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보자 이거지?(3)
해보자 이거지?(3)
철썩-
무자비하게 날아든 손바닥에 황태자의 얼굴이 우로 돌아갔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황태자의 좌측 뺨.
제국에서 황태자의 얼굴에 손을 댈 이는 단 한 명뿐이었다.
"네 이놈!"
황태자는 노성을 토해내는 황제를 보며 슬며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런 자식의 반응에 황제는 더욱 분노했다.
"지금 네놈이 무슨 짓을 벌인 건지 알고 있느냐!"
"......."
황태자는 답이 없었다.
그저 섭섭하고 답답한 눈으로 황제를 바라볼 뿐이었다.
하지만 진노한 황제는 그런 것을 헤아려 주지 않았다.
"도대체 네가 생각이 있는 게냐 없는 게냐!"
황제의 거듭되는 노성에 다물려 있던 황태자의 입이 열렸다.
"고작... 고작 평민 하나 잡아넣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어찌 이토록 화를 내시는 겁니까?"
"...허."
황태자의 말에 황제가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지금 네가 할 소리가 진정 그뿐이더냐?"
"전... 폐하께서... 아니, 아바마마께서 어찌 평민 따위에게 그토록 관심을 주시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의 독백 같은 물음에 황제의 눈에서 불이 뿜어져 나왔다.
'이, 이놈이!'
이미 황태자의 상태는 보고를 받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이 없다 하여도 설마 일을 저지를까 싶었는데....
그 설마가 자신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한 황제였다.
황제가 으르렁거렸다.
"고작 그런 이유로... 감찰부를 움직였단 말이냐!"
황제가 이토록 화를 내는 이유는 황태자가 멀린을 잡아들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멀린을 잡아들인 과정이 문제였다.
제국의 감찰부.
이는 귀족이 주축이 되어 황실과 여러 이권단체를 조사하는 기관이었다.
그런 감찰부의 수장은 다름 아닌 4대 공작이었다.
황실이 변질하는 것을 막기 위해 초대 황제가 귀족들에게 부여해준 칼.
시간이 흐르며 감찰부는 황실을 견제하는 공작파의 대표적인 힘이 되었다.
그리고 황태자가 한 일은 언제든지 황실을 물어뜯을 작정을 하고 있던 공작들에게 씹을 거리를 내주는 일이었다.
황제가 어찌 분노하지 않겠는가.
"그래, 너의 말처럼 고작 평민이다. 그런데 너는 고작 그런 평민 따위를 어찌해보려고 황실의 힘을 깎아 먹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공작들과 충분히 이야기된...."
"무엇이 충분하단 말이냐!"
"......."
"고작 이런 일에 감찰부를 움직인 그놈들이 대체 뭘 요구할지 알고 그리 말한단 말이냐!"
"과한 것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그저...."
"뭐라?!"
황제가 놀란 눈으로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황태자의 저 말은 이미 거래가 끝났다는 소리였다.
놀란 황제가 재촉하듯 물었다.
"무엇이냐. 이 일을 통해 저들에게 무엇을 내주기로 했느냐?!"
"저, 정말로 별거 아닙니다. 그저... 국립 연구소에 그들의 사람 몇을 넣어 주는 것으로...."
"너, 너."
황제의 얼굴이 붉어졌다.
자신이 내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태연한 얼굴을 한 자식놈을 보고 있자니 뒷목이 뻣뻣해졌다.
"끄윽...."
"폐, 폐하!"
휘청거리는 황제를 향해 황태자가 달려들었다.
그러나 황제는 자식의 부축을 매몰차게 뿌리쳤다.
황제가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이 멍청한 놈!"
"예...?"
"고작 이딴 일로 그간 아비가 지켜온 것을 무너트리다니!"
"그게 무슨...."
황제가 답답하다는 눈으로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시리우스 호 사업과 이를 진행하는 기관인 국립 연구소를 제어하는 곳은 황실이었다.
수많은 귀족이 시리우스 호 사업에 손을 뻗어 왔지만, 황제는 그 어떤 귀족도 끼어들지 못하게 선을 그어왔었다.
"이 멍청한 놈... 어찌... 어찌 깨닫지 못한 것이냐."
"......."
"시리우스가 단지 국제적인 외압에서 벗어나고자 만드는 건 줄 알았더냐?"
"그럼...."
"시리우스는 제국의 힘이기 이전에 황실의 힘이다! 타국을 견제하는 용도일 뿐 아니라 호시탐탐 황실을 노리는 귀족 놈들을 견제할 힘이었단 말이다!"
"......?!"
오랜 시간 시리우스를 위해 고군분투해온 황제의 고백에 황태자가 놀란 눈을 해 보였다.
"그, 그게 무슨...."
처음 듣는 소리이자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생각이었다.
그제야 황태자는 어째서 황제가 독단으로 시리우스 사업을 진행했고, 다른 귀족들을 전부 배제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황제는 현재의 황실은 물론이거니와 다음 대의 황제, 그 후대까지 내다보고 황실의 힘을 키울 작정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황제의 계획을 황태자인 자신이 망쳐버린 것이다.
