은?"
그녀는 마나의 흐름이 몰려드는 곳이 멀린이 폐관에 들어간 곳이란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세계수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진짜... 이제는 하다 하다 이런 식으로 이자를 챙겨가는 건가요?"
세계수가 피식거렸다.
물론 장난이었다.
7서클 이상의 깨달음이 원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란 것을 그녀 역시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무언가를 알아내긴 한 모양이군요.'
살짝 흥미로운 표정의 세계수.
곧 그녀의 표정이 새초롬하게 변했다.
도무지 억겁의 세월을 살아온 존재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다채로운 표정 변화였다.
그녀가 멀린이 있는 곳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렇게까지 해주는데 성과만 없어 봐요. 혼내줄 거예요."
작게 투덜거린 세계수의 전신에서 환한 빛이 뿜어졌다.
그리고.
촤르를-
그녀의 본체인 거대한 나무가 빛을 내며 몸을 떨었다.
그러자 맑고 정순한 마나가 숲의 요새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백색 거목이 내뿜은 빛과 기운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경건한 마음이 들게 할 정도로 신비로웠다.
"어, 어머니?"
"이게 무슨?"
그런 세계수의 변화는 엘프들조차 놀라게 했다.
그러다가 세계수가 뿜어내는 정순한 마나에 취해 하나같이 행복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세계수가 뿜어내는 마나의 태반은 멀린이 자리한 곳으로 쑥쑥 빨려 들어갔다.
멀린에게 벌어진 또 하나의 행운이었다.
엘릭서를 얻기 위해 세계수를 찾은 일.
그리고 세계수의 부탁으로 신의 영혼을 관찰한 일.
그 속에서 진리를 조금이나마 관찰 할 수 있었던 일.
모든 행운이 유기적으로 맞물려 돌아가며 오랜 기간 정체되어있던 멀린의 성장이 시작됐다.
***
전날 내린 눈이 소복이 쌓인 대공성 내부의 정원.
사샤는 그 정원을 조용히 거닐었다.
사박사박-
걷는 사샤의 발걸음을 따라 눈 밟히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그렇게 홀로 걸어간 사샤가 도착한 곳은 그리 커 보이지 않는 유리 온실 앞이었다.
사샤는 유리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
언제나 이어지는 혹한의 대지에서 녹빛으로 가득한 유리 온실은 이질적인 느낌이 들 수밖에 없었다.
찬 바람이 쌩쌩 부는 땅에서 식물을 키우기란 쉽지 않은 일.
때문에 유리 온실은 늘 난방을 유지해야 했고, 이는 평소 검소하게 살아온 대공이 부린 유일한 사치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공가 속한 그 누구도 유리 온실을 손가락질하는 이는 없었다.
"후우...."
살짝 한숨을 내쉰 사샤가 온실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후끈하고 습한 공기가 그녀를 반겨주었고, 곧 흙냄새와 푸릇푸릇한 내음이 코로 파고들었다.
사샤가 녹색의 식물 사이를 가로질렀다.
얼마 뒤, 사샤의 시야에 새하얀 비석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날개 잃은 천사가 머물다 간 곳.]
비석에 쓰인 글귀를 보는 순간 사샤의 눈빛이 흔들렸다.
낯익은 글씨체였다.
하루 전 아버지의 일기장에서 본 바로 그 글씨체.
"엄마...."
비석의 정체는 다름 아닌 세상을 떠난 사샤의 어머니 것이었다.
살아생전 식물 돌보기를 좋아했던 아내를 위해 대공이 만들었고, 아내가 죽은 뒤 그가 두 손에 흙을 묻혀가며 손수 돌봐 온 온실.
온실은 대공이 죽은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는 장소였고, 이를 모르는 대공성의 주민은 없었다.
사샤는 아버지가 돌봐왔을 화초들을 쭉- 둘러보았다.
벌써 2주째 주인이 찾아오지 않았음에도 화초들은 여전히 싱그러움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머니를 닮아서인지, 아니면 쿼터일지라도 엘프의 피를 타고나서인지.
사샤 역시 화초들을 보며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사샤가 주변을 둘러보고 있을 때.
"아가씨...?"
사샤의 뒤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고개를 돌린 사샤의 시야에 살짝 놀란 눈을 한 노파가 들어왔다.
