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샤(3)
사샤(3)
조소 지은 멀린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마법이 사라진 시대에 마나독을 쓸만한 인간들.
멀린의 머릿속에 그럴 만한 존재는 하나뿐이었다.
'교단.'
물론 그들이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아닐 확률보다 맞을 확률이 더 높았다.
마나독은 어지간한 마법사는 흉내도 내지 못할 정도로 복잡한 기술이었다.
지금 시대에 마나독을 사용할 고위 마법사가 그들이 아니면 누가 있겠는가.
아버지의 병세에 대해 멀린이 무언가 알고 있는 듯싶자, 사샤가 다급하게 물었다.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마나독이란 게 뭔지."
"이 마나독이란 거는 인간이 타고난 선천적 마나를 갉아먹는 독이다. 그리고 인간이 가진 선천적인 마나를 훼손하려면 마나독을 장기간 복용해야 한다."
"......?!"
멀린의 말에 사샤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녀라고 저 소리가 무슨 의미인지 왜 모르겠는가.
사샤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 물었다.
"그... 그럼 누군가 아버지에게 그 마나독을 꾸준하게... 먹여 왔다는 건가요?"
"그래. 첫 발작이 8년 전이면 못해도 그보다 1년 전부터 마나독에 당해 왔을 거다."
"그, 그럴 수가! 비록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지는 못하셨지만, 아버지도 최상급 익스퍼트셨어요. 그런 아버지가 독에 당하고 계셨단 거를 모르셨을 리가 없을 텐데?"
"말했잖아. 마나독은 저주에 가까운 거라고. 마법에 대해 무지하다면 당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마나독은 애초에 마법을 익히지 않은 자들을 중독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거다."
과거에도 그런 이유로 마나독에 당한 기사들이 많았다.
시간이 흘러 마나독에 대한 방비책이 생겨났지만, 현재 그것이 남아 있을 리 없었다.
사용하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은 당연했으니 말이다.
"아마 네 아버지도 눈치는 챘을 거다. 자신이 겪는 증상이 단순히 병이 아니란 걸. 다만 어찌할 방법을 몰랐겠지. 그리고 마나독을 푼 존재도 그런 네 아버지의 의심을 피해 더 조심히 마나독을 사용했겠지. 그래서... 아직 네 아버지가 살아 계신 거다."
"그, 그런...."
"지금까지 네 아버지가 죽지 않고 살아 계신 걸 다행으로 여겨. 마나독을 뿌린 마법사가 조금만 더 독하게 마음을 먹었으면.... 오늘 넌 아버지를 뵙지 못했어."
사샤의 안색이 파리해져 갔다.
절망 어린 사샤의 얼굴.
하지만 그 속에 한 줄기 희망이 피어올랐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몰랐던 사실을 알려준 멀린.
그라면 방법을 알고 있을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샤가 다급히 물었다.
"바, 방법은요? 치료 방법은 없나요?"
"넌 진짜 마탑에 들어온 걸 다행으로 여겨라. 마나독을 마법사만 쓸 수 있다는 말은 마법사라면 마나독을 없앨 수 있다는 소리니까. 비록... 그간 마나독에 잡아먹힌 선천적 마나를 채워 넣는 거는 쉽지 않은 일일 테지만, 마나독만큼은 내가 어찌해줄 수 있다."
"아아!"
사샤의 얼굴이 대번 환해졌다.
그녀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갔다.
그런 사샤를 옆에 두고 멀린이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복잡하게 허공을 유영했다.
'이 시대에 이 마법을 펼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마나독은 마법사만이 해결할 수 있었기에 고위 관직자들은 언제 있을지 모를 마나독의 암살 위험에 늘 곁에 마법사를 대동했다.
실제 멀린도 용병 시절 그러한 이유로 귀족들에게 고용된 적이 있었다.
지금 멀린이 사용하는 마법도 그 시절 만들어진 것이었다.
"만병의 치료."
6서클의 다복합 치료 마법, 만병의 치료.
해독, 해열, 체력 보충, 상처 치료 등등.
다양한 효과의 치료를 단번에 해결해 내는 멀린표 마법이었다.
