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라니까?(5)
진짜라니까?(5)
'진정... 진정하자. 표정 관리, 표정 관리!'
멀린이 입꼬리와 사투를 벌이고 있는 사이 세계수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세상에 신이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아직 그들의 파편은 남아있습니다. 제가 찾고자 하는 거는 바로 그런 신의 영혼이에요."
세계수의 이야기를 들은 멀린은 잠시 고민하다 물었다.
"그걸 왜 찾으시는 겁니까."
"음... 자세한 거는 말씀드리지 못하지만, 꼭 필요한 겁니다. 결코, 현계에 해가 되는 일이 아니란 거는 제가 보장할게요."
"흠...."
태초부터 현계를 위해 힘써온 세계수의 말이었기에, 해가 될 일이 아니란 것은 확실히 믿을 수 있었다.
멀린의 고심이 깊어졌다.
아니, 고민하는 척을 해 보였다.
겉모습과는 달리 멀린은 속으로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었다.
'이게 이렇게 엮이네?'
신의 영혼.
멀린이 이를 왜 모르겠는가.
당장 자신의 몸에 틀어박혀 있는 것을.
'엑스칼리버.'
신의 영혼을 담아 만든 아다만튬 검.
세계수가 말한 시기상으로 볼 때 그녀가 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리라.
슬쩍 눈치를 본 멀린이 입을 열었다.
"흠... 그러니까 그것만 찾아 주면 엘릭서를 내주신다는 거죠?"
"예. 신의 영혼을 찾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 아마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고...."
원래라면 그럴 것이다.
그제야 멀린은 세계수가 어째서 엘릭서를 그토록 쉽게 내준다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세상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신의 영혼을 찾는 일.
그게 쉬울 리 없었다.
물론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말이다.
멀린이 씨익- 미소 지었다.
"좋습니다. 거래를 받아들이죠."
"좋아요.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요."
세계수의 말에 멀린은 억누르고 있던 입꼬리를 놓아 버렸다.
살판난 입꼬리가 하늘로 승천했다.
"후후. 기다리실 필요 없습니다."
"네?"
멀린이 손을 내밀었다.
"주세요."
"......?"
난데없는 상황에 세계수는 물론 비비안과 로첼라도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워 올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멀린은 자신의 할 말을 할 뿐이었다.
"신의 영혼 찾았으니 엘릭서 주시죠."
"......?"
싸늘한 정적이 실내에 감돌았다.
그제야 자신이 너무 많은 것을 생략했다고 여긴 멀린이 황급히 추가 설명을 덧붙였다.
"그, 그 신의 영혼 여기 있습니다!"
멀린이 제 가슴을 탕탕 쳤다.
하지만....
"......."
도무지 굳어버린 분위기는 좀처럼 풀릴 줄 몰랐다.
장난치지 말라는 세 쌍의 시선에 멀린은 궁색하게 말했다.
"진짜라니까... 요."
"......."
"진짠데...."
멀린이 애써 주장을 해보았지만, 뚱한 시선은 좀처럼 풀릴 줄 몰랐다.
조금 더 깊은 대화의 필요성을 느낀 멀린이 자신이 엑스칼리버를 얻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그로부터 30분 뒤.
"드워프? 그들이 아직 남아있단 말인가요?"
"아다만튬? 세상에."
세계수와 비비안이 놀라 멀린을 바라보았다.
반면, 로첼라는 믿지 못하겠다는 눈빛이었다.
그녀가 세계수를 보며 물었다.
"어머니... 저 말을 믿으십니까?"
로첼라의 물음에 세계수가 단호한 목소리로 답했다.
"로첼라. 비록 멀린이란 저 사람이 영 믿음이 안 가기는 할지라도 이런 일에 거짓말할 사람은 아니에요."
"......."
세계수의 말에 비비안이 옆에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멀린의 입이 살짝 튀어나왔다.
그런 멀린을 무시한 세계수가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멀린."
"예."
"정녕 그대의 말처럼 그 검이 당신의 몸에 들어가 있다면... 제가 그것을 느끼지 못할 리 없습니다. 그런데 전 지금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네요."
"음...."
멀린으로서도 난감한 상황이었다.
세계수조차 멀린의 몸에 흡수된 엑스칼리버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는 일이었다.
멀린이 딱히 답이 없자 세계수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좋아요. 그럼 이렇게 해요."
"어떻게 말입니까?"
