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가장 처음 변화를 눈치 챈 것은 이나연이었다.
그녀는 막 중형 악마 하나를 단신으로 쓰러뜨리고 다음 목표를 찾아 이동하던 중이었다.
때마침 적당한 크기의 좋은 사냥감이 보이기에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놈의 정수리에 칼침을 박아 넣으려 이동했다.
악마 역시 이나연을 발견하고, 그들은 서로를 향해 내달렸다.
그런데 웬 걸.
돌연 악마가 행동을 멈췄다.
마치 잘 돌아가던 기계의 전원을 리모컨으로 꺼 버린 것처럼 돌연 멈춰 서는 모습은 누가 봐도 부자연스러웠다.
“이거 왜 이래?”
이나연은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다가갔다.
그녀가 코앞까지 다가왔음에도 악마는 미동조차 없었다.
혹시 몰라 칼끝으로 쿡 찌르자, 악마는 퍼서석 소리를 내며 가루가 되어 흩어져 버렸다.
“어? 뭐야? 왜 갑자기 죽었지?”
비단 이나연뿐만이 아니다.
전장 전역에서 같은 증상을 발견하는 구원자들이 속출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모든 악마들의 행동이 멈춰 있었다.
그들은 툭 건드리기만 해도, 심지어 조금 바람이 강하게 부는 것만으로도 형체를 유지하지 못하고 가루가 되어 버렸다.
‘설마…….’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린 이나연의 심장이 격하게 뛰기 시작했다.
몸에 차오르는 열기의 정체가 희열이라는 것을 파악한 그녀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아!”
그녀를 따라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환호성인지 괴성인지 모를 외침은 들불 번지듯 빠르게 퍼지고, 정신을 차려 보니 모든 구원자들은 서로를 얼싸안은 채 기쁨을 토해 내고 있었다.
그들은 단 한 번도 몸에서 떼어 놓은 적 없던 무기를 내다 던진 채 눈물을 흘렸다.
너무 기쁜 나머지 호흡곤란을 호소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나연아!”
멀리서부터 한달음에 달려온 민서라가 이나연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녀도 민서라를 마주 안으며 서로 방방 뛰어 댔다.
“이겼어…… 우리가 이겼어! 시현 씨가 해냈나 봐!”
“흐아앙! 오빠…… 믿고 있었다고!”
기뻐서 흘리는 눈물은 굉장히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승리를 확신하기 힘든 싸움이었다.
그녀는 늘 시현을 믿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한 마음이 싹트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나 시현은 보란 듯 승리를 거머쥐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그를 향해 달려가고 싶었다.
그녀는 곧장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려 했다.
하지만 이변이 발생했다.
“어? 어어어어어?!”
누군가의 당황한 듯한 음성이 승리의 함성 속에서도 똑똑히 들려왔다.
그곳에서 이나연이 목격한 것은 반딧불을 연상시키는 녹색의 빛에 휘감겨 있는 정화 능력자 진우혁이었다.
“뭐야, 이거 뭐야! 나 왜 빛나?”
그는 자신의 몸에서 발생한 현상이 무엇인지 몰라 굉장히 당황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 글을 읽는 것처럼 허공을 응시하며 작게 중얼거리더니 당황하던 것을 멈췄다.
마치 자신의 몸에 발생한 이상 현상이 당연하다는 듯 행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
함께 진우혁의 상태를 지켜보던 민서라가 무언가를 깨달은 것처럼 돌연 탄성을 내뱉었다.
그와 동시에 하나, 둘, 빛에 휘감기는 구원자들의 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들 반응은 모두 한결같았다.
처음에는 당황하다가 무언가를 확인한 후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들 모두의 입가에는 함박웃음이 그려져 있었다.
“언니? 언니!”
또 다시 들려오는 다급한 목소리.
확인해 보니 빛에 휘감겨 있는 등대의 리더 한소현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의 다리에 눈물, 콧물을 총동원한 유서인이 매달려 있었다.
“이거 뭐임? 우리가 이긴 거 아니었음? 그런데 왜 갑자기…….”
“서인아.”
한소현은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고민하는 듯하더니 웃는 얼굴로 재차 입을 열었다.
“그동안 고생 많았어. 김영운도 여기에 있으면 좋았을 텐데…….”
“왜 마지막인 것처럼 말해? 왜?”
“보고 싶을 거야.”
