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의 싸움(5)
케이의 싸움(5)
정확히 자신을 응시하며 부르는 공작의 목소리에 멀린이 뚱하게 답했다.
"왜요?"
"...재밌는 얘기 잘 들었네. 문을 부순 것은 이야기를 들은 거로 수리비를 받았다 치지."
"그러시겠다면야."
"분명 자네는 뛰어나네. 하지만... 굽히는 법을 좀 배워야겠군."
"충고 고맙습니다만, 전 지금도 충분히 굽히고 있는 겁니다."
어찌 보면 오만하다 할 소리였지만, 그의 경지를 보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걸 알기에 공작도 이에 대해 더는 말하지 않았다.
"오늘 있었던 일은 함구하지. 그러니...."
"우리도 다물어라?"
"......."
멀린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소드 마스터인 걸 숨겨야 하는 건가?'
자세한 것은 모르나 무언가 사정이 있는 듯싶었다.
멀린으로서도 딱히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기에 긍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멀린이 싱긋 웃어 보였다.
공작은 별말 하지 않고 등을 돌렸다.
그러고는 저택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잠시 멀린을 노려보던 기사들도 공작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리사엘도 마찬가지였다.
"......."
아무 말 없이 멀린을 노려보던 그녀가 자리를 벗어났다.
그렇게 모두가 떠난 순간.
[아들 녀석을 잘 부탁하네.]
마나를 타고 멀린에게만 전해진 목소리.
이에 멀린은 멀어져가는 공작의 등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렇게 상황이 종료되고.
"흐억...."
"사, 살았다."
윈스턴과 제플린은 상황이 끝나기 무섭게 다리가 풀려 휘청거렸다.
멀린이 그런 이들을 보며 혀를 찼다.
"쯧. 살긴. 언제는 죽을 뻔했냐?"
"바, 방금 얼마나 위험한 상황이었는지 모르시는 겁니까?"
"응. 모르겠는데?"
"끄응...."
태연한 멀린의 말에 제플린은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런 이들을 뒤로하고 멀린은 케이를 바라보았다.
몹시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말이다.
"너 이 자식...."
"왜, 왜 그러십니까?"
"수업료 좀 올리겠다니까 바로 가문에서 나와 버려?"
"헤헤. 그게... 그렇게 됐습니다."
어수룩한 미소를 짓는 케이를 보며 멀린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우며 뚱하게 물었다.
"됐고. 후련하냐?"
"네."
케이의 답은 거침이 없었다.
녀석의 얼굴에는 정말 일말의 미련도, 후회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로지 후련함만이 존재할 뿐.
이를 보며 멀린도 살짝 미소 지었다.
"그거면 됐다."
"감사합니다."
케이가 진심으로 감사를 담아 고개를 숙였다.
한때는 친구였지만, 이제는 스승이 된 존재.
멀린이라는 든든한 버팀목이 있었기에 케이는 당당해질 수 있었다.
'내 인생에 있어 최고의 기회는 탑주님을 만난 것이며, 최고의 선택은 아발론 마탑에 들어간 거였을 지도 모르겠구나....'
믿고 따를 존재가 있다는 것.
그것은 케이에게 너무도 힘이 되어주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케이의 초롱초롱한 눈빛에 멀린이 떨떠름한 얼굴로 한 발짝 물러섰다.
"뭐냐. 그 느끼한 눈빛은?"
"탑주님...."
"오, 오지 마."
"탑주니이이임!"
"오지 말라고 새꺄!"
격정적으로 달려드는 케이를 발로 밀어내는 멀린.
그리고 눈물을 글썽이며 달라붙는 케이.
사샤를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조금 전에는 일부러 그러신 건가?'
공작을 향한 멀린의 언사가 언뜻 무례한 도발로 보일 수는 있었지만, 사샤는 그것이 케이의 기를 살려주는 행위로 보였다.
또한, '어디 또 한 번 케이 건드려 봐! 그때는 다 죽는 거야!'라는 듯한 무력시위로도 여겨졌다.
마치 제 새끼 건들면 다 물어 버리겠다는 맹수처럼 말이다.
사샤는 멀린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알 수 없는 사람....'
언뜻 보면 가볍고 진지함이 없어 보이는 멀린이었지만, 꼭 한 번씩 이런 모습을 보일 때가 있었다.
마법에 관한 일이나.
금전에 관한 일이나.
혹은 자신의 테두리 안에 들어온 사람에 관해서 말이다.
'...그게 저분의 매력일지도.'
사샤는 케이와 아웅다웅하고 있는 멀린을 보며 살며시 미소 지었다.
"콱 씨! 이 자식이 어디 하늘 같은 탑주님한테 앵겨 붙어!"
"어흑...."
기어코 멀린에게 두어대 쥐어 터진 케이가 이마를 부여잡고 나가떨어졌다.
