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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서클 직전에 환생-87화 (87/191)

황제(5)

황제(5)

멀린의 이야기에 황제가 재밌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퇴학이라 하였느냐?"

"네."

"호오? 어째서?"

"제가 말입니다. 제.네.시.스 아카데미란 곳을 다녔었는데, 글쎄 거기 교장이란 작자의 손주 놈이랑 대련 과정에서 몇 대 쥐어박았다고 퇴학을 시켜버리지 뭡니까."

"......."

"시비도 그 교. 장. 손자놈이 먼저 걸었는데 말이죠."

"큭... 큭큭."

멀린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황제가 어깨가 들썩였다.

그러다 이내 그가 대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하하!"

황제는 도저히 이 상황이 유쾌해 참을 수 없었다.

어찌나 유쾌하게 웃었던지 눈물이 맺힐 정도였다.

'재밌구나! 참으로 재밌어!'

황제는 정말 귀한 물건을 보았다는 표정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난다긴다하는 귀족들조차 자신의 앞에서는 기를 펴지 못하고 항상 말을 조심했다.

그런데 이제 고작 17살이 되었다는 이 어린 연구원은 자신의 앞에서 제 할 말을 다 하고 있지 않은가.

아니, 이것은 제 할 말을 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누가 봐도 하소연이며, 고자질이었다.

황제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그렇더냐?"

"네. 제가 진짜 억. 울. 하. 고 분통이 터져서 잠도 제대로 못 잤다는 거 아닙니까?"

"네 말대로라면 분명 억울할 만한 일이구나."

멀린의 수다에 맞장구를 쳐주는 황제를 보며 그를 따라왔던 수행원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들의 황제가 누구던가.

매사에 냉철하고 계획적으로 행동하던 이었다.

그런 그가 고작 어린 소년의 말을 들어주며 맞장구까지 쳐주고 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장내에 있는 이들은 숨을 죽이고 황제와 멀린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래서 어찌 되었느냐?"

"어쩌긴 어쩌겠습니까. 힘이 없으니 당해 줄 수밖에요."

멀린은 구구절절 자신의 이야기를 모조리 털어놓았다.

황제 역시 이를 나무라지 않고 들어주었다.

언젠가 사샤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멀린이라면 공작이 아니라 황제 앞에서도 주둥이를 털 사람이라고.

그런 그녀의 예상이 조금도 틀리지 않고 정확하게 들어맞은 것이다.

"하하, 마음고생 많았겠군."

"어이쿠. 폐하께서 저 같은 놈의 마음을 헤아려 주시니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멀린의 과장된 아부에 황제는 고개를 돌려 파웰스 백작을 바라보았다.

"이 아이 말이 사실인가, 백작?"

황제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자 파웰스 백작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는 황제 뒤에서 서 있는 멀린이란 놈을 바라보았다.

멀린이 백작과 눈이 마주친 순간.

싱긋-

멀린은 살며시 눈웃음을 지었다.

이에 파웰스 백작은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 들었다.

'이, 이...!'

지금의 상황은 파웰스 백작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자신이 퇴학시킨 멀린이란 놈이 소장의 곁에 떡하니 붙어 있을 때만 해도 그리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소장이 놈을 싸고도는 것을 잘 알고 있기도 했고, 어떤 간 큰 놈이 황제 앞에서 함부로 입을 놀리겠는가.

하지만 소장이 녀석을 수석 연구원이라고 황제에게 소개했을 때.

또한, 놈이 듣도 보도 못한 기괴한 기술을 황제에게 선보였을 때.

백작의 가슴 한쪽에서 불안감이 슬금슬금 기어올랐다.

그리고 불안감은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설마 이렇게 대놓고 퇴학에 관해 얘기할 줄이야!'

멀린이란 놈은 자신의 상상 이상으로 간덩이가 부은 녀석이었다.

'이...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이!'

파웰스 백작이 속으로 이를 부득 갈았다.

그러나 그는 겉으로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황제의 말에 답했다.

"아닙니다, 폐하. 저 아이가 무언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해라?"