그 말을 끝으로 한소현은 자취를 감췄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던 것처럼 돌연, 홀연히.
그녀의 다리에 매달려 있던 유서인이 허공을 끌어안았다.
그녀의 뺨에서 두 줄기 눈물이 또르르 떨어졌다.
오열하는 소리가 이나연의 귀를 아프게 했다.
울음은 유서인에게서만 터져 나온 것이 아니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전장에 승리를 기뻐하는 환호성이 가득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울음바다가 되어 있었다.
빛에 휩싸인 구원자들이 하나 둘 사라지고 있었다.
그들과 친하게 지내던 이들, 은혜를 주고받은 자들, 서로를 가족이라 여기던 이들.
모두가 갑작스러운 이별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
이나연은 떨리는 눈으로 민서라의 손을 잡았다.
도대체 언제부터였을까.
민서라 역시 녹색의 빛을 휘감고 있었다.
“이거……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다들 어디 가는 거야?”
내뱉는 목소리가 떨렸다.
민서라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억지 미소를 지었다.
“설마 이런 식으로 이별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적어도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 정도는 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러니까…….”
“보고 싶을 거야. 아주 많이.”
민서라는 이나연을 끌어안고 그녀의 등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어, 어디 가는 거야? 그냥 여기에 있으면 안 돼? 다시 돌아올 거야?”
불안에 떠는 이나연의 음성이 민서라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러나 그녀는 어떠한 약속도 해 줄 수 없었다.
애초에 사는 세계가 다른 두 사람이다.
아마 다시 만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던 민서라는 그 대신 다른 말을 남겼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시현 씨한테 가 봐야지.”
“……오빠?”
이나연은 동갑내기인 민서라를 상당히 좋아했다.
하지만 시현과 비교하자면 애정의 크기에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민서라의 몸이 빛에 휘감겼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두려워하는 이나연의 등을 민서라는 강하게 밀었다.
이나연은 거의 본능적으로 달렸다.
빠른 속도로 멀어져가는 이나연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민서라는 쓸쓸하게 웃었다.
“음…… 막상 이렇게 되니까 조금 외롭네. 나도 시현 씨한테 작별 인사 정도는 하고 싶었는데…… 나연이 네가 대신 해 주겠지?”
괜히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민서라의 곁으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강소하였다.
그는 이나연처럼 울고불고 하지 않고 담담하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수고 많았다.”
그 한마디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흐아아앙! 누나!”
“언니이이이!”
멀리서 격하게 눈물을 쏟으며 달려오는 쌍둥이와 신호석 등을 보며 민서라는 마지막으로 활짝 웃으며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 * *
<윤시현의 Re write의 완결을 축하드립니다.>
<현 시점을 기준으로 참가자 윤시현의 Re write는 1위입니다.>
<계약에 따라 참가자 윤시현의 인생을 다시 쓸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됩니다.>
<기회는 단 한 번뿐이니 신중하게 선택해 주세요.>
<잠시 후 차원문이 열립니다.>
“…….”
눈앞에 연달아 나타나는 메시지를 시현은 멍하니 응시했다.
드디어 끝났다.
시현의 발아래에는 숨이 끊어진 외신이 있었다.
어둠이 걷히고 시현을 위협하던 악마들은 더 이상 대지를 딛고 서 있지 못했다.
저들의 마지막 주인이 죽음으로서 그들 역시 함께 목숨을 잃은 것이다.
더 이상 이 땅에 악마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남은 생존자들은 평화로운 세상에서 무너진 문명을 복구하며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수고 많았다. 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은 틀리지 않았어.]
이자프가 시현의 업적을 축하해 주었다.
시현은 그에게 시선을 줬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인지, 무너진 건물 잔해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는 이자프의 숨결은 굉장히 얇았다.
아마 오래지 않아 그의 숨은 완전히 끊어질 것이다.
위대함의 파편조차 남아 있지 않은 지금의 그는 이자프라는 이름보다 정훈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려 보였다.
그의 앞에는 아르하가 누워 있었다.
화사한 금발을 흐트러뜨린 채 눈을 감고 있는 그녀에게서 생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만족해?”
그 질문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훈은 한 번 세상을 구했다.
그러나 마지막 전쟁에서 너무 많은 수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죽은 사람을 세는 것보다 살아남은 사람을 세는 것이 더 빠를 정도.
