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아…… 성질나네.”
시현은 충동적으로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그 모습이 환희에 젖어 있는 외신을 더욱 기쁘게 한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표정, 손짓을 총동원해 자신이 느끼는 분노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하지만 외신이 하나 착각하고 있는 게 있었다.
그가 생각한 것처럼 시현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대한 좌절을 분노로 변환시켜 표출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30분은 자신이 가진 전력을 쏟아 내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이자프처럼 몇 날 며칠을 싸워야 할 정도로 에너지의 총량에 비해 결정력이 부족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현이 짜증을 느끼는 대상은 외신이 아닌 이자프였다.
“이번 전투가 끝나고 나면 다음에는 그 망할 자식을 못 걸어 다닐 수준으로 두들겨 패 놓으려 했는데, 이렇게 되면 그렇게 못 하잖아.”
원래라면 60억을 가지고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을 시현을 이쪽 세계로 끌고 온 것에 대한 원망은 아직까지도 남아 있었다.
공공의 적을 상대해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손을 잡고 있다지만, 기회가 되면 꼭 한 번 이자프를 자신의 발아래에 둘 계획이었건만.
이제 그 꿈은 이룰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물론 하고자 하면 가능이야 하겠지만, 시현은 아군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 죽어 가는 사람의 뒤통수를 깔 만큼 악랄하지 못했다.
그러니 시현의 짜증은 당연한 것이었다.
“아니지.”
씩씩거리던 시현은 한 가지 묘책을 발견했다.
“이자프가 힘을 다 소진하기 전에 저놈을 죽이면 되는 거잖아. 그 다음에는 그 자식이 기어 다니지도 못할 정도로 패 주면 되고.”
[……다 들린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이자프의 음성이 들려왔으나, 시현은 못 들은 척했다.
지금의 상황이 넋이 나가도록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외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1:1로, 고작 30분도 되지 않는 시간 안에 나를 이기겠다고 말하고 있는 건가? 이 미친 인류는?]
외신은 강하다.
한 번 인류에게 패배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류 자체의 가능성을 얕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다르다.
그는 여전히 강하지만, 인류를 쉽게 보지 않는다.
어린 영양 하나를 사냥하는데도 전력을 다하는 초원의 사자처럼, 저 자그마하고 건방진 생물 하나를 짓이기는데도 전력을 다했다.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었다.
그러나 목이 꺾이도록 자신을 우러러봐야 할 놈들이 감히 자신을 동급으로, 오히려 그 아래로 취급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에게도 엄연히 자존심이라는 게 있다.
[벌레답게 짓이겨 주마.]
외신이 손짓했다.
강력한 공격력을 가진 검은 번개를 사용할 때 취하던 행동이기에 시현은 반사적으로 오감을 곤두세웠다.
눈으로 보고 피하면 늦는다.
소리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번개에 뭉쳐 있는 에너지를 느끼고 이쯤 떨어지겠구나 싶으면 감으로 피할 생각이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검은 번개가 만들어지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
시현은 놀리는 건가 싶어 외신을 바라봤다.
표정을 보아하니 그건 또 아닌 모양이었다.
[이 검은색의 기운은 내 권능마저도 막아 내는 건가? 대단하군. 그렇다는 건…….]
오른손에는 제 몸집만큼이나 거대한 검.
왼손에는 덩치를 가릴 수 있는 커다란 방패.
외신은 완전무장을 마쳤다.
[근접전으로 끝장을 내는 수밖에.]
외신은 시현을 향해 달려들었다.
거의 날아들다, 혹은 공간을 도약한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경이로운 속도였다.
눈으로 쫓는 것조차 벅찰 지경이건만, 시현은 어렵지 않게 공격을 막아 냈다.
그러다 보니 본인이 막아 놓고 본인이 놀라는 사태가 발생했다.
“……어?”
시현은 검을 맞댄 채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속도뿐만이 아니다.
힘에서도 밀리는 느낌이 안 들었다.
외신의 반응 역시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무슨 짓을 한 거지?]
도저히 믿기 어렵다는 듯 제 검과 시현의 검을 번갈아 가며 바라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외신의 속도와 힘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던 시현이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시현은 속도에서도, 힘에서도 외신과 동등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외신은 시현을 노려봤다.
덕분에 이 현상의 이유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 거였군. 이자프, 그 빌어먹을 작자가 재미있는 짓을 했어.]
“그러게.”
시현 역시 돌연 자신이 강해진 원인을 파악하고는 슬그머니 웃었다.
이 검은 공간.
이것은 단순히 외부와 내부를 차단하는 기능만 있는 게 아니었다.
이자프의 힘으로 가득한 이 공간은 시현의 힘을 비약적으로 상승시켜 주었다.
