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궁 연회(4)
황궁 연회(4)
근위병부터 시작해 정문을 통과하고 있던 이들.
주변의 모든 이들의 이목이 한 여인에게 쏠려 있었다.
곱게 땋아 올린 흑단 같은 머리카락.
과하지 않은 장신구와 언뜻 보면 수수해 보이는 검은 드레스.
하지만 유독 새하얀 피부와 검은 드레스가 대비되어 묘한 아름다움을 자아냈다.
사각 사각-
드레스를 살짝 끌고 들어오는 사샤.
윈스턴은 단언할 수 있었다.
파티장을 향하는 그 어떤 여인보다 가장 매혹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여인이 바로 그녀일 것이라고.
사락 사락-
천천히 아발론 일행에게 다가온 사샤.
"......"
그녀를 보고 아발론 일동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사샤를 오래 보아온 그조차 넋을 놓을 정도였으니 주변의 다른 이들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반면, 그곳에서 유독 멀쩡한 존재가 있었으니.
"왔냐? 왜 이렇게 늦어! 빨리 빨리 다니란 말야!"
"...탑주님?"
사샤는 멍하니 멀린을 바라보았다.
멀린이 휘휘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다 왔으니 가자."
하지만 멀린의 말에 움직이는 이는 없었다.
모두 멍하니 사샤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
그들은 이마에 작은 매직 애로우 한 방씩을 얻어맞고서야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가자고!"
"아, 네."
그제야 움직이는 일행.
사샤는 자신에게 따라붙는 시선에 살포시 한숨을 쉬었다.
케이를 비롯한 다른 이들도 평소와는 다르게 자신을 어색해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평소처럼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멀린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멀린이 뚱한 얼굴로 말했다.
"뭐야. 왜 이렇게 달라붙어?"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또다시 시작된 의심의 눈초리에 멀린은 짜증스럽게 초대장을 넘기며 대충 설명해 주었다.
사샤가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대체... 황제 폐하와는 어떻게?"
"뭐... 어쩌다 보니?"
"대단하시네요."
"그것보다 너...."
"네?"
멀린의 살짝 짜증 섞인 얼굴에 사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멀린이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로 물었다.
"...키 컸냐?"
"아! 조금 큰 거 같긴 해요."
"...췟."
자신과 비슷한 눈높이를 가진 사샤를 보고 멀린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런 멀린을 보고 사샤가 슬며시 미소 지었다.
멀린과 사샤.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그들을 보며 나머지 3인방이 쑥덕거렸다.
"오늘 사샤... 조금... 와...."
"그러게... 조금 많이... 예쁘네."
"저게 조금이냐? 주변을 둘러봐라. 다리 세 개 달린 놈들은 죄다 쳐다보고 있는데?"
"그건 그런데 말야... 저 인간은 왜 저렇게 태연하냐?"
그들이 의문인 것은 사샤와 대화를 나누는 멀린이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듯 보인다는 것이다.
사샤를 오래 알고 지낸 자신들 역시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인데 말이다.
더욱이 사샤를 대하는 멀린의 태도에서 가식이 아닌 진심으로 아무렇지도 않다는 게 보였다.
이에 윈스턴과 제플린이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아무래도 저 인간...."
"...고자인가?"
둘의 중얼거림을 들은 케이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만큼은 케이도 둘의 의문에 공감이 갔기 때문이다.
***
연회는 황실에서 주관했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게끔 화려함의 극치였다.
또한, 초대된 이들 역시 난다긴다하는 귀족들이기에 연회를 준비하고 진행하는 이들은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웅성 웅성-
연회장에 모인 귀족들은 분주히 자리를 오가거나 연회장 곳곳에서 무리 지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곳에 모인 귀족들에게 이번 연회는 건국 3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라기보다는 새로운 인맥을 만드는 하나의 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귀족들과는 달리 너무도 한가한 이가 있었으니.
"오! 이거 맛있네."
다른 이들이 이야기를 나누느라 거들떠보지도 않는 연회 요리로 배를 채우고 있는 멀린.
그 옆에는 연회 분위기가 어색한지 주변 눈치를 보고 있는 케이와 음료를 홀짝이는 사샤가 있었다.
그런 사샤를 보고 멀린이 물었다.
"야."
"네."
"케이는 그렇다 쳐도... 넌 왜 여기 있냐?"