그가 이 마법을 만들어낸 이유는 간단했다.
각각의 병증마다 증세에 맞는 마법을 여러 번 마법을 펼쳐야 하는 귀찮음 때문이다.
잠시 후 멀린의 손끝에서 나온 청록색의 빛이 잠든 대공의 전신으로 깃들었다.
멀린은 심유한 눈으로 이를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의 마법이 대공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 유심히 관찰했다.
곧 그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흠...."
"어, 어떤가요?"
"쉿."
옆에서 재촉하는 사샤를 멀린이 손을 들어 진정시켰다.
그는 눈조차 깜빡거리지 않고 대공을 살폈다.
특히나 검은 핏줄이 돋은 대공의 가슴을 말이다.
잠시 뒤, 청록빛이 대공의 가슴 쪽에 머물다 그대로 사라지는 게 보였다.
멀린의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이것 봐라?"
살짝 굳어진 멀린.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사라졌어야 할 마나독이 아직도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멀린이 양손을 뻗었다.
'이것도 버티나 보자.'
멀린의 머리 위에 붉은 라이프 포스 베슬이 나타났다.
작정하고 라이프 포스 베슬까지 소환한 멀린의 손은 이전과는 다르게 매우 복잡하게 움직였다.
사샤는 주변에 요동치는 마나에 흠칫 놀랐다.
'이, 이건?'
과거에도 이런 마나의 태동을 느낀 적이 있었다.
당시 이런 마나의 태동이 있은 뒤, 멀린은 경악할 만한 마법을 보여줬었다.
당황과 놀라움, 그리고 기대감으로 사샤는 아무것도 못 한 채 멀린만을 바라보았다.
그러는 사이 멀린이 마법을 완성했다.
"천신의 세례."
멀린의 중얼거림이 끝나기 무섭게 은은하고 하얀빛이 대공에게 쏟아져 내렸다.
이에 사샤의 입이 자동으로 벌어졌다.
"아...!"
맑은 빛에서 사샤는 생기를 느꼈다.
만물을 포용하는 듯한 어마어마한 생기를 말이다.
사샤가 그렇게 감탄하는 사이 멀린은 긴장을 풀지 않고 대공의 변화를 살폈다.
얼마 뒤 빛이 사그라지고.
"허...."
멀린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는 믿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대공의 가슴을 바라보았다.
"이것도 버텨?"
경악스러웠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가 펼친 것은 무려 8서클의 다복합 치유 마법이었으니 말이다.
팔다리가 잘려도 어지간해서는 바로 붙게 만들고, 해독하지 못할 독이 없는 '천신의 세례'.
멀린이 직접 만들어낸 8서클의 마법을 고작 마나독 따위가 버텨 낸 것이다.
멀린의 얼굴이 잔뜩 굳어졌다.
'고작... 마나독 따위가 아니란 건가?'
멀린이 다시금 마법을 펼쳤다.
두 번이나 연달아 8서클 마법이 사용되고.
"흠...."
대공의 상태를 살핀 멀린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에 사샤가 초조하게 물었다.
"어, 어떻게 된 건가요?"
"...쉽지 않겠다."
멀린의 말에 사샤가 놀란 듯 되물었다.
"탑... 주님의 힘으로도요?"
"조금 전 마법은 8서클 마법이었다. 잘린 팔다리도 흉터 하나 없이 붙일 수 있고, 세상에 존재하는 어지간한 독은 해독할 수 있는 마법이었지."
"......."
"그런데... 저건 좀 독하네. 안 없어져."
"아아...."
멀린의 고백에 사샤의 얼굴에 절망이 깃들었다.
마법을 배우는 입장에서 8서클 마법이 어떤 의미인지 이제 그녀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탈함에 사샤의 고개가 밑으로 떨어지는 찰나.
딱-
멀린의 매직 애로우가 사샤의 이마를 가볍게 두들겼다.
그제야 고개를 든 사샤.
그녀의 앞에는 밝게 미소 짓는 멀린이 있었다.
"뭘 그렇게 다 죽어가는 얼굴이야."
"하, 하지만... 8서클 마법으로도 어찌하지 못한 거면."
