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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서클 직전에 환생-94화 (94/191)

과거의 인연(1) - 4권 끝

과거의 인연(1)

"큭...."

자신을 멀뚱히 바라보는 멀린의 모습에 황제는 참을 수 없는 즐거움을 느꼈다.

"크하하하!"

기어코 황제가 대소를 터트렸다.

그와 같은 모습에 귀족들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국정을 볼 때나 황궁 행사, 심지어 황태자가 태어났을 때도 황제가 이런 웃음을 보인 적은 없었다.

시원하게 웃음을 토해낸 황제가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암, 그래야지. 정당한 내기에서 이겼는데 그에 따른 보상이 있어야지."

황제는 멀린이 어지간히 마음에 든 눈치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파웰스 백작은 공작파에서 제법 중요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백작의 인맥도 인맥이거니와 그가 운영하는 각종 사업장의 수입이 공작파에 흘러 들어갔다.

그런 파웰스 백작을 이토록 손쉽게 쳐낼 수 있었으니 황제로서는 제법 득이 되는 상황이었고, 이를 유도한 멀린이 어찌 이뻐 보이지 않을 수 있으랴.

"그래, 파웰스 백작의 재산을 회수 조치하면서 너에게 200만 골드를 반드시 넘겨 주겠다."

"감사합니다."

200만 골드가 넘어온다는 소리에 멀린이 잽싸게 고개를 숙였다.

그랜드 마스터 앞에서도 꼿꼿하게 서 있던 고개가 돈 앞에서 너무도 쉽게 수그러들었다.

드워프의 왕 거핀이 보면 기가 찰 노릇이었다.

하지만 어쩌랴.

그게 멀린인 것을.

고개 숙인 멀린이 희희낙락하고 있었는데, 황제의 말은 끝난 게 아니었다.

"흐음... 너의 공이 이토록 큰데 고작 200만 골드로 끝을 낼 수는 없겠지. 보자... 무엇을 주면 좋을까."

200만 골드에 덤까지 얹어주겠다는 말에 멀린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황제는 멀린에게 무엇을 줄지 고민했다.

곧 그가 결정을 내렸다.

"그래, 그게 좋겠구나."

"무엇입니까?"

"파웰스 백작가가 아카데미 운영에서 물러나고 아카데미의 모든 운영을 황실에서 도맡아 할 것이다."

"......?"

"말일 그렇게 된다면 아카데미 운영 지분 중 10%를 너에게 주도록 하마."

황제의 제안에 연회장 곳곳으로 놀라움이 번져나갔다.

황제는 지금 황실 산하기관의 운영권 중 일부를 17살짜리 소년에게 주겠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이를 들은 멀린의 얼굴을 그다지 좋지 못했다.

"저... 질문이 있습니다."

"질문이라... 해보거라."

"그... 운영 지분이란 걸 받으면, 저도 무언가를 해야 하는 겁니까?"

멀린의 말에 황제는 또다시 기꺼운 웃음을 터트렸다.

멀린이 무엇을 꺼리고 있는지 단번에 알아차린 것이다.

"흐하하! 걱정 말거라. 아카데미 운영은 황실에서 주관할 것이다. 물론 운영 지분 10% 정도면 충분히 아카데미 행사에 관여할 수 있겠지만... 그리 할 테냐?"

"아뇨. 절대 안 할 겁니다."

내가 미쳤다고?

멀린은 정색했다.

지금 연구소에 불려 나가는 것만 해도 고역이었다.

만약 아카데미에 있는 아발론 일행이 아니었다면 제국의 수도고 나발이고 진즉에 떠났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연구소 말고 혹이 하나 더 붙는 일은 멀린 쪽에서 사양이었다.

그런 멀린의 생각을 짐작한 것인지 황제가 말했다.

"그렇다면 문제 될 건 없다. 넌 그저 운영 지분만큼 아카데미에서 나오는 수익만 받아 가면 되는 것이다."

"...다달이... 말입니까?"

"그렇다. 다달이."

"......?!"

의무는 없지만, 권리와 이익은 있는 아주 행복한 상황.

멀린의 입이 좌우로 쭈욱 찢어졌다.

그저 가만히 있어도 돈이 알아서 주머니에 들어온단다.

세상에 공짜만큼 좋은 것이 또 있겠나.

멀린이 냉큼 고개를 숙였다.

"황제 폐하의 높고 높은 자비와 하해와 같은 은혜에 깊이 감사드리옵니다!"

멀린의 머리가 지면에 닿을 듯 꺼졌다.

그가 그러는 모습을 처음 본 아발론 일동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반면, 주변의 귀족들은 그런 멀린을 예의 주시했다.

