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마리(2)
실마리(2)
노트의 정체는 다름 아닌 일기장이었다.
매일매일을 기록한 것은 아니지만, 대공이 생각하기에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사건을 기록한 일기.
그 시작은 대공이 아내를 처음 만나는 날부터였다.
***
XXX년 X월 X일
날개 잃은 천사를 만났다.
드디어 찾고야 말았다.
내 평생을 함께할 그녀를!
***
일기장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싶었기에 사샤는 웃고 말았다.
'아빠도 참....'
연인을 향한 구애.
3번의 거절.
포기하지 않고 결국, 사랑을 얻어내는 과정까지.
일기장에는 그 모든 것이 적혀 있었다.
'맨날 엄마가 먼저 만나자고 했다더니... 다 거짓말이었잖아?'
사샤의 입꼬리가 다시 살짝 말려 올라갔다.
그녀는 서둘러 다음 장을 넘기며 빠르게 일기의 내용을 살폈다.
그날부터 일기는 결혼과 사샤의 탄생으로 인해 행복이 묻어나는 문장으로 가득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묵직한 문체가 나타났다.
***
XXX년 X월 X일
내게 찾아왔던 날개 잃은 천사가 하늘로 떠나갔다.
내 품에 작은 아기 천사를 남겨놓고.
부디 그곳에서는 아프지 말고 행복하기를....
***
일기장 군데군데 번져있는 작은 물자국이 사샤의 가슴을 찔렀다.
일기를 쓰며 남몰래 눈물을 흘렸을 아버지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이후 한동안 일기를 쓰지 않은 대공.
그가 다시 일기를 쓰기 시작한 부분부터는 온통 사샤에 관한 이야기뿐이었다.
사샤가 처음으로 뒤집기를 한 날.
사샤가 처음으로 이가 난 날.
사샤가 처음으로 자신을 아빠라고 부른 날.
그것은 대공의 일기가 아닌 숫제 사샤의 육아 일기라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로 인해 이전의 우울함 가득한 글체가 다시 밝아진 것이 보였다.
온통 자신의 이야기로 가득한 일기를 본 사샤의 눈빛이 따뜻하게 변했다.
그렇게 빠르게 일기장을 넘기던 사샤의 손이 한 곳에서 멈췄다.
그녀의 시선이 머문 페이지.
그곳에 적힌 날짜는 8년 전이었다.
***
XXX년 X월 X일
몸에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상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
짧은 한줄기의 기록.
이를 본 사샤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녀가 서둘러 페이지를 넘겼다.
***
XXX년 X월 X일
점점 몸 상태가 나빠지고 있다.
원인을 파악 중이다.
추정하기로 독이 아닐까 싶다.
XXX년 X월 X일
생명의 원천이 되는 마나가 흩어지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이 아내가 남긴 자료를 통해 마나독임을 알아냈다.
***
일기의 내용은 놀라웠다.
'아버지가 마나독인 걸... 알고 계셨다고?'
사샤는 대공이 마나독을 모르기에 당했다고 여겼지만, 아버지는 자신이 당한 것이 마나독임을 알고 있었다.
더 놀라운 점은 그녀의 어머니가 언급됐다는 것이다.
아내가 남긴 자료.
분명 아버지의 일기에 그렇게 쓰여 있었다.
사샤가 짙은 의구심을 드러냈다.
'엄마가 어떻게... 마나독을 알고 있는 거지? 아빠는 마나독임을 알고도 당했다는 건가?'
의문점투성이였다.
그 의문은 일기의 내용만이 해결해 주리라.
사샤는 계속해서 일기를 읽어내려갔다.
***
XXX년 X월 X일
이미 당한 마나독을 내 능력으로는 해독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앞으로 당할 마나독을 예방하는 것으로 최대한 버텨볼 생각이다.
그보다 사샤가 걱정이다.
나를 직접적으로 노릴 정도니, 사샤라고 그들의 표적이 되지 말란 법은 없었다.
사샤를... 대공가에서 내보내야 한다.
XXX년 X월 X일
사샤가 제네시스 아카데미로 떠났다.
그 아이가 졸업할 때까지 버티기로 약속을 했건만... 과연 이 몸이 얼마나 버텨줄지 나도 잘 모르겠다.
