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륜이 담긴 구라(1)
연륜이 담긴 구라(1)
감찰부가 멀린을 찾기 1시간 전.
황궁으로 돌아온 황제는 관련 관직을 지닌 귀족들을 전부 소집했다.
옥좌에 앉은 그의 얼굴은 불과 몇 시간 만에 무척이나 초췌하게 변해 있었다.
보고도 믿지 못할 상식 밖의 일을 마주했기 때문이었다.
'어찌....'
황제의 머릿속에 끊임없이 의문이 떠돌았다.
대체 어떻게?
그 거대한 시리우스 호가 감쪽같이 사라질 수 있단 말인가?
수많은 연구원의 증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직접 본 게 아니었다면 도저히 믿지 못했을 일이었다.
입술을 질끈 깨문 황제가 옆에 근위대에게 물었다.
"소장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더냐?"
"그렇사옵니다. 마신 술의 양이 워낙 많은지라.... 내일은 되어야지 정신을 차릴 듯싶습니다."
시리우스의 소실을 깨달은 황제는 다급히 소장을 찾았지만, 소장은 연구소에 자리하지 않았다.
근위대를 풀어 소장의 행방을 수색하길 30분여.
찾던 소장은 물론 부소장까지 술에 절어 근위대에 업혀 왔다.
사람조차 못 알아볼 정도로 인사불성이 된 그들의 상태에 황제는 골머리를 앓았다.
"이럴 때!"
소장이 무엇 때문에 술을 퍼마신 것이지 이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답답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소집된 귀족들은 황제의 불편한 심기에 눈치를 보아야 했다.
그러던 중 황제의 뇌리에 한 인물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를 떠올린 황제가 다급히 외쳤다.
"당장... 당장 가서 감찰부에 수감 된 멀린이란 아이를 데려오거라!"
황제의 명령에 다시금 근위대가 바빠졌다.
'어쩌면 그 아이라면... 알고 있을지 모른다.'
감옥에 갇힌 전(前) 수석 연구원.
그리고 공간과 공간을 연결하는 기적과도 같은 연구를 선보인 천재.
그라면 어쩌면 이번 사태에 관해 답을 구할 수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필....'
황제도 멀린이 감옥에 갇히게 된 경위를 잘 알고 있었다.
황제도 나름 조사를 해보았다.
감찰부에서 멀린에게 씌운 죄목은 마나석 횡령.
하지만 그것은 명백하게 누명이었다.
연구소의 마나석이 사라진 것은 교단의 습격이 있던 날, 그 단 하루뿐이었다.
사라진 수톤(t)에 달하는 마나석을 단 멀린 한 명이 챙긴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다.
감찰부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멀린을 잡아 들일 죄목이 필요했기에 내부고발자라는 조작된 존재를 만들어 냈다.
오로지 멀린을 연구소에서 찍어내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 이유를 과연 당사자가 모를까?
또한, 그렇게 억울한 누명을 쓴 이가 제국의 도움 요청에 응할 것인가?
황제가 생각해도 아니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이에 황제가 소리쳤다.
"최대한... 그 소년을 정중하게 데려오거라!"
한시가 급한 이 순간.
소장과 부소장이 언제 술에서 깰지 모르는 상황에서, 현재 황제가 기대를 걸 수 있는 이는 멀린뿐이었다.
그렇게 황궁에서 감찰부로 사람이 급파됐다.
"후우...."
황제의 두 눈에 착잡함이 감돌았다.
그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어디서...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단 말인가?"
황제의 머릿속, 사건의 실타래가 복잡하게 얽혀들었다.
***
"싫은데요."
차가운 멀린의 답변에 그를 찾아왔던 이들이 당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지금껏 감찰부 생활을 해오면서 감옥에서 꺼내려 한 사람 중 이토록 단호하게 거절을 한 이는 없었다.
그들은 그저 감옥에서 나와 밖으로 가는 것만으로도 기뻐했었다.
"뭐?"
당황한 감찰부 놈들을 보며 멀린은 그냥 감옥 바닥에 드러누워 버렸다.
