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시간(4)
2시간(4)
점심시간을 맞아 조용하던 대련장이 시끌벅적해졌다.
"뭐야? 무슨 일이야?"
"엔조랑 멀린이랑 한판 붙는다는데?"
"멀린?"
"왜 있잖아. 3학년 차석."
"아, 그 평민?"
어느새 소문을 들은 생도들이 3번 대련장으로 바글바글 모여들었다.
무료한 점심시간, 엔조와 멀린의 대련은 작은 여흥 거리가 된 것이다.
더욱이 3학년 차석이라지만, 지금까지 멀린의 실력은 여전히 베일에 싸여있었다.
"그런데 이거 싸움이 되나?"
"엔조가 윈스턴과 제플린도 이겼다며?"
소문을 듣고 모여든 이들 중 멀린의 승리를 점치는 이는 없었다.
"엔조가 이긴다에 20골드."
"나도 엔조한테 50골드 건다."
"...이러면 내기가 안 되잖아?"
심지어 한 생도가 둘의 승부로 도박판을 만들기도 했다.
엔조에게 쏠린 판돈에 도박판이 엎어지려는 찰나.
"멀린에게 1천 골드."
큰손이 등장했다.
작은 도박판에 묵직한 자루가 얹어졌다.
"어...?"
"머, 멀린?"
턱-
내기 당사자가 나타나 본인에게 1천 골드를 걸자 모두가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도 멀린에게 200골드."
"똑같이 200골드."
이에 질세라 윈스턴과 제플린이 판돈을 얹었다.
큰손들의 등장에 엎어질 뻔한 도박판이 다시 살아났다.
돈을 건 멀린은 대련장의 중앙으로 나섰다.
그곳에는 먼저 도착한 엔조가 몸을 풀고 있었다.
반면 멀린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엔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졸린가?"
"응? 아, 조금."
몸이 나른 나른해질 시간이었다.
멀린을 보며 엔조가 날카롭게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라. 곧 그 자리에 눕혀주마. 푹 잘 수 있게."
매서운 눈의 엔조를 바라보며 멀린은 가볍게 귀를 후볐다.
일말의 긴장감도 없는 태도였다.
반면 엔조는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무기를 들어라."
"응?"
"무기조차 들지 않은 상대를 쓰러트렸다는 오명을 쓰고 싶지는 않다."
"아, 그래? 괜찮겠어?"
"...뭐?"
"아냐. 들지 뭐."
멀린이 휘적휘적 대련장 한쪽에 비치된 수련용 검을 집어 들었다.
"형편없군."
걸음걸이 하며 흐느적거리는 모습까지.
멀린의 모든 것이 엔조의 이맛살을 구겨지게 했다.
그는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화를 억눌렀다.
'조금만 참자. 곧... 곧 시작된다.'
참아왔던 분노를 대련에서 모두 쏟아부을 작정인 엔조.
스르릉-
검집에서 엔조의 검이 뽑혀 나왔다.
이에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와우, 저 무늬 저거... 설마?"
"디미토리 공방에서 1년에 딱 3자루만 만든다는 그거지?"
"예약 대기자가 워낙 많아서 돈 있어도 못 구하는 물건이라던데...."
수련용 검의 멀린과는 달리 엔조의 애검은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풀풀 날렸다.
"준비됐나?"
"뭐 이렇게 오래 걸려? 난 아까부터 준비 끝냈는데?"
검조차 뽑지 않은 멀린의 모습은 누가 봐도 준비가 덜 된 이였지만, 본인이 그렇다는데 엔조도 더는 뭐라 하지 않았다.
엔조가 검 끝으로 멀린을 가리켰다.
곧 명검을 타고 마나의 푸른 빛이 아른거렸다.
"시작한다?"
"오호?"
지켜보는 이들의 눈에 긴박감은 전혀 없었다.
모두 엔조가 멀린을 얼마나 빨리 이기는지에만 흥미가 있을 뿐이었다.
"들어와라."
드디어 시작된 둘의 대련.
선공을 양보한다는 듯, 혹은 한 수 가르쳐 주겠다는 듯한 엔조의 말에 멀린이 시큰둥하게 답했다.
"오냐."
그리고.
츠팟!
멀린의 신형이 사라졌다.
"......?!"
대련을 지켜보고 있던 좌중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누구도 멀린의 움직임을 본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구보다 놀란 것은 엔조였다.
'무슨?!'
비록 형편없는 상대라 여기기는 했지만, 놈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순간 놈의 움직임을 놓치고 만 것이다.
엔조가 놀라 눈을 치켜뜬 사이 그의 우측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왔다. 어쩔래?"
빠각-
엔조의 시선이 우측으로 돌아간 순간 그의 뒤통수에 묵직한 충격이 가해졌다.
실로 어마어마한 충격이었다.
엔조는 고개가 앞으로 쏠리며 정신이 아득하게 멀어져 갔다.
이른바 기절하기 일보 직전의 상태.
"어허, 온갖 똥폼 다 잡아 놓고 한 방에 가면 쓰나?"
이를 가만히 두고 볼 멀린이 아니었다.