놀라 넋이 나간 황태자가 말을 더듬었다.
"어, 어찌... 어찌 그것을 말씀해 주지 않으신 겁니까?!"
"언제까지...."
황제는 슬픔과 분노가 담긴 눈으로 자식을 바라보았다.
"언제까지 내가 모든 것을 일일이 설명해 주어야 하는 게냐?"
"......."
"내가 어찌 그 평민 소년을 총애했냐고 물었더냐? ...이러해서였다."
"......."
"내가 너에게 바라온 것들을 그 소년이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왜 너는 고작 코앞의 것밖에 보지 못하느냐! 왜 그 이상의 것을 생각하려 하지 않느냔 말이다!"
"아...."
"그 좁은 시야로! 어찌 이 거대한 제국을 운영할 생각이더냐!"
"......."
황태자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러했던가....'
으레 자식들이 이상적인 아버지의 상을 그리듯 황제, 그의 아버지 역시 평민 소년에게서 이상적인 자식의 상을 보고 있던 것이다.
황제는 허탈한 눈으로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내가 너에게 과한 것을 원했더냐."
"...아닙니다."
"네가 모든 것을 망쳐버렸구나."
30년 전이었다.
나날이 득세하는 귀족 세력과 축소되어가는 황실의 힘.
그 모습을 지켜보며 자라난 황제는 강한 황권을 꿈꾸게 되었다.
아니, 최소한 귀족들의 세력과 대등한 힘을 황실이 지니길 원했다.
오랜 시간 강구하던 일이 최근 들어서야 겨우 가시거리에 들어왔건만....
잘못 가르친 자식 놈의 실수로 그 오랜 노력이 허무하게 무너졌다.
'하아....'
만약 이대로 공작들이 국립 연구소에 그들의 사람을 심는다면 시리우스 호 사업이 난관에 봉착할 것이다.
이제 완공이 얼마 남지 않은 시리우스 호.
귀족들이 너도나도 시리우스 호에서 이권을 빼먹으려고 쳐댈 분탕질에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이를 어찌한단 말인가....'
이대로 없는 것으로 하기에는 황태자가 걸렸다.
황태자가 제 이름을 걸고 약속하였기에 공작들이 감찰부를 움직였다.
아무리 물밑에서 오간 거래일지라도 황태자의 말을 무시해 버린다면 귀족들이 이를 빌미로 황실을 물어뜯을 것이다.
'...앞으로 황태자의 말에 신뢰할 수 없다며 황실을 비하할 테지.'
황족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신뢰와 힘이 담겨야 했다.
그런데 이를 황제인 자신이 무시해 버린다면 귀족들조차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후우...."
황제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는 건가....'
이대로 황태자의 실수가 드러나면 이 또한 귀족들에게 좋은 빌미를 제공해 줄 것이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황태자의 실수를 실수가 아닌 것으로 바꿔야 했다.
'덮어야 하는가....'
황태자가 멀린이란 수석 연구원을 잡아들인 것이 그의 독단이 아닌 황실의 의지였다는 것으로 둔갑 시켜야 한다.
나아가 이 상황을 황실에 유리하게 이용해야만 했다.
'어찌 보면 다른 이가 아니라 그 아이를 잡아들인 것이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구나.'
황제는 황궁 연회에서 멀린이 파웰스 백작을 쳐낸 것을 기억해냈다.
파웰스 백작은 공작파에 꽤 영향이 있는 자였다.
그를 찍어내며 공작파와의 관계가 뒤틀어졌었다.
원래라면 이를 개선할 생각 따위는 없었지만....
'녀석을 잡아들인 것은 그에 대한 화해라고 하면 되겠구나.'
멀린을 잡아들인 것은 공작파에 건네는 화해로 포장해야 했다.
황태자의 실수를 의도된 계획으로 탈바꿈시켜서 최대한 이점을 가져가야만 했다.
대충 계산이 선 황제가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에게 또 다른 형제가 없다는 것을 다행으로 알아야 할 것이다."
"......."
만일 너에게 형제가 있었다면 황태자 자리는 너의 것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황제의 경고에 황태자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돌아가서 자숙하거라. 내 허락 없이 궁을 벗어나서는 안 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또한, 네 총기를 흐린 그 아이도 이제 그만 내보낼 것이다."
"폐, 폐하!"
"닥치거라!"
비비안을 내보내겠다는 황제의 말에 황태자가 놀라 소리쳤다.
그러나 황제의 싸늘한 눈빛에 입을 다물어야 했다.
"더는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말거라. 그나마 너에게 주어진 자리마저 보존하고 싶거든."
"......."
"마지막이다. 이번이 정말로 마지막이다. 이 이상 나를 분노케 한다면... 내 양자를 들여서라도 너를 쳐낼 것이다."
"......?!"
"돌아가라. 꼴도 보기 싫으니."
"아, 알겠습니다."