그리고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할 말 없으니, 그냥 가세요."
"나오거라...."
"왜?"
"자세한 이유는 묻지 말고 얼른 나오거라!"
심드렁한 멀린을 보며 기어코 사내가 목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그러나 멀린이 누구던가.
결코, 이 정도에 굴할 사나이가 아니었다.
그는 되려 사내에게 등을 돌렸다.
그러고는 들으라는 듯 궁시렁거렸다.
"웃기고 있네. 누명을 씌워서 끌고 올 때는 언제고 이제는 이유 따위는 알려 줄 수 없으니 그냥 나와라?"
"......."
"됐고. 꺼져. 난 그냥 여기서 썩어 죽을 테니까."
존대 따위는 진즉에 때려치웠다.
그의 목소리는 나긋했고 삶의 의욕은 없었다.
멀린은 자신의 '연기'에 매우 흡족했다.
'감정 전달력 죽이고!'
지금 멀린의 모습은 전형적인 배신당한 천재였다.
한창 꿈을 꿀 젊은 나이에 당한 모략에 좌절하여, 삶을 포기한 젊디젊은 천재.
멀린이 보인 연기에 감찰부 사내는 골머리를 앓았다.
'젠장!'
감찰부의 팀장인 그가 직접 감옥을 찾은 이유가 무엇이던가.
황제의 엄명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멀린이란 아이에게 협조를 구해라!]
황제의 명령에서 중요한 점은 저 어린 것을 '강행'하는 게 아니라 '협조'를 얻으라는 점이었다.
국립연구소에서 일어난 초유의 사태.
아무리 감찰부가 속한 공작파가 황제와 대립한다고는 하나 공작들 역시 제국에 속한 이였다.
시리우스 호가 황제의 손에 들어가는 것이 마음에 안 들뿐, 시리우스 호 자체가 제국에 가져다주는 이득에 대해서는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기를 쓰고 시리우스 호 사업에 손을 뻗으려 한 것이다.
시리우스 호의 증발은 공작들에게도 초유의 사태였다.
이에 감찰부 발등에 불똥이 떨어진 것이다.
감찰부의 팀장은 자신에게 등을 돌린 소년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지 말고... 나오거라."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간곡한 애원조였다.
멀린을 끌고 갈 수 없으니 이렇게라도 부탁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여전히 반응이 없는 멀린을 보며 감찰부 팀장이 추가 설명을 이어붙였다.
"이번 일만 잘 협조해준다면 폐하께서 널 사면 시켜 주실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아무런 흥미도 보이지 않던 멀린이 협조와 사면이란 말에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리고 슬그머니 일어나 등을 돌리고 앉았다.
멀린이 감찰부 팀장을 곧게 바라보며 물었다.
"협조? 사면?"
"그렇다."
"아무 죄 없는 사람을 여기다 처박아 둘 때는 언제고, 사면? 그거 죄지은 사람을 풀어줄 때 하는 말 아닌가?"
"......."
멀린의 지적에 답을 찾지 못한 감찰부 사내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애써 가라앉혔다.
그 모습을 보고 멀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쯤 긁었으면 됐다. 더 긁으면 역효과 나겠네.'
칠 땐 치고, 빠질 땐 빠진다.
연기에도 적당한 완급조절이 필요했다.
멀린이 툭툭 엉덩이를 털며 말했다.
"좋아, 가자고. 대체 뭐 때문에 영원히 감옥에 처박아둘 줄 알았던 날 찾아와서 이 난리인지 궁금하니까."
"......."
"뭐해? 앞장서."
주객이 전도된 상황.
감찰부 사람들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멀린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누구도 멀린에게 뭐라 하는 이는 없었다.
그가 이렇게 순순히 따라와 준다는 사실 자체가 감지덕지였으니 말이다.
***
감찰부는 멀린을 데리고 그대로 황궁으로 향했다.
멀린이 도착한 곳은 황궁 대신들의 회의가 열리는 곳.
