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시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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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숙사를 나선 멀린 일행은 복도에서 일단의 무리와 마주했다.
그들의 선두에 선 소년.
그가 환히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오, 사샤 양, 어디 가셨나 했더니 여기 계셨군요."
살짝 구릿빛의 피부와 탄탄한 체구.
짙은 은발에 계란형,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미소년.
복도에서 마주친 그는 오로지 사샤밖에 안 보이는지 그녀에게 일직선으로 다가갔다.
그 뒤로 생도위원으로 보이는 이들이 줄줄이 달려왔다.
"오늘 오후 일과 전에 그대의 얼굴을 볼 수 있다니 운이 좋군요."
"하아... 엔조...."
"엔조 경이라 불러주시지요."
짙은 한숨을 쉬는 사샤.
멀린이 눈으로 저 느끼한 놈이 그놈이냐고 묻자 케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딱 봐도....'
멀린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엔조라는 놈을 훑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유형이네.'
과거에도 저런 놈이 있었다.
얼굴도 반반하고, 실력도 제법 있고, 가문이란 뒷배경도 좋은.
거기에 돈도 많았다.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멀린이 만난 그런 유형의 인간들에게 꼭 하나씩 빠진 게 있었으니.
바로 '인성'이었다.
'이런 놈들은 대개 제 잘난 맛에 사는 재수탱이들인데.'
눈앞의 엔조를 보는 순간 감이 왔다.
이놈도 그런 놈이란 것을.
그렇게 멀린이 엔조를 훑던 순간 그와 엔조의 시선이 딱 마주쳤다.
"응?"
사샤와 친분을 만들기 위해 그녀 주변 사람들 전부를 파악해둔 엔조.
그는 갑자기 사샤 옆에 나타난 선 얇은 미소년에 살짝 경계하며 인상을 썼다.
"사샤 양... 이쪽은?"
멀린을 두고도 굳이 사샤에게 물어보는 엔조.
멀린이 이를 두고 볼 리 없었다.
"멀린이다."
엔조가 자신과 사샤의 대화를 쑥 끊고 들어온 멀린을 곱지 않은 눈길로 응시했다.
그러나 곧 그런 표정은 사라지고 웃음이 대신했다.
가식적인 미소였다.
"아아, 그렇군요. 저는 엔조 파웰스라고 합니다. 혹시 학년이...?"
"3학년."
"3학년? 3학년에 그대와 같은 사람이... 아! 아버지가 말씀하신 그 생도였군요! 국립과학연구소에서 특별요청하여 실습 기간이 길어진 생도가 한 명 있다고.... 매우 유능한 인재라지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리 말하며 엔조가 손을 내밀었다.
자신의 앞으로 내민 손을 빤히 바라보던 멀린이 이를 마주 잡았다.
그 모습에 사샤와 케이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반대로 제플린과 윈스턴은 '에이 설마? 진짜 대화만 하려고?'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악수한 상태에서 엔조가 물었다.
"혹시 가문이?"
"그런 거 없는데?"
"평민?"
"응."
"아하. 그렇군."
그 순간 멀린은 엔조의 눈에 스친 경멸을 볼 수 있었다.
말투 또한 어느새 달라져 있었다.
빠르게 손을 빼낸 엔조.
멀린이 피식거렸다.
'보통 이다음에 손을 닦는 순서인가?'
아니나 다를까.
슬쩍 손을 뒤로 돌린 엔조가 바지에 손을 슬슬 문질렀다.
'이야, 어쩜 이렇게 한치의 예상을 안 벗어나냐?'
그나마 다행인 점은 손수건을 꺼내서 닦지 않았다는 것?
멀린의 조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때 엔조가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사샤 양과는 무슨 관계?"
"그건 네가 알 필요 없고."
멀린의 말에 엔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때 엔조의 옆에 있던 다른 3학년 생도가 다가와 그의 귀에 속닥거렸다.
무언가를 전해 들었는지 멀린을 바라보는 엔조의 경멸이 더욱 짙어졌다.