'고작 17살에 아카데미 운영 지분 10%라....'

'평민이라고 무시할 수준이 아니다.... 당장이라도 폐하께서 단승 작위를 내리면 귀족이 될 아이다.'

눈에 보이는 황제의 총애.

절대자의 관심을 한몸에 받는 17살의 어린 소년은 귀족들에게 흥미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파웰스 백작이 황제의 눈 밖에 나 내쳐진 게 불과 조금 전이었지만, 이제 이를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모두가 멀린만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만큼 멀린의 등장이 파격적이고 충격적이었다는 소리였다.

좀처럼 고개를 들지 않는 멀린을 바라보던 황제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자, 여흥은 이만하면 되었다. 제국의 300주년을 축하하는 자리이니만큼 모두가 즐기거라. 특히 연회의 마지막 날은 짐이 좋은 구경거리를 준비해 두었으니 꼭 빠지지 말고 참여들 하라."

그렇게 황제의 외침이 끝나기 무섭게 황궁 악단이 연주를 시작했다.

잔잔하게 연회장으로 퍼져나가는 음악 소리.

이를 뒤로하고 황제는 조용히 자리를 떴다.

멀린에게 아낌없이 퍼준 황제가 사라진 뒤, 멀린이 케이에게 물었다.

"야, 케이."

"네."

"아까 황제가 마지막 날이라고 했잖아?"

"네, 그러셨죠."

"...이 연회 오늘 하루만 하는 거 아니었냐?"

너무도 당당한 멀린의 물음에 케이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답했다.

"모르셨습니까?"

"뭘."

"이 연회가 축제 기간 내내 열립니다."

"축제 기간이 언제인데?"

"오늘부터 닷새 뒤까지입니다만?"

"......."

멀린의 표정이 멍해졌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4박 5일? 그럼 앞으로 5일 동안 여기 나와야 한다고?"

"네."

"...안 나오면?"

"솔직히 그거야 탑주님 마음이겠지만, 폐하께 받은 게 있는데 황실 행사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렇지? 네가 보기에도 좀 그렇지?"

"네."

말해 무엇하겠냐는 듯 케이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멀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체념한 표정을 지었다.

"하아... 그래, 와서 저녁 먹는다는 생각으로 나오지 뭐."

귀찮고, 피곤하고, 따분하고, 짜증 나지만.

그 모든 것을 차후 있을 '아카데미 운영 지분 10%'를 위해 감내할 자신이 있는 멀린이었다.

남들이 들었다면 배부른 소리라 하였을지 몰라도, 멀린으로서는 충분히 성의를 보이는 일이었다.

그렇게 멀린이 한숨을 쉬는 사이, 브륜힐트 공작이 그에게 다가왔다.

"놀랍군. 그대가 국립연구소의 수석 연구원일 줄이야.... 소드 마스터가 어찌 그런 곳에."

"누가 그럽니까? 제가 소드 마스터라고?"

"...뭐?"

"그게 다 편견입니다. 실력 좀 있다고 다 소드 마스터인가?"

"그게 무슨."

"그냥 그렇다고 알고 계세요. 아무튼, 전 소드 마스터 아닙니다."

"그렇군...."

브륜힐트 공작은 멀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마 지금 이곳에서 이 어린 소년의 진면목을 알고 있는 자가 몇이나 될까.

자신 역시 고작 이 소년의 일부만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대체 이 어리디어린 소년에게 또 무슨 비밀이 숨겨져 있을지... 브륜힐트 공작은 그것이 궁금했다.

그것은 개인적인 호기심이자, 아들을 맡긴 아버지의 마음이었다.

그렇게 멀린과 브륜힐트 공작이 대면하는 사이.

"저 소년 이름이 멀린이라고 했냐?"

"예."

"흠...."

알렌 후작가의 두 부자가 멀린과 브륜힐트 공작을 보고 대화를 나누었다.

알렌 후작이 의구심을 담아 물었다.

"멀린이란 녀석... 황제 폐하를 구워삶은 것도 놀랍건만, 대체... 저 석상 같은 브륜힐트 공작은 어찌 제 편으로 끌어들인 거지? 제플린, 아는 게 있느냐?"

"그게...."

아버지의 물음에 제플린은 난색을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공작가 대문 부수고 쳐들어가서 한판 했습니다! ... 라고 말하면 믿어 주실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리 말했다가는 아버지 손에 자신이 쥐어 터질 것 같았다.

제플린이 어색한 얼굴로 답했다.

"그, 글쎄요. 그건 저도 잘...."