끙끙거리며 이마를 문지르는 케이를 멀린이 불렀다.
"야, 케이."
"예...?"
"그것보다 넌 이대로 괜찮냐?"
"뭐가 말입니까?"
"가문을 나온 거야 네 의도였다 쳐도 이대로 무시 받고 끝낼 거냐고."
"네?"
"쯧쯧. 케이야. 이 멍청한 케이야... 난 널 그렇게 안 가르쳤다."
"......?"
"이왕 달라지기로 결심한 거 뭔가 성과는 있어야 할 거 아냐?"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케이를 보며 멀린이 음흉한 미소를 보냈다.
"듣자 하니 네 동생이 그렇게 싹퉁머리가 없다며?"
"......."
"교육 한번 시켜줘라. 아발론 마탑 식으로."
"아...."
케이가 옅은 탄성을 내질렀다.
곤 환하게 웃으며 그가 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사제간의 대화를 들으며 윈스턴과 제플린은 네이든의 명복을 빌어주었다.
***
다사다난했던 주말은 빠르게 흘러갔다.
다시금 돌아온 결정전.
시합장으로 향하는 네이든의 얼굴빛은 영 좋지 못했다.
'짜증 나네.'
원래대로라면 오늘의 시합은 없는 시합이어야 했다.
케이를 가문에 붙잡아 두고 부전승으로 다음 시합에 올라가는 것.
그로 인해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두는 게 네이든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주말 동안 있었던 일로 인해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얕은수 부릴 생각하지 말거라.'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가봐라.'
공작에게 불려가 알 수 없는 훈계를 듣고 쫓겨난 네이든.
그는 어머니인 리사엘에게 사건의 자초지종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케이 그 아이가 돌아갔다.'
'예?'
'공작 각하께서 아셨어.'
'어, 어떻게요?'
'그 아이가 공작 각하를 뵙고 직접 말했단다.'
'그 녀석이 말입니까?'
리사엘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에 네이든은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자식한테 그럴 강단이 있을 리가 없는데?'
'어찌 되었든, 일이 그렇게 됐으니, 나머지는 네 힘으로 알아서 헤쳐나가야 한다.'
'...알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자신이 계획했던 일이 모조리 무용지물이 되었다는 사실에 울컥울컥 짜증이 치솟았다.
"괜히 쓸데없는 데 힘 빼게 생겼군."
못마땅함이 가득한 네이든의 얼굴.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짜증을 제외한 감정은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질 거라는 걱정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남은 시합은 두 개뿐이니까."
애초 네이든의 목표는 우승이 아니었다.
2학년으로서 두각을 드러낼 수 있는 적당한 성과를 내면 그뿐.
네이든이 정한 성과의 기준은 바로 8강이었다.
이번 황실 연회에 초청받는 생도인 8강까지 말이다.
'칫. 아버지가 거기에 날 데려간다고 했으면 내가 이런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는 거였는데.'
황실 300주년 기념 파티에 제네리움 제국의 큰 기둥 중 하나인 브륜힐트 공작가가 초대받지 못할 리는 없었다.
공작도 당연히 파티에 참여할 계획이었다.
다만, 그곳에 공작가의 후계자인 네이든을 데려가지 않겠다고 한 공작의 발언이 문제였다.
다른 대귀족은 물론 황제와 황태자가 참여하는 대규모 파티.
그런 자리에 공작가의 후계자를 데려가지 않겠다는 소리에 공작부인이 직접 나서 설득을 해보았지만, 공작은 자신의 결정을 철회하지 않았다.
이에 네이든은 공작을 설득하기보다는 다른 활로를 찾았다.
'차라리 잘 됐어. 아버지를 따라가는 것보다는 나 스스로 능력을 입증해서 파티에 참여하는 게 그림 상으로 봤을 때 더 좋으니까.'
저학년 생도로 8강에 오름으로써 재능을 입증한 브륜힐트 공작가의 후계자.
그편이 황태자는 물론 황제의 관심을 더 쉽게 유도할 수 있으리라.
'내 대에서는 중립의 브륜힐트가 아니라, 모든 가문 위에 군림하는 브륜힐트로 만들 것이다!'
그것은 네이든이 가진 원대한 꿈이었으며, 이번 황실 연회는 그 꿈을 위한 첫걸음이 될 예정이었다.
저벅저벅-
'케이는 별 볼 일 없다. 다음 시합만 잘 치르면 돼.'
시합장으로 가는 통로를 걸어가는 네이든의 얼굴에는 여유가 가득했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시합장.
대련 연습장을 개조한 시합장에는 32강 경기답게 이전보다 많은 생도가 나와 구경을 하고 있었다.
그사이, 먼저 도착한 케이가 자리해 있었다.