귓속말이 끝나기 무섭게 엔조가 비아냥거렸다.
"아아, 그쪽이 그 유명한 지난 학기 차석이군."
"...나 유명해?"
"운 좋게 수석과 차석을 두 멍청이가 차지했다는 이야기는 잘 들었지."
엔조의 시선이 케이와 멀린을 스쳤다.
그러고는 더 이야기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돌려 사샤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마치 이 공간에서 너희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명백한 무시였다.
"혹시, 사샤 양 시간 되십니까? 이번에 좋은 차를 구해왔는데 시간을 내주신다면 대접을 해드리고 싶습니다."
언제 경멸 어린 표정을 지었냐는 듯 화사해진 엔조의 얼굴.
반대로 사샤는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보았기 때문이다.
멀린의 왼쪽 입꼬리가 위로 17도 정도 치솟는 것을 말이다.
이런 사실은 케이와 잡부 콤비 역시 알아차렸다.
케이는 그간 멀린에게 시달린 트라우마에 안색이 창백해졌다.
'주, 죽일 거야... 탑주님이 죽일지도 몰라!'
반대로 잡부 콤비는 묘한 기대감으로 들뜬 표정을 지었다.
'넌 뒈졌다!'
'그렇지! 자고로 지성인의 대화는 주먹으로 주고받는 법!'
그러나 모두의 기대와는 달리 멀린은 너무도 침착했다.
"이봐."
"아직도 거기 있었나?"
"아까부터 계속 있었는데?"
"...그래서 용건은?"
"네가 이번 생도위원장인가 뭐시기고 동아리를 전부 폐쇄하려고 한다지?"
"난 또 뭐라고.... 오해가 있군. 전부가 아니라 학업에 방해되는 동아리만 폐쇄하는 거다."
"어떻게?"
"뭐?"
멀린의 물음에 엔조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방금 말했을 텐데? 학업에 방해되는...."
"아아, 그건 알아들었는데. 대체 무슨 기준으로 어떤 동아리가 학업에 방해가 되고 안되고를 정한다는 건데?"
"그건 당연히 기사로서의 소양을 쌓는 일과 연관이 없는 동아리다."
"아하, 칼질하는 거랑 상관이 없으면 전부 폐쇄다?"
"뭐, 틀린 말은 아니군."
멀린의 왼쪽 입꼬리가 2도 정도 더 올라갔다.
"이야, 기준 하나는 명확하네."
"그러는 네놈은 무슨 자격으로 내게 그런 질문을 하는 거지?"
"나? 마술 동아리 부장."
멀린의 답변을 들은 엔조가 싸늘한 표정에 한껏 비아냥을 담아 읊조렸다.
"이거, 아주 대단하신 분이셨네."
그가 옆에선 위원회 일원에게 대놓고 들으라는 듯 큰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동아리 철거 시 다른 곳보다 그 마술 동아리인지 뭔지를 최우선으로 치워버려. 먼지 한 톨 남기지 말고."
"알겠습니다."
이제 어찌할 거냐는 듯 엔조가 비웃음을 담아 멀린을 바라보았다.
이에 멀린의 왼쪽 입꼬리가 다시 2도 정도 올라갔다.
그가 옆에 사샤에게 말했다.
"사샤, 내가 궁금한 게 있는데 말야."
"네?"
"기사는 무슨 밥도 안 먹고 책도 안 보고 음악도 안 듣냐?"
"그건 아닙니다."
"아, 나는 어떤 분이 기사가 소양을 쌓는 데 그딴 건 필요 없다고 해서 그런 줄 알았지."
"그렇군요."
"와, 그 말대로라면 칼질하는 것과 전혀 상관없는 마.술 동.아.리 들어온 사.샤 너.는. 기사 소양 쌓는 데 실패 한 거네?"
"그렇게 되겠군요."
사샤가 마술 동아리라는 것은 처음 듣는지 엔조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를 슬쩍 보고 멀린이 어깨를 오들오들 떨어 보였다.