쓰러지고 있는 엔조의 얼굴로 멀린이 검집째 휘둘렀다.
빠각-
고꾸라지고 있던 엔조의 얼굴이 뒤로 튕겨 올랐다.
그와 함께 두 가닥의 핏줄기가 흩날렸고 동시에 엔조의 입에서 새하얀 무언가가 사방으로 튀었다.
뒤통수에 한 방.
면상에 한 방.
단, 두 방이었다.
명검을 들고 거들먹거리던 엔조가 정신줄을 놓아 버린 것이 말이다.
"난 그냥 주먹으로 해결 보려 했는데, 네가 연장 들라고 한 거다?"
씨익 웃어 보인 멀린이 소나기처럼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마나 조차 담지 않은 그저 평범한 공격.
하지만 아무리 느리고 평범한 공격도 기절한 상태에서는 속수무책으로 얻어맞을 수밖에 없었다.
퍽-
"새꺄, 평민은 무슨 사람도 아니냐!"
퍽-
"귀족은 무슨 금똥이라도 싸지르나 봐? 진짜 그러면 내가 인정한다!"
퍽-
"똑같이 처먹고 똑같이 똥 싸지르는 사람인데, 뭔 평민을 그따위로 무시해!"
의식의 흐름대로 내뱉어지는 말과 그에 따라 휘둘러 지는 검집.
퍽-
마지막으로 뒤통수에 한 번 더 얻어맞은 엔조가 돌 맞은 개구리처럼 바닥에 대 자로 뻗어버렸다.
"......."
장내가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
그들은 너무도 큰 충격에 빠져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입학 이래 평민이라며 멀린을 무시하던 이들.
3년간의 무시가 경악으로 바뀌는 데에는 고작 2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 걸렸을 뿐이었다.
반면, 윈스턴과 제플린은 굳은 낯빛으로 의견을 주고받았다.
"...봤냐?"
"아니... 넌?"
"못 봤다."
처음 멀린이 모습을 감춘 순간, 그 누구도 그의 모습이 어떻게 사라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공간을 격하고 나타나는 블링크를 어찌 눈으로 좇겠는가.
멀린이 기묘한 수를 쓸 것이라고 예상하던 자신들도 움직임을 놓쳤는데 엔조라고 별수 있으랴.
거기에....
"뒤통수 후려갈긴 거... 매직 애로우였지?"
"내가 딴 거는 못 봐도 그건 확실히 봤다."
"역시 그랬군."
옆에서 목소리를 들려주고 매직 애로우로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멀린의 전법.
일전에 매일같이 매직 애로우에 두들겨 맞은 그들이 아니었다면 알아보기 힘들 정도의 절묘한 꼼수였다.
실제 대련을 구경하고 있던 이들 대부분이 엔조가 무엇 때문에 앞으로 고개를 숙인 것인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저건... 못 막지."
"알고도 반응 못 하는데 어찌 막겠냐."
이미 첫 움직임을 놓치고 뒤통수에 매직 애로우를 허용하는 순간 대련은 끝났다고 봐야 했다.
"콱 뒈지려고."
너덜너덜해진 검집을 집어 던진 멀린.
이를 지켜보고 있던 케이가 작게 중얼거렸다.
"이, 이미 죽인 거 아닌가?"
탁탁-
가볍게 손을 털어낸 멀린이 자리를 옮겼다.
그의 이동에 따라 생도들이 좌우로 갈라졌다.
터벅터벅 걸음을 옮긴 멀린이 도착한 곳.
"보자...."
그곳은 대련 시작 전 도박 좌판이 벌어진 곳이었다.
"그래서 내 배당률이 얼마라고?"
"...어... 그게...."
환하게 웃는 멀린을 보고 도박판을 벌인 생도가 연신 비질 땀을 흘려 댔다.
이는 멀린의 아카데미 복귀 1시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
"아들!"
"엔조야!"
양호실 문이 벌컥 열리며 중년의 사내와 노인이 허겁지겁 들어왔다.
"허...."
"이, 이 무슨 꼴이냐!"
교장과 부교장은 처참한 몰골로 변한 엔조를 황망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제네시스 아카데미를 세운 파웰스 자작가.
그들은 아카데미를 키우고 제국에 내놓은 공을 인정받아 백작가로 승작할 수 있었다.
아카데미를 다니는 학생들 대다수가 유명 귀족 가문의 자제들이었고 그들은 파웰스 백작가의 든든한 힘이 되어 주었다.
그로 인해 파웰스 백작가의 위세는 나날이 커지는 중이지만, 그들의 가문에는 문제점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손이 귀하다는 것이었다.
"감히 어떤 놈이 우리 5대 독자를!"
엔조의 아버지인 부교장이 길길이 날뛰었고.
"누구 짓이냐."
교장은 차분하지만 차가운 분노를 토해냈다.
죽은 듯 기절한 엔조의 곁을 지키고 있던 위원회의 일원이 교장에게 세세한 사정을 전했다.
"이, 이, 이놈이!"
교장이 기어코 불같은 노성을 토해냈다.
그의 아들인 부교장의 입에서도 불길이 뿜어져 나왔다.