"그렇습니다. 저 아이가 퇴학을 당한 것은, 저 아이의 그간 행실이 큰 문제를 일으켰기에 때문입니다. 분명 제 손자 녀석과의 대련이 시발점이 되긴 하였으나, 그 또한 저 아이의 문제가 된 행실 중 하나일 뿐! 제 손자와의 대련 사건만으로 저 아이가 퇴학을 당했다는 것은 명백한 오해입니다."

"흐음... 그런가?"

파웰스 백작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황제는 무덤덤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불현듯 황제의 뇌리를 스치는 기억이 있었다.

'아마 올해 초였던가?'

그즈음 파웰스 백작가와 연구소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를 보고 받고 중재한 것이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거기까지 생각한 황제가 멀린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 녀석이었군.'

연구소와 아카데미 간의 갈등이 한 소년의 퇴학으로 인해 벌어진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사건의 발단이 바로 자신의 앞에 있는 이 소년일 줄이야.

당당해도 너무 당당한 멀린을 보는 황제의 눈에 기이한 빛이 일렁였다.

'영악한 놈이군.'

지금 멀린이 한 일은 황제가 잡아 둔 불길에 다시금 불씨를 집어 던지는 일이었다.

그리고 녀석은 그 불씨를 집어 던지는 일에 황제인 자신을 이용하고 있었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흥미가 돋아났다.

'재밌는 녀석이구나.'

멀린에게서 시선을 뗀 황제가 다시 파웰스 백작을 바라보았다.

멀린을 볼 때는 옅은 웃음기가 있던 황제의 얼굴이 파웰스 백작을 보는 순간 싸늘하게 돌변했다.

'두 사람의 이야기가 상반되니 누군가 내게 거짓을 고하고 있다는 소리겠지.'

황제의 감은 그 누군가가 파웰스 백작이라 말하고 있었다.

싸늘해진 황제의 시선에 백작의 낯빛이 파리해졌다.

꿀꺽-

마른침을 삼키는 파웰스 백작을 보고 황제는 조소 지었다.

아마 파웰스 백작 역시 자신이 두 집단 간의 갈등에 대해 보고 받은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파웰스 백작이 거짓을 고한 것은 황제가 자세한 내막에 대해 모르고 있으리라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놈.'

황제의 입꼬리가 뒤틀렸다.

그가 멀린을 바라보며 물었다.

"멀린이라고 하였느냐?"

"예."

"넌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인간 부류가 어떤 부류일 거라고 생각하느냐?"

"흐음... 글쎄요."

"힌트를 주마. 나는 말 많은 작자를 아주 싫어한단다."

"흠...."

황제의 말에 멀린은 살짝 고민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뜬금없이 자신이 싫어하는 부류를 맞춰보라더니, 거기에 준 힌트가 '말 많은 작자.'란다.

이는 단순히 그냥 말이 많은 사람을 싫어한다는 것이 아님을 돌려 말하는 것이었다.

황제의 성향을 파악해본 멀린이 씨익 웃으며 답했다.

"알겠습니다."

"호오? 벌써 말이냐?"

"우연히도 폐하께서 싫어하는 인간의 부류와 제가 싫어하는 인간의 유형이 매우 유사한 것 같아서 말이죠."

"그렇더냐? 그럼 네가 싫어하는 인간의 유형이 무엇이냐?"

"지닌 능력은 쥐뿔도 안 되면서 말만 거창하게 늘어놓는 작자."

"......."

멀린의 말에 파웰스 백작은 어깨를 크게 움찔 떨었다.

반면 황제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

"하하, 그렇다. 나 또한 그런 작자를 매우 싫어하지. 하하!"

크게 웃던 황제가 돌연 싸늘한 눈으로 백작을 바라보았다.

이에 백작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

백작은 알아차렸다.

황제의 눈빛이 경고임을 말이다.

"파웰스 백작."

"예, 폐, 폐하."

"이 아이의 퇴학과 관련된 진상을 세세하게 정리하여 보고하거라."

"그... 폐, 폐하... 고, 고작 이런 일을 폐하께서 일일이 확인하실 필요는...."

"못하겠는가?"

"아... 아닙니다."

"일주일 주겠네."

"알겠습니다."

황제의 눈빛에 결국 백기를 든 백작이 고개를 숙였다.

한편,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소장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기를 썼다.

'멀린이 이 녀석!'