아마 전 세계를 다 뒤져 봐도 생존자의 수는 세 자리도 넘기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정훈은 역사를 다시 쓰고자 했다.
그 결과 정훈은 모든 것을 잃었다.
제 목숨도, 영혼도.
그런데도 그는 웃고 있었다.
[만족한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도?”
[그래. 확실히 많은 이들이 안타깝게 목숨을 잃기는 했지. 그래도 그때보다는 훨씬 나아. 애초에 모두를 구할 수 있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너는 나보다 수백, 수천 배의 사람들을 구했고. 나는 충분히 만족한다.]
“그러냐. 다행이네.”
[너에게는 미안한 짓을 했군. 어떻게든 보상을 해 주고 싶은데…….]
점점 정훈의 눈에서 빛이 사라져갔다.
[나도 가진 게 없어서. 줄 수 있는 게 없군. 승자로서의 특권을 잘 사용하라고 조언해 주는 정도인가?]
“아마 뭐가 되었건 너보다는 이기적으로 잘 써먹을 거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정훈은 눈을 감았다.
사실상 인류를 위해 이 남자가 얼마나 큰 희생을 했는지 알아주는 이는 시현 한 사람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씁쓸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너 때문에 상당히 고생을 하기는 했지만, 용서할게.”
반응은 없었다.
이 말을 조금 빨리 할 걸, 후회가 생겼다.
“……아.”
눈앞에서 무언가가 반짝였다.
반딧불을 닮은 녹색의 빛이다.
그것은 시현의 몸 전체를 휘감고 있었다.
<차원문이 열렸습니다. 새롭게 인생을 시작하고 싶은 시점을 머릿속으로 그려 주세요.>
“나는…….”
“오빠!”
우렁찬 외침이 시현의 귀에 닿았다.
화들짝 놀라 돌아보니 저 멀리, 전력으로 달려오는 이나연이 보였다.
모처럼 예쁜 얼굴로 태어난 게 아까울 만큼 표정이 가관이었다.
“다들 어디 가는 거야! 왜 나만 두고…… 가지 마!”
그녀는 오열했다.
뭔가 돌부리 같은 거에 걸려서 넘어지면 영화 같을 거라고 생각하며, 시현은 두 팔을 활짝 벌렸다.
곁에 있어 준다거나, 떠나지 않겠다는 그런 지키지도 못할 약속은 할 수 없으니 마지막으로 한 번 안아 주기라도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 매정한 시스템은 시현의 이별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그를 휘감고 있던 빛이 강해졌고, 세상이 백색으로 물들었다.
이나연의 통곡 소리가 귀에 맺히는 듯 했다.
시현은 아무 것도 없는 백색의 공간에서 둥둥 떠다녔다.
마치 요람에 담겨 있는 것처럼 편안한 느낌이었다.
“나연이한테는 미안하게 됐네. 민서라 씨나 진우혁 씨는 잘 돌아갔나? 이렇게 급하게 헤어질 줄 알았으면 미리 작별 인사라도 좀 해 둘 걸 그랬네.”
홀로 중얼거리고 있으려니 눈앞으로 메시지가 나타났다.
지금까지 반복해서 나타나던 메시지와 비교해 내용이 물에 번진 것처럼 글자가 다소 일그러져 있었다.
<참가자 윤시현의 Re write가 1위로 기록되었기에 특전을 부여받습니다.>
<오류 발생. 대상에게서 아무런 힘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현 상태에서 초월자로 가기 위한 힘을 부여할 경우 육신이 버티지 못합니다.>
<참가자 윤시현을 초월자로 만드는데 실패했습니다.>
“……누구 멋대로 초월자니 뭐니 하고 있어. 소름 끼치는 놈들일세.”
만약 아르하와 이자프가 목숨을 잃지 않았다면, 시현은 시스템에 의해 강제로 정훈과 같은 초월자가 되었을 것이다.
인간과 동떨어진 존재가 되는 것이다.
정훈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결과, 딱히 초월자의 자리에 매력을 느끼지 못한 시현으로써는 실로 다행인 이야기였다.
하지만 아직 메시지는 끝나지 않았다.
<특전을 변경합니다. 당신을 초월자도 만드는데 소진되었을 에너지와 인과율만큼의 소원을 이루어 드립니다. 원하는 바를 기록해 주세요.>
“그렇단 말이지?”