황제의 살기 넘치는 경고에 황태자가 고개를 바짝 숙이고 물러났다.
그 모습 어디에서도 다음 대 황제가 되어야 할 이의 기개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분노가 가신 황제의 눈에 씁쓸함이 감돌았다.
"허... 다 내 잘못이구나."
사별한 황비를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유일한 자식을 싸고돌았다.
점점 제멋대로 구는 아들을 바로잡으려 했으나 이미 모든 것이 늦어버린 뒤였다.
"하아... 아깝구나. 제국의 동량이 될 아이였는데."
황제는 총기 넘치던 멀린을 떠올렸다.
저 녀석이 황태자였으면 싶을 정도로 마음에 쏙 들던 아이.
하지만 이제 다시는 볼 일이 없을 아이였다.
"어쩔 수 없구나."
한 제국의 황제이기 이전에 그 역시도 아버지.
아무리 자식이 못났다고 해도 남의 자식보다는 제 자식을 향해 팔이 굽는 법이었다.
그렇게 황제는 멀린을 기억에서 지우기로 결정했다.
***
난데없이 끌려온 멀린은 그대로 지하 감옥에 투옥됐다.
어이가 없어진 멀린이 소리쳤다.
"야, 이건 무슨 조사도 안 하냐? 다짜고짜 감옥행이 무슨 경우냐고!"
그러나 그의 외침에도 사내들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그대로 감옥을 빠져나갔다.
그들의 뒤통수를 보며 멀린은 고민했다.
'증거가... 나왔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 정도로 일 처리가 빨라지려면 확실한 증거가 나왔어야 했다.
"이건 뭐... 누가 설명해 줄 사람도 없고."
멀린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감옥의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일단은 좀... 기다려 볼까?"
나갈 땐 나가더라도 상황이 어찌 된 것인지 파악을 해야지 않겠는가.
그렇게 결론을 지은 멀린은 감옥이 제 안방이라도 되는 양 편히 드러누웠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덜컥-
감옥의 입구가 활짝 열렸다.
"머, 멀린아!"
열린 문 사이로 들어온 이는 다름 아닌 부소장이었다.
그는 후다닥 달려와 감옥의 쇠창살을 부여잡았다.
"아이고! 얼마나... 고생 많았누?"
멀린은 갑자기 나타나 자신을 걱정하는 부소장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뭐지?'
만약 정말로 마나석을 빼돌린 게 걸렸다면 부소장이 자신을 걱정할 리 없었다.
되려 널 믿었는데 이렇게 뒤통수를 치냐고 역정을 내어야 했다.
걱정스러움이 가득 담긴 부소장을 보며 멀린이 스리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함께 조심스럽게 부소장을 떠보았다.
"어떻게 된 겁니까?"
넌지시 던져진 질문.
그의 물음에 부소장이 이를 갈며 답했다.
으득-
"더러운 공작 놈들이 수작질을 부렸다."
"...네?"
영문을 몰라 되물으니 노한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며칠 전 갑자기 감찰부에서 쳐들어와서 내부 고발이 있었다며 장부를 싹 긁어갔다. 그리고 마나석이 비는 걸 빌미로 압박을 넣더구나."
"어?"
"마나석 소실이 그 의문의 습격 날 일어난 걸 연구소에서 모르는 놈이 어디겠느냐. 그런데 문제는 그 찢어 죽일 내부고발자 녀석이 마나석 횡령 혐의로 널 지목했다는 거다."
"...그 내부고발자가 누굽니까?"
"모른다. 감찰부에서도 내부고발자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알려주지 않고 있어."
부소장이 전해준 소식에 되레 멀린이 화색을 지었다.
'어... 그러니까. 나 안 들킨 거네?'
그는 자신의 완전 범죄가 들통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살짝 기뻐했다.
그러나 환했던 멀린의 표정은 이내 딱딱하게 굳어졌다.
잊고 있던 중대한 사실이 떠오른 것이다.
"잠깐... 그러니까 그 소리는 다시 말해서...."
"응?"
"저, 누명 썼다는 거네요?"
비록 누명 같지 않은 누명이었지만, 멀린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누명이었다.
그의 물음에 부소장이 애통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됐구나. 그래도 너무 걱정 말거라. 지금 형님과 내가 어떻게든 널 빼내려고 하고 있으니, 곧 풀려날 거다."
"......."
부소장의 위로에도 멀린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때 감옥 밖에서 초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간 됐습니다. 나오십쇼!"
"이런... 다음에 다시 오마. 아니, 다음에는 밖에서 보자꾸나!"
그 말을 끝으로 부소장이 감옥을 벗어났다.
그렇게 다시 홀로 남게 된 멀린.
그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내 살다 살다 누명을 써보긴 처음이네."
누군가한테 누명을 씌운 적은 있어도 자신이 당하기는 처음이었다.
신선한 느낌이 들었던 것도 잠시.
"하... 이것들이 지금 해보자는 거지?"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멀린에게서 스산한 살기 뿜어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