수많은 귀족과 황제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멀린이 등장했다.
꾀죄죄한 몰골로 등장한 그를 보고 귀족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반면 황제는 멀린을 반겼다.
"어서 오거라."
황제의 환대에도 멀린은 아무런 예도 취하지 않았다.
그저 멀뚱히 그를 바라볼 뿐.
발칙한 그의 모습에 근위기사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경고를 주기 위해서였다.
"되었다."
황제가 손을 들어 근위기사를 막았다.
근위기사는 황제에게 고개를 숙이고 뒤로 물러났지만, 여전히 멀린을 매서운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사뭇 날카로운 분위기 속에 황제가 입을 열었다.
"잘 지냈느냐."
"예. 하루 한 끼 꼬박꼬박 나오는 어두컴컴한 곳에서 숨만 쉬면서 잘 지냈습니다."
말 속에 뼈가 있었다.
불손한 멀린의 태도에도 황제는 침착함을 유지하며 질문을 던졌다.
"너에게 물을 것이 있다."
"뭡니까?"
당돌한 멀린의 답변에 황제가 눈짓했다.
한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연구원이 지금까지 일어난 상황을 멀린에게 전달했다.
"...음."
상황을 전달받는 멀린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알고있어도 모른 척.
멀린은 처음 듣는 소리라는 듯 연구원의 이야기를 끊지 않고 경청했다.
연구원의 이야기가 다 끝났을 때 멀린은 피식거렸다.
"아아, 왜 저를 불렀는지 대충 감이 오네요. 그러니까... 저보고 시리우스가 왜 사라졌는지 알아내라는 겁니까?"
"그렇다."
황제의 되물음에 멀린은 작게 심호흡을 했다.
지금부터가 중요했다.
이제까지의 연기는 그저 맛보기에 불과할 뿐.
상대를 속이려면 연기 속에 혼과 연륜을 담아야 했다.
순식간에 기도가 바뀐 멀린이 입을 열었다.
"불가능합니다."
"...뭐?"
"인간이 한 일이 아닌 것을 어찌 알아낸단 말이냐."
"그게... 무슨 소리더냐."
황제는 물론 주변의 귀족들도 놀라 수군거렸다.
그 속에서 멀린은 침착함을 유지해나갔다.
"일전 제가 선보인 시연을 기억하십니까?"
"...기억한다."
잊을 리가 없었다.
평생을 통틀어 그때만큼 신비로움을 경험했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실상 황제가 멀린을 불러들인 것도 그 때문이었다.
갑자기 사라진 시리우스 호.
그것이 어쩌면 멀린이 보인 연구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약간의 의심 때문에 말이다.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 속에 멀린이 입을 열었다.
"그처럼 한 사람을 옮기는 그 작은 공간을 열기 위해 들어간 마나석이 수백 개입니다. 시리우스 호처럼 커다란 구조물을 옮기기 위해 들어갈 마나석이 몇 개일 것 같습니까? 단언컨대 현재 연구소에 남아있는 마나석을 전부 때려 붓는다고 해도 그 정도 크기의 공간을 만들어 내지 못할 것입니다"
물론 거짓이다.
차원문의 크기에 마나량이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은 마나로도 시리우스 호를 통과시킬 거대한 워프 게이트를 만들 수는 있었다.
멀린이라면 말이다.
"시리우스가 빛을 내며 그대로 사라졌다고 했습니까? 그게 무슨 현상인지 저도 파악이 안 되는군요."
모를 리가 있겠나.
연구원들을 갈아 넣어 이번 일을 준비한 게 자신인데.
"시리우스 호를 사라지게 하는 기술은 현재 연구소의 기술력으로 구현해 낼 수 없습니다. 기술도 기술이겠거니와 그 많은 마나를 어찌 인간이 감당한단 말입니까? 혹여... 신이 존재한다면 모를까."
멀린의 설명에 황제는 미심쩍은 눈으로 물었다.
"정녕... 감옥에 있다가 온 것이 맞느냐?"
"지금 그게 방금 감옥에서 끌려 나온 사람에게 할 소립니까?"