"일단 멀린의 몸속에 신의 영혼이 들어가 있다는 거는 믿을게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확인은 해야겠어요."
"그런데요?"
"그러니 어쩌겠어요? 그 엑스칼리버란 걸 빼 오셔야죠."
"......."
멀린의 얼굴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어... 음... 그게 말입니다. 이게... 안 빠지는데요?"
멀린이라고 몸속에 칼을 박고 살고 싶었겠는가.
그간 틈틈이 엑스칼리버를 빼내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해왔었다.
그러나 어찌 된 영문인지 엑스칼리버는 몸 밖으로 빠져나올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런 멀린의 답에 세계수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그럼. 저희도 엘릭서를 내드릴 수 없어요."
"이러실 겁니까? 저희가 함께한 세월이 얼마인데?"
"기껏해야 수십 년이죠."
"...그간의 정을 생각해서라도."
"어떤 분이 정 따위에 의존해서는 절대 큰일을 할 수 없다고 누누이 강조하셔서요."
"누굽니까? 그딴 망발을 한 인간이!"
"멀린요."
"...제가요?"
"예."
멀린이 볼을 긁적였다.
'그랬던 거 같기도 하고....'
과거 친우였던 리든을 등쳐먹으면서... 아니, 거래를 하면서 종종 했던 소리였던 거 같기도 하다.
실상 멀린이 엘릭서를 누구 덕분에 얻어먹고 다녔겠는가.
그게 다 리든을 통해 얻은 것들이었다.
스스로 불러들인 재앙에 발목이 잡혀버린 멀린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예전에는 안 그러셨는데... 많이 변하셨네요."
"우리 착했던 리든이 당신과 어울리면서 물드는 걸 지켜보고 저도 조금 배웠죠."
"...굳이 그런 걸 배우실 필요는 없었는데."
"후후."
"하아... 알겠습니다. 어떻게든 빼내 오죠."
"잘 생각하셨어요."
이번만큼은 멀린도 어쩔 수가 없었다.
설득과 협박도 통하는 상대에게나 해야 하는 것이다.
세계수에게 자신의 설득이 통할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세계수가 원하는 것을 가져다줘야 할 판이었다.
멀린이 로첼라를 돌아보며 물었다.
"여기 남는 방 있지?"
"...내드리겠습니다."
그는 엘프 마을에 방 하나를 얻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엑스칼리버를 꺼낼 궁리에 들어갔다.
***
그로부터 며칠 뒤.
리카르토 백작령.
"알아보란 것은?"
백작은 서재에 앉아 기사로 보이는 수하를 대면하고 있었다.
모시는 이의 물음에 기사는 자신이 알아 온 것을 성심성의껏 답하기 시작했다.
"말씀하신 대로 케이 브륜힐트라는 이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결과부터 말씀드리면... 실제 브륜힐트 공작가의 인물이 맞았습니다."
수하의 보고에 백작의 안색이 굳어졌다.
"저, 정말이라더냐?"
"예. 브륜힐트 공작가에서 정보를 은폐하고 있어 알아내는 게 쉽지 않았지만, 현 공작가의 후계자인 네이든의 형이라고 합니다."
"허억?!"
놀란 백작이 숨을 들이마셨다.
며칠 전 대공가에서 변을 당하고 온 백작은 이를 갈며 케이 브륜힐트란 이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만약 놈인 자신을 기만한 것이라면 당장 기사단을 이끌고 쳐들어가 목을 쳐버릴 작정이었다.
하지만 수하는 그가 진짜 브륜힐트 공작가의 인물이라 말하고 있었다
"끄응...."
백작은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다가 무언가 이상함을 알아차리고 되물었다.
"네이든 공자의 형이라 하였느냐?"
"예."
"그렇다면 브륜힐트의 장자라는 소리인데... 어찌 내가 모른단 말이냐?"
"알아본 바로는, 케이 브륜힐트는 현 공작과 부인 사이에서 나온 자식이 아니라 합니다."
"서자? 서자란 소리냐?"
"그렇습니다. 10여 년 전 공작이 외부에서 난 자식을 데려온 게 케이 브륜힐트라 합니다."
"흐음...."
백작의 얼굴에 이채가 스쳤다.
'과연....'
서자라면 공작가에서도 그의 존재를 감출 만했다.
높은 귀족 가문일수록 적통을 따지는 법이니 케이 브륜힐트는 공작가의 치부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래도 그가 브륜힐트 공작가의 일원이란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백작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지난 세월 그가 대공가를 집어삼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왔던가.