시현은 활짝 웃었다.
과장 하나 없이 초월자가 되는 것보다야 몇 배는 반가운 특전이었다.
무슨 소원을 빌면 좋을까, 시현은 기분 좋은 고민을 시작했다.
무려 인간을 초월자로 만들 수 있는 힘이다.
분명 시현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복제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야금야금 사용한 복권을 돌려받을 수도 있을 것이고, 그 이상의 것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한참을 고민하던 시현은 입을 열었다.
“내가 원하는 건…….”
* * *
마지막 전쟁에서 살아남은 모든 참가자들은 보상으로 인생을 다시 쓸 기회를 얻었다.
랭킹 1위인 시현 역시 마찬가지.
고민하던 시현은 고등학생 때로 되돌아갔다.
사실 시현의 인생이 뒤틀리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시절, 아버지가 사기를 당한 시점부터였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아들인 시현 앞에서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며 다녔고, 어머니는 빚을 갚으려 몸을 혹사시키다가 결국 몸을 망가뜨렸다.
즉, 그놈의 사기꾼만 해결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한 번 미래를 살아 본 시현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 후 시현의 인생은 잃어버린 행복을 되찾았다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의 사업은 더욱 크게 확장되었고, 집안은 부유해졌다.
아버지는 늘 자신감과 부성이 넘쳤으며, 어머니는 웃음과 건강을 되찾았다.
돈 때문에 걱정할 일도 없었고, 시현은 포기한 꿈도 쫓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몇 년인가 시간이 지났다.
“와…… 망할. 빌어 처먹을. 역시 안 되나?”
그 날로부터 몇 년이 지났지만, 시현은 자신이 60억에 당첨된 날을 아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어두컴컴한 인생에 빛이 들던 날인데.
동시에 약 올리듯 희망의 빛이 사라진 날이기도 했고.
어찌되었건 시현은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번호대로 복권을 구매했다.
이미 머릿속으로 수십, 수백 번은 더 되풀이한 상황인지라 번호를 잊어버린다거나, 잘못 적는다는 등의 실수는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첨자 목록에 그의 이름은 존재하지 않았다.
당첨 번호 자체가 바뀌어 있었다.
아마도 그 전장에서 60억을 전부 써 버린 것에 대한 인과율이 적용했을 것이다.
“어쩔 수 없나.”
아쉬운 마음과 함께 시현은 과거 복권이었으나, 이제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어진 종이 쪼가리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60억은 굉장히 큰돈이지만, 애초에 지금의 시현은 돈에 아쉬울 게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막 땅을 치며 후회할 정도로 안타깝지는 않았다.
어쩌면 마음속으로 반쯤 포기하고 있던 것이 원인이었을지도 모른다.
원래 기대를 하지 않으면 실망도 작은 법이니까.
무엇보다 그 돈이 없더라도 지금의 시현은 충분히 행복했다.
시현은 편의점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멍하니 핸드폰만 바라봤다.
앞으로 몇 분 후면 그 때가 찾아온다.
Re write라는 이름의 게임이 시작되던 그 때가.
‘앞으로 10초…….’
시현은 뚫어져라 핸드폰 액정만 노려봤다.
괜히 고동이 격해졌다.
‘3, 2, 1…… 0!’
마음속으로 수를 헤아리던 시현은 고개를 치켜들고 주변을 살폈다.
변한 것은 없었다.
그러나 마음을 놓기에는 아직 이르다.
시현은 편의점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건성건성 내뱉는 인사가 그리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대로네.”
“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수고하세요.”
변하지 않은 알바의 얼굴에 안도하며 시현은 편의점을 빠져나왔다.
“시현 씨.”
누군가가 시현을 불렀다.
익숙한 목소리다.
고개를 들어보니 그리운 얼굴이 보여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오랜만이네요.”
“그러게요. 쭉 만나고 싶었는데 소식이 닿아서 다행이에요.”
그녀는, 민서라는 시현 이상으로 활짝 웃고 있었다.
“그렇게 작별 인사도 못 하고 헤어져서 얼마나 아쉬웠는데요.”
그렇게 말한 민서라는 다가와 시현을 와락 끌어안았다.
반가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민서라는 그쪽 세상에 있을 때보다 훨씬 아름답고, 건강해 보였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듣고 싶어요. 제 이야기도 하고 싶고요. 괜찮으면 식사라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눌까요? 시간이 너무 이르다 싶으면 카페에 가도 괜찮고.”