"어휴. 무서워라. 이거 뭐 그 작자 말대로라면 소양 쌓은 기사는 그냥 칼질만 하는 살인귀네, 살인귀야. 허허."
조금 전 자신이 한 그대로.
아니, 그보다 곱절로 되돌려 받은 엔조의 하관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으득-
엔조에게서 나온 이가 갈리는 소리를 기점으로 멀린의 입이 본격적으로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아, 그리고 사샤 혹시 이상형이 어찌 되냐?"
"네?"
눈을 동그랗게 뜬 사샤에게 멀린이 질문을 던졌다.
"혹시 자기 주관 뚜렷한 거는 좋은데 밑을 살필 줄 모르는, 그런 독불장군 같은 남자는 어때?"
무언가를 눈치챈 사샤.
그녀가 정색하는 얼굴로 단호하게 답했다.
"싫습니다."
"아니면, 여자가 싫다고 대놓고 거절했는데도 자꾸 들러붙는, 눈치라고는 벼룩 간만큼도 없는 새끼는?"
"정말 싫습니다."
"생긴 것도 멀쩡하고 집안도 괜찮은 데다가 허우대도 좋아. 그런데 제 잘난 맛에 사는 재수탱이 같은 남자는?"
"딱 질색입니다."
사샤의 말이 끝날 때마다 엔조의 입에서 이갈리는 소리가 더더욱 커져갔고 그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다.
이를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케이와 잡부 콤비가 작게 중얼거렸다.
"우, 우와... 마, 말로 패고 있어."
"사실에 기반을 둔 정신 폭행이군."
"이건... 타격이 꽤 있겠어."
그러는 사이에도 멀린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그렇지? 그런 사람 만날 바에야 그냥 윈스턴이나 제플린을 만나는 게 낫겠지?"
"아뇨. 그건 아닙니다."
구경하다가 난데없이 '사실 기반 정신 폭행'을 당한 윈스턴과 제플린이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트렸다.
"이야, 우리 사샤가 남자 보는 기준 하나는 아주 명확해요! 어떤 분의 기준이 명확한 거처럼."
"감사합니다."
그렇게 일단락이 된 멀린과 사샤의 대화.
멀린은 뜨끈뜨끈하게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능청스럽게 물었다.
"어? 아직 안 갔어? 이런... 있는 줄 몰랐네."
"......."
멀린의 유들거림에 엔조의 두 눈에서 화르륵 불똥이 튀었다.
"네놈...!"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말문이 막힌 듯 버럭버럭 성질만 내는 엔조.
그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멀린에게 집어 던졌다.
턱-
멀린의 가슴팍에 맞고 떨어진 것.
그것은 새하얀 장갑이었다.
"결투다!"
멀린은 바닥에 떨어진 장갑을 보고는 제 팔을 쓸어 올렸다.
'어우, 소름이야... 아직도 이런 걸 하는 놈이 있네?'
과거에도 몇 없는 기사 놀음에 심취한 꼬맹이라니.
도발을 한 것은 그였지만 설마 주머니에서 장갑이 튀어나올 것이라고는 멀린 역시 예상하지 못했다.
'대충 흥분에서 달려들면 적당히 쥐어패고 말려고 했더니만....'
이렇게 알아서 판을 갈아주시겠다는데 이를 마다할 멀린이 아니었다.
속으로 웃음을 삼킨 멀린이 입을 열었다.
"결투? 내가 왜?"
"나를 그렇게 모욕해놓고 그냥 넘어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모욕? 내가? 언제?"
"네놈...."
뻔뻔 답변에 엔조의 입에서 또다시 이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멀린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유들거리며 답했다.
"거참... 대체 뭐 때문에 그러는지 모르겠네. 난 그냥 사샤랑 대화를 나눈 것뿐인데. 아무튼... 그 결투라는 거 내가 왜 해야 하는 거지?"
"넌 나를 모욕했고, 내 명예를 짓밟았다. 기사를 지망한다는 놈이 명예조차 모르는 거냐!"
"응, 몰라."
"......!"
점점 더 붉어져 가는 엔조의 얼굴.
