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샤(2)
사샤(2)
새액 새액-
이미 죽었어도 진즉에 죽었을 듯한 몰골을 하고, 레드포드 대공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다만 숨을 내쉴 때마다 그에게서 역한 냄새가 풍겨왔다.
그것은 오랜 시간 병상에 누운 환자에게서 풍기는 냄새였다.
눈조차 뜨지 못하는 아버지를 보고 사샤는 눈물지었다.
그녀가 집사에게 물었다.
"언제부터... 언제부터 이리되신 겁니까?"
"...지난주부터였습니다."
"갑자기 이렇게 안 좋아지신 건가요?"
"예, 지난달까지만 해도 몸이 좀 불편하긴 하실지언정, 일상생활은 가능하셨는데...."
사샤에게 대공의 상황을 알리는 집사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오랜 세월 레드포드 대공가에 충성을 해온 노인.
현 레드포드 대공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모셔온 집사에게 레드포드 대공은 주인이자 자식과도 같았다.
그랬기에 답하는 집사의 목소리는 매우 먹먹했다.
"처음에는 그저 늦잠을 주무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일어나지를 않으셔서."
"하아...."
사샤가 대공의 손을 부여잡고 이마를 맞댔다.
사샤를 따라왔지만, 막상 도울 게 없던 아발론 일행은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잠시 그녀가 아버지와 온기를 나누기를 기다리던 집사가 입을 열었다.
"저... 아가씨? 이분들은?"
집사의 부름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사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카데미 친구들이에요. 메이튼... 이분들 좀 쉴 수 있게 안내해주세요."
"아가씨께서는...."
"저는, 여기 있을게요."
"알겠습니다."
사샤는 다시 침상에 옆에 무릎 꿇고 앉았고, 집사가 아발론 일행에게 다가갔다.
"따라오시지요. 쉴 곳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잠시 사샤를 흘끗 거리 이들은 이곳에서 자신들이 할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집사를 따랐다.
하지만 한 사람만큼은 발이 땅에 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케이가 그를 불렀다.
"탑주님?"
자신을 부르는 케이의 목소리에 멀린은 손을 내저었다.
"먼저 가라. 난 사샤한테 할 말이 있어서."
"...알겠습니다."
케이와 친구들은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집사를 따라 사라지고 홀로 남은 멀린.
그가 문을 닫고 사샤에게 다가갔다.
"사샤."
멀린의 부름에 사샤가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멀린을 뒤돌아보지는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메마른 대공의 얼굴을 향해 있었다.
손을 들어 아버지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사샤.
오래전, 건장했던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제가 태어나자마자 산고로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어요.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자식은 오로지 저 하나뿐이었고, 가문의 많은 이들이 아버지에게 재혼하라고 요구했죠."
아련한 눈으로 아버지를 보며 사샤는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았다.
"하지만 어머니를 지극히 사랑하셨던 아버지는 저를 다른 이의 손에 키우게 하지 않겠다고...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재혼을 거절하셨어요. 저는 그런 아버지의 과분한 사랑을 받으며 자라났죠."
멀린은 사샤의 독백을 가만히 들어주었다.
"레드포드 영지는 할아버지 대에서부터 쇠락의 길을 걸어왔어요. 대공가에 속했던 다수의 귀족이 떨어져 나갔고, 그나마 남은 것도 이 성벽 안의... 척박한 영지뿐이었죠. 다른 귀족에 비하면 많은 것이 부족했던 어린 시절이었지만, 전 그때가 가장 행복했어요. 말괄량이인 저를 보고 기뻐해 주는 영지민과 혼을 내면서도 웃어주는 아버지. 그 모든 게 뚜렷하게 기억나요."
과거를 떠올리며 살짝 미소를 지었던 사샤.
그러던 그녀의 표정이 돌연 어두워졌다.
"그런데 8년 전... 갑자기 아버지가 쓰려지셨어요. 처음에는 그저 단순한 과로인 줄 알았죠. 그만큼 아버지의 업무는 많았으니까요. 그런데... 점점 쓰러지시는 횟수가 늘어갔고, 그제야 이상한 걸 깨달았습니다. 이게 단순한 과로가 아니란 걸."
8년 전이면 사샤가 아카데미에 들어오기 한참 전이었다.
사샤의 나이 고작 9살 무렵.
그때부터였다.
사샤의 삶이 어두워지기 시작한 게.
