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의 싸움(1)
케이의 싸움(1)
금방이라도 일을 벌 일 듯한 멀린의 모습에 제플린이 침을 삼키며 물었다.
"왜, 왜 그러세요?"
"아니,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아니꼽잖아?"
"뭐, 뭐가요?"
"내가 열심히 굴려서 이제 겨우 사람 구실 하게 만들어 놨더니 그걸 날름! 홀랑 먹으시겠다?"
"...케이 얘깁니까?"
"그럼 지금 이 상황에 내가 누굴 얘기하겠냐?"
멀린의 떨떠름한 표정을 보며 제플린은 입을 다물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멀린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케이 집 아는 사람?"
이에 사샤가 물었다.
"어쩌시려고요?"
"어쩌긴 찾아가야지. 그래서 케이 집 아는 사람?"
"......."
불안감이 슬금슬금 치밀어 오른 3인방.
자신의 질문에 돌아오는 답이 없자 멀린이 뚱한 얼굴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몰라?"
"그러는 탑주님은 아십니까? 저희보다 더 오랫동안 케이랑 알고 지내셨잖아요?"
"......."
제플린의 반격에 멀린이 처음으로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그도 케이가 어느 가문의 사람인지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애초에 관심이 없었다는 게 옳았다.
결국, 아무도 케이의 가문과 집이 어딘지 모르자 멀린이 다른 방법을 말했다.
"뭐, 케이 동생을 파보면 알게 되겠지."
그리 말한 멀린이 외투를 챙겨 들고 밖으로 나섰다.
마탑 일동은 살짝 한숨을 쉬며 그런 멀린을 뒤쫓았다.
그로부터 얼마 뒤.
"...거참."
멀린이 턱을 쓸었다.
멀린을 비롯한 마탑 일동이 네이든에 대해 이리저리 알아보고 다녔지만, 알아낸 것은 없었다.
"성을 숨겼다라...."
대진표에 나타난 네이든의 이름 옆에는 성이 표시되지 않았다.
그간 케이 역시 그랬지만, 그건 케이가 귀족가의 사생아이기에 그런 것이라 여겼었다.
그런데 그 동생까지도 성을 숨기고 있는 것은 무언가 수상했다.
멀린이 제플린에게 물었다.
"아카데미에서 성을 표기하지 않는 건 무슨 경우냐?"
"일단... 탑주님처럼 평민 출신이거나 당사자가 성을 밝히지 않기를 원하는 경우죠. 그런데... 그런 경우는 그렇게 흔치 않습니다."
"그렇지?"
"예. 솔직히 이곳에서는 가문의 이름이 힘인데, 굳이 평민으로 오해를 살 만한 상황을 만들어 가며 성을 숨길 이유는 없죠."
"흠... 제 성조차 밝히지 않은 놈이 생도위원회에 들어갔다라.... 거기 들어가기 쉬운 곳인가?"
"그럴 리가요. 뭐, 생도위원 위임은 전적으로 위원장 권한이기는 한데... 엔조 그놈 성격상 어지간한 가문 아니고는 제 옆에 두지 않았을 겁니다. 실제로 그러고요. 거기에 이제 2학년이 된 놈을 옆에 둘 정도면... 케이네 가문도 제법 영향력 있는 곳일 겁니다."
"그렇단 말이지...."
멀린의 의구심이 깊어졌다.
잠시 고민에 빠진 그에게 제플린이 물었다.
"어쩌실 겁니까? 제가 생도위원회에 아는 놈이 있기는 한데... 한번 물어볼까요?"
"걔가 알려줄 거 같냐?"
"그럴 거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안 물어보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요?"
"됐다. 괜히 우리가 이리저리 캐묻고 다닌다고 소문나서 좋을 건 없으니까. 특히 그 생도위원회 놈한테 물어보면 그게 엔조 귀에 안 들어갈까?"
"그건 그렇죠."
멀린은 네이든을 조사해서 케이의 집을 찾아내겠단 선택지를 지웠다.
대신 그는 다른 방법을 선택했다.
멀린이 등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디 가십니까?"
뒤에서 들려오는 윈스턴의 목소리에도 멀린은 대꾸조차 하지 않고 걸었다.
그가 도착한 곳은 과거 자신과 케이가 사용하던 기숙사였다.
자연스럽게 기숙사 안으로 들어선 멀린은 케이의 침대를 뒤적거렸다.
"찾았다."
살짝 미소 지으며 무언가를 집어 든 멀린.
그것은 갈색빛이 도는 한 가닥의 머리카락이었다.
지켜보는 아발론 마탑 일동은 멀린이 또 무슨 일을 하는지 가만히 지켜볼 따름이었다.
그때였다.
[아빠! 아빠! 나줘요, 나!]
멀린의 재킷 빼꼼히 고개를 내민 시리가 손을 내밀었다.
매일 매일 멀린에게 마법 수업을 들으면서도 정작 마법을 쓸 일이 그리 많지 않았던 시리는 항상 마법을 쓰고파 안달이 나 있는 상태였다.