***
그제야 사샤는 대공이 자신을 왜 그렇게 아카데미로 보내려 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사락-
사샤가 다음 장으로 일기장을 넘겼을 때 일기의 기록 일자가 몇 년을 훌쩍 뛰어넘어 있었다.
***
XXX년 X월 X일
지난 몇 년간 입는 것, 먹는 것, 마시는 것, 심지어 잠자리까지.
중독될 수 있는 모든 경로를 원천 통제했다.
하지만 내 상태는 날이 갈수록 나빠져만 갔다.
선천적 마나의 소모가 나날이 극심해졌다.
나도 모르는 새 마나독에 계속 노출되고 있다는 뜻이다.
무언가 있다.
내가 파악하지 못한 마나독에 중독되는 경로가.
그것이 무엇인지 찾아내야 한다.
내가 아닌 사샤를 위해서라도.
***
일기를 쥔, 사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는 어째서 아버지가 일기를 숨겨 두었을까 생각해 보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알 수 있었다.
'홀로... 버텨내셨던 건가.'
도대체 누가 자신을 중독시켰는지 알 수 없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아버지가 믿을 존재가 있었을까?
그렇기에 홀로 기록을 남기며 어떻게든 버텨내려 했을 것이다.
사샤는 자꾸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꾹 눌러 참았다.
그렇게 다시 일기를 넘기니 일기의 날짜는 최근까지 도달해 있었다.
***
XXX년 X월 X일
내 모든 노력은 부질없는 짓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도대체 중독의 경로가 어디란 말인가?
***
글자 하나하나에서 초조함이 엿보였다.
이때까지도 아버지는 자신이 어떻게 마나독에 중독됐는지 알지 못한 듯싶었다.
사샤는 다시 종이를 넘겼다.
"어?"
마지막 한쪽을 제외하고 그 뒤로 일기는 적혀있지 않았다.
놀란 사샤가 꽤 많이 남은 종이를 넘겨 보았지만, 모두가 비어있었다.
다시 앞으로 되돌아온 사샤가 마지막 일기를 읽어내려갔다.
***
XXX년 X월 X일
왜... 왜 몰랐을까.
나는 내가 모든 것을 통제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단 하나! 내가 생각하지 못한...
내가 통제하지 못한 한 가지가 있었다.
유일하게 내가 의심하지 못했던 장소가 있다.
분명하다.
내가 안전한 안식처라 여겼던 곳.
그곳이라면 나의 의심을 피해 중독시킬 수 있었으리라.
지금에 와서야 그것을 깨달았지만... 이제는 너무 늦어버렸다.
어쩌면... 당장 내일일지라도 내가 눈을 뜨지 못할 수도 있다.
조금만 더 빨리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
일기의 마지막은 그전까지의 정갈한 글자체와는 달리 심하게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온전치 않은 몸으로, 떨리는 손으로 겨우겨우 일기를 작성한 게 보였다.
일기를 전부 읽은 사샤의 얼굴이 침착하게 가라앉았다.
'아버지가 말한 안식처....'
사샤는 눈을 반개하고 아버지의 입장을 되돌이켜 보았다.
홀로 버텨냈을 상황에서 아버지가 어디에서 위안을 얻었을지.
"아!"
잠시 뒤 무언가를 떠올린 그녀의 눈이 활짝 떠졌다.
스륵-
그녀는 마룻바닥 공간에 일기를 다시 숨기고, 모든 것을 원상태로 되돌린 다음 책상에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총관이 차를 들고 서재로 찾아왔다.
사샤는 총관이 내준 차를 들었다.
"......."
맑은 찻물에 비친 그녀의 눈에는 뜨거움이 가득했다.
사샤는 그것을 억누르며 총관에게 물었다.
"총관... 아니, 아민 아저씨."
사샤의 부름에 총관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민 아저씨.
그것은 사샤가 어린 시절 자신을 부르던 호칭이었기 때문이다.
"왜 그러십니까?"
"아저씨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떻게 만나셨는지 기억하시나요?"
난데없는 물음이었다.
또한, 의외의 질문이기도 했다.
총관이 알고 있는 사샤는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잘 꺼내지 않았다.
어린 나이였지만, 본능적으로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면 아버지가 슬퍼한다는 것을 알고 꺼린 것이었다.
그런 사샤의 질문에 총관은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럼요.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죠. 아뇨, 잊을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당시 그 난리를 쳤는데."