"......."
황제가 멀린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렇군.... 알겠다. 내 너에게 이번 일의 조사에 대한 전권을 맡기겠다. 너는 책임지고 이 일을 밝혀내거라. 그리하면 내 너의 죄를 모두 용서하여 복직시켜 주겠노라."
황제의 이야기에 그 자리에 자리했던 황태자의 얼굴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자신이 뺨을 맞아가며 겨우 감옥에 처넣은 놈이 다시 풀려난다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도 어쩔 수 없었다.
더는 황제의 심기를 거스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만은 어쩔 수 없다고.
황태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멀린의 다음 답변이 이어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멀린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싫습니다."
"...뭐?"
정면에서 자신의 명령을 거역하는 멀린의 행태에 황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멀린은 제 할 말을 했다.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
"전 싫으니 그냥 감옥으로 돌려 보내주십쇼."
"네 이놈!"
멀린의 행동에 공작 중 한 명이 노성을 터트렸다.
얼굴에 날아와 박히는 수십 쌍의 분노한 눈길에도 멀린은 덤덤했다.
혼이 담긴 연기가 좌중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까놓고 말합시다. 제가 죄를 지었습니까? 진짜 그리 생각하셔서 저를 감옥에 처넣으셨습니까?"
"......."
"제 의지를... 미약하게 날아보고자 하는 날개를 꺾은 건 폐하십니다. 날개가 부러진 제가 무얼 할 수 있겠습니까? 무얼 위해 연구소에 돌아가야 하는 겁니까?"
나이답지 않은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에 황제는 공감할 수 있었다.
자신 역시 오래전 득세하는 귀족들 사이에서 의지가 꺾일 뻔하지 않았던가.
멀린의 연기가 황제의 공감을 끌어냈다.
황제가 아무런 말도 없이 자신을 바라보자 멀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리 말했는데도 보내주지 않으실 겁니까?"
그리 말한 멀린이 주변을 쓱 둘러보다 황태자에게서 시선이 멈췄다.
"감옥에서 끊임없이 생각했습니다. 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런 일을 겪어야 할까. 그리고 폐하께서는 왜 침묵하실까."
멀린의 비릿한 목소리가 모든 이에게 쏙쏙 들어박혔다.
"생각하고 생각하다가 한 가지 결론을 내렸습니다."
멀린의 두 눈에 살기가 감돌았다.
여전히 황태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멀린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너지? 날 감옥에 처박은 게."
"......?!"
경어를 생략한 멀린에게 모두가 경악했다.
그가 말을 걸고 있는 상대가 누구던가.
무려 황태자였다.
좌중이 경악에 휩싸였지만, 멀린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더 나아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네놈밖에 없어. 공작들을 움직일 힘에 폐하가 침묵해야만 할 이유."
"너, 너...."
"왜 그랬을까? 도대체 내가 너에게 뭘 얼마나 밉보였기에 이딴 짓을 벌였을까? 그리 생각해 봤지. 한 가지 결론이 나더라고."
"......."
"질투."
"......."
"쯧. 옹졸한 놈 같으니라고. 세상에서 가장 많은 것을 가지고 태어난 놈이 뭐가 아쉬워서 나 같은 것을 질투하냐."
"다, 닥쳐라!"
황태자가 얼굴이 시뻘게져 소리쳤지만, 이미 멀린은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이제 황제를 향했다.
"폐하, 잘 생각하세요. 과연 진정으로 이 나라의 미래를 저런 놈에게 맡기는 것이 옳은 일인지 말입니다."
고작 평민 따위가 황족을 모욕한 경악스러운 사건이었다.
개운한 표정을 지은 멀린이 황제에게 물었다.
"자, 이쯤 하면 되었겠죠? 아니면 더 해야 하는 겁니까? 황족 모욕이면 충분히 감옥으로 되돌아갈 만하지 않습니까? 아니면......."
멀린의 눈에 도발적인 기운이 스며들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제 목을 치시렵니까?"
그 물음에 황제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