그 증거로 전투로 인해 옷이 찢어지며 드러난 어깨에 새겨진 낙인이 찬란하게 빛을 토해 내고 있었다.
몸에 힘이 넘치니 자신감 역시 생겨났다.
시현은 본격적으로 외신을 몰아붙였다.
비록 그가 검술을 따로 배운 것은 아니지만, 그동안 쌓아온 경험이 어디로 가는 것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이자프에 의해 강화된 시현의 검은 한 방, 한 방이 무겁고 재빨랐다.
폭풍처럼 쏟아지는 연격을 차분하게 막아 내며, 외신은 방패를 만들어 내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이건 꽤나 자존심이 상하는군.]
보다 압도적인 힘으로 찍어 누를 때는 몰랐는데, 가진 힘이 거의 균등해지니 시현은 생각보다 버거운 상대였다.
특히 심리전에는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힘으로 밀어붙이는 듯하다가도 빈틈을 보이면 귀신같이 그 부분을 노리고 달려든다.
우습게도 구원자 중에서 최강이라 불리는 그이지만, 자신보다 강자와 싸울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 그가 지금의 속도로 성장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시현은 자신이 가진 권능들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했다.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처형의 권능.
거기에 더해 아르하의 권능으로 모방한 다양한 권능들을 총동원했다.
공간을 도약하고, 스스로를 강화하며, 보이지 않는 사각에서 핏빛의 검을 만들어 내서 찌르는 등.
다양한 수단으로 외신을 괴롭혔다.
하지만 외신 역시 자신의 능력을 다루는 데는 도가 튼 존재였다.
검은 눈, 사각 지역을 보호하는 방패, 분신체를 만들며, 소형화시킨 불꽃, 번개를 뿜어내거나 촉수를 소환하는 등.
다양한 권능으로 시현을 압박했다.
‘돌겠네.’
시현은 흐르는 땀을 거칠게 닦아 내며 입술을 씹었다.
현재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전력을 다해도 가까스로 동수를 이루는 정도.
만약 이자프의 도움이 없다면 자신은 진즉에 쓰러졌을 것이다.
그 정도로 전력을 다하는 외신은 강했다.
‘남은 시간은…… 이제 겨우 7분 정도인가.’
무려 20분이 넘도록 공방을 나눴다.
하지만 결판이 나지를 않는다.
질 것 같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이길 것 같지도 않다.
시현에게 시간제한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외신은 철저하게 방어 위주로 싸웠다.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함이 더해져갔으나, 지금의 상황에 반전을 줄 능력이 더 이상 시현에게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마냥 손 놓고 남은 7분을 흘려보낼 생각은 없었다.
시현은 외부에서 방법을 찾았다.
‘블랙마켓.’
그는 블랙마켓을 호출했다.
시현은 블랙마켓에 있는 물건의 목록을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기억에 새겨져 있는 판매 목록 중에서는 현재의 상황을 타개할 수단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랙마켓을 호출한 것은, 이전에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기 때문이다.
황혼의 이슬.
그것이 시현에게 필요할 것이라고 판단한 아르하는 임의로 블랙마켓의 판매 목록을 변경시켰다.
이번에도 그렇게 해 주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갖고 블랙마켓을 호출한 것이다.
그리고 시현의 판단은 옳았다.
목록의 최상단에는 전에 없던 물건이 놓여 있었다.
<강림의 서.>
인과율을 무시하고 이 땅에 하나의 신을 강림시킨다.
“……이걸 쓰라는 건가?”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이게 맞는 건가 싶었다.
외신은 강하지만 수가 적다.
반대로 신은 외신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하지만, 그만큼 수가 많다.
다시 말해 지금의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저 위에 있는 신들 전부를 데려와도 모자란데, 강림의 서를 이용해 소환할 수 있는 신은 고작 하나뿐이었다.
그뿐이랴.
이미 외신은 단신으로 수많은 신들을 도륙 낸 전과가 있지 않은가.
믿고 강림의 서를 구매해도 좋을지 의문이었다.
‘무엇보다…… 비싸! 그냥 비싼 것도 아니고 더럽게 비싸!’
강림의 서는 효과에 비해 눈이 돌아가는 가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전에 황혼의 이슬을 구매하며 남은 10억 가량의 돈을 전부 사용해야 될 정도로.
하지만 시현 혼자서 지금의 난관을 타개할 방법은 없었다.
결국 시현은 떨리는 손으로 구매 버튼을 눌렀다.
[슬슬 한계인 모양이군.]
그런 시현의 속내를 알 리가 없는 외신은 웃었다.
시현의 손이 떨리는 이유가 힘이 거의 소진되었기 때문이라 판단한 것이다.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눈물을 훔친 시현은 마지막 일격을 준비했다.