"난리요?"
"소영주님이... 아, 당시에는 대공께서 소영주님이셨습니다. 아무튼, 어느 날부터인가 소영주님의 영지 시찰이 잦아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한 여인을 결혼하겠다며 데려온 거 아니겠습니까. 그것도 영지 사람이 아닌 외지인을요. 그러니 대공가가 발칵 뒤집혔죠."
"그 외지인이란 게...."
"예... 돌아가신 마님. 사샤 아가씨의 어머님이십니다."
"......."
마치 그 당시를 회상하는 듯 노인의 눈에 잔잔함이 담겼다.
"그랬군요...."
반면 사샤의 눈에는 감췄던 열기가 화르륵 되살아났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과거를 회상하고 있던 총관은 이를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
멀린은 끝없이 펼쳐진 정보의 바다에 정신을 빼앗겼다.
'이게 무슨 일이냐?'
신의 영혼과 의지가 연결된 순간 펼쳐진 의문의 현상.
멀린의 정신은 진리라 여겨지는 정보의 바다를 따라 부유했다.
그 과정에서 멀린은 이상함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건... 진리가 아니다.'
아니, 진리이기는 했다.
그러나 진짜는 아니었다.
이것은 신의 영혼에 담긴 과거의 기억일 뿐이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아직 정확한 것을 알지 못했다.
멀린은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그는 침착하게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주변을 관망했다.
신의 영혼이 보여주는 기억은 큰 변화 없이 잠잠했다.
그런데....
드드드-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았던 고요함 속에 격한 변화가 생겨났다.
드드드-
기억이 보여주는 배경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와 함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째서! 어째서 나는 안된단 말이냐!
그것은 굵직한 남성의 목소리였다.
-그 녀석은 되면서 왜! 왜 나는 안되냔 말이다!
슬픔, 분노, 억울함, 답답함.
온갖 감정이 들끓는 외침을 들으며 멀린은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어라... 잠깐... 이 목소리?!'
선명하게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스쳐 지나가는 듯 짧은 순간 들었을 뿐이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음성.
'이거 그 새끼잖아?'
확실했다.
진리의 문을 지키고 있던 수문장.
그 새끼의 목소리가 틀림없었다.
멀린은 의식을 더욱 바짝 세웠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다 면밀하게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좋다! 네가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억지로라도 그 문을 열어 주마!
놈의 목소리를 들은 멀린에게 의문이 피어났다.
'이건 또 무슨 소리냐? 이 새끼... 문을 지키는 놈 아니었어?'
멀린으로서는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문을 지키는 이라 생각하고 지금껏 놈을 '수문장'이라 불렀다.
하지만 들려오는 이야기를 들으니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게 멀린이 생각에 잠긴 사이 기억의 배경이 다시 변화하기 시작했다.
드극 드극-
고요한 호수와 같던 공간이 지진이라도 난 듯 사방팔방 출렁이며 흔들렸다.
주변을 가득 채운 글자들이 쉼 없이 떨려왔고, 그러한 현상이 한동안 이어졌다.
'이 새끼, 대체 무슨 짓을 벌이는 거야?!'
멀린이 속으로 수문장 놈을 욕하고 있을 때.
-크아아!
고함인지 비명인지 모를 괴성이 들려왔다.
그리고.
'어?!'
멀린이 있던 세상에 빛이 발생했다.
마치 어두운 방의 문이 열린 듯 틈이 벌어진 것이다.
그곳으로 주변의 글자들이 튀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는 멀린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정확히는 멀린이 아닌 그가 보고 있는 기억의 주체가 틈으로 빨려 나가는 것이었다.
'오호?'
그 틈에 멀린은 주변 상황을 빠르게 살폈다.
직감한 것이다.
지금부터 일어나는 일을 통해 자신이 몰랐던 비밀을 알 수 있으리란 것을.
그렇게 집중한 사이 멀린이 보고 있던 배경이 확 변했다.
이에 멀린은 정신이 확 깨는 기분이 들었다.
'역시?!'
여길 어찌 잊으랴.
단, 한 발.
그 한 발을 내딛지 못해 수천 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된 장소인데.
바로 진리의 문 앞이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으아아악!
육신이 조각조각 흩어지며 괴성을 내지르는 놈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