그랬던 녀석은 멀린이 하려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 냉큼 선수를 친 것이다.
"네가 해볼래?"
[응응!]
멀린의 물음에 크게 고개를 끄덕인 시리가 재킷에서 빠르게 튀어 나갔다.
그러고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엉덩이를 씰룩이며 율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번쩍번쩍 달님의 머리는 번들번들! 반짝반짝 별님이 아이~ 눈이 부셔....]
율동에 노래는 덤이었다.
거기에 시리의 주변으로 진짜 별가루 같은 반짝임이 흩날렸다.
해괴한 노랫말과 이상한 율동에 할 말을 잃어버린 마탑 일동.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한 사샤가 물었다.
"지금... 뭐 하는 건가요?"
"뭐 하긴... 마법... 쓰고 있잖아."
"저런 마법이 있어요?"
"있긴 해... 저런 주문은 없어도."
"......."
자기가 말하고도 민망한지 살짝 고개를 돌려버린 멀린.
그가 다급히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저게 저래 보여도 6서클 마법이다."
"그건... 그거대로 대단하네요."
황당해하는 사샤의 눈빛에 멀린이 다시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시리, 이놈의 자식이!'
멀린에게 마법을 배운 시리.
녀석은 언젠가부터 멀린에게 배운 마법에 자신만의 주문과 율동을 붙이기 시작했다.
'대체 누굴 닮아서... 아, 날 닮은 거구나.'
과거, 마법의 궁극은 멋이라며 변태 같은 마법을 양산해낸 멀린이었다.
그가 시리를 탓하는 것은 결국 제 얼굴에 침 뱉기나 다름없었다.
이에 멀린은 당당하게 나가기로 결심했다.
"뭐, 이상하기는 해도 귀엽잖아?"
"...귀엽긴 하네요."
사샤도 멀린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엉덩이를 씰룩이며 짧은 팔다리를 바동거리는 시리의 모양새는 우스꽝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손녀의 재롱잔치를 보는 듯 귀여웠다.
그렇게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마법 겸 재롱잔치를 선보이는 시리의 움직임이 격해졌다.
마침내 율동이 절정에 다다르자 시리가 외쳤다.
[자라나라 머리 머리!]
제플린과 윈스턴이 해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이 뒤바뀌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시리의 해괴한 주문과 함께 빛에 휩싸인 케이의 머리카락.
"흐헉?!"
"지, 진짜 자라난다!"
그것이 자라나고 있었다.
츠츠츠-
한 가닥에 불과했던 머리카락이 마치 담쟁이덩굴이 자라나듯 치렁치렁 길어지며 얼기설기 엉켜갔다.
그리고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새?"
마치 밧줄을 꼬아 만든 듯한 모양을 가진 작은 새가 나타난 것이다.
마법이 끝나자 시리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멀린에게 물었다.
[어때요?]
"참... 잘했어요."
[엣헴!]
멀린은 볼록한 배를 내밀며 자랑스러워하는 시리를 애써 외면했다.
그러고는 시리가 만들어낸 새를 들어 올렸다.
"자, 가라."
푸르득-
멀린의 손에서 벗어나 창문으로 날아간 작은 새.
이를 지켜본 사샤가 물었다.
"방금 그건 뭔가요?"
"자라나라 머리 머리라는 마법."
"...진짜요?"
"진짜겠냐. 디텍티브 오브젝트 마법의 변형이다. 원래는 저서클 마법이지만, 수색 범위가 넓어질수록 필요로 하는 서클이 많아지지. 수도 전체를 수색하려면 대충 6서클 정도면 될 거야."
"아...."
짧게 시리가 사용한 마법의 정체를 알려준 멀린이 털썩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여유롭게 다리를 꼬며 말했다.
"자, 그럼 기다려 보자고."
그런 멀린을 따라 마탑 일동도 주변 자리를 차지했다.
'자라나라 머리 머리' 마법이 알려 줄 케이의 행방을 기다리며.
***
네이든을 따라 가문으로 돌아온 케이.
"그럼 난 할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 허튼 생각하지 말라고. "
본가에 돌아오자 네이든은 케이에게 경고를 남기고 자리를 빠져나갔다.
기사들의 인도를 받아 가문 깊숙이 들어선 케이.
"됐습니다. 더 이상의 안내는 필요 없습니다."
"......."
"도망치지 않을 겁니다. 걱정하지 말고 가보세요."
"......."
"후우...."
케이의 말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기사들.
자신이 어떤 말을 해도 떠나지 않을 것을 알아차린 케이는 그냥 그들을 무시하기로 했다.
또각또각-
구둣발 소리가 울리는 복도.
새하얀 대리석은 매일같이 청소하는지 천장이 비쳐 보일 정도였다.
케이는 그런 통로를 걸어가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14살에 아카데미에 들어가 3년 만에 되돌아온 본가였다.