[끝을 볼 생각인가.]
달라진 분위기를 감지한 외신도 마지막 공방을 준비했다.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에 긴장감이 달린다.
백색의 검에 자신이 가진 모든 권능을 때려 넣은 시현이 구매를 마친 강림의 서를 사용했다.
“진짜…… 누가 올지는 모르겠지만, 등장하자마자 아무 것도 못하고 픽 죽어 버리면 가만 안 둬. 죽어서도 저주할 거다!”
[무섭기도 해라.]
들려오는 음성은 굉장히 익숙한 것이었다.
시현은 기함했다.
소환된 신이 아르하였기 때문이다.
복부에 구멍이 뻥 뚫려서 다 죽어 가는, 전투에서 하등 쓸모가 없는 아르하 말이다.
[……지원군 치고는 그리 듬직하지 못하군.]
오죽하면 외신이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을 지어 보였을 정도다.
아르하는 그야말로 가까스로 숨이 붙어 있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상태였다.
지금의 상황에서 그녀가 등장한다 한들 고착 상태를 깨뜨리지는 못할 것이다.
[미안하구나. 나한테 남아 있는 힘이 없어서 여기까지 스스로 도달하는 것조차 불가능했거든.]
“그러면 왜 온 건데. 차라리 다른 놈을 보내던가 하지.”
[희생은 스스로가 판단하는 거지, 누군가에게 강요할 수 없는 거니까.]
그렇게 말한 아르하가 시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어디선가 강한 빛이 터져 나왔다.
시현은 본능적으로 그 빛이 어디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인지를 알아차렸다.
자신의 등 뒤에 새겨진 아르하의 낙인.
그것이 빛의 근원지였다.
[미쳤군. 단단히 미쳤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종일관 여유롭던 외신이 초조해하는 게 느껴졌다.
놈의 동공이 격하게 떨리고 있었다.
[고작 이런 벌레 따위를 위해, 세상을 좀먹는 버러지들을 구하기 위해 네놈들의 목숨뿐만이 아니라, 영혼까지 소모하려는 건가?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네놈들이 모르지는 않을 텐데!]
외신은 발악하듯 소리쳤다.
그러나 아르하는 멈추지 않았다.
[자, 가거라.]
그녀는 시현의 등을 밀어 주었다.
길게 늘어뜨린 검에는 시현이 사용한 권능들과 아이템들의 사용 효과 외에도 황금빛의 기운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고맙다는 말은 안 할 거야.”
애초에 시현은 이자프를 포함한 신들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60억에 당첨되어 인생 역전에 성공한 자신을 이 지옥에 끌고 온 당사자들이었으니까.
아무리 시현이 초대장을 파기하지 않은 게 원인이었다고는 해도 술 때문에 인사불성이 된 상태인데다가 심적으로 약해진 시현에게 수작을 부린 그들에게 잘못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이해한다.]
아르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서 끝을 내도 좋았겠지만, 시현은 굳이 한마디를 더했다.
“그래도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너희에게 한평생 감사할 거다.”
즉, 전쟁이 끝나고 나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자프와 아르하가 무엇을 했는지 모두에게 알리겠다는 소리였다.
[……그런가.]
아르하는 충분히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시현은 마지막 일격을 위해 걸음을 내디뎠다.
[너희는 처음부터 끝까지 어리석군.]
시현 본인이 가지고 있는 힘에 이자프와 아르하가 스스로의 영혼까지 희생시켜 만들어 낸 일격.
그것을 버텨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판단한 외신의 표정이 뒤틀렸다.
[또 이렇게 지는 건가…….]
“그래. 그리고 세 번째 기회는 없을 예정이다. 원래 리메이크는 한 번이면 충분하거든.”
머리 위로 검을 치켜 든 시현은 온 힘을 다해 내리찍었다.
외신은 방패를 들어 공격을 막았다.
외신의 장비는 권능의 일환이다.
가진 힘이 강할수록 완성되는 장비의 성능 또한 높아진다.
바꿔 말하자면, 이자프와 아르하가 영혼까지 쏟아 내서 만든 힘이 더해진 시현의 일격을 막아 낼 정도의 능력은 못 된다는 소리다.
그 단단하던 방패가 마치 두부처럼 잘려 나가는 것을 보며 외신은 생각했다.
[영혼…… 영혼인가…….]
그 역시 자신의 영혼을 희생시킨다면 지금의 공격을 막아 내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영혼이 찢겨 나간다는 것은 죽음 그 이상으로 두려운 것이었으니까.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신과 외신…… 천사와 악마들조차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것이었으니까.
외신은 그 마지막 선을 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원통하군.]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