케이는 '저러다가 얼굴이 곧 터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대충 된 거 같네.'
지금까지 열심히 채찍질했으니 이제는 살짝 당근을 던질 차례.
"뭐, 네가 결투를 하고 싶어 하는 마음은 알겠는데 말야... 나는 기사의 명예보다는 확실한 보상에 움직이는 사람이거든."
"보상? 하... 이런 놈이 우리 아카데미의 생도라니. 역시 평민 출신은 어쩔 수 없는 건가...."
"뭐, 아무렇게나 생각하시고. 나와 결투를 하고 싶으면 명예 따위의 허울 없는 거 말고 확실한 보상을 들고 와."
"그 말인즉슨, 결투가 아닌 내기를 하자?"
"눈치는 빨라서 좋네."
멀린이 씨익 미소지었다.
이에 엔조도 비릿한 미소로 마주했다.
"뭘 원하지?"
"학과 과목과 상관없는 동아리 폐쇄 안건 전면 취소."
"하, 이미 승인이 떨어진 일을 되돌려라? 그게 쉬운 일이라 생각하는 거냐?"
"듣자 하니 생도위원장에 교장이 할아버지라며? 그런데 그 정도도 못 하냐?"
"......."
엔조가 멀린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이어진 멀린의 추가 조건.
"아, 거기에 우리 동아리 방을 가장 좋은 곳으로 옮기는 것까지."
"하...."
엔조가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잠시 고민에 잠겼던 그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오 정말?"
"단!"
"아, 그렇지. 너도 조건을 걸어야겠지. 뭔데, 말해 봐."
"내가 이긴다면 네놈은 제 발로 이 아카데미를 나가라. 우리 아카데미는 네놈 따위가 있을 곳이 아니니까."
제 딴에는 제법 위협적인 조건이라 생각했지만, 멀린은 흔쾌히 승낙했다.
"난 또 뭐라고. 좋아! 내기 성립!"
이에 윈스턴과 제플린은 고민에 빠졌다.
"야, 이거 누구를 응원해야 하냐?"
"글쎄...."
재수 없는 엔조 새끼의 머리통이 깨지는 것을 보고 싶었지만, 그보다 더 재수 없는 멀린의 자퇴는 그들에게 너무 매혹적이었다.
"결투 일시는 네놈이 정해라. 이쪽은 언제든지 받아 줄 수 있으니까."
"이야, 너무 여유로운 거 아냐?"
"너 같은 놈을 상대하는 데 긴장할 필요가 있을까?"
"음... 그래? 그러면 굳이 길게 끌 필요 있나. 후딱 끝내자."
"잘 됐군. 나도 할 일이 많아서. 지금 당장 3번 대련장으로 와라."
그리 말한 엔조가 몸을 돌려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
엔조의 뒤를 따르는 한 소년과 케이의 두 눈이 마주쳤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케이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를 눈치챈 사람은 멀린 한 명뿐이었다.
엔조 일당이 떠나가자 멀린이 케이에게 물었다.
"누구야?"
"...동생... 입니다."
작게 답한 케이.
무언가 우울함이 감도는 목소리에 멀린은 사연을 캐묻지 않았다.
대신에 쾌활한 목소리로 모두에게 들리게 말했다.
"봐, 난 분명히 대화만 했다?"
마치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듯 말하는 멀린.
이에 사샤가 어이없다는 눈빛을 보냈다.
"왜! 뭐! 난 진짜 대화로 풀려고 그랬다고! 쟤가 먼저 장갑 던진 거 봤잖아?"
"네... 그러시겠죠."
"자, 가자! 후딱 끝내자고!"
이제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사샤.
그녀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거기에 어울려준 건 나니까.'
속 시원하게 할 말을 전부 하고 나니 후련함이 생겨난 사샤였다.
그녀는 흡족 얼굴로 낄낄거리며 걸어가는 멀린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빠르게 그를 쫓았다.
이는 4개월 만에 아카데미에 돌아온 멀린이 30분 만에 벌인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