그런데 난데없이 나타난 브륜힐트 공작가의 서자로 인해 모든 것이 뒤엎어질 위기였다.
고심하는 백작을 본 기사가 물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공작가에 약혼 여부를 확인해 보시는 게...."
"아니! 미쳤느냐! 절대 안 된다!"
기사의 말에 백작이 노성을 터트렸다.
그의 눈에는 기광이 번뜩였다.
"그랬다가는 만약, 정말로 그 케이 브륜힐트와 사샤 레드포드가 혼약 관계라면... 어찌할 테냐."
"예?"
"우리는 이 사실을 모르는 거다."
"......."
"공연히 브륜힐트 공작가에 사실관계를 확인하려 해서 우리가 알고 있다는 티를 내서는 안 된단 말이다! 그때는 대공가에 쏟아부은 모든 게 어그러지는 거야. 우리는 철저하게... 모를 척을 해야 한다. 그래야 나중에 가서도 발뺌을 할 수 있겠지."
백작의 눈에 짙은 탐욕과 열기가 피어올랐다.
"당장 가턴 자작과 브람스 자작에게 사람을 보내라. 내가 보잔다고 전해라!"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기사가 서재를 벗어났다.
그렇게 홀로 남은 백작.
그는 한쪽 벽에 걸린 갑옷을 바라보았다.
"머지않았다... 곧."
오랜 시간 리카르토 백작가는 세간에 손가락질을 받아왔었다.
주인을 문 개.
배은망덕한 종자들.
대공가의 은덕을 먹고 자랐으면서 주인의 등 뒤에 칼을 품었다는 딱지가 백작가에 떡하니 붙어 있었다.
백작은 그런 사실이 너무도 싫었다.
그렇기에 그는 결심했다.
'우리를 주인을 문 개라 칭한다면 기꺼이 그리되어주마! 그리고 보여주마. 우리가 문 것이 주인이 아니라, 주인이 될 값어치도 없는 것들이었다는 걸!'
세상은 승자만을 기억할 것이고, 리카르토 백작은 승자가 될 준비를 마쳤다고 자신했다.
그의 눈에 검은 야심이 피어올랐다.
***
교단의 본단이 자리한 비처.
찰박-
뽀얀 수증기가 자욱하고, 수십 명이 동시에 들어가도 널널해 보일 탕 속에 모건은 홀로 앉아 있었다.
그녀가 시중도 없이 홀로 목욕을 즐기고 있던 그때였다.
푸드덕-
검은 까마귀 한 마리가 목욕탕 안으로 날아들었다.
이를 발견한 모건이 살포시 검지를 들어 올렸다.
목욕탕의 천장을 배회하던 까마귀가 모건의 손에 내려앉았다.
"후후."
다섯 개의 눈이 달린 까마귀.
모건은 녀석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까마귀가 입을 쩍 벌어지며 작은 원통을 토해냈다.
그러고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다시 날아올랐다.
"과연 무슨 소식이 왔을까요?"
마치 노래하듯 혼잣말을 중얼거린 모건은 까마귀가 전해준 원통을 열었다.
그러자 그 안에서 작게 말린 양피지가 드러났다.
양피지에는 짧은 글귀가 적혀있었다.
[요새 변화 감지. 일시적 개방으로 추정.]
짧디짧은 문구.
이를 본 모건의 입꼬리가 살며시 말아 올라갔다.
"흐음... 그 집순이가 문을 열었다 이거지?"
까마귀는 숲의 요새를 관찰하고 있는 교단의 정보원에게서 보내온 것이었다.
그들이 전한 소식은 모건이 기다리던 것이기도 했다.
"재밌네."
오랜 시간 열리지 않았던 숲의 요새.
엘프들이 요새를 개방할 일이 무엇일까?
그것을 떠올린 모건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욕탕 밖으로 발을 내디딘 모건.
곧 강한 마나가 그녀의 전신을 휘감고 피부에 남아있던 물기가 빠르게 기화해 날아갔다.
모건은 하늘거리는 옷을 걸쳐 입으며 미소 지었다.
"어디... 우리 집순이가 무엇 때문에 밖에 나온 건지 확인을 해볼까?"
그녀는 즐겁다는 듯 작게 흥얼거렸다.
그리고 그와 함께 모건의 신형이 공중에서 사르르 녹아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