“그 전에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는데, 먼저 거기부터 다녀와도 괜찮을까요?”
“그럼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민서라는 퍽 서운한 눈치였다.
“물론 민서라 씨도 같이요.”
“네? 저도요?”
“그럼요. 애초에 저 혼자 갈 거였으면 민서라 씨와의 약속 시간을 늦췄겠죠.”
“음…… 알겠어요.”
그녀는 길게 고민하지 않고 수락했다.
만나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시현을 향한 민서라의 신뢰는 더 이상 위가 없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약 5분 정도를 걸은 시현은 어느 건물 앞에 도착했다.
Re write가 시작되기 전 시현이 살던 원룸이다.
현재 원룸은 공실 상태였다.
예전에 시현이 자취를 하겠다고 구해 두고 쭉 사용하지 않은 채였다.
시현은 문고리를 잡았다.
노숙자가 들어와 몰래 살고 있지 않은 이상, 문 너머에는 관리되지 않은 텅 빈 공간만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열쇠로 잠금을 해제한 시현은 문고리를 돌렸다.
“저…… 시현 씨, 여기 방 안에 누가 있는 건가요?”
아무리 시현을 믿는다 해도 불안한 마음은 어떻게 할 수 없던 걸까.
민서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말해 줘도 상관없기는 한데, 그렇게 되면 서프라이즈가 안 되는데…….”
“서프라이즈요?”
“그러지 말고 딱 한 번만 저 믿어 줄래요?”
시현은 웃으며 손을 내밀었고, 민서라는 주저 없이 그 손을 잡았다.
“저야 항상 믿죠.”
“고마워요.”
시현은 그녀의 손을 잡은 채 원룸 안으로 들어갔다.
“……어?”
민서라는 크게 당황해했다.
당연히 가구 하나 없는 텅 빈 원룸이 나타나야 하건만.
놀랍게도 그녀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시현이 살던 원룸이 아닌, 황폐화된 도시였다.
잿빛으로 물든 하늘 아래에 펼쳐진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
뒤집어진 도로와 붕괴한 건물들, 그리고 망가진 신호등과 바닥을 굴러다니는 표지판, 식물에 잠식당한 폐차를 아무렇지도 않게 만나 볼 수 있는 세계.
“시현 씨! 이거…… 제가 생각하는 그거 맞죠?”
시현을 부르는 민서라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격한 감동도 느껴지는 듯했다.
“저도 직접 와 보는 건 오늘이 처음입니다. 에너지의 총량이 어쩌네, 인과율이 어쩌네 하면서 뭔 조건이 그리 많은지. 1위 특전이라 해서 엄청 기대했는데, 생각보다 조건이 많은…… 우와악!”
잠깐을 참지 못한 민서라가 시현의 손목을 붙잡고는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모든 힘을 잃어버린 시현과 달리 민서라는 아직 구원자로서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시현은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힘없이 끌려 다녀야 했다.
하지만 시현 이상으로 마음이 급한 민서라 덕에 두 사람은 5분이 채 지나지 않아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시현 씨는 얼마나 시간을 되돌렸어요?”
“고등학교 1학년 시절로 돌아갔는데, 그건 왜요?”
“저는 일곱 살 때까지 시간을 돌렸거든요. 그러니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하면, 저 거의 15년만이거든요? 그러니까 제가 먼저 안아 봐도 괜찮을까요?”
그녀의 조심스러운 제안에 시현은 웃으며 말했다.
“싫습니다.”
그러고는 굳게 닫혀 있는 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굳이 멀쩡한 문 놔두고 건물의 유리창을 깨며 누군가가 뛰어내렸다.
마지막에 만났을 때보다 두 배는 길어진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그녀는 소리쳤다.
“이, 이 나쁜 놈들아!”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는 그녀를 보며 시현은 생각했다.
‘너무 전력인 거 같은데…… 쟤는 좀 약해져도 될 거 같은데 여전하네. 지금의 내가 받았다가는 어디 하나 부러질 거 같기도 하고…….’
민서라를 앞에 세울까 하는 마음도 있지만, 역시 마지막 순간이 마음에 걸렸다.
각오를 다진 시현은 두 팔을 벌렸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이나연은 시현의 품에 뛰어드는데 성공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