"아버지께서 쓰러지신 후로 수많은 치료사가 다녀갔어요. 그런데도 아버지의 병세는 나아지기는커녕 점점 더 안 좋아졌죠. 하루하루 말라가는 게 눈에 보일 지경으로요. 그럼에도 아버지는 쉬지 못하셨습니다."
"어째서? 아프면 쉬었어야지."
"레드포드 대공령은 비록 척박한 땅에 자리 잡고 있지만, 기회의 땅이라고도 불렸어요. 저... 혹한의 땅에는 여전히 많은 자원이 묻혀있었고, 레드포드 대공령은 그것을 밑바탕으로 성장해온 곳이었죠."
"......."
"아버지는 자신의 대에서 과거의 영광을 되살리고자 하셨지만... 부질없는 짓이었습니다. 인재는 턱없이 부족하고, 주위 영지들은 레드포드 대공령이 다시 예전과 같은 성세를 되찾길 원하지 않았어요. 그들은 끝없이 우리 영지를 견제해 왔죠."
멀린은 사샤가 전하는 이야기를 진지한 얼굴로 들어줬다.
벌써 2년여를 사샤와 함께했지만, 그녀의 사정을 듣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간 아카데미에서 있었던 일로 보아 대공가에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사샤는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고, 주변에서도 그것을 일부러 들추지 않았다.
멀린 역시 사샤의 사정을 억지로 알아내려 하지 않았다.
바로 지금처럼 사샤가 먼저 알려주기를 기다린 것이다.
"아버지께서 점점 쇠약해지니 주변 영지에서 저에게 혼담이 들어왔어요. 그때 제 나이 고작 10살이었죠. 그런데 웃긴 게 뭔지 아세요?"
"뭐냐?"
"저에게 혼담이 들어온 상대가 태어난 지 고작 한 달 된 아기였다는 겁니다. 말이 안 되는 혼담이었고, 속이 뻔히 보이는 수작이었죠."
당시를 떠올렸는지 사샤가 조소를 지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레드포드의 피를 이은 거는 저뿐이에요. 그런 저를 얻어 레드포드 대공령을 집어삼키겠다는... 뻔히 보이는 수작. 아버지는 당연히 불같이 화를 내시며 혼담을 거절하셨죠. 하지만 아버지가 나날이 약해지는 것을 보고 저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죠."
"그래서 검을 든 거냐?"
"네, 맞아요."
그녀가 굳은살이 박힌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귀족가 영애답지 않은 투박한 손바닥이었다.
"아직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도 우리를 무시해온 그들이...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어떻게 돌변할지 아무도 몰랐기에... 저는 제가 사랑하는 이 땅을 지키기 위해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어요. 다행히 제 재능이 모자라지 않아 실력이 빠르게 늘었죠."
사샤는 재능이라고 했지만, 멀린은 알고 있었다.
그녀의 실력은 재능을 넘어선 노력의 결과란 것을 말이다.
그것을 그녀의 손이 증명해 주고 있었다.
"그렇게 14살이 되던 해, 아버지는 저를 아카데미에 보냈어요. 저는 가지 않으려 했지만, 그런 저를 아버지께서는 억지로 내보내셨죠."
"......."
"당신이 살아 계실 때, 제가 아무런 걱정 없이 세상을 보길 원하셨던 거죠."
아카데미로 출발하기 전날, 14살의 사샤는 가지 않겠다고 억지를 썼었다.
그런 사샤를 곁에 앉히고 대공이 말했다.
'사샤, 어린 애는 어린애다워야 하는 거다. 가서 친구도 좀 사귀고, 연애도 좀 하... 아, 연애는 취소. 아무튼, 네 인생에 14살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아. 제도에 가서 재밌게 놀다 오거라.'
다정다감했던 아버지의 말에 사샤도 더는 억지를 부릴 수 없었다.
다음 날, '연애는 절대 안 된다!'라는 아버지의 신신당부를 들으며 사샤는 제도로 떠났다.
첫 타지 생활은 적응하기 쉽지 않았고, 사샤 역시 적응하려 하지 않았다.
겨우 4년이었다.
4년만 넘기면 그녀는 다시 추운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다.
제도에서의 4년 동안 나약한 마음이 생겨날까, 그녀는 스스로 제약을 걸었다.
고향에서보다 더 검을 휘두르고 육신을 한계까지 몰아붙였다.
그 결과 학년 최강이라 불렸지만, 그녀의 주변에 남은 사람은 없었다.
그러다가 만나게 되었다.