"야, 내가 누구냐? 나 멀린이야. 내가 고작 저런 마나독 하나 어쩌지 못할 거 같아? 가서 자세히 봐봐."
멀린의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사샤가 아버지를 살폈다.
그때서야 사샤는 무언가 변화를 알아차렸다.
"아... 숨소리가?"
"조금은 괜찮아졌지?"
그의 말마따나 미약하던 대공의 숨결이 조금은 정상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더욱이 가슴 전반을 차지하고 있던 검은 핏줄도 조금은 가라앉은 듯 보였다.
그제야 다시 희망을 본 사샤.
이에 멀린이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냥 임시방편으로 숨을 이어붙인 거나 다름없어. 네 아버지는 지금 몸속에 언제 터질지 모를 폭탄을 안고 있는 거다. 내 마법이 일시적으로 그 폭탄의 불꽃을 꺼트렸지만, 그 불꽃은 곧 다시 피어오를 거다."
"그, 그러면?"
"그러면은 뭘 그러면 이냐. 당연히 폭탄을 꺼내 치워야지."
그리 말한 멀린이 사샤의 어깨를 토닥였다.
"믿어봐라, 나를."
환하게 웃는 멀린을 본 사샤의 얼굴이 멍해졌다.
이내 정신을 차린 사샤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렇게 웃으면서 말하면 괜히 더 불안해진다고요. 그런 얼굴로 사고 치신 적이 어디 한두 번이어야죠."
"쯧. 너는 진짜 케이를 본받아야 해. 믿음이 부족하다고, 믿음이."
"평소에 잘하면 믿어볼게요."
삐죽거리기는 했지만, 사샤의 눈에는 멀린에 대한 신뢰가 담겨있었다.
평소 행실은 그리 믿을 만한 사람이 못 됐지만, 이럴 때 멀린은 그 누구보다 든든한 스승이자 후원자였다.
그렇게 둘이 서로를 바라볼 때.
"누구냐!"
문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급함이 깃든 목소리.
곧 문을 열고 다수의 기사가 들이닥쳤다.
그들은 방 안에 자리한 사샤와 멀린을 보고 당황한 눈치였다.
"어? 아, 아가씨? 여긴 어떻게?"
아직 사샤가 도착한 것을 알고 있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대공의 위독함을 알린 게 불과 며칠 전이었다.
그런데 사샤가 떡하니 대공의 침실에 있자 그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놀람도 잠시.
그들은 부리부리한 눈으로 주변을 살피며 물었다.
"혹시... 여기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대공의 침실 근처에 있던 기사들은 갑자기 침실에서 터져 나온 엄청난 마나 파장에 놀라 급히 달려온 것이다.
이를 눈치챈 사샤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 그렇습니까?"
방 안에 있던 게 사샤였기에 기사들도 미심쩍지만 넘어가는 듯싶었다.
그때 멀린이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아으... 피곤하네. 난 가서 쉰다."
"...네, 쉬세요."
사샤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소년에게 그녀가 존대하자 기사들이 다시금 놀란 듯 입을 벌렸다.
멀린은 그런 기사들의 옆을 유유히 스쳐 지나갔다.
그때 사샤의 머릿속에 울리는 멀린의 목소리.
[이 일...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되는 거 알지?]
뒤돌아 걸어가는 멀린의 뒷모습을 보고 사사의 눈이 빛났다.
그녀라고 어찌 멀린이 남긴 말의 의미를 모르겠는가.
지난 몇 년간 누군가 계속해서 대공을 중독시켜왔다.
그 의미는 최소 대공성 안에 대공을 중독시킨 범인이 자리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최악의 경우....
'믿고 있던 이가 범인이 있거나.'
현재 사샤에게 대공성에서 믿을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단 한 명.
"아, 이 자식들 어디로 간 거야?"
대공성을 제집처럼 유유히 걸어가는 저 소년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
그로부터 사흘이 흘렀다.
"흠...."
대공의 침실 밖에 선 기사는 문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거대한 마나의 파동에 안색을 굳혔다.
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궁금했지만, 그는 섣불리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없었다.
그것은 사샤 때문이었다.