"일단 알겠다. 그런데 네가 소개하려 했던 친구가 멀린이란 녀석이지?"

"네."

"어째서?"

"음... 그게...."

제플린이 눈을 뒤룩뒤룩 굴렸다.

잠시 뒤 그가 속내를 털어놓았다.

"지금 당장은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어떻게서든 멀린 녀석과 좋은 인연을 맺어 두셔야 합니다."

"내가?"

"예. 아버지가요."

"어째서 말이냐?"

"...지금 당장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다만... 믿어 주세요. 이는 분명 알렌 후작가에 큰 이득을 가져다줄 겁니다."

"흐음...."

아들의 진중한 눈빛에 알렌 후작은 신음을 흘렸다.

종종 엉뚱한 짓을 하는 놈이지만, 가문의 후계자로 모자람이 없는 녀석이었다.

알렌 후작도 아들놈이 이토록 진지한 것을 본 적은 처음이었다.

그의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알았다. 어차피 폐하의 총애를 받는 아이이니 인연을 만들어 둬서 나쁘지는 않을 테니, 언젠가 날 잡아서 후작가로 찾아오라고 해라."

"아뇨."

제플린이 후작의 말을 냉큼 잘랐다.

그가 매우 단호하게 말했다.

"멀린이 저희를 찾아오는 게 아닙니다. 저희가 찾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굽혀야 합니다. 저희 좀 잘 봐주십사 하고요."

"......?"

"제발... 한 번만 믿어 주세요. 멀린을 고작 17살짜리 소년으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그를... 공작 각하와 동급이라고 여기셔야 합니다."

"뭐?"

아들의 말은 놀랍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 장난스러운 기미는 없었다.

반면 제플린으로서는 더 자세히 말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믿어 주세요! 저 인간이 미래의 대륙 제일 거부란 말입니다!'

드워프와의 교역권.

그것만 따낼 수 있다면 지금 버린 자존심이 전혀 아깝지 않으리라.

"......."

"......."

잠시 아들과 눈싸움을 벌인 알렌 후작.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그가 크게 한숨을 쉬며 답했다.

"하아... 알았다. 기회가 되면 연락하거라."

"네!...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일단락된 두 부자의 대화.

그런 상황은 윈스턴과 클라크 후작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어떻게든 멀린과 아버지 간의 연결점을 만들기 위해 윈스턴은 식은땀을 뻘뻘 흘려가며 설명을 해야만 했다.

그렇게 브륜힐트 공작, 알렌 후작, 클라크 후작이 멀린과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해 나가려 했지만, 모든 이들이 멀린을 좋게 보는 것은 아니었다.

멀찍이서 멀린을 지켜보는 시선이 있었으니.

우득-

시선의 주인은 다름 아닌 황태자였다.

얼굴은 무덤덤했지만, 그의 시선에는 그리 좋은 감정이 담겨있지 않았다.

또한, 어찌나 주먹을 꽉 쥐었던지 그의 손에서 뼈가 마찰 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저하? 무슨 일이시온지?"

황태자에게 잘 보이고 싶어 다가왔던 귀족들이 그의 살벌한 분위기에 놀라 흠칫 몸을 떨었다.

"......."

그렇게 한참이나 멀린을 바라보던 황태자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말없이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

그로부터 닷새가 흘렀다.

축제 기간 동안 멀린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연회장에 들락거려야 했다.

처음에는 귀찮고 따분했지만, 멀린은 지루한 연회에서 나름 그만의 즐거움을 찾아냈다.

그것은 바로 식도락이었다.

"오! 이거 맛있네?"

역시 황실은 황실이었고, 그런 황실 주방장들이 만들어낸 음식은 화려하고 맛도 좋았다.

매일매일 바뀌는 연회 음식에 맛 들여 버린 멀린은 연회의 마지막 날도 부지런히 접시에 음식을 쓸어 담고 있었다.

"대체 이 맛있는 걸 왜 손도 안 대는 거야? 음식 아깝게."

중얼중얼하며 접시에 음식 탑을 쌓고 있을 때 윈스턴이 잔뜩 상기된 얼굴로 뛰어왔다.

"타, 탑주님!"

잔뜩 흥분하여 얼굴이 붉어진 윈스턴을 보며 멀린은 시큰둥하게 되물었다.

"왜."

"들, 들으셨습니까?"

"뭘?"

"그 소문 말입니다! 그 소문!"

"......."

답지 않게 발까지 동동 구르는 윈스턴을 보며, 멀린은 소문이고 나발이고 간에 눈앞에서 귀여운 척을 하는 오크를 처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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