윈스턴과 제플린, 케이.
그리고... 멀린.
비록 얼마 되지 않은 짧은 시간 동안 엮인 인연이었지만, 그들과 함께한 시간은 즐겁고 소중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네요."
사샤의 눈에 아쉬움이 서렸다.
"탑주님과 케이, 윈스턴, 제플린. 모두와 함께한 시간은 정말로 즐거웠어요. 하지만 이제 저는 원래의 제자리로 돌아가야 할 거 같아요. 최소한... 졸업할 때까지는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네가 졸업할 때까지는 끄떡없다고 웃던 아버지는 이제 오랜만에 만난 딸조차 바라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만약 이대로 그가 죽는다면 사샤만이 유일한 대공가의 후계자였다.
그녀는 대공령의 주인으로서 영지를 지켜야 했다.
그것을 위해 그녀가 수년간 노력해 왔지 않은가.
아발론 마탑에 남고 싶었지만, 이제는 정말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대공가의 후계자가 되어야 했다.
그런 사샤의 각오 어린 말을 들으면서 멀린은 피식 웃었다.
"까분다."
"......."
"내가 말했지. 한 번 마탑에 속하면 네가 나가고 싶어도 못 나간다고. 넌 영원히 마탑 식구인 거다. 내가 허락해주지 않는 한."
"탑주님...."
"그리고 나는 널 탑에서 내보낼 생각이 없다."
"하지만요, 탑주님."
"이 얘기는 다음에 다시 하고... 그전에 뭐 하나만 물어보자."
"...말씀하세요."
"대공... 그러니까 네 아버지가 쓰러진 게 8년 전이라고?"
"예."
"그때 증상이 어땠는지 기억나냐?"
멀린의 물음에 사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를 리가요."
"혹시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식은땀이 나고, 무기력증이 있던?"
"예. ...그걸 어찌?"
멀린의 말에 사샤가 살짝 놀란 얼굴을 해 보였다.
그가 말한 증상은 8년 전 처음 발병했을 당시 아버지가 겪은 증상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사샤의 반응에 멀린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멀린의 말이 이어졌다.
"처음에는 몇 달에 한 번, 그다음에는 한 달에 한 번. 차츰 기절하는 주기가 짧아졌고?"
"예."
"거기에 기절 횟수가 거듭될수록 기절해 있는 시간도 길어졌을 텐데?"
"마, 맞아요."
멀린의 물음에 사샤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녀는 직감했다.
지금 멀린이 물어보는 게 단순히 자신을 떠보는 것이 아님을.
그가 무언가를 알아차렸음을 말이다.
혹시나 하는 심정이... 없어진 줄 알았던 희망이란 단어가 그녀의 가슴속에서 서서히 피어올랐다.
멀린이라면... 탑주님이라면.
무언가를 알지 모른다는 그런 기대감 말이다.
그런 제자의 기대감 어린 눈빛 속에 멀린은 말했다.
"손톱과 발톱도 자주 빠졌을 거야.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 말한 멀린이 성큼성큼 대공에게 다가왔다.
그는 잠든 대공의 이불을 걷어치웠다.
그러자 앙상하게 마른 팔다리가 드러났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멀린은 대공의 웃옷을 벗겼다.
그러자 드러난 대공의 상체,
이를 본 멀린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이렇게 심장 어림에 검은 거미줄 자국이 생겨나지."
"......!"
사샤는 아버지의 가슴에 생긴 거미줄 같은 검은 핏줄에 입을 틀어막았다.
이는 그녀 역시 처음 보는 것이었다.
"아아!"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대공.
아버지가 딸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을 알아버린 사샤는 가슴 속에서 무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겨우겨우 울음을 억누른 사샤가 물었다.
"이게... 이게 뭔가요?"
"'마나독'이란 거다."
"마나독?"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일정량의 마나를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난다. 마나독은 그런 선천적 마나를 갉아 먹는 독이고."
"하, 하지만... 그 어떤 치료사도 독이란 소리는...."
"당연히 모를 수밖에. 마법이 사라진 시대에 이걸 알아볼 놈이 누가 있을까."
"그게... 무슨?"
눈을 동그랗게 뜬 사샤를 본 멀린의 입가에 삐뚜름한 미소가 걸렸다.
"마나독은 진짜로 독이라기보다는 저주에 가까운 거다."
그가 말을 덧붙였다.
"때문에 이 마나독은... 마법사만 쓸 수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