'제 허락이 있기 전까지는 절대 문을 열지 마세요. 이는 가주 대리로서 하는 명령입니다.'
며칠 전 갑자기 돌아온 사샤.
몇 년 만에 다시 본 그녀였지만,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아직 어리지만, 위엄 서린 그녀의 엄포에 대공가에 충성을 맹세한 기사들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대공이 의식이 없는 지금, 돌아온 사샤만이 레드포드 대공가의 유일한 후계자이자 정당한 가주 대리였기 때문이다.
'역시 그날 그 소년과 무슨 일이 있었다.'
기사는 며칠 전 보았던 금발의 소년을 떠올렸다.
그날 사샤는 아무 일도 아니라고 했지만, 그 소년과 사샤는 저 안에서 무언가를 했다.
똑같은 현상이 계속해서 반복되니 바보가 아닌 이상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기사들이 이를 두고 보는 이유는 저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 대공의 안위에 도움의 되는 일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저게 끝날 때마다 대공의 얼굴이 편해 보였다.'
만약 사샤와 소년이 하는 일이 대공의 안위를 위협하는 일이었다면, 아무리 가주 대리의 명령이라도 당장 문을 부수고 들어갔으리라.
***
한편, 오늘도 어김없이 대공에게 치료 마법을 걸어준 멀린.
"...어떤가요?"
사샤의 물음에 멀린이 굳은 얼굴로 답했다.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네 아버지가 당한 마나독은... 지독할 정도로 생존력이 강해. 아니, 이건 생존력이라기보다는 죽여도 죽여도 계속해서 살아나는 거 같아. 마치...."
"......?"
치료 과정을 설명하던 순간 멀린이 멈칫거렸다.
자신이 한 말 속에서 무언가를 깨달은 것이다.
그가 아공간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이를 보고 사샤가 물었다.
"갑자기 그건 왜?"
"피를 좀 뽑아야겠다."
"네?"
"걱정 마. 그렇게 많이 필요로 하지는 않을 테니까."
사샤의 불안을 잠재운 멀린이 대공의 손바닥을 칼로 그었다.
흘러나온 피를 작은 유리 용기에 담고 대공의 상처를 치료해준 멀린,
그는 사샤가 지켜보는 가운데 대공의 피에 천신의 세례를 사용했다.
마법에 노출된 피가 밝게 빛나는 순간, 멀린은 볼 수 있었다.
핏속에 떠오른 검은 입자를 말이다.
그는 검은 입자의 변화를 놓치지 않고 살폈다.
'이건....'
검은 입자.
그것은 마나독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충격적인 것은 그것들이 자의성을 가지고 움직인다는 점이었다.
멀린의 마법에 노출된 순간 스스로 기운을 감춰 죽은 척을 하는 마나독.
마치 생명체와 같은 마나독의 형태에 멀린이 혀를 내둘렀다.
'도대체 이걸 어떻게 만들어낸 건지?'
마나독이란 무생물체를 생명체로 변화시키는 것.
고작 10~20년 연구한다고 나올 만한 결과물이 아니었다.
'지금 이 시대에... 이런 걸 만들어 낼 존재는....'
멀린의 뇌리로 스치는 얼굴.
이를 떠올린 그의 입꼬리가 비틀리며 스산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모건 페이...."
흑마법과 키메라에 정통한 그녀라면 충분히 이런 말도 안 되는 마나독을 만들어 낼 수 있으리라.
'그때 마계로 쳐들어가서라도 죽였어야 했나.'
그랬다면 지금 같은 악연은 이어지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뭘 좀... 알아내신 건가요?"
사샤의 물음에 멀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마나독의 정체가 뭔지... 그리고 어떻게 없앨 수 있는지."
"......?!"
멀린의 답변에 사샤의 얼굴이 대번 환해졌다.
"어, 어떻...."
사샤가 다급히 멀린에게 치료법을 물으려는 찰나.
"아가씨!"
문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해를 받은 사샤의 얼굴이 굳어졌다.
하지만 이어진 목소리에 그녀는 문을 열 수밖에 없었다.
"크, 큰일 났습니다. 리카르토 백작이 찾아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