멀린의 영특함을 알고 있는 소장은 그가 공연히 자신의 퇴학 이야기를 꺼낸 게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그로 인해 파웰스 백작이 면박을 당하는 것을 보고 있자니 막혔던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소장이 그렇게 입을 틀어막은 사이 황제는 멀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시선은 마치 네가 원하는 대로 됐냐는 듯 묻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에 멀린은 살며시 고개를 조아렸다.

"허...."

마치 제 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어린 소년의 모습에 신기함과 호기심을 참지 못한 황제가 질문을 던졌다.

"네가 연구소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되었느냐?"

"음... 이제 1년 정도 된 거 같습니다."

"어쩌다 기사 아카데미의 생도가 연구소에 들어오게 된 것이냐?"

"처음에는 시리우스 호를 견학 왔다가 연구소가 마음에 들어 자원하여 실습을 나왔었습니다. 이후 소장님과 부소장님의 눈에 들어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시리우스 호 견학이라...."

시리우스 호가 언급되자 황제는 눈에 기이한 빛이 감돌았다.

멀린은 그와 같은 눈빛을 잘 알고 있었다.

'아... 귀찮아지겠네.'

저건 마치 빚쟁이들이 빚 받으러 왔을 때의 눈빛 같지 않은가?

'지금까지 내 장단에 맞춰줬으니 이제 자기 장단에 맞추라 이거냐?'

그런 멀린의 생각을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황제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멀린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래, 그럼 이곳에서 네가 본 시리우스 호는 어떤 물건인 것 같더냐?"

"......."

황제의 질문은 정말 난데없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그것이 시험임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그것도 황태자에게 주어졌던 것과 똑같은 종류의 시험이었다.

이에 황태자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흠...."

멀린은 살짝 고민했다.

보통 일반적인 귀족이라면 제국의 다음 대 황제가 될 황태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 최대한 황태자가 한 답변에서 벗어나지 않는 말을 하리라.

하지만 멀린은 달랐다.

그는 뒷배가 있는 귀족이 아닐뿐더러, 아직 어린 황태자보다는 실질적인 제국의 실권을 쥐고 있는 황제가 더욱더 매력적이었다.

'그래, 기왕 줄을 잡을 거면 성능이 어느 정도인지 모를 얇은 신제품보다는, 중고지만 굵고 성능도 검증된 것이 낫겠지.'

생각을 정리한 멀린이 무덤덤하게 답했다.

"시리우스는 거대한 황금 덩어리죠."

멀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좌중은 의문을 표했다.

제국의 방패니, 검이니 라는 말을 한 황태자의 답변과는 확연히 다른 멀린의 답변.

이에 황제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소리는 제국민의 세금을 처발라 만들었다는 의미더냐?"

"뭐, 그것도 그리 틀린 소리는 아니지만, 제가 말한 황금 덩어리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더해 보라는 황제의 시선을 받으며 멀린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멀린에게 집중하고 있는 이는 황제뿐이 아니었다.

황태자를 비롯한 모든 이들이 황제의 관심을 독차지한 어린 연구원이 무슨 말을 할지 귀를 기울였다.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멀린이 입을 열었다.

"제가 그리 말한 것은 시리우스를 잘만 굴린다면 제법 쏠쏠하게 황금을 벌어들일 수 있을 것 같아서였습니다."

지극히 멀린다운 답변이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는 이들 중 멀린의 생각에 동의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저, 저!"

"이놈! 제국의 혈세로 만들어낸 시리우스를 그저 돈벌이 수단으로 보다니!"

"폐하! 저런 망발은 들을 가치도 없사옵니다!"

황제의 수행원들이 멀린의 이야기에 격하게 반대를 외쳤다.

그들은 시리우스라는 제국과 황실을 상징하는 물건을 단순히 돈벌이 수단이라 말하는 멀린의 이야기를 도무지 기껍게 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제의 생각은 달랐다.

"조용."

황제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로든이 검 자루를 부여잡았다.

그러자 묵직한 기운이 수행원들을 향해 쏟아졌다.

자신들을 압박하는 기운에 기가 질려 입을 다문 수행원들.

그런 이들을 뒤로하고 황제가 멀린을 돌아보았다.

"계속해 보거라."

황제의 눈에는 묘한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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