사샤가 그녀를 보며 말했다.
"오랜만이에요, 유모."
"아유... 아가씨, 이게 얼마 만이에요!"
노파의 정체는 사샤의 유모였다.
그리고 그녀는 사샤의 어머니, 샤넬의 유모이기도 했다.
자신을 향해 환히 웃으며 다가와 손을 붙잡은 그녀를 보고 사샤도 같이 미소를 보냈다.
"언제... 언제 오신 겁니까?"
"조금 됐어요. 요새도 여전히 온실만 왔다 갔다 하시는 건가요?"
"늙은이가... 할 게 뭐 있다고. 그저 마님께서 남기고 가신 이 아이들을 돌보는 게 제 여생 동안 할 일이지요."
노파의 주름진 눈이 곱게 휘어졌다.
그녀를 보며 사샤가 물었다.
"유모."
"예, 아가씨."
"물어볼 게 있어요."
"말씀하세요."
"아버지는 어머니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셨던 건가요?"
"그게 무슨...."
"어머니가 평범한 여인이 아니란 것을... 아버지도 알고 계셨나요?"
사샤의 물음에 유모는 놀란 눈을 해 보였다.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사샤를 보며 유모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가씨... 저는 도무지... 아가씨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고 계시잖아요. 어머니가 신비한 힘을 다뤘다는 것을."
"......."
유모는 입을 다물었다.
곧 그녀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아... 아가씨."
"......."
"대공께서는... 전부 알고 계셨습니다."
"전부라는 게... 어느 정도죠?"
"저와 마님은... 아니, 샤넬은 연고지 없는 떠돌이들이었습니다. 그런 저희를 대공께서 받아들이시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받아들이셨으려고요."
"언제부터... 아버지는 언제부터 알고 계셨던 거죠?"
"처음부터였습니다. 영지 밖으로 시찰을 나온 대공께서 상처를 입으셨고, 마님께서 자신이 가진 신비한 힘으로 대공의 상처를 치료해 주었지요."
유모의 답변에 사샤는 입술을 곱씹었다.
온화했던 사샤의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분노로 가득한 그녀의 얼굴.
갑작스러운 변화에 유모는 당황하여 물었다.
"왜, 왜 그러십니까?"
"유모...."
".......?"
"왜... 왜 그랬어요?"
"예?"
사샤가 서글픔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버지께 어머니의 연구자료를 넘긴 게 유모 당신이잖아요."
"......."
"아버지께 마나독의 존재를 알리고 조심하라고 한 게 바로... 당신이잖아!"
사샤의 높디높은 절규가 온실을 쩌렁쩌렁 울렸다.
당황한 듯 보이는 유모를 보며 사샤가 울분에 차 외쳤다.
"아버지께서 기록을 남기셨지. 당신께서 가장 안전하다고 여긴 장소, 유일한 안식처...."
"......."
"아무리 생각해도 이곳밖에 안 떠오르더라고."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해소하고 마음의 안식을 얻고자 대공이 꼬박꼬박 들르던 장소.
그리고.
"마나독이란 존재를 알리고 조심하라 알려준 이라면... 아버지도 안전하다고 생각하셨겠지."
"...아가씨."
그것이 사샤가 내린 결론이었다.
마나독의 존재와 그 해결법을 찾기 위해 대공은 이 온실을 찾았을 것이다.
마나독의 해결책을 알고 있는 존재를 만나기 위해서.
때문에 모든 것을 통제하던 대공도 이 장소에서만큼은 마음을 놓았을 것이다.
상대가 아내의 유모였기에.
그리고 딸아이의 유모였기에.
자신이 안고 있는 고충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존재였기에.
하지만 마지막의 순간에 가서야 깨닫고 말았다.
유일하게 믿고 있던 이가, 해결책을 제시해 주던 이가 자신을 중독시킨 존재일지 모른다는 것을.
"대체... 왜 그랬냐고!"
사샤가 또다시 절규를 내질렀다.
"아가씨...."
당황한 눈으로 사샤를 바라보던 온화한 인상의 노파.
"...그냥 모르는 척하고 지내실 것이지."
노파의 인상이 변했다.
마치 늙은 마녀의 그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