스스로 모든 것을 집어던진 케이와는 달리 레드포드 대공의 하나뿐인 딸인 사샤는 연회장에서 제법 인기인이었다.
실제 그녀를 노리고 말을 걸어온 젊은 귀족이 다수 있었지만, 스리슬쩍 자리를 피해 그녀가 돌아온 곳은 멀린의 옆이었다.
쿠키를 다람쥐처럼 갉아먹고 있는 멀린을 바라보며 사샤가 답했다.
"그냥요.... 저도 이런 분위기가 영 익숙하지 않아서."
"그러냐?"
"네. 그러는 탑주님은... 뭔가 익숙해 보이시네요?"
사샤의 물음에 멀린은 어깨를 으쓱였다.
애초에 이런 분위기에 기죽을 멀린이 아니기도 했거니와 과거 대마법사 시절 이 정도 규모의 연회는 수없이 돌아다닌 그였다.
아니, 이보다 더한 연회에도 많이 겪어 봤었다.
그러니 고작 황궁 연회 따위에 기가 죽을 리가 있나.
"뭐, 연회란 게 별거 있나? 먹을 거 먹으면서 수다 떠는 거지. 돈을 물 쓰듯 퍼부어 대며! 물론, 내 돈 아니니까 상관은 없다만."
"...여러 의미로 존경스럽네요."
사샤는 태연한 멀린을 보며 묘한 감탄사를 날렸다.
그렇게 그들이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사샤... 양?"
갑자기 들려온 느끼한 목소리에 사샤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단순히 목소리만으로도 누군지를 알아차린 사샤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시선이 돌아간 곳에는 엔조가 우뚝 서 있었다.
"아... 사샤양...."
그는 사샤를 보며 반쯤 동공이 풀려있었다.
"하아...."
그 모습에 짙게 한숨을 내쉰 사샤.
오로지 사샤만을 뚫어지게 보는 엔조를 보며 멀린이 케이에게 작게 귓속말을 날렸다.
"야, 쟤 맛탱이가 좀 간 거 같지?"
"음... 조금이 아닌 거 같습니다."
조금만 입을 더 벌리면 침을 줄줄 흘릴 것만 같은 엔조였다.
그런 그가 사샤를 향해 홀린 듯이 한 발짝 다가섰다.
"사샤 양... 오늘 정말 아름다우시군요."
넋나간 듯한 목소리에 사샤는 반사적으로 몸을 멀린의 뒤로 숨기고 말았다.
그곳이 가장 안전한 곳이란 것을 알아차리고 본능적으로 발길이 향한 것이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엔조를 막아주는 꼴이 된 멀린.
이를 본 엔조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제야 멀린을 발견한 엔조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너 이 새끼... 네가 어떻게 여기를?"
자신을 보며 짖는 하룻강아지의 울음소리에 멀린이 피식 웃었다.
"이야, 너 앞니는 어디서 했냐? 감쪽같네?"
"큭... 감히 너 따위 놈이 어찌 이곳에 온 거냐?"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엔조에게 멀린이 생글생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네가 아직 덜 맞았지?"
"......."
멀린의 목소리에 잠시 움찔 어깨를 떤 엔조.
그러나 그는 좋아하는 여인 앞에서 약하게 보이기 싫었던지, 용기와 독기를 끌어 올려 멀린의 눈을 마주했다.
그렇게 시작된 둘의 눈싸움.
그리고 연회장의 한쪽 구석에서 시작된 두 소년의 눈싸움이 건국 300주년 연회에 태풍을 몰고 올 것이라고 예상한 이는 없었다.
멀린과 엔조의 눈싸움이 이어질 때.
"여기서 뭘 하는 게냐?"
엔조의 뒤편에서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파웰스 백작이었다.
조부의 등장에 기세가 오른 엔조가 더욱더 눈에 힘을 넣었다.
'아, 거 집안 식구 없는 사람은 어디 서러워서 눈싸움하겠나.'
엔조가 자신을 노려보는 모양새가 꼭 싸움에서 지고 부모를 데려와 이르는 어린아이 같아 멀린은 피식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문제는 그런 웃음을 파웰스 백작이 보았다는 것이었다.
"왜 웃느냐."
"그냥 웃긴 게 좀 생각나서요."
멀린이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이미 파웰스 백작의 심기는 어그러진 상태.
안 그래도 멀린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아 심사가 꼬여있는데 파웰스 백작의 입에서 좋은 말이 튀어 나갈 리 없었다.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언젠가는 너의 오만함이 네 목줄을 조를 테니."