'여긴... 변한 게 없구나.'
일곱 살.
아버지의 손을 잡고 이 복도를 걸을 때는 그저 모든 것이 신기했었다.
다 쓰러져 가는 폐가에 가까운 집에 살다가 처음 본 대귀족의 저택은 말 그대로 별천지에 가까웠다.
처음에는 자신이 이런 집에 살아도 될지에 대한 걱정이 들었고, 이후 이런 곳에 살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뻤다.
그 모든 감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자신을 견제하는 가문의 안주인과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아버지.
나날이 날아드는 주변의 눈초리.
아무리 노력해도, 성과를 이뤄도 늘 되돌아오는 것은 차디찬 냉대뿐.
그 모든 것을 짊어지기엔 당시의 자신은 어렸고 연약했다.
때문에 숨고 피하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이제 자신에게는 앞날을 제시해준 스승과 친구라고 부를 만한 이들이 함께했다.
강해지기 위해, 성장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 성과를 인정해주는 이들이 있었다.
'지켜야 해.'
그들과의 관계를 지키기 위해서는 자신이 달라져야만 한다.
꾸욱-
케이가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가 말했다.
"아버지를 뵙고 싶습니다."
그의 말에 기사들이 어깨를 흠칫 떨었다.
케이는 무덤덤한 눈빛으로 기사들을 응시했다.
"3년 만에 돌아왔습니다. 아버지... 아니, 가주 님께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
케이의 말에 침묵하던 두 명의 기사.
잠시 뒤, 그들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지금 시각이면... 가주께서는 서재에 계실 겁니다."
"감사합니다."
"가주께서 만나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거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리 답한 케이가 걸음을 옮겼다.
3년이란 시간의 공백이 있었지만, 가문의 지리는 마치 어제 그날처럼 모든 것이 선명했기에 케이의 걸음에 거침이 없었다.
살짝 한숨을 쉰 기사들이 케이를 따랐다.
잠시 뒤.
"후우...."
서재 앞에서 작게 심호흡한 케이.
그가 서재 문을 두들겼다.
똑똑-
"가주님... 케이입니다."
나직하지만 또박또박 정확한 발음.
그것은 분명 문 너머로 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문 안쪽에서는 답이 없었다.
그럼에도 케이는 기다렸다.
그저 묵묵히 기다렸다.
5분, 10분, 15분.
여전히 답이 없는 상황에 기사들이 케이를 부르려는 찰나.
"...아직 거기 있다면 들어와라."
문 안쪽에서 답이 들려왔다.
기사들의 몸이 우뚝 멈추고.
달칵-
케이가 서재 안으로 들어섰다.
***
조용한 기숙사 안.
멀린은 잠이 든 듯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때였다.
[찾았다!]
시리의 목소리와 함께 번쩍 떠진 멀린의 눈.
"어디냐?"
[저쪽!]
"그래?"
벌떡 상체를 일으킨 멀린이 2층 창문 밖으로 몸을 날렸다.
"아니, 멀쩡한 문 놔두고 왜...?"
입을 그렇게 투덜거렸지만, 윈스턴도 그런 멀린을 따라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아발론 일행은 빠르게 멀린의 뒤를 쫓았다.
그로부터 1시간 뒤.
부단히 시리가 알려준 길을 따라 도착한 멀린 일행은 거대한 쇠문을 마주했다.
끝도 없이 늘어선 담장과 삐죽삐죽 날카로운 철장.
귀족의 저택을 방문한 이들이라면 그것이 저택으로 들어가는 일종의 관문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외문을 통과하고 한참이 지나야 진짜 주거지가 나오는 구조.
그런데 멀린 일행이 마주한 담벼락의 규모가 범상치 않았다.
이를 본 제플린이 놀라 물었다.
"지, 진짜 여기 맞습니까?"
그의 시선은 철장에 새겨진 깃털이 검으로 된, 독수리 문장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그러나 그뿐만이 아니었다.
사샤와 윈스턴.
둘 다 놀란 눈으로 문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반응에 멀린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왜? 아는 곳이야?"
"어... 안다고 해야 하나... 저 문장 모르십니까?"
"귀족가 문장이 어디 한두 개야? 그걸 내가 어찌 다 알아?"
"저건 유명한 건데...."
"저게 뭔데?"
"검(劍)수리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멀린의 재촉에 대한 답은 사샤에게서 나왔다.
"검수리. 4대 공작가 중 하나인 브륜힐트 공작가의 문장이에요."
사샤의 답에 멀린의 시선이 브륜힐트 공작가의 상징인 검수리에 닿았다.
잠시 뒤.
"케이 이 자식...."
쾌활한 목소리가 멀린에게서 흘러나왔다.
"있는 집안 자식놈이었잖아? 수업료 올려 받아도 되겠네."
"......."
싱글벙글인 멀린의 얼굴로 '저걸 보고한다는 게 고작 그런 소리냐!'는 듯한 시선 3쌍이 날아와 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