"이를 그냥 두고 봐서는 안 됩니다! 관련된 놈들을 아주 깡그리 징계처분 내려야 합니다."
"아암! 그래야지!"
아들의 성난 외침에 교장 역시 동의하는 바였다.
귀한 후계자가 만신창이가 된 탓에 이성적인 판단이 흐려진 것이다.
아카데미 최상위 권력자 둘의 분노에 생도위원회 일동이 오한을 느꼈다.
이는 멀린이 복귀한 지 1시간 30분경 벌어진 일이었다.
***
한편 개운하게 몸을 풀고 강의실로 복귀한 멀린.
그를 기점으로 상급반에 싸늘한 정적이 감돌았다.
모두가 힐끗힐끗 멀린을 살피기 바빴다.
평소 같지 않은 분위기에 멀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용하네? 요즘 면학 분위기 좋다?"
"...탑주님 때문이잖아요."
"내가? 나 아무 짓도 안 했는데?"
"하아... 그런 게 있습니다."
사샤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대수롭지 않게 신경을 끈 멀린이 설레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언제 아발론 문 다시 열어주려나?"
"그냥 직접 문 열고 들어가시면 되잖아요?"
"에이, 그러면 승리한 성취감이 없잖아. 남이 열어준 문에 들어가야 제대로지."
"네... 그러시겠죠."
"아무튼, 언제 열어주려나? 위원장쯤 되는 놈이니 일 처리 빨리하겠지?"
"...병상에서 일어날 수만 있다면 빨리해줄 거 같네요."
태연하기 짝이 없는 멀린의 모습에 제플린과 윈스턴은 고개를 내저었다.
애초에 그런 멀린에게 익숙해진 케이는 신경조차 쓰지 않고 조금 전 멀린이 던져준 새로운 마법 이론을 살피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렇게 조용한 분위기에서 곧 시작될 수업을 기다리던 그때.
드르륵-
강의실의 앞문이 열렸다.
교수인 줄 알았던 생도들은 난데없이 등장한 일단의 무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도위원회?"
"쟤들이 여긴 왜?"
5명의 소년, 소녀는 이번 생도위원으로 뽑힌 이들이었다.
왼쪽 팔에 찬 완장이 그들이 생도위원회라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
뚜벅 뚜벅-
단체로 무리 지어 등장한 그들이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생도위원회가 최종적으로 도착한 곳은 멀린 일행이 모여있는 곳이었다.
"응? 뭐야?"
막 책상에 엎어지려던 찰나 난데없는 이들의 등장에 고개를 든 멀린.
그가 녀석들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생도위원 중 한 명이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펼쳤다.
그러고는 큰 목소리로 읽어갔다.
"멀린, 케이, 사샤 레드포드, 제플린 알렌, 가웨인 클라크. 이상 5인은 금일 12시경 엔조 파웰스를 직접 폭행하거나 혹은 이를 방임하다."
"엉?"
"뭐, 뭐야?!"
모두가 화들짝 놀라 생도위원회를 바라보았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생도위원회가 낭독을 이어갔다.
"그 죄가 엄중한 점을 감안하여 생도 징계위원회는 멀린 외 4인을 징계회에 회부조치 않고 즉각 징계 처리함을 알린다."
이에 윈스턴과 제플린이 길길이 날뛰었다.
"지, 징계?"
"아니, 지금 기사 지망생이란 놈이 좀 얻어터졌다고 우릴 징계 처리한다는 거야?"
"그리고 우리는 그냥 보기만 했는데 왜 징계냐고!"
"지켜본 게 죄면 거기 있던 놈들 전부를 징계 처리해야지!"
두 사람이 옳은 소리를 했지만, 생도위원은 눈썹 하나 꿈쩍이지 않았다.
"징계 명세는 다음과 같다. 케이, 사샤 레드포드, 제플린 알렌, 가웨인 클라크. 위 4인은 폭행을 보고도 방임한 바 2개월 정학에 처한다."
"허...."
"음...."
여기저기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생도위원이 멀린을 바라보며 보다 큰 목소리로 낭독했다.
"멀린. 위 생도는 같은 생도를 무자비하게 폭행한 사실이 명확하고 죄질이 악독함이 인정된바 즉각 퇴학 조치한다. 이상. 징계 위원장 부교장 버클 파웰스."
강의실에 정적이 감돌았다.
모두가 어이없어하면서도 잔뜩 굳어 있었다.
오로지 한 명.
퇴학의 당사자인 멀린만이 재밌다는 듯 방긋 웃었다.
그가 말했다.
"이야... 일 처리 속도 하나는 진짜 기가 막히게 빠르네."
물론, 그 일 처리가 자신이 원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였지만, 빠른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장 4달 만의 아카데미 복귀.
그리고 정확히 2시간 만에....
멀린에게 퇴학 조치가 떨어졌다.
한편, 그런 멀린을 조심스럽게 살피는 눈이 있었으니.
'괘, 괜찮은 걸까?'
멀린을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바라보는 케이.
물론 그가 멀린을 걱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 이러다가 아카데미가 사라지는 거는 아니겠지?'
케이는 아카데미의 앞날을 걱정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