파웰스 백작의 거친 언사에 옆에 있던 케이와 사샤가 흠칫했다.
보통이라면 파웰스 백작이 저리 말할 정도로 척을 진 상대를 걱정하겠지만, 두 사람이 걱정하는 것은 오히려 파웰스 백작 쪽이었다.
'큰일 났네....'
'백작님... 왜 하필 건드려도 이 사람을 건드리시나요.'
아니나 다를까.
멀린이 파웰스 백작의 말을 듣고 그대로 넘어갈 리 없었다.
"아 네. 그러시겠죠. 그런데 말입니다."
"......."
"반성문은 다 쓰셨나요?"
"뭐...?"
"폐하가 내라고 한 반성문 말이에요."
멀린이 씨익 미소 지었다.
그가 말한 반성문이란 게 황제가 시킨 진상규명서임을 모를 리 없는 파웰스 백작이었다.
백작이 분기에 차서 멀린을 노려보았다.
그 순간이었다.
"이 친굽니다."
"아버지, 제가 꼭 소개해드리고 싶은 친구가...."
어딘가 사라졌던 윈스턴과 제플린.
그들이 자신의 부친을 이끌고 나타났다.
각각 알렌 후작가, 클라크 후작가문의 당대 가주들.
가문의 미래를 위해 반드시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는 아들의 고집에 이끌려 온 그들은 파웰스 백작과 대치를 벌이고 있는 소년을 보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
파웰스 백작가에 두 후작가 사람이 모여든 상황.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란 것이었다.
후작들이 도착한 것과 똑같은 시각에 찾아온 이가 있었으니.
"오랜만이구나."
한쪽에서 케이와 멀린을 발견하고 브륜힐트 공작이 나타났다.
거기에.
"브륜힐트 공작?"
"오! 제프리? 자네도 왔는가?"
"하긴, 폐하가 부르는데 아무리 브륜힐트라 해도 저택에 틀어박혀 있을 수는 없겠지."
브륜힐트 공작을 너무도 편하게 칭하며 다가오는 세 명의 사내까지.
멀린을 중심으로 사방팔방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뭐냐, 이건....'
멀린은 브륜힐트 공작을 향해 다가오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현시점에서 브륜힐트 공작을 이 정도로 편하게 대할 수 있는 귀족은 제국 내에서 단 셋뿐이었다.
바로 나머지 3개 공작 가문의 주인들.
그렇게 멀린은 자신을 향해 몰려든 이들 사이에 포위되고 말았다.
한쪽은 일반적인 백작가를 뛰어넘는 영향을 발휘하는 파웰스 가문.
다른 쪽은 제국 내 스물을 넘지 않는다는 후작 가문 중 둘.
마지막으로 한자리에 모인 네 명의 공작까지.
단언컨대 연회장 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이들이 모인 곳이 바로 멀린의 주변이라 할 수 있었다.
특히, 오랜만에 4대 공작가의 주인이 한자리에 자리한 것을 본 좌중의 이목은 자연스럽게 멀린이 있는 곳으로 쏠릴 수밖에 없었다.
멀린은 자신의 주변에 포진한 이들의 면면을 보며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넓은 데 놔두고 왜 다 여기서 난리인지....'
그 모든 이들을 불러 모은 시초가 자신임을 눈곱만큼도 자각하지 않는 멀린이었다.
그러나 그가 불러들일 인연의 끈 중 가장 굵직한 끈이 남아 있었으니.
두쿵-
연회장의 두꺼운 문이 열리고 목청 좋은 이가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대 제네리움 제국의 위대한 지배자, 그레고리 제네리움 황제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내빈들은 예를 갖추시오!"
쩌렁쩌렁한 외침에 연회장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열린 문 사이로 황제와 그를 따르는 이들이 들어섰다.
황태자를 비롯한 황가의 일원들.
그들의 등장에 연회장의 귀족들이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저벅 저벅-
조용한 연회장에 작게 들려오는 발소리.
연회장 중앙에 마련된 낮은 단상으로 향해가던 황제의 걸음이 어느 지점에서 우뚝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들라."
멀린은 자신의 머리 위쪽에서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곳에는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황제의 환한 얼굴이 있었다.
자신의 주변을 빼곡히 에워싼 권력 집단을 보며 멀린은 생각했다.
'아... 자리 잘못 잡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