네이든이 시합장에 들어서 케이의 앞에 섰다.
그러고는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로 말했다.
"일을 참 번거롭게 만들었네?"
"......."
"그냥 얌전히 가문에 있었으면 얼마나 좋아? 서로서로 험한 꼴 안 보고."
자신의 앞에서 조잘거리는 네이든의 태도에도 케이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피차 서로 얼굴 보기 껄끄러우니 빨리 끝내자고."
그리 말한 네이든이 심판을 바라보았다.
얼른 시작하라는 의미였다.
그 눈빛을 받아 심판이 외쳤다.
"시합 시작!"
심판의 외침이 끝나기 무섭게 네이든의 신형이 사라졌다.
더불어 케이를 가운데 두고 사방에서 사람 형상을 띤 잔상이 일어났다.
그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후회하지 마. 네가 자초한 일이니까.]
네이든의 목소리는 잔상 곳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가 처음부터 전심전력으로 각성기를 사용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엄청나네. 저 녀석이 2학년이라고?"
"저 정도면 32강까지 올라오기에 충분하지."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움직임에 여기저기서 놀라움이 빗발쳤다.
반면 케이는 이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S급 각성기 고속이동.'
네이든을 2학년 최상위 실력자로 만들어 준 능력이었다.
이는 분명 뛰어난 각성기가 맞았다.
어찌나 빠르게 움직이던지 주변에 만들어진 잔상이 분신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왜 그래? 너무 놀라서 움직일 수조차 없는 건가?]
네이든의 잔상에서 비웃음이 들려왔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예전의 나였다면 놀라 움직일 생각도 못 했겠지.'
하지만 지금의 자신은 과거의 자신이 아니었다.
서서히 좁혀드는 잔상 속에서 케이는 침착하게 수인을 맺어갔다.
[그건 또 무슨 수작이냐?]
네이든의 눈에 케이가 맺어가는 수인은 그저 손장난으로 보일 뿐이었다.
피식 조소를 터트린 네이든이 말했다.
[그만 끝내자.]
네이든의 잔상이 검을 빼 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침묵으로 일관하던 케이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탑주님께서는 말씀하셨지. 칼잡이가 날뛰어 봤자 칼잡이다."
위대한 격언을 읊는 듯한 케이를 보고 사샤를 비롯한 윈스턴과 제플린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는 사이 순식간에 완성된 수인이 빛을 발하고 케이가 마법 주문을 읊조렸다.
"슬로우."
마법이 완성되자 여기저기서 수군거림이 터져 나왔다.
"어? 저게 뭐야?"
"허공에서 빛이 나는데?"
케이와 네이든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관객들이 놀란 눈을 해 보였다.
하지만 그곳에서 그 누구보다 놀란 이는 다름 아닌 네이든이었다.
[어?!]
다급한 경악성과 함께 서서히 수가 줄어 들어가는 네이든의 잔상.
"슬로우."
케이가 재차 슬로우 마법을 펼쳤다.
그와 함께 네이든의 잔상이 완전히 사라지며 그의 신형이 드러났다.
"이이... 이이게에에 왜에에에?"
자신이 자랑하던 고속이동의 효과가 사라지고 이제는 말조차 느려져 버린 네이든.
케이가 그의 앞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이를 보고 네이든이 몸을 빼려 했지만, 그의 움직임은 느려도 너무도 느렸다.
그가 자신에게서 도망치려는 네이든을 보며 말했다.
"네가 잊어버렸나 본데... 내 각성기가 인지력이야."
케이의 각성기 B급 인지력은 네이든이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고 있던 그의 움직임을 정확히 잡아냈다.
물론 고속이동을 하는 상대에게 마법을 맞추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케이는 네이든의 다음 움직임을 예측하고 보란 듯이 단번에 마법을 적중시켰다.
그것은 케이의 마법 실력이 놀라울 정도로 늘었다는 증거이자, 그가 행한 노력에 대한 결과였다.
"이이이이게에에에뭐어어야야?!"
케이는 자신의 앞에서 허우적거리는 네이든을 보며 주먹을 울끈 말아 쥐었다.
"가문을 나왔지만, 그래도 피를 나눈 형제이자 형으로서 마지막 도리를 다하려고 해."
천천히 천천히 네이든에게 다가가는 케이.
"동생의 인성에 문제가 있다면 응당 형으로서 이를 고쳐줘야겠지."
마침내 케이가 네이든의 앞에 우뚝 멈춰 섰다.
그가 네이든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런데 우리 아발론식 교육이 제법 거칠어. 그래도 효과는 좋으니 걱정하지는 마."
뼈에 사무칠 정도로 효과 좋을 거니까 말야.
우득 우득-
주먹을 꺾는 순간 케이의 입가에 번진 미소.
그것은 멀린의 미